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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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를 찾아 나서지만 세상엔 가짜만 가득했다. 미련, 위선, 가난과 고통, 부조리로 가득한 밑바닥 인생을 겪으면서 남은 희망이라면 ‘진짜 엄마’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따듯한 인정이었을 테지만 누군가에겐 ‘진짜 엄마’인 사람도 별반 다를 것 없는 인간성을 보이면서 희망을 져버리게 한다. 세상의 모든 자들이 쥐떼로 보이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역겨워 지는 순간.

어느 작가의 소설에 어른이라는 것은 싫어하는 사람과 잘 지내는 것이라는 문장이 있었나. 이미 어른이 되어 역겨운 쥐가 되었고 쥐 떼의 군상을 이루는 한 사람으로서 위선을 장착하고 고통에 체념하고 사는 삶에는 희망을 버려야 하는 필요조건이 전제되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곱씹어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을 보면 지난 날의 순수함을 상기시키며 그 순수한 마음을 지키고 싶은 보호본능이 일게 되는 것인가.

시간은 멈출 수 없기에 사람은 결국 성장해버리고 만다. 쥐떼같은 우리를 복제한 어른이 되는 것을 막으려면 성장이라는 것을, 어른이 된다는 것을 너무 아름다운 미사어구로 포장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미련하고 위선적이고 부조리하고 희망 없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만행은 멈춰야 하지 않을까.

소설을 읽는 동안 소녀와 나를 동일시하고 너무 슬프기만 했지만 책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고 나니 나와 다른 어른들을 비추어 부끄러움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찬수의 책장에 꽂혀 있던 동화책을 떠올렸다. 사람이 되고 싶은 곰과 호랑이에 대한 동화인데, 동굴속에서 쑥과 마늘만 먹던 곰은 결국 사람이 되었고 호랑이는 사람이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그 동화를 읽으며 나는 사람이 된 곰을 등신이라 생각했다. 이왕에 곰 아닌 무언가가 될 거라면 사람보다는 호랑이가 낫지 않나? 도대체 뭣하러 사람 같은 게 되겠다고 백일 동안 쑥과 마늘만 처먹은 거지? 곰이 쑥과 마늘만 먹다가 사람이 돼버린 건 멍청한 곰에게 내려진 최고의 벌이 분명하다.- P42

그것도 사랑의 힘인가? 사랑은 다친 데를 치료해주는 연고 같은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언니는 상처가 아닌 곳에 연고를 덕지덕지 바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멀쩡한 곳에자꾸 연고를 바르니까 진짜 상처는 점점 썩어 들어가고 멀쩡한 곳의 연고는 미끄덩미끄덩, 언니와 백곰의 관계를 자꾸 엇나가게 하는 것이다.- P48

백곰의 눈엔 내가 열 살도 안된 어린애로 보이겠지만, 나는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보고 듣고 짐작하는 천 년의 세월을 살았다. 태어나서는 그보다 훨씬 지독한 세월을 단숨에 견뎌냈다. 맞고 때리고 지르고 울고, 부수고 찌르고 할퀴고 물고, 박살내고 집어던지고 다치고 도망가고, 닦고 짓이기고 삼키고 내혀부터 씹어대는 그런 것들.- P52

나에게 좋은 일이 아들에게도 좋은 일이라면좋겠지만, 누군가가 웃으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울어야 한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P99

내가 진짜엄마를 찾는 이유는 진짜엄마가 그리워서도, 진짜엄마가필요해서도 아니다. 가짜를 가짜라고 확신하기 위해서. 이유는 그 뿐이다. 진짜를 찾아내야 가짜를 가짜라고 말할 수 있으니까. 세상이 온통 가짜뿐이라면, 가짜가 가짜임을 증명할 수가 없지 않나.- P111

나는 할머니에게 화만 내고 싶은데, 그것마저 못하게 하니까 할머니는 진짜 나쁘다.- P115

사람들이 목소리를 그렇게 칭찬할 때마다 (그게 칭찬인지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교과서에 나올 것 같은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올바르게 웃는 법을 가르치는 책이 있다면, 그가 웃는 모양을 사진으로 찍어 실어도 될 만큼. 문제는, 그가 그 이상으로 착하려고 애쓰다보니 착하지 않은 자기는 지나치게 경멸하는 것이었고, 더 큰 문제는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그런 착함을 강요한다는 데 있었다. (그런 면에서 제일 나쁜 건 사람들이다. 자기들은 하기도 싫고 할 마음도 없는 착한 행동을 목소리에게만 강요하는 거니까.) 목소리가 나를 보살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사람들은 그를 더 많이칭찬했다. 그래서 목소리는 나를 더 깨끗하게 입히고 얌전한 아이로 만들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좀 헷갈렸다. 목소리가 나를 보살피는 게 정말 나를 아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사람들이 보고 있기 때문인지, 혹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기 때문인지.- P133

그 순간 내가 왜 경적을 울렸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미남이 이모와 용이 삼촌이 그러고 있는 걸 대장이 보는 게 싫었다. 보면대장이 크게 상처를 받을 것 같았다. 이미 상처를 받은 사람은 제 상처가 깊어지는 것 따윈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에게 상처 주기가 더 쉽다. 더 이상 보호해야 할 자기가 없으니까, 다칠 걱정따윈 하지 않고 맘껏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다. 진짜엄마는 가짜엄마든 찾으면 당장 죽여버리겠다는 대장의 말을 다른 사람들은 격한농담 정도로 받아들이지만, 나는 안다. 그건 대장의 진심이다. 자신의상처를 재료로 허풍을 떠는 사람은 없으니까.- P188

다들 뭔가를 예감하고 있으면서 그 예감이 사실로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는 것 같아서.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불행에 대한 예감은 실현되고야 만다. 사람들이 불안해하면서 불행을 자꾸 떠올리면 불행이 옳거니, 여기가 내 자리구나 하면서 냉큼 달려드니까.- P189

용이 삼촌과 미남이 이모는 돈뿐만 아니라대장 가슴 속의 빛나는 부분까지 같이 훔쳐간 것이다.- P201

구걸은, 나는 너무 불쌍해요, 나는 너무 배고파요, 나는 너무 불행해요, 라는 얼굴로 돈을 요구하는거다. 자신의 불행을 대가로 돈을 받는 것. 불행을 좋아하는 사람은아무도 없다. 불행에 인자한 사람 역시 없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상대를 즐겁게 해줘야 한다. 불행으로 살 수 있는 건 동정뿐이다. 동정은 아무 힘이 없다. 나는 그것을 잘 안다. 나는 동정받는다고 느낄때 가장 비참했다. 그건 내게서 즐거움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는 거니까. 나를 동정할 때, 나를 동정하는 사람의 마음이 따뜻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차라리 불행할 것이다. 대장과 달수 삼촌은 내게 그이치를 가르쳐줬다. 불행을 주긴 쉽지만 웃음을 주긴 어렵다는 걸, 우리가 웃음을 주려고 하면 사람들은 팔짱을 낀 채 ‘어디 한번 해보시지‘ 라는 눈빛을 마구 뿜어냈다. 사랑하던 사람이 도망가고, 돈을 다잃고, 마음속에 활활 불이 타올라도 우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웃어야 했다. 그럼 우리를 보는 사람도 웃었다. 웃다가도 어쩔 수 없이 울면, 우리를 보는 사람도 울었다. 그 눈물에, 표정에, 코를 훌쩍이는 소리에 위안을 받았다. 그건 동정이 아니다. 같은 마음이다. 그렇게울고 웃는 사이 불행은 평범해졌다. 평범해진 불행에 힘이 없다. 그냥 그까짓 것이 된다.- P230

나는 아무 말 없이 담배만 피웠다. 극한의 불행에 빠뜨리는 방법.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을 부숴버리면 된다. 하지만 나리의 새아빠는 그런 게 없다. 그래서 불행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다. 아, 하나 있긴 하다. 돈, 그가 가진 돈과 땅과 건물을 모두 없애버리면 되는데. 그건 불가능하다. 모두 그의 돈을 지키려고 안간힘이니까. 세상 사람 전부. 왜냐. 세상은 가진 자를 숭배하고 보호하는 곳이니까. 그리고 못 가진자를 경멸하고 없애는 곳이니까.- P260

날마다 새로운 날이 아니라, 날마다 같은 날. 아주 사소한 것들만 변할 뿐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틀과 원리는 어디든 비슷해서, 맞는 사람은 늘 맞고 으스대는 사람은 늘 으스대며 때리는 자는 늘 때리는 자다. 그것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지 알 순 없었지만, 짐작은할 수 있었다. 그것을, 그런 이치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은 그들의 뜻대로 굴러간다. 나는 그 모든 것을 반쯤 헐린 나의 공간에서 지켜보았다.- P269

불길은 그것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 삼켰다. 나는 내가 불태운 숱한 가짜들을 떠올렸다. 그땐 그것들이 모두 가짜인 줄 알았지만, 그것들이 가짜라면 세상에 가짜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온통 가짜투성이고 진짜는 하늘에만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아니, 진짜 따윈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이제 와 내가 무언가를 불태워야 한다면, 이세상을 통째로 태워서 까만 재로 만들 것이다. 진짜 따윈 없다. 진짜인 척하는 가짜로 세상은 이미 가득 찼다.
나라고 다르진 않을 것이다.
불타는 집을 보고 사람들은 미친 듯 울며 용역에게 매달렸다. 용역은 그들을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용역에게 주먹질을 하는 사람도있었다. 그 옆엔 친절한 경찰이 있어서, 주먹이 용역에게 닿기도 전에그 사람을 잡아갔다. 돈 없고 빽 없고 힘없는 것이 죄라면 죄였다. 모든 것은 주님의 뜻대로 될 거라고, 목소리가 말했었지. 이런 것이 정말 주님의 뜻이라면 천국은 지옥보다 더 지독한 곳일 거다.- P271

아침이 되어 일을 마친 상호를 따라 그가 사는 방으로 갔다. 출근하는 사람들로 거리는 북새통이었다. 무가지를 집어 지하철역으로내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어떤 표정도 없었다. 쥐 떼…… 같았다. 쥐에겐 표정 같은 게 없으니까. 그저 맛있고 배부르고 위험한 것에만반응하니까. 지하철과 버스마다 가득찬 쥐 떼를 상상하니 구역질이났다. 거리 한가운데서 허리를 굽힌 채 구역질을 했다.- P286

나이 들수록 아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점점 멍청해진다. 알 수없는 세계에 대해 구체적 짐작을 시도할 때, 그리고 그것을 물질로 풀어낼 때면 당연하다 믿던 것들이 기이한 세상으로 이동한다. 소녀가진짜인 척하는 가짜를 수집하듯, 나는 당연한 척하는 부조리를 모으는 중이다. 이러다 더 멍청해질 수도 있다. 상관없다. 밑져야 본전이다.-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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