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박서련 지음 / 민음사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의 세상에 날리는 조소가 너무나 재밌는 소설이다. <더 셜리 클럽>에서 다소 진부한 전개가 실망이었지만, <호르몬이 그랬어>나 젊은 작가상에 실린 이 책의 표제작이 너무 인상적이라 다시 박서련을 집어 들었다. 몇 번을 소리내서 웃었다. 이런 무거운 내용을 보고 웃었던 건 아무래도 재미보다는 공감이었던 것 같다.


<미키마우스 클럽>
아이돌 가수 니나의 임신으로 니나의 매니저이자 엄마인 화자는 활동 중단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연다. 기자회견이 마무리 되어 갈 무렵 한 기자가 매니저가 니나의 엄마라는 소문이 사실이냐는 질문에 화자는 기자가 니나의 임신사실마저 알고 있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에 마이크를 기자에게 집어던져 아수라장을 만들어 버린다.
화자는 미국으로 입양갔던 재미교포이다. 화자에게는 어린 시절 미키마우스클럽의 마우스캐티어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마이클잭슨 분장을 한 다른 지원자와 다툼이 생겨 자격을 박탈당한 과거가 있었다. 자신의 꿈을 딸 니나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화자에게는 구속이 되더라도 기자의 입을 막는 것이 절실했다. 소설의 초반은 화자와 니나의 대조되는 외모는 물론 성향과 운명을 보여주며 진행된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화자와 니나의 접점을 이뤄가는 반전이 전개된다.
화자가 수사를 받으면서 자신이 양부모와 함께 디즈니랜드에 갔던 기억과 니나와 함께 디즈니랜드에 갔던 기억이 중첩되며 혼란스러워 하는 것부터 화자의 꿈과 니나의 현실을 평행이론처럼 반증해 나가기 시작한다. 화자의 꿈은 마이클잭슨 분장을 한 지원자와의 싸움에서 틀어졌듯이, 니나의 현실은 상대가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임신을 통해 무너지려고 한다. 그리고 피해자 기자의 기자회견이 예정돼 있던 자리에 순진한 줄만 알았던 니나가 나타나 화자의 간교함을 넘어서 대중을 기만하는 모습에 화자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니나 속의 자신을 보게 된다.

<보>
보혜는 목사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하지만, 이유도 듣지 않고 남편은 자신의 잘못을 빌기 시작한다. 부유한 아버지의 지원으로 교회유적지 인근의 개척교회 목사가 된 남편과는 자신의 뜻을 반드시 이뤄내고 마는 아버지의 의지대로 영혼 없이 남편과 결혼했다. 보혜는 남편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하지만 이것이 단순히 선교 여행 때 프라이빗 비치에서 잠시 스쳐간 현지인 여성을 회상하며 둘러대는 것인지, 정말 여성을 사랑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버지와 남편으로 이어지는 지긋지긋한 남성들에 의해 자신의 삶의 지휘권을 빼앗기는 점에 질린듯한 느낌은 확실하다. 남편은 보혜를 강간하려 들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보혜의 가여운 눈총만 받고 만다.

<곤륜을 지나>
자영은 회사에서 근속10주년 기념으로 받은 여행상품에 대한 정보가 남편을 통해 시어머니로 흘러들어가 중국 곤륜을 함께 여행하게 됐다. 애초에 친정엄마와 함께하려고 했던 것을 평소 고부갈등으로 긴장이 팽배한 사이인 시어머니가 낚아 챈 것이었고, 역시나 이 와중에 남편은 면세주류만 탐하는 진상을 부린다. 계속되는 불편한 여정에 시어머니는 웬 본인 시어머니하고 겪었던 갈등을 토로하며 자영을 이해하는 척, 위로하는 척 하는 둥 친한 척을 해대고, 친정엄마는 몸이 불편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속은 뒤집히는 상황에 진상 남편은 연락도 되지 않는다. 여행가이드는 곤륜산을 오르면 영혼이 맑아진다는 설명을 약장수처럼 하고 시어머니는 곤륜에 오면 업이 씻어진다는 말에 왔다며 전날 못 다한 푸념을 늘어놓더니 주저앉아 소변을 지리고 울기 시작한다. 자영은 본인의 업만 씻겨버리고 가이드의 말대로 육체가 가벼워지고 갓난아이의 영혼으로 돌아간 시어머니를 보고 체념하며, 끓어오르는 분노와 욕지거리를 참아내고 시어머니를 업어 산을 오른다.

<기미>
공장을 전전하며 삶을 이어가던 원희는 엄마가 치매에 걸리자 시골로 내려와 엄마를 간병하며 친구 성미의 학원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산다. 자신에게 생전 들어보지 못한 심한 욕을 해대는 엄마에 억지로 익숙해지며 자신의 삶을 이어가던 원희는 성미의 제안으로 산악회에 나가 군인아파트에 사는 독신 남자와 잠깐의 만남을 이어가지만,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는 원희에게 엄마에게 상한음식을 먹여 자연사 시키라는 소리를 듣고는 기가 막혀 집을 빠져 나온다. 성미는 군인아파트에 학원차가 보인다는 민원이 들어왔다며 조심하라는 일침에 남자를 다시 만나 정사를 나누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이것봐. 보라고./나는 살아 있어./ 너희들처럼 살아 있다.’(173p.)
원희가 천변도로에 나가 경적을 울리며 소리를 질러대는 것은 치매에 걸린 엄마의 구속, 학원의 학부모에게 오는 구속을 견디며 자신의 존재를 구원하기 위한 발악이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엄마는 계속 치매에 걸려있고 원희는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이어나간다.

<그 소설>
화자(작가)가 문예지에 청탁받은 소설을 송고한다. 대학생 시절 합평 때 혹평을 받았던 소설을 조금 수정해서 냈는데, 과거의 자기 소설을 누군가 도용해 공모전에서 가작을 받은 것을 알게 된다. 도용범을 잡아내 소설은 문예지에 실렸지만, 그런 사건이 있는 동안 ‘내 얘기’라는 소설을 새로 쓴다. 과거 합평 때마다 교수들이 뻔한 낙태에 관한 소설을 식상해하던 기억에 맞물려 독자들에게 정말 진정한 작가의 얘기인 것 마냥 소설을 쓴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던 때쯤이라 시대상을 반영하는 듯했고, 소설이 발표되고 난 뒤 상까지 받는다. 지인들의 축하전화가 봇물처럼 이어지지만 ‘내 얘기’라는 소설 제목처럼 가족과 지인들의 의심을 받고 추궁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전 남자친구로부터 온 전화였는데, 자신이 엮인 이야기를 전 여자친구가 써 유명세를 타는 게 분했는지, 뒤늦게 자신의 핏줄에 대한 연민이 분노로 표출했는지 작가에게 욕설과 악담을 퍼붓는다. 작가는 사실 계류유산의 경험으로 소설을 써 낙태 경험을 한 적은 없었다.
진실과 사실은 구분되지 않는다. 작가는 문예지에 자신이 도용당했던 소설을 싣는 과정과 문예지의 ‘불미스럽’다는 해명이 어쩐지 자신을 향한 듯한 찝찝함을 느끼고, 편집자가 생각할 수 있는 갖은 오해를 상상하지만 도용되었다는 사실을 규명하고 말뿐, 진실을 호소하는 일까지는 관심이 없다. 사실도 아닌 낙태를 진실이라 착각하고 전화를 건 전 남자친구에게도 할 말은 많지만 ‘마음대로 해 봐.’(204p.)라는 한마디를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무엇이 진실이건 간에 ‘새로운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204p.)을 무기력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를 100점이라고 하고새치기같이 작은 죄는 1점이라고 하면, 살인 한 번보다새치기 백한 번이 조금 더 나쁜 게 아닐까요? - P74

보혜는 헤어지자고 한 이유를 아직 말하지 않았다. 남편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들켰다고 생각하는구나. 또 무슨 일을 저질렀구나. 보혜는 피로를 느꼈다. 환멸이 아니라 남편은 보혜에게 환멸처럼 거창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 P84

애초에 기도라는 것은, 듣는 사람이 있는 기도라는 것은, 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연극적인 방식으로 자기할말을 하는 거라는 생각이든다고 보혜는 썼다. 고등학교 때였다. - P86

또 편할 때만 하나님 법 찾고 유리할 때만 세상 법 찾지요? - P104

우리 엄마 원래 그래.
WAN남편은 자영의 하소연을 매번 그런 말로 일축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자영은 원래 그렇다는 말의 편리함을 곱씹어 보곤 했다. 늙은이를 마주할 때마다 자영은 인간 미만의 어떤 존재가 되는 것 같은 형언할 수 없는비참함에 휩싸이는데, 그런 기분을 다 설명하기도 전에남편은 그 이유를 한마디로 줄여 말하는 것이었다. 늙은이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영도 원래 그런사람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싹싹하고 눈치빠른 며느리 같은 것이 될 소질은 자영의 몫이 아니었다. - P127

자영은 화장실을 나오자마자 바람을 쐬다며 휴대폰을 들고 베란다로 갔다.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떤 의도로 말을 꺼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어설픈 사과나 위로라면 절대 받고 싶지 않았다. 누가 사과하랬나. 위로해 달랬나. 도리어 크게 모욕당한 느낌이 들었다. 그깟 말 몇 마디로 자기 혼자 편해지려고? 자기 마음만 편해지면 그만이고, 그간잘못한 것 있으면 다 잊어버리라고? - P137

빌어먹을 년. 도둑년. 더러운년 언니! 언니! 언니 이 씨발년아. 개흘레를 붙을 년아. 이게 엄마의 본심일까. 몸만 상하고 정신은 멀쩡했을 때가 어쩌면 위선의 시절이었던 걸까. - P157

열려 있는 문틈으로 남자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 곡이 흘러나왔다. 난 네게 상처를 줬지만 여전히 널 그리워하고 그래도 날 용서하진 말고 대신 잊지도 말아 달라는 둥 앞뒤 안 맞는 가사로 된 고음 차력쇼 듣고 있자면 정서가 오염되는 것 같아서 승희 스스로 그런 노래를튼 적이 단 한 번도 없을뿐더러, 그런 노래를 틀 만한 장소에도 발을 들이지 않고 지내 왔다. - P2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