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릇을 가르치느라 때렸다는 주장은 나중에 갈비뼈를 부러뜨릴 정도로까지 발전한 ‘의도적’ 학대를 위장하기위한 거짓말이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일하는 상담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처음부터 부모나 보호자가 아이를 죽이거나 해를 입힐 ‘의도’를 갖고 시작하는 학대는 없다. 서현이의 경우도 한두 번의 체벌이 점점 강도를 더해가면서 갈비뼈가 부러지고 뼈가 폐를 찔러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미숙한 아이들을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체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열등한 상대에 대한교정 목적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오래된 논리다. 그러나 수많은 경험적 연구는 체벌의 교육적 효과는 없고되레 폭력의 내면화를 통해 뒤틀린 인성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지적한다. 아이들에게도 반성보다 공포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체벌은 갖가지 이유로 행해질 수 있고, 거기 따라붙는 훈계도 그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표면상의 다양성을 넘어서, 체벌은 언제나 단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바로 체벌이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몸은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가르침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가 된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부모의 체벌은 용인하면서 어린이집에서 체벌이 발생할 경우 벌집 쑤시듯 요란해지는 언론보도를 볼 때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툭하면 불거져 나오는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 보도들을 볼 때마다 나는 똑같은 폭력을 대하는우리 사회의 태도가 뭔가 이중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린이집에선 어떠한 체벌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의 태도는 매우 확고하다. CCTV를 달아서라도 아동학대를 감시해야 한다는 주장 앞에서 보육교사들의 인권에 대한 우려는 뒷전이었다. 보육을 맡고 있는 성인이 아이를 때리는 일에 그토록 민감하면서 왜 부모의 체벌은 괜찮다고 보는 것일까. 사실 어린이집은 부모의 자격을 위임받아 취학 전 아이를 양육, 교육하는 곳이다. 어린이집 교사의 체벌금지를 말하기 이전에 부모의 체벌금지부터 논의해야 하는 것 아닐까.
기성세대는 그 시대의 제한된 문화적 환경에서 자녀를 가르쳤다.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서 그 방법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체벌의 유해성을 연구해온 발달심리학자 엘리자베스 거쇼프는 이를 자동차 안전벨트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성인의 상당수는 자동차 안전벨트가 없던 시절에 자랐다. 하지만 누구도안전벨트가 없었던 덕분에 내가 잘 자랄 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안전벨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탈하게자랐다고 말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부모의 체벌 덕분에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부모의 체벌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폭력도 사랑이라고 가르치며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거나 깊이 의지한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 상태에서 힘을 휘두른다면, 이는 신체적 상해에 더해 상대의 마음을 악랄하게 모욕하는, 질이 나쁜 폭력이다. 다수의 가정폭력이 그렇고 데이트 폭력도 그 한예다. 2015년 트위터를 달군 데이트 폭력에 대한 증언들을 보면 이랬다. 가해자는 폭행의 이유로 ‘네가 맞을 짓을했다‘며 피해자 탓을 한다. ‘맞는 것보다 상대를 잃는 게 더 두려운‘ 피해자는 맞을 짓을 계속하는 자신을 탓하며더 좋은 연인이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계층화, 정치적 의사결정의 비민주성, 폭력적 문화가 심한 사회일수록 체벌이 심한 경향성이 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 가톨릭 사제들에 의한 아동성폭력을 밝혀내려 분투하던 인권변호사는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에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남태평양 통가의 경우 체벌이 잦은데 그들은 어린이에겐 사회적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사회적 능력이란 지위에 따른 위계질서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존경심과 복종의 태도를 갖추는 것이다. 이들에게 체벌은 위계질서를 어린이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어린이를 훈육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던 기존 시각에서 어린이가 연약할지라도 어른과동등한 가치를 지닌 인간이고 권리의 주체라는 시각으로 인식의 전환을 이루어냈다. 협약이 체벌을 금지하는 취지도 만약 성인을 때리는 것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면 마찬가지로 어린이를 때리는 것도 이유를 불문하고 허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법안에 ‘체벌’이라는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체벌에 관용적인 사회에서는 누구도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나 ‘폭력’ ‘학대‘라는 표현에 체벌이 포함된다고 해석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설령 법원이 이 개정안을 가정 내 체벌금지로 해석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체벌금지는 해석이 아니라 법률 그 자체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글로벌 이니셔티브’의 입장이었다. ‘체벌‘이라는 두 글자가 법안에 금지의 대상으로 명백히 들어가야 한다는 거다.
체벌을 허용하는 사회는 아이들이 완전한 인간이 아니며 사회구성원의 자격을 얻기 위해 어느 정도는 고통을경험할 필요가 있다고 바라본다. 아이도 개별적 인간이고 권리를 지닌 사람이라기보다 부모의 뜻대로 처분 가능한소유물처럼 바라본다. 이 뿌리 깊은 부정적 태도를 바꾸자는 것이 체벌금지 입법의 취지다.
체벌과 학대는 두 그룹 모두에서 일어난다. 과보호와 방임 둘 다 아이를 독립적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고 소유물로 바라보는 같은 뿌리에서 비롯됐다. 과보호의 상황에선 부모의 과잉교육열과 지나친 간섭이 정서적, 신체적학대의 양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방임의 경우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방치하다가 툭하면 스트레스와화풀이 대상으로 삼는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적당한 거리와 존중을 유지하지 못해 과보호와 방임의 두 극단이 생겨난다.
엄마 꿈의 대리 실현자가 된 아이는 희망의 포로다.
한국 사회에서 부모가 자신의 뜻대로 자식을 처분‘ 하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가 지금도 간간이 발생하는 부모의자녀 살해 후 자살이다. 언론은 이를 곧잘 ‘가족 동반자살‘이라 부른다. 행위 자체에도 그렇고 이를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는 표현 둘 다에 아이들을 부모와 분리된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고 부모가 세상을 버릴 때 데리고 갈 정도로처분이 가능한 소유물처럼 여기는 관점이 배어 있다.
1.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은 명백한 살인과 아동인권 침해를 온정의 대상으로 만들고 부모가 자기 뜻대로 자녀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퍼뜨립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일가족 동반자살‘로 보도된 사건의 절반 이상은 부모가 미성년 자녀를 살해한 뒤 자살한사건입니다. 자녀는 부모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재산도, 소유물도 아닙니다. 부모의 처지가 아무리 절망스럽다고 해도 부모가 자녀를 죽일 권리는 없습니다. 한국 정부가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6조는 "모든 아동은 생명에 관한 고유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내가 없으면 내 아이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불신은, 실제로 그러한 안전망이 결여된 데다 자녀를 키우고 가르치는것이 순전히 부모의 능력과 자원에 의해 결정되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특징에서 기인한다.
즉, 어떤 ‘친엄마‘는 자녀의 생존을 자신과 분리시켜 생각하지 못하며, 어떤 아버지들에겐 자녀 양육을 전담해줄 ‘친엄마‘가 없는 것이 자녀 살해와 죽음을 선택할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인 거다. 개인이 자신뿐 아니라 자녀의생사를 선택하는 무서운 결정을 할 때조차 한국 사회에서 어머니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토록 짙게 배어 있다.
인류학자 이현정은 이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국의 경우 부모와 자녀를 개별적 개인을 넘어 하나의 집단적 정체성으로 바라보는 사고가 매우 약하다. 이는 "49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국가가 유교주의적 전통사상을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개인의 생산활동 및 사회정체성을 가족이나 종족이 아니라 집체를 중심으로재구성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관계에서는 자녀의 운명이 반드시 부모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 사회에서는 부모와 자녀가 운명 공동체라는 시각이 한국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로 이현정은 핵가족과 확대가족이라는 구조의 차이를 들었다. 1920~1950년대 통계자료로 한중일 3국을 비교한 결과에 따르면 일본과 한국은 이미 그 시절에 핵가족이 전체 가족 유형의 80%였지만 중국은60%가 안 된다고 한다. 핵가족 구조가 지배적인 일본과 한국에서는 부모의 위기는 곧 가족 전체의 존립 문제로 인식되기 쉽다. 반면 중국의 경우 확대가족의 성격이 강하고 핵가족 외부의 상호의존관계인 가족 밖 네트워크가 튼튼해 자신이 죽더라도 자녀를 다른 가까운 누군가가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이 점은 한국이나 일본의 부모들이 자녀의 불확실한 미래를 염려하여 혼자 놔두기보다 차라리 함께 세상을 떠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과대비된다. 결국 같은 유교문화권 내에서도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부모가 자녀를 독립된 개인으로 바라보느냐,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가족 밖에 기댈 언덕이 있느냐 여부에 놓여 있다. 체제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집단’을 도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고 폭력적이라는 점이다.
친권은 부모가 자녀를 보호하고 가르칠 ‘의무‘지 자녀에 대한 처분 ‘권리‘가 아니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소위 ‘정상가족‘인 가부장적 가족만 인정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다. 법적 혼인절차가 수반되지 않은 임신과 출산, 양육에 대한 사회적 보호와 인정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결혼=출산’의 등식이 지나치게확고한 탓에 제도의 바깥에서 출산함으로써 가족의 순수함을 훼손했다고 여겨지는 미혼모와 그 자녀들은 제도적, 사회적 차별에 시달린다.
사후 관리는 국내입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허술하다. 한국은 국내입양 활성화를 꾀한다는 명목으로 건강한영아를 입양할 때에도 계속 현금을 지원하는 특이한 나라다. 노혜련 교수는 "입양부모는 선하고 대단한 존재라는사회적 인식은 입양아동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어도 외부에 도움을 청할 수 없도록 만든다"라면서 "입양은 선한 일이라기보다 전문적 도움이 필요한 전 생애의 과정이라는 인식을 확대하고 현금 지원보다 전문적 사후서비스를 제공하는 공적 전달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더 많은 민주주의와 자유,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수적인 사람들보다 타자에 대해 더 관용적 태도를 지녔으리라 생각했던 당시의 나로서는 그들의 이주아동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슨 이유인지 알고싶어 온라인 게시판과 SNS에 올라온 ‘한국판 이민법‘ 비판을 일일이 찾아 읽어보았다. SNS 프로필에 권위주의적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바란다고 적어둔 이들이 딱 그 권위주의적 시각으로 이주민을 바라보며 ‘우리 권리를빼앗아간다‘고 비판과 혐오발언을 쏟아냈다.
이주민에 대한 증오는 이주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위험 전가, 희생양 찾기, 타자 비난의 가장 흔한 형태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처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너무나 간단히 타자를 증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만큼 불안과위기감이 사람들의 일상과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은 근대 이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어온 현상이다. 사회심리학자 헬렌 조페Helene Joffe의『위험사회와 타자의 논리』에 따르면 매독이 유럽을 휩쓸던15세기에 매독은 영국에선 ‘프랑스 두창’으로, 프랑스에선 ‘독일병’으로, 플로렌스인들에겐 ‘나폴리병‘, 일본인에겐 ‘중국병’으로 불렸다. 매독뿐 아니라 콜레라, 흑사병, 나병에 이르기까지 집단적인 불치의 질병은 늘 ‘타자’와연관되어왔다. 흥미로운 것은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이 서양사회 혹은 지배집단에서만 드러나는 특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히티에서 매독은 ‘영국병’으로 불렸다. 아프리카 줄루족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에서도 질병의 발생을 ‘타자‘와 연관지어 이해하는 반응이 드러난다. 결국 위기에 처했을 때 ‘타자‘는 지배집단이든 아니든 누구나 비난할수 있는 잠재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내 주변에는 우연찮게 자발적인 무자녀 가족이 여럿 있다. 자신의 삶에만 충실하기 위해 자녀를 갖지 않기로결정했으나 그렇다고 가족주의에서 자유롭지도 않다. 딩크DINK, Double Income No Kids족이라는 말의 경쾌한 어감처럼 ‘내 삶을 즐기기‘ 위한 선택이라기보다 한국의 가족현실과 자신의 상황, 부모의 책임과 자격을 고민하다 내린‘포기의 결단’에 더 가깝다.
사회학자 김혜영은 이를 가족을 통한 국가의 통치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다. 경제발전과정에 노동력, 특히 값싼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했던 국가는 핵가족을 찬양하면서 농촌 자녀의 도시 이주를 장려하고 여성의노동시장 유입, 산아제한을 골자로 한 가족계획을 장려했다. 그러다가 산업화의 진전으로 농촌의 공동화 및 노령화가 문제가 되고 노인 부양의 필요가 제기되자 이번에는 핵가족을 비판하고 전통적 가족 부양의 윤리를 찬양했던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금 모으기는 기묘한 운동이다. 국가와 재벌의 잘못으로 야기된 외환위기였고 국민의 혈세로부실기업과 부실금융기관에 공적 투입을 한 것도 모자라 국가가 국민에게 손을 벌린 것이니까 말이다. 사회학자 김덕영은 『환원근대』에서 금 모으기 운동을 "국가와 가족의 관계에서 쌍방성이 결여된 일방적 증여" 라고 묘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관계에서 가족은 장롱 깊숙이 간직한 할머니의 금가락지를 내놓을 정도로 헌신적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국가는 외환위기와 더불어 실직한 사람을 전적으로 가족에게 떠맡겼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노숙자로 전락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또한 소득보장, 교육, 돌봄의 양과 질 등이 가족에게 의존적일 경우 계층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질이달라지므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양질의 교육과 돌봄 서비스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가족에게 주어진 자유선택이란 곧 개별경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도적 가족주의의 진단과 함의>를 연구한 장경섭 등은 "이처럼 가장 기초적 부분에서 발생하는 격차는 가족을 통해 재생산되어 개인과 가족의 삶의 계층화, 양극화를 점점 더 심화시킨다"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자녀를 소유물로 바라보는 관념은 압축적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중요성이 커진 가족이 이제 개인 삶에서도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굳어진 상호의존성, 귀속성이 자녀 양육에도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내가 과장되게 느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족의 호칭이 점점 더 사회 전반으로 깊숙이 퍼져나가는 것 같다. 사람들이 결혼을 기피하고 전통적 가족가치가 무너져간다고들 하는데 가족 호칭의 확산은 거꾸로 방향을 향한 듯하다.
급변하는 사회지만 가족적 문화에 대한 미화는 여전하다. 공동체 의식과 배려, 책임을 강조하고 싶을 때 아주자주 가족적 관계에 대한 비유가 호출되고, 친밀감을 전제로 한 집안의 인간관계가 사회관계로까지 확장된다. 우리는 왜 중립적 호칭을 놔두고 굳이 가족적 거리를 암시하는 표현들을 점점 더 많이 쓰게 되었을까?
그게 가장 두드러지는 영역은 아마 회사가 아닐까 싶다. 직장가족주의는 직장을 가정의 확장된 장소로 보고 가족 내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속성이 조직과 구성원들의 의식과 행태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업에서는 흔히들주인의식을 고양시킨다는 명목으로 가족주의를 표방한다. "종업원을 가족처럼, 회사를 내 집처럼", "우리는 모두한 가족" 등과 같은 사훈社에서 나타나듯 직장가족주의에는 가족과 유사한 관계를 중심에 놓는 유교적 이념이 내포되어 있다. 직장가족주의를 통해 구성원의 충성, 헌신, 공동체, 집단성, 소속감을 강조하며 부모-자녀의 수직적 관계가 직장에서는 상사-부하의 서열구조로 나타난다. 구성원과 경영진의 관계에서도 가족 내에서 자녀의 부를 공경하는태도를 기대하고 요구하기도 한다.
‘정상가족‘의 안팎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의 문제들을 지켜보며 내가 한국 가족주의에 대해 가졌던 의문들, 즉가족 안에서는 개별성, 가족 밖에서는 다양성이 왜 존중받지 못하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본 답은 이렇다. 첫째, 가족의 생활을 지원하는 공공의 역할 부재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 없이 사적 안전망인 가족에게 모든 ‘보호’를 떠넘겼고 당장의 생존이 목표인 가족이 구성원의 개별성을 고려할 리는 만무하다. 둘째, 치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가족 단위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개별성과 다양성의 설 자리는 없다. 셋째, 자기 집단만 중시하는 가족주의가 사회로 확대되면서 배타적인 태도가 굳어졌고 타인과 사회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다.
폭력 없이 아이를 키운다고 해서 우리가 영원한 평화의 상태 안에서 살아갈 새로운 인류를 만들 수 있을까요? 아마 어린이 책 작가들만이 그렇다고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유토피아겠지요. 이 가난하고 아픈 세상에서 평화를 원한다면 해야 할 다른 많은 일들이 있음을 압니다.
가족 내에서 양육을 할 때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를 국가가 금지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가족의 탈사생활화를 요구하는 조치라고 볼 수도 있다. 가족 내에서 이뤄지는 행위들이 전부 사생활은 아니게 된 것이다.
스웨덴인들은 정반대로 이를 지극히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2011년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스웨덴 역사학자 라르스 트래가르드Lars Trägårdh가 발표한 ‘스웨덴식 사랑 이론swedish theory of love‘이그런 논리다. 이 이론은 진정한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이지 않는 개인들 사이에서만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율적이고 평등한 개개인 사이에서만 사랑과 우정 같은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심지어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서로 의존적이고 굴욕을 강요하는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한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다고바라본다. 국가는 이런 굴욕감에서 개인을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스웨덴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삶은 개인주의적으로 살고, 해법은 집단주의적으로 찾을 때 저출산을 비롯하여 우리가 겪는 위기를 해소할 길이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스웨덴과 비교하면 한국은 거꾸로다. 삶은 집단주의적이고 해법은 개인주의적이다. 개인의 개별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가족과 온갖 배타적 관계에 둘러싸여 집단주의적으로 살아가면서 육아, 교육, 주거 등은 다 각자 알아서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말이다.
반면 지금 우리 사회는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각자 가족 밖에서 다른 일을 하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또 권력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공감력이 낮다. 다른 사람 처지에 서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나 나르시시스트처럼 공감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그들이 느끼기를 원하면 공감을 느낄 수 있다. 자기 집단내의 사람이라고 느낄 경우 사이코패스들도 공감력을 보인다. 공통의 경험도 꼭 공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현재 그 일을 겪는 사람에게 가장 덜 공감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런 공감의 한계 때문에 심리학자 폴 블룸Paul Bloom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방식의 공감력 향상보다는 되레 한발 물러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도덕에 근거해 판단하는 이성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26 그는 미래의 위험을 예방하는 정책을 세우려면 공감을 제쳐놓고 생각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기후변화, 고령화 사회 등에 대처하려면 미래의 추상적인 혜택을 위해 현재의 사람들에게 비용을 부과해야 하는데, 대체로 사람들은 막연한 대중의 고통, 미래의 큰 비극보다 특정한 개인, 눈앞의 아픔에 더 공감하기 때문이다.
"네 이웃과 적을 죽이지 마라. 설령 그들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러나 젊은 세대의 강한 거부감의 이유가 단지 공동체와 공공성을 헷갈리는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에 대한 반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다. 아마 각자 겪어본 공동체의 경험이 대체로 부정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사사건건통제하고 간섭하며 구성원을 존중해주지도 않는, 수긍할 만한 원칙도 없고 권위를 가진 사람 마음대로인 폐쇄적공동체들, 가족에서 학교, 회사에 이르기까지 겪은 부정적 경험이 공동체 일반에 대한 반감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아닐까. 공동체의 억압적 측면을 주로 경험하며 성장한 사람들에게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된 개념이 아니라는 말은 그저 공염불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하고 양자택일의 대상처럼 경험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생각엔 공동체가 작동하는 원리로 공공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공공성이 강화될수록 사생활의 자유는 오히려 커진다"
철학자 새뮤얼 셰플러 Samuel Scheffler가 『죽음과 사후생Death and the Afterlife (국내 미출간)에서 설명한 것처럼 나의사후에도 인간 세계가 지속될 것이라는 암묵적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나은 치료법을 찾고 더 나은 기술을연구하고 더 새로운 것을 창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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