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오늘의 젊은 작가 24
김기창 지음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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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짜여진 스토리의 상업영화를 본 기분이다. 작가가 문화, 예술, 취미의 세계를 성실히 조사했는지, 원래 조예가 깊은지는 모르겠지만(동생이 사려던 써벨로의 S5를 실물로 보자마자 모델명까지 알아보는 여자는 비현실적이다... 차라리 몇 년 식까지 언급을 해보지 그랬다... 이건작가들이 얘기하는 핍진성도 아니고 전문성도 아니고 그냥 남들이 잘 모르는 무엇인가가 쓰이면 글의 가치가 높아 보인다는 믿음에 근거한 수작이다) 집중력을 오히려 떨어트리는 장치들에도 불구하고 잘 짜여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캐릭터들의 입체성이 부족한 진부한 클리셰들이 큰 문제였는데 참고 완독할 만 했다.(그래서 영화 같은 것이고, 어쨌든 결말은 궁금하니까....)
‘자신이 배운 지식의 양과 정의의 크기가 비례한다‘는 착각을 하는 정우와 마찬가지로 끝까지 섬세하고 엄격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며 치료까지 필요해 보이는 섬머는 끝내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정체도 모르고, 아버지가 살해당한 것도 모른다. 마지막에 최후를 맞이하는 훙의아버지 말처럼 ‘누군가 넘어져서 땅이 파인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반드시 또 넘어지듯이 진실의 행방을 알 수 없는 묘연한 사건들은 폭력의 크기만 다를 뿐 일상에 어쩔 수 없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은 핑계라고 할 수 있고, 자연스러운 인생이랄 수도 있는 것인가. 활력만 남아 있다면 이 인생을 소중한 ‘추억으로 둔갑시킬 힘’을 남겨두기 위해....

자신만의 규칙이 있어 철저히 따르고 있는 듯했다. 홍은정인의 그런 면도 마음에 들었다. 자신만의 규칙이 있는 사람은 지나친 선행을 베풀지 않았고, 쓸데없는 악행을 저지르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무의미한 웃음을 흘리지 않았다. - P16

팟퐁을 찾은 사람들은 낮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다시는 낮이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밤을 소비했다. 서로를 유혹하고 희롱하는데 모든 힘을 쏟았다. 터져 나오는 분수처럼 웃고 울었다. 서로에게 아무렇지 않게 피해를 주고 아무렇지 않게 사과했다. 죄책감이 낮의 일이라면 밤의 일은 질문을 지워 버리는 것이었다. 적어도 팟퐁의 밤은 그랬다. - P23

섬머는 인간도 동물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인간은 동물보다 나은 존재여야 했다. 윤리가 기준이었다. 섬머의 말에 따르면 윤리적이지 않은 인간은 모든 생명체에게 고통만을 안겨 주는, 신의 가장 큰 실수일 뿐이었다. 언젠가 벤은 섬머의 주장에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네 엄마가 윤리적이지 못해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건아냐.
그건 다른 문제예요.
윤리적인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언제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생겨. 의식하지 못하거나 무시할 뿐이지. 나는 뭐가 다른 문제인지 모르겠군.
아빠는 좀 더 섬세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아니, 우리모두가 그래야 해요. - P30

나쁘기만 한 사람도 아냐. 많은 사람이 그래. 인간이 할 수있는 가장 잔인한 일은 누군가의 고통에 눈감는 일이라고 생각해.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보다 누군가의 고통에 눈감는 사람이 더 많아. 그래서 끝없이 고통이 반복되는 거야.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눈을 감지 않는 게 중요해. 그러면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어. - P50

갖은 고생 다 하고 살아온 애들은 안 돼. 엄마 봐. 자기 손해 보는 일 절대 안 해, 희생은 여유에서 나와, 여유 있는 외국남자 만나. 설마, 회사에 마음에 드는 놈이 있는 건 아니지? - P60

그러냐? 사실, 나도 그 창녀를 나쁜 년이라 생각하지 않아,
그 여자가 엄마를 죽인 거예요.
누군가 넘어져서 땅이 파인 자리에는 다른 누군가가 반드시 또 넘어지게 되는 법이야. 그 창녀도 누군가한테 옮았겠지. 네가 내 아들로 태어난 것처럼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을 거다. 그렇지만 너하고 트린한텐 정말 미안해, 트린을 잘보살펴야 해. 알겠지? - P92

술집 앞에 놓인 플라스틱 테이블에 모여 앉아 술잔을 부딪치는 사람들은 활력이 넘쳐 났다. 그들에게는 찰나의 하룻밤을 오랫동안 기억에남을 찬란한 추억으로 둔갑시킬 힘이 아직 있어 보였다. - P139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뭐 그리 큰 잘못을 했나 싶어. 어쩔 수 없이 상처 주고 상처받고, 다들 그렇게 사니까. 삶의 어느 순간에 제일 중요하다 싶은 것이 머리에 차오르면 다른 건 눈에 안 들어와. - P158

섬머가 지금까지 데려온 놈들은 하나같이 예의 바르고 잘난 놈들이었지. 그런 놈들이 있어. 자신이 배운 지식의 양과자신이 가진 정의의 크기가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놈들 말이야. 내가 알기로는 그 반대거든. 예의 바르게 말하고 정의로운척하면서도 속에서는 잔머리를 굴리고, 실제로 용감해야 할때는 한없이 비겁하고 비굴해지지. - P191

정우는 한숨을 쉬었다. 정우는 타인을 위해 어떠한 희생도마다 않는 사람들을 보며 종종 생각했다. 위대한 사람들이긴하지만 동시에 치료도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그들의 행동은마음속 어딘가가 크게 구멍이 난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정우는 눈앞에 있는 섬머가 바로 그런 사람처럼 느껴졌다. - P234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립니다. 예의는 미덕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기사에서 봤는데 한국이 OECD 국가 중 노인 자살률이 1위더군. 이런 생각이 들었지. 저놈의 나라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고등학교에 총질을 하거나, 마구잡이 연쇄 살인으로 푸는 대신에 예의 있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걸로 해결하는 거 같다고 말이야.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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