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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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나이지리아의 부호이자 기독교 광신도이다. 자신의 부로 군사 쿠데타에 맞서 민주적 성향의 신문사를 후원하며, 나이지리아의 토속 신앙을 뿌리 뽑아 기독교를 전파하려 한다. 그의 위치는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있지만 가정에선 폭력적인 가장이다.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는 아버지를 이교도라며 가족들과의 접촉을 일체 금하고, 교리를 지키기 위해 아내 비어트리스에게 무리한 일정을 요구하다 유산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들 자자와 딸인 캄빌리는 유진이 정해놓은 규율에 벗어나지 않는 하루 일과를 보내야 하고 성적은 항상 수석을 유지해야 하며, 이를 어길 시 정도를 벗어난 체벌을 당한다.
유진의 고향이자 유진의 아버지 파파은누쿠가 사는 아바에서 가족들은 매년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파파은누쿠는 아직 개종하지 않고 전통적인 신앙을 믿고 있으며, 유진은 이교도에 대한 굳은 거부감 때문에 자신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었을뿐더러, 킴벌리와 자자가 할아버지를 만나는 시간도 분 단위로 제한한다. 반면 유진의 동생이자 대학교수인 이페오마와 그의 사촌 아마카, 오비오라는 파파은누쿠와의 가족적인 유대감을 가지고 지낸다.
아바에서 이페오마의 간곡한 설득 끝에 킴벌리와 자자는 고모와 사촌들과 함께 방학을 보낸다. 이페오마의 집에서 지내며 캄빌리는 아마디 신부를 알게 되고 아버지 유진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며 교리를 엄격하게 지키는 베네딕트 신부와 비교하며 문화적 충격을 받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호감을 느끼기도 한다. 또한 아마카의 부에 대한 질투심으로 규율과 복종에 익숙한 생활습관이 조롱을 받기도 하지만 이페오마의 도움으로 점점 둘의 우정이 깊어져 간다.
파파은누쿠의 건강이 악화되어 은수카의 이모네로 요양을 오게 되는데, 할아버지와의 접촉이 금지된 캄빌리와 자자는 아버지 유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게 걱정이 되지만, 사촌들처럼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다. 결국 고향 아바에서의 소식통으로 파파은누쿠가 이페오마의 집에서 요양하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고, 유진이 분노하여 은수카로 오는 길에 할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되어 돌아가신다. 이페디오라는 파파은누쿠의 장례를 전통 방식으로 치르려고 하지만 유진은 기독교식 장례를 강행하고, 캄빌리와 자자는 에누구의 집으로 돌아와 이교도와 함께한 죄를 씻는다는 명분으로 끓는 물을 발에 붓는 벌을 받는다. 또 캄빌리가 이모의 집에서 파파은누쿠의 초상을 몰래 가져온 것이 들통나 유진에게 빼앗기는 과정에서 반항하다 구타를 당해 뇌출혈과 골절상을 입고 입원한다. 아마디신부와 함께 병원을 찾아온 이페디오라는 상황에 경악하며 자자와 캄빌리를 은수카로 데려간다.
유진은 자신이 후원하는 신문사의 편집장 아데 코커가 살해당하고, 쿠데타 정부로부터 살인 위협을 받으며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다. 캄빌리와 자자는 두 번째로 방문하게 된 은수카에서 아마디신부와 고모 가족들과 함께 더 많은 경험을 하며 아버지를 벗어나 자립하려는 의지를 키우고 쿠데타와 학생시위로 교수직을 잃게 된 이페오마는 미국으로의 이민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던 와중 어머니 비어트리스가 유진의 폭행으로 또 유산을 당하고 이페디오라의 집으로 도피해 온다. 이페디오라는 비어트리스와 조카들을 보내고 싶지 않지만 유진의 협박과 현실적인 실리를 따져 결국 비어트리스는 아이들과 함께 에누구로 돌아온다.
에누구로 돌아온 캄빌리와 자자는 더이상 예전 같지 않은 태도로 유진을 대하고, 자자가 영성체를 거부하는 사건이 발단이 되어 유진의 권위는 점점 더 무너져 내린다. 이페디오라가 해고통보를 알려오던 날 자자와 캄빌리는 유진에게 은수카로 간다는 통보를 하고 에누구를 떠나온다. 이페오마의 비자가 발급되고 미국으로 이민 갈 짐을 다 쌀 무렵, 캄빌리와 자자는 집에서 갑작스럽게 유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에누구로 돌아온다. 유진의 장례 미사 전 비어트리스는 캄빌리와 자자에게 자신이 유진의 음식에 약을 타 살해했다고 실토하지만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자자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자수하면서 수감이 된다. 비어트리스의 발언은 남편과 사별한 부인의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실언으로 받아들여진다.
시간이 지나 캄빌리와 비어트리스는 출소를 앞 둔 자자를 면회하고, 캄빌리는 사건 이후 말을 잘 하지 못하는 비어트리스에게 자자의 출소 후 은수카로 간 뒤 이페디오라와 사촌들이 있는 미국으로 갈 계획이라고 말한다.

나이지리아의 문학을 접한 건 아프리카 문학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지만, 치마만다의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과 성평등 의식에 대한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관심을 가진 계기가 더 크다.
나이지리아에서 개몽적인 전도사이자, 군사 독재에 저항하는 지식인이며 성공한 자산가 가장의 폭력적인 실상을 보여주지만, 유진의 사회적 명망과 가정에서의 폭력성은 이중적인 인격의 발로가 아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부를 이용해 스스로를 신격화한 자아가 사회와 가정에서 보이는 모습의 결과가 빚어지는 점을 유의해서 봐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성공과 명망을 가진 사람의 명암인 것이다.
캄빌리와 자자 역시 유진을 이중적이거나 위선적인 사람이라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유진이라는 절대적인 권력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성장기를 거친다. 유진은 어렸을 때부터 통제와 순종에 길들인 캄빌리와 자자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하지만, 캄빌리와 자자는 유진의 여동생 이페오마의 집에서 방학을 보내면서 기존의 질서를 깨는 세계의 방식을 접하게 되고 아버지 유진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겪는다. 에누구의 집처럼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는 못하지만 은수카의 고모집에서 캄빌리와 자자는 사촌들에게 자율적이며 주체적인 삶을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오비오라의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며 자자는 독립심을 키워나가고, 아마카의 냉소적이지만 자유분방한 행동을 보면서 캄빌리 역시 순종적인 자신의 외피를 벗어 던지고 당당함을 키워나간다. 또한 캄빌리는 아마디 신부의 예배 방식과 파파은누쿠가 아침마다 행하던 전통의식 ‘이투은주’를 통해 아버지의 그릇된 광신도적 종교 생활에서 성찰적 종교 생활을 배워나간다는 점에서 일반 성장소설과 차별성을 갖는다.
이 책이 나이지리아 가부장의 가학적인 현실을 고발하려는 소설이 아니듯이, 종교적 색채가 짙은 책 또한 아니다. 성공이라는 빛나는 상징성에 묻은 추악함과 그 속에서 성장을 이루어 나가는 객체들에 대한 응원과 용기의 메시지이다.

그것은 건축가가 성당이 아니라 주거용 건물을 설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처럼 생긴 집이었다. 식당으로이어지는 아치는 제단 입구처럼 보였다. 크림색 전화기가 놓인 벽감은 성체를 받아 먹을 준비가 된 입같았다. - P43

우리는 매년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냈다. 버라니카 수녀는 그것을 이보족의 민족 대이동이라고불렀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단어를 혀끝까지 굴려보내는 아일랜드식 악센트로 이렇게 말했다. 왜 수많은 이보족 사람들은 고향에 거대한 저택을 지어서 12월에 일이 주밖에 안 쓰고나머지는 일 년 내내 도시의 좁아터진 집에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느냐고. 하지만 나는 버라니카 수녀가 왜 굳이 이해하려 하는지의아할 때가 많았다. 그냥 원래 그런 것일 뿐인데. - P71

"오빠가 왜 이페디오라랑 사이가 안 좋았는 줄 알아요?" 또다시 들리는 이페오마 고모의 속삭임은 아까보다 더 사납고 시끄러웠다. "이페디오라가 오빠 면전에 대고 자기 생각을 말했기 때문이에요. 이페디오라는 진실을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죠. 하지만 오빠는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진실에 대해서는 꼭 싸우려 들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죽어 가고 있어요, 알겠어요? 죽어 간다고요. 노인네가 사실 날이 얼마나 남았겠어요, 그보? 그런데 오빠는 아버지를 이 집에 오지도 못하게 하고 인사드리러 가지도 않죠. 오조카! 오빠는 하느님 행세를 그만둬야 해요. 하느님은 다 큰 어른이니까 당신 일은 당신이 하실 수 있어요. 아버지가 조상님 방식을 따르기로 한 것에 대해 하느님이 벌하실 거라면 오빠가 아니라하느님이 벌하시게 놔두란 말이에요." - P124

"나는 학교에 충성하라고 월급 받는 게 아니야. 내가 진실을말하는 게 결과적으로 불충이 된 거지."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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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박서련 지음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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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세상에 날리는 조소가 너무나 재밌는 소설이다. <더 셜리 클럽>에서 다소 진부한 전개가 실망이었지만, <호르몬이 그랬어>나 젊은 작가상에 실린 이 책의 표제작이 너무 인상적이라 다시 박서련을 집어 들었다. 몇 번을 소리내서 웃었다. 이런 무거운 내용을 보고 웃었던 건 아무래도 재미보다는 공감이었던 것 같다.


<미키마우스 클럽>
아이돌 가수 니나의 임신으로 니나의 매니저이자 엄마인 화자는 활동 중단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연다. 기자회견이 마무리 되어 갈 무렵 한 기자가 매니저가 니나의 엄마라는 소문이 사실이냐는 질문에 화자는 기자가 니나의 임신사실마저 알고 있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에 마이크를 기자에게 집어던져 아수라장을 만들어 버린다.
화자는 미국으로 입양갔던 재미교포이다. 화자에게는 어린 시절 미키마우스클럽의 마우스캐티어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마이클잭슨 분장을 한 다른 지원자와 다툼이 생겨 자격을 박탈당한 과거가 있었다. 자신의 꿈을 딸 니나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화자에게는 구속이 되더라도 기자의 입을 막는 것이 절실했다. 소설의 초반은 화자와 니나의 대조되는 외모는 물론 성향과 운명을 보여주며 진행된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화자와 니나의 접점을 이뤄가는 반전이 전개된다.
화자가 수사를 받으면서 자신이 양부모와 함께 디즈니랜드에 갔던 기억과 니나와 함께 디즈니랜드에 갔던 기억이 중첩되며 혼란스러워 하는 것부터 화자의 꿈과 니나의 현실을 평행이론처럼 반증해 나가기 시작한다. 화자의 꿈은 마이클잭슨 분장을 한 지원자와의 싸움에서 틀어졌듯이, 니나의 현실은 상대가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임신을 통해 무너지려고 한다. 그리고 피해자 기자의 기자회견이 예정돼 있던 자리에 순진한 줄만 알았던 니나가 나타나 화자의 간교함을 넘어서 대중을 기만하는 모습에 화자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니나 속의 자신을 보게 된다.

<보>
보혜는 목사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하지만, 이유도 듣지 않고 남편은 자신의 잘못을 빌기 시작한다. 부유한 아버지의 지원으로 교회유적지 인근의 개척교회 목사가 된 남편과는 자신의 뜻을 반드시 이뤄내고 마는 아버지의 의지대로 영혼 없이 남편과 결혼했다. 보혜는 남편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하지만 이것이 단순히 선교 여행 때 프라이빗 비치에서 잠시 스쳐간 현지인 여성을 회상하며 둘러대는 것인지, 정말 여성을 사랑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버지와 남편으로 이어지는 지긋지긋한 남성들에 의해 자신의 삶의 지휘권을 빼앗기는 점에 질린듯한 느낌은 확실하다. 남편은 보혜를 강간하려 들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보혜의 가여운 눈총만 받고 만다.

<곤륜을 지나>
자영은 회사에서 근속10주년 기념으로 받은 여행상품에 대한 정보가 남편을 통해 시어머니로 흘러들어가 중국 곤륜을 함께 여행하게 됐다. 애초에 친정엄마와 함께하려고 했던 것을 평소 고부갈등으로 긴장이 팽배한 사이인 시어머니가 낚아 챈 것이었고, 역시나 이 와중에 남편은 면세주류만 탐하는 진상을 부린다. 계속되는 불편한 여정에 시어머니는 웬 본인 시어머니하고 겪었던 갈등을 토로하며 자영을 이해하는 척, 위로하는 척 하는 둥 친한 척을 해대고, 친정엄마는 몸이 불편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속은 뒤집히는 상황에 진상 남편은 연락도 되지 않는다. 여행가이드는 곤륜산을 오르면 영혼이 맑아진다는 설명을 약장수처럼 하고 시어머니는 곤륜에 오면 업이 씻어진다는 말에 왔다며 전날 못 다한 푸념을 늘어놓더니 주저앉아 소변을 지리고 울기 시작한다. 자영은 본인의 업만 씻겨버리고 가이드의 말대로 육체가 가벼워지고 갓난아이의 영혼으로 돌아간 시어머니를 보고 체념하며, 끓어오르는 분노와 욕지거리를 참아내고 시어머니를 업어 산을 오른다.

<기미>
공장을 전전하며 삶을 이어가던 원희는 엄마가 치매에 걸리자 시골로 내려와 엄마를 간병하며 친구 성미의 학원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산다. 자신에게 생전 들어보지 못한 심한 욕을 해대는 엄마에 억지로 익숙해지며 자신의 삶을 이어가던 원희는 성미의 제안으로 산악회에 나가 군인아파트에 사는 독신 남자와 잠깐의 만남을 이어가지만,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는 원희에게 엄마에게 상한음식을 먹여 자연사 시키라는 소리를 듣고는 기가 막혀 집을 빠져 나온다. 성미는 군인아파트에 학원차가 보인다는 민원이 들어왔다며 조심하라는 일침에 남자를 다시 만나 정사를 나누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이것봐. 보라고./나는 살아 있어./ 너희들처럼 살아 있다.’(173p.)
원희가 천변도로에 나가 경적을 울리며 소리를 질러대는 것은 치매에 걸린 엄마의 구속, 학원의 학부모에게 오는 구속을 견디며 자신의 존재를 구원하기 위한 발악이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엄마는 계속 치매에 걸려있고 원희는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이어나간다.

<그 소설>
화자(작가)가 문예지에 청탁받은 소설을 송고한다. 대학생 시절 합평 때 혹평을 받았던 소설을 조금 수정해서 냈는데, 과거의 자기 소설을 누군가 도용해 공모전에서 가작을 받은 것을 알게 된다. 도용범을 잡아내 소설은 문예지에 실렸지만, 그런 사건이 있는 동안 ‘내 얘기’라는 소설을 새로 쓴다. 과거 합평 때마다 교수들이 뻔한 낙태에 관한 소설을 식상해하던 기억에 맞물려 독자들에게 정말 진정한 작가의 얘기인 것 마냥 소설을 쓴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던 때쯤이라 시대상을 반영하는 듯했고, 소설이 발표되고 난 뒤 상까지 받는다. 지인들의 축하전화가 봇물처럼 이어지지만 ‘내 얘기’라는 소설 제목처럼 가족과 지인들의 의심을 받고 추궁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전 남자친구로부터 온 전화였는데, 자신이 엮인 이야기를 전 여자친구가 써 유명세를 타는 게 분했는지, 뒤늦게 자신의 핏줄에 대한 연민이 분노로 표출했는지 작가에게 욕설과 악담을 퍼붓는다. 작가는 사실 계류유산의 경험으로 소설을 써 낙태 경험을 한 적은 없었다.
진실과 사실은 구분되지 않는다. 작가는 문예지에 자신이 도용당했던 소설을 싣는 과정과 문예지의 ‘불미스럽’다는 해명이 어쩐지 자신을 향한 듯한 찝찝함을 느끼고, 편집자가 생각할 수 있는 갖은 오해를 상상하지만 도용되었다는 사실을 규명하고 말뿐, 진실을 호소하는 일까지는 관심이 없다. 사실도 아닌 낙태를 진실이라 착각하고 전화를 건 전 남자친구에게도 할 말은 많지만 ‘마음대로 해 봐.’(204p.)라는 한마디를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무엇이 진실이건 간에 ‘새로운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204p.)을 무기력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를 100점이라고 하고새치기같이 작은 죄는 1점이라고 하면, 살인 한 번보다새치기 백한 번이 조금 더 나쁜 게 아닐까요? - P74

보혜는 헤어지자고 한 이유를 아직 말하지 않았다. 남편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들켰다고 생각하는구나. 또 무슨 일을 저질렀구나. 보혜는 피로를 느꼈다. 환멸이 아니라 남편은 보혜에게 환멸처럼 거창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 P84

애초에 기도라는 것은, 듣는 사람이 있는 기도라는 것은, 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연극적인 방식으로 자기할말을 하는 거라는 생각이든다고 보혜는 썼다. 고등학교 때였다. - P86

또 편할 때만 하나님 법 찾고 유리할 때만 세상 법 찾지요? - P104

우리 엄마 원래 그래.
WAN남편은 자영의 하소연을 매번 그런 말로 일축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자영은 원래 그렇다는 말의 편리함을 곱씹어 보곤 했다. 늙은이를 마주할 때마다 자영은 인간 미만의 어떤 존재가 되는 것 같은 형언할 수 없는비참함에 휩싸이는데, 그런 기분을 다 설명하기도 전에남편은 그 이유를 한마디로 줄여 말하는 것이었다. 늙은이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영도 원래 그런사람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싹싹하고 눈치빠른 며느리 같은 것이 될 소질은 자영의 몫이 아니었다. - P127

자영은 화장실을 나오자마자 바람을 쐬다며 휴대폰을 들고 베란다로 갔다.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떤 의도로 말을 꺼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어설픈 사과나 위로라면 절대 받고 싶지 않았다. 누가 사과하랬나. 위로해 달랬나. 도리어 크게 모욕당한 느낌이 들었다. 그깟 말 몇 마디로 자기 혼자 편해지려고? 자기 마음만 편해지면 그만이고, 그간잘못한 것 있으면 다 잊어버리라고? - P137

빌어먹을 년. 도둑년. 더러운년 언니! 언니! 언니 이 씨발년아. 개흘레를 붙을 년아. 이게 엄마의 본심일까. 몸만 상하고 정신은 멀쩡했을 때가 어쩌면 위선의 시절이었던 걸까. - P157

열려 있는 문틈으로 남자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 곡이 흘러나왔다. 난 네게 상처를 줬지만 여전히 널 그리워하고 그래도 날 용서하진 말고 대신 잊지도 말아 달라는 둥 앞뒤 안 맞는 가사로 된 고음 차력쇼 듣고 있자면 정서가 오염되는 것 같아서 승희 스스로 그런 노래를튼 적이 단 한 번도 없을뿐더러, 그런 노래를 틀 만한 장소에도 발을 들이지 않고 지내 왔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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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걸 보면 네 생각이 나 - 먼 곳에서 선명해지는 시간의 흔적들
청민 지음, Peter 사진 / 상상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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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가같은 달달하고 가벼운 문장들

물론 영화가 끝나는 순간부터 내 삶은 다시 이어지겠지만 잠시 이렇게 어딘가에 기대어 마음을 쉬어본다. 이 영화가 끝나고나면 나는 아주 조금 행복해질 거야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거면 된다는 만족으로. - P17

사람 마음이란 게 나이 먹는 법이 달라서, 몸은자라도 순수하게 좋아했던 마음은 그 시절의 나이로 남아 있는법이니까. - P23

점원에게 내 발자국은 지워야 할 수많은 발자국 중 하나였을 테지만 그가 닦은 건 사실 발자국 모양을 한나의 작은 외로움이었다는 걸, 지나고서 알게 되었다. - P33

그런데 여기 오고서야 알 것 같았다. 굳이 나까지 쨍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는 걸 조금 어두워야 더 선명히 보이는 빛깔이 있다는 걸. - P44

내일의 불안함을 미리 당겨오지 않고, 오늘 주어진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어 좋다. 그저 하나의 생각만으로 시간을 채울 수 있는 게 여행이 주는 기쁨 아닐까. - P50

살면서 그날의 남산을 자주 떠올렸다. 내게 그날은 힘들 때 꺼내 먹는 기억이 되었다. - P79

아무리 문밖의 세계를 좋아해 즉흥적으로 떠나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그건 문안의 평범한 안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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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있기 좋은 방 - 오직 나를 위해, 그림 속에서 잠시 쉼
우지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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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도판에 대한 역사적인 의미나 작가의 개인적인 배경과 시대상을 그림과 연결시켜 설명하는 해설서는 아니다.(물론 그런 부분이 전혀 없다는 건 아니다.) 그런 책은 아무나 쓸 수 있는 책도 아닐뿐더러, 일반적인 독자들에게는 구구절절 암기하여 상식을 뽐내기위한, 그 이상의 의미도 가질 수 없는 요약서에 불과하다.

이 책은 우리가 그림을 감상하는 유익한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책이 독자의 감상으로 작품의 의미를 찾고 해석이 더해져 풍부한 작품의 완성을 이루듯이, 그림도 마찬가지로 보는 이의 감상으로 작품이 완성된다.

저자의 그림에 관한 개인적인 감상이 에세이로 출판되어 나에게 텍스트로 와 닿고, 그림도 나만의 감상을 가질 수 있어 좋았다. 사실 그림책이지만 그림에 집중하기 보다는 저자의 감상에 집중하며 읽었고, 그 뒤에 책을 다시 한 번 훑어보며 그림을 감상했다. 나에게도 방이라는 것이 살면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막연하지만 앞으로 어떤 사연을 가지고 살아갈지 기대가 된다.

어느 때는 내가 나의 삶을 선택하고 이끌고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를 제어하고 움직이고 소유하는 듯하다. 나는 이제야 사람이 삶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사람을선택한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P53

그림을 삶에 끌고 들어와 내삶을 더욱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그림의 본질이자진정한 가치일 것이다. 그럴 때 우리의 삶 전체는 하나의 미술관이될 수 있다. - P72

휴식도 습관이고 능력이다. 쉬지 못하는 사람은 계속 쉬지 못한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휴식에 당황하고 불안해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낸다. 쉬면서도 긴장을 풀지 못하고 연거푸 초조해하며 조금의 여유도 못 견딘다. 쉬어본 적도 없고, 쉬는 방법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자랑도 성실도 그무엇도 아니다.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상태일 뿐이다. 누구든 가능하나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이 휴식이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휴식에도 연습과 학습이 필요하다. 멈춰야 할 때를 아는 지혜, 과감히 내려놓는 용기, 무리하지 않는 자세, 여유를 즐기는 기술 등이 요구된다. 쉬운 것 같지만 절대로 쉽지 않은 휴식, 잘 쉰다는 것은 잘산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를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얼마나 많은가. 과중한 업무, 갖은 모임, 무의미한 약속, 빼곡한 일정으로 하루하루가버겁고 숨차고 힘겹다. 쉴 시간도 없고, 쉴 곳도 없다. 쉴 수도 없고, 쉴 틈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해야 하는 것이 휴식이다. 휴식은 잔여 시간이 아니라 필수 시간이다. 시간 날 때 하는 것이아니라 시간을 내서 해야 하는 일이다. - P128

꿈은 이제 새롭게 규정되어야 한다. 꿈을 이룬다는 것은 직업의획득이 아니다. 꿈을 성패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건 꿈의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일이다. 꿈을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지만, 어떤 꿈을 꿀 것인가는 고를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마음에 든다면, 그건 이미 꿈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 원래꿈이란 그런 것이니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반드시 꿈을 이뤄야만 하는 것은 아님을 이루지 못한 꿈도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만약 가닿을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꿈꾸고 있는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응원을보내고 싶다. 꿈을 지키기 위해 버텨낸 용기는, 꿈을 이루기 위해노력한 시간은 충분히 박수 받을 만하다. 설혹 실패한다고 해도 지지할 것이다. 당신의 꿈을 꿈꾸는 당신을 - P224

종종 생각한다. 삶이란 상실을 축적해가는 일이라고 반복되는부재를 견디며 살아가는 여정이라고. 살면서 우리는 끝없는 상실을 경험한다. 만났다가 헤어지고, 기억했다가 망각하고, 채웠다가비워지고, 가졌다가 놓아주고, 왔다가 떠나가고, 얻었다가 잃어버리고, 탄생했다가 소멸한다.
산다는 건 끊임없이 이별하는 일이다. 무언가를 잃어가는 반복속에 표류하는 일이다. 세월은 자꾸 빈자리를 만들고, 빈자리는 영영 채워지지 않는다. 만물은 유실되어 사라지고, 이윽고 소멸해버린다. 사라짐이 곧 인생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라짐의 운명이있다. - P276

어떤 일을 할 때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습관이 있다. 쉽게 낙관하지 않고 도리어 이 일이 비극적인 결말을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려고 노력한다. 조금 비관적으로보일 수도 있겠지만, 상황을 낙관적으로 예상하지 않는다고 해서비관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긍정 유토피아라는 허황된 환상에서 벗어나 똑바로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진정한 긍정이 온다.
다소 모순적이게 들릴 수도 있으나 실제로 그렇다. 좋은 결과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삶을 더 치열하게 만든다. 긍정이란신념이나 마법이라기보다 삶을 대하는 태도에 더 가깝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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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덩! - 완전한 휴식 속으로
우지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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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담긴 그림들이 도판으로 보기만 해도 휴식이 된다.
무엇보다 휴식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저자의 셀렉션과 편집디자이너의 능력임이 틀림없다.
손 안에 담을 수 있는 전시를 보고 난 기분이다.

휴식의 해답은 ‘현재‘에 있다. 몸과 마음과 정신을 현재에 두는 것이다. 이를테면 침대에 누워 지난날의 실수를 곱씹지 않는 것,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밀린 설거짓거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내일의 고난을 상상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직 오늘에 충실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몰입하고 즐기는 것이다. 몸은여기 있는데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오롯이 쉴 수 없다. 언제나휴식은 현재 시제에서만 가능하다. - P66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처럼 우울은 물에 녹는다. 기분이 찌무룩할 때 따뜻한 물로 샤워하면 거의 즉각적으로 기분이 달라진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욕실에 들어가기 전보다 월등히 기분이 나아진다. 집에서 샤워만 해도 그러할진대 수영장에 가면 효과는 배가 된다. 물속에서 팔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나쁜 감정들이 씻겨나가고, 이리저리 헤엄치다 보면 무거운 마음이 가벼워진다. 우울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해도 옅은 농도로 희석된다. 물에는 그런 정화의 기능이 있다. - P80

세상의 꽤 많은 문제들은 그냥 흘려보내는 것으로 해결된다. 그러니 괜한것들에 일일이 반응하거나 동요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안 좋은 영향을 주는 것들에 집중해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는 없다. 나에게 해로운 것들이 나의 세계를 뒤흔들게 내버려두지 말자. 파도가 바다를 정화하듯, 내 안에 나쁜 물이 고이지 않도록 하려면 자연스레 흘려보내야 한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그린 저 바다처럼.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너와 별로 상관도 없는 일에 지나치게 마음 쓰지 말도록 해라. 그리고그런 일에 자신을 피곤하게 만들지 마라."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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