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병운 지음 / 민음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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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책을 보면서 작가의, 아니 어느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안책방에서 했던 ‘아아공필‘ 북토크에 참석했는데, 당시의 경험까지 책에 나와 있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의 진솔한 편지를 받은 기분이랄까.

독특한 경험을 서술하는데 느껴지는 보편성은 결국 세상에 다를 게 없다는, 차별이 차이를 만들 뿐이라는 것을 다시 새겨본다.

나는 성소수자를 연민하고동정하는 감독의 시혜적인 시선과 선민의식이 거북했고, 내가 끝내 지켜야 하는 것이 퀴어로서의 자존심인지 아니면 배우로서의 성장 기회인지 알 수가 없어 갈팡질팡했다. - P11

어째서 당신이 우리의 스피커가 되어야 하는가. 잘알지도 못하고 잘 알 수도 없으면서 당신이 게이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마 다음에는 트랜스젠더인가. 다다음에는 퀘스처닝에 인터섹스, 무성애자이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기만 하면, 선의와 정치적 신념을 담보하기만 하면 당신의 발언은 정당해지는가. 당신이 성소수자를 도구화해서 재생산한 편견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지는가. - P19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으나 그게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유일신 같은 감독님이시고 나는 발에 채는 일개 배우일 뿐이라고, 그런 하극상은 나 같은 무명에게는 허락되지 않으며이건 예의나 도의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 P21

남들과는 다른 욕망을 지녔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신체에수치심과 모멸감을 적립해 온 사람이라면, 반복되는혼란과 부정 속에서도 기어코 규범을 거스르는 쾌락쪽으로 향하는 자신에게 진저리쳐 본 사람이라면, 제아무리 벽장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한들 이 소설에서 자신의 어떤 시절을 겹쳐 보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 P114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이지면이 어떤 성소수자들의 희생으로 비로소 가능해진 미래라고 생각하는 게 결코 무리는 아니리라 확신하면서. - P123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고 결심했으면서, 섣불리 연민하거나 동정하지 말자고 다짐했으면서, 나는 어느새 그걸 또 잊고 있었다. - P209

그러니까 상황은 뻔했다. 이쪽은 저쪽에 끌리나 저쪽은 이쪽에 끌리지 않는 것. 이쪽은 갈급하나 저쪽은 아쉬울 게 없는 것. 나는 여러 번에 걸친 곁눈질로두 사람을 유심히 살폈고, 물감이 번진 듯한 요란한무늬의 남방을 입고 있는 내 쪽의 남자보다는 집에서잘 때나 주워 입을 것 같은 흰색 티셔츠에 밤톨 같은머리를 하고 있는 건너편의 남자가 훨씬 더 일틱해 보인다는 것을 확인했다. 건너편의 남자는 시종일관 느긋하고 편안해 보였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남성성을부풀리거나 연출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외형적 조건이 남자를 이따금 미소 지으며 대답만 해도 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듯했다. 그래 봤자 게이이므로그건 정말이지 같잖은 기득권이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그런 사람에 끌렸고 그런 사람으로 비치길 원했으며 그게 잘 안 돼서 힘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나는 누군가의 마음에 들고자 나를 가장하는 일에 완전히 지쳐있었다. 남자다운 분 선호합니다, 여성스러운 분 죄송합니다, 운동하는 분이 좋습니다, 끼순이는 사양합니다라고 적혀있는 데이팅앱 프로필 문구를 볼 때마다 다들 참 양심도 없다고 혀를 차면서도 자꾸만 내 모습을 점검하게 됐고, 어쩌다 연이 닿아 누군가를 만날 때도 진짜내 모습을 들켰다가는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불안에시달렸다. 게이들이 선호하는 매력 자본이 부족한 사람. 선섹스 후연애라는 이쪽 세계의 작동방식에 부적합한 사람. 너무 많은 거절과 너무 잦은 낙담에 어느덧 자존감이 바닥나 버린 사람. 그게 나였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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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개별적인 인격을 가진 존재라면 나는 아이들에게 술담배를 금지하는 것도 차별이자 성인 권력의 탄압이라고 생각한다.(사실 정확한 표현은 어른들에게도 좋지 않은 것을 무슨 논리로 아이들에게만 금지하고 있는 것인가이지만)

또 아이들은 절대적으로 순진무구한 선한 존재라는 전재가 좀 거북했다. 우리는 살면서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나 ‘케빈에 대하여’의 케빈과 같은 아이들을 마주한다. 어른들의 케이스는 극단적인 폭력성을 보여주는 사례를 모았고, 아이들은 나약한 피해자의 사례만 모아서 그런지 책의 요지가 설득력이 없다. 정도의 차이지 벤이나 케빈같은 성향을 누구나 다 타고 나는데…
온실 속의 화초같은 유토피아에서 자라게 하자는 논리에는 여러 허점이 숨어있다. 우리가 폭력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폭력을 경험했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우리의 생존 본능은 상대적으로 약한 자를 밟아 살아 남는다는 것을 안다. 400만년 가까이 유전되어 온 기질이기 때문에 우리 성향은 폭력성을 기본적으로 내재하고 있다. 이런 폭력성을 억제시키는 것이 교육이 해야할 일인데 우리가 가진 언어나 표정은 폭력을 상대할 만큼 강력함을 발휘하지 못한다…

한국의 사람들은 공공의 지나친 책임을 운운하는데 이는 결국 더욱 더 강력한 간섭을 갈구하는 꼴이다. 정작 본인이 공공 질서 유지를 위해 통제를 받으면 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며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둥 진상을 부리면서... 공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지만, 결국엔 누군가에겐 그냥 권력으로 다가올 뿐이다. 본인들이 주장하는 바가 어떤 사회적 낭비를 초래하는지는 계산도 해보지 않은 채, 좀 멋있어 보이고 싶으면 피해자를 내세워 공공을 비난하고 책임을 물어버리면 되는 게 좌파 대학생들 사이의 유행이라 그런지 이젠 집안일도 스스로 성찰할 생각은 안 하고 공공의 책임으로 돌리자고 난리다. 너무 편리한 사고방식에 넌더리가 난다.
규제의 실천은 공공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고, 이런 부작용의 사례는 ‘아이 엠 샘’같은 영화를 통해 지탄을 받아왔는데도 공권력의 사적 영역으로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고 있다. 차별과 편견은 나 자신을 포함한 대중의 잘못이지 공공의 책임 부재로 빚어진 결과가 아니다.

작가의 맥락 때문에 몇 가지 좋은 이론들이 책에 인용되었음에도 아쉽다. 적당히 요구하고 스스로 성찰해야겠다.

버릇을 가르치느라 때렸다는 주장은 나중에 갈비뼈를 부러뜨릴 정도로까지 발전한 ‘의도적’ 학대를 위장하기위한 거짓말이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일하는 상담원들의 말을 들어보면 처음부터 부모나 보호자가 아이를 죽이거나 해를 입힐 ‘의도’를 갖고 시작하는 학대는 없다. 서현이의 경우도 한두 번의 체벌이 점점 강도를 더해가면서 갈비뼈가 부러지고 뼈가 폐를 찔러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미숙한 아이들을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체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열등한 상대에 대한교정 목적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오래된 논리다. 그러나 수많은 경험적 연구는 체벌의 교육적 효과는 없고되레 폭력의 내면화를 통해 뒤틀린 인성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지적한다. 아이들에게도 반성보다 공포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체벌은 갖가지 이유로 행해질 수 있고, 거기 따라붙는 훈계도 그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표면상의 다양성을 넘어서, 체벌은 언제나 단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바로 체벌이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몸은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가르침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가 된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부모의 체벌은 용인하면서 어린이집에서 체벌이 발생할 경우 벌집 쑤시듯 요란해지는 언론보도를 볼 때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툭하면 불거져 나오는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 보도들을 볼 때마다 나는 똑같은 폭력을 대하는우리 사회의 태도가 뭔가 이중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린이집에선 어떠한 체벌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회의 태도는 매우 확고하다. CCTV를 달아서라도 아동학대를 감시해야 한다는 주장 앞에서 보육교사들의 인권에 대한 우려는 뒷전이었다. 보육을 맡고 있는 성인이 아이를 때리는 일에 그토록 민감하면서 왜 부모의 체벌은 괜찮다고 보는 것일까. 사실 어린이집은 부모의 자격을 위임받아 취학 전 아이를 양육, 교육하는 곳이다. 어린이집 교사의 체벌금지를 말하기 이전에 부모의 체벌금지부터 논의해야 하는 것 아닐까.

기성세대는 그 시대의 제한된 문화적 환경에서 자녀를 가르쳤다.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서 그 방법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체벌의 유해성을 연구해온 발달심리학자 엘리자베스 거쇼프는 이를 자동차 안전벨트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성인의 상당수는 자동차 안전벨트가 없던 시절에 자랐다. 하지만 누구도안전벨트가 없었던 덕분에 내가 잘 자랄 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안전벨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탈하게자랐다고 말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부모의 체벌 덕분에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부모의 체벌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폭력도 사랑이라고 가르치며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거나 깊이 의지한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 상태에서 힘을 휘두른다면, 이는 신체적 상해에 더해 상대의 마음을 악랄하게 모욕하는, 질이 나쁜 폭력이다. 다수의 가정폭력이 그렇고 데이트 폭력도 그 한예다. 2015년 트위터를 달군 데이트 폭력에 대한 증언들을 보면 이랬다. 가해자는 폭행의 이유로 ‘네가 맞을 짓을했다‘며 피해자 탓을 한다. ‘맞는 것보다 상대를 잃는 게 더 두려운‘ 피해자는 맞을 짓을 계속하는 자신을 탓하며더 좋은 연인이 되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사회적 계층화, 정치적 의사결정의 비민주성, 폭력적 문화가 심한 사회일수록 체벌이 심한 경향성이 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에서 가톨릭 사제들에 의한 아동성폭력을 밝혀내려 분투하던 인권변호사는 "한 아이를 키우는 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에도 한 마을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남태평양 통가의 경우 체벌이 잦은데 그들은 어린이에겐 사회적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사회적 능력이란 지위에 따른 위계질서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존경심과 복종의 태도를 갖추는 것이다. 이들에게 체벌은 위계질서를 어린이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방편이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어린이를 훈육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던 기존 시각에서 어린이가 연약할지라도 어른과동등한 가치를 지닌 인간이고 권리의 주체라는 시각으로 인식의 전환을 이루어냈다. 협약이 체벌을 금지하는 취지도 만약 성인을 때리는 것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면 마찬가지로 어린이를 때리는 것도 이유를 불문하고 허용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유는 법안에 ‘체벌’이라는 표현이 없기 때문이다. 체벌에 관용적인 사회에서는 누구도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나 ‘폭력’ ‘학대‘라는 표현에 체벌이 포함된다고 해석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설령 법원이 이 개정안을 가정 내 체벌금지로 해석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체벌금지는 해석이 아니라 법률 그 자체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글로벌 이니셔티브’의 입장이었다. ‘체벌‘이라는 두 글자가 법안에 금지의 대상으로 명백히 들어가야 한다는 거다.

체벌을 허용하는 사회는 아이들이 완전한 인간이 아니며 사회구성원의 자격을 얻기 위해 어느 정도는 고통을경험할 필요가 있다고 바라본다. 아이도 개별적 인간이고 권리를 지닌 사람이라기보다 부모의 뜻대로 처분 가능한소유물처럼 바라본다. 이 뿌리 깊은 부정적 태도를 바꾸자는 것이 체벌금지 입법의 취지다.

체벌과 학대는 두 그룹 모두에서 일어난다. 과보호와 방임 둘 다 아이를 독립적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고 소유물로 바라보는 같은 뿌리에서 비롯됐다. 과보호의 상황에선 부모의 과잉교육열과 지나친 간섭이 정서적, 신체적학대의 양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방임의 경우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방치하다가 툭하면 스트레스와화풀이 대상으로 삼는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적당한 거리와 존중을 유지하지 못해 과보호와 방임의 두 극단이 생겨난다.

엄마 꿈의 대리 실현자가 된 아이는 희망의 포로다.

한국 사회에서 부모가 자신의 뜻대로 자식을 처분‘ 하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가 지금도 간간이 발생하는 부모의자녀 살해 후 자살이다. 언론은 이를 곧잘 ‘가족 동반자살‘이라 부른다. 행위 자체에도 그렇고 이를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는 표현 둘 다에 아이들을 부모와 분리된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고 부모가 세상을 버릴 때 데리고 갈 정도로처분이 가능한 소유물처럼 여기는 관점이 배어 있다.

1. ‘동반자살‘이라는 표현은 명백한 살인과 아동인권 침해를 온정의 대상으로 만들고 부모가 자기 뜻대로 자녀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잘못된 인식을 퍼뜨립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일가족 동반자살‘로 보도된 사건의 절반 이상은 부모가 미성년 자녀를 살해한 뒤 자살한사건입니다.
자녀는 부모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재산도, 소유물도 아닙니다. 부모의 처지가 아무리 절망스럽다고 해도 부모가 자녀를 죽일 권리는 없습니다. 한국 정부가 비준한 <유엔아동권리협약〉6조는 "모든 아동은 생명에 관한 고유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내가 없으면 내 아이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불신은, 실제로 그러한 안전망이 결여된 데다 자녀를 키우고 가르치는것이 순전히 부모의 능력과 자원에 의해 결정되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특징에서 기인한다.

즉, 어떤 ‘친엄마‘는 자녀의 생존을 자신과 분리시켜 생각하지 못하며, 어떤 아버지들에겐 자녀 양육을 전담해줄 ‘친엄마‘가 없는 것이 자녀 살해와 죽음을 선택할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인 거다. 개인이 자신뿐 아니라 자녀의생사를 선택하는 무서운 결정을 할 때조차 한국 사회에서 어머니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은 이토록 짙게 배어 있다.

인류학자 이현정은 이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국의 경우 부모와 자녀를 개별적 개인을 넘어 하나의 집단적 정체성으로 바라보는 사고가 매우 약하다. 이는 "49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국가가 유교주의적 전통사상을 반혁명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개인의 생산활동 및 사회정체성을 가족이나 종족이 아니라 집체를 중심으로재구성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게다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관계에서는 자녀의 운명이 반드시 부모에 의해 결정되지도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 사회에서는 부모와 자녀가 운명 공동체라는 시각이 한국보다 약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로 이현정은 핵가족과 확대가족이라는 구조의 차이를 들었다. 1920~1950년대 통계자료로 한중일 3국을 비교한 결과에 따르면 일본과 한국은 이미 그 시절에 핵가족이 전체 가족 유형의 80%였지만 중국은60%가 안 된다고 한다. 핵가족 구조가 지배적인 일본과 한국에서는 부모의 위기는 곧 가족 전체의 존립 문제로 인식되기 쉽다. 반면 중국의 경우 확대가족의 성격이 강하고 핵가족 외부의 상호의존관계인 가족 밖 네트워크가 튼튼해 자신이 죽더라도 자녀를 다른 가까운 누군가가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이 점은 한국이나 일본의 부모들이 자녀의 불확실한 미래를 염려하여 혼자 놔두기보다 차라리 함께 세상을 떠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과대비된다.
결국 같은 유교문화권 내에서도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는 부모가 자녀를 독립된 개인으로 바라보느냐, 그리고 위기 상황에서 가족 밖에 기댈 언덕이 있느냐 여부에 놓여 있다. 체제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다.

‘집단’을 도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위험하고 폭력적이라는 점이다.

친권은 부모가 자녀를 보호하고 가르칠 ‘의무‘지 자녀에 대한 처분 ‘권리‘가 아니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소위 ‘정상가족‘인 가부장적 가족만 인정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다. 법적 혼인절차가 수반되지 않은 임신과 출산, 양육에 대한 사회적 보호와 인정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결혼=출산’의 등식이 지나치게확고한 탓에 제도의 바깥에서 출산함으로써 가족의 순수함을 훼손했다고 여겨지는 미혼모와 그 자녀들은 제도적,
사회적 차별에 시달린다.

사후 관리는 국내입양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허술하다. 한국은 국내입양 활성화를 꾀한다는 명목으로 건강한영아를 입양할 때에도 계속 현금을 지원하는 특이한 나라다. 노혜련 교수는 "입양부모는 선하고 대단한 존재라는사회적 인식은 입양아동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어도 외부에 도움을 청할 수 없도록 만든다"라면서 "입양은 선한 일이라기보다 전문적 도움이 필요한 전 생애의 과정이라는 인식을 확대하고 현금 지원보다 전문적 사후서비스를 제공하는 공적 전달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더 많은 민주주의와 자유,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수적인 사람들보다 타자에 대해 더 관용적 태도를 지녔으리라 생각했던 당시의 나로서는 그들의 이주아동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슨 이유인지 알고싶어 온라인 게시판과 SNS에 올라온 ‘한국판 이민법‘ 비판을 일일이 찾아 읽어보았다. SNS 프로필에 권위주의적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바란다고 적어둔 이들이 딱 그 권위주의적 시각으로 이주민을 바라보며 ‘우리 권리를빼앗아간다‘고 비판과 혐오발언을 쏟아냈다.

이주민에 대한 증오는 이주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위험 전가, 희생양 찾기, 타자 비난의 가장 흔한 형태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처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너무나 간단히 타자를 증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만큼 불안과위기감이 사람들의 일상과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사회에 위기가 닥쳤을 때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은 근대 이전부터,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어온 현상이다. 사회심리학자 헬렌 조페Helene Joffe의『위험사회와 타자의 논리』에 따르면 매독이 유럽을 휩쓸던15세기에 매독은 영국에선 ‘프랑스 두창’으로, 프랑스에선 ‘독일병’으로, 플로렌스인들에겐 ‘나폴리병‘, 일본인에겐 ‘중국병’으로 불렸다. 매독뿐 아니라 콜레라, 흑사병, 나병에 이르기까지 집단적인 불치의 질병은 늘 ‘타자’와연관되어왔다.
흥미로운 것은 위험을 ‘타자‘와 관련짓는 반응이 서양사회 혹은 지배집단에서만 드러나는 특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타히티에서 매독은 ‘영국병’으로 불렸다. 아프리카 줄루족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에서도 질병의 발생을 ‘타자‘와 연관지어 이해하는 반응이 드러난다. 결국 위기에 처했을 때 ‘타자‘는 지배집단이든 아니든 누구나 비난할수 있는 잠재적 대상이 되는 것이다.

내 주변에는 우연찮게 자발적인 무자녀 가족이 여럿 있다. 자신의 삶에만 충실하기 위해 자녀를 갖지 않기로결정했으나 그렇다고 가족주의에서 자유롭지도 않다. 딩크DINK, Double Income No Kids족이라는 말의 경쾌한 어감처럼 ‘내 삶을 즐기기‘ 위한 선택이라기보다 한국의 가족현실과 자신의 상황, 부모의 책임과 자격을 고민하다 내린‘포기의 결단’에 더 가깝다.

사회학자 김혜영은 이를 가족을 통한 국가의 통치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있다고 분석한다. 경제발전과정에 노동력, 특히 값싼 저임금 노동력이 필요했던 국가는 핵가족을 찬양하면서 농촌 자녀의 도시 이주를 장려하고 여성의노동시장 유입, 산아제한을 골자로 한 가족계획을 장려했다. 그러다가 산업화의 진전으로 농촌의 공동화 및 노령화가 문제가 되고 노인 부양의 필요가 제기되자 이번에는 핵가족을 비판하고 전통적 가족 부양의 윤리를 찬양했던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금 모으기는 기묘한 운동이다. 국가와 재벌의 잘못으로 야기된 외환위기였고 국민의 혈세로부실기업과 부실금융기관에 공적 투입을 한 것도 모자라 국가가 국민에게 손을 벌린 것이니까 말이다.
사회학자 김덕영은 『환원근대』에서 금 모으기 운동을 "국가와 가족의 관계에서 쌍방성이 결여된 일방적 증여"
라고 묘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관계에서 가족은 장롱 깊숙이 간직한 할머니의 금가락지를 내놓을 정도로 헌신적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국가는 외환위기와 더불어 실직한 사람을 전적으로 가족에게 떠맡겼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노숙자로 전락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또한 소득보장, 교육, 돌봄의 양과 질 등이 가족에게 의존적일 경우 계층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의 질이달라지므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양질의 교육과 돌봄 서비스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가족에게 주어진 자유선택이란 곧 개별경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도적 가족주의의 진단과 함의>를 연구한 장경섭 등은 "이처럼 가장 기초적 부분에서 발생하는 격차는 가족을 통해 재생산되어 개인과 가족의 삶의 계층화, 양극화를 점점 더 심화시킨다"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자녀를 소유물로 바라보는 관념은 압축적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중요성이 커진 가족이 이제 개인 삶에서도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굳어진 상호의존성, 귀속성이 자녀 양육에도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내가 과장되게 느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족의 호칭이 점점 더 사회 전반으로 깊숙이 퍼져나가는 것 같다.
사람들이 결혼을 기피하고 전통적 가족가치가 무너져간다고들 하는데 가족 호칭의 확산은 거꾸로 방향을 향한 듯하다.

급변하는 사회지만 가족적 문화에 대한 미화는 여전하다. 공동체 의식과 배려, 책임을 강조하고 싶을 때 아주자주 가족적 관계에 대한 비유가 호출되고, 친밀감을 전제로 한 집안의 인간관계가 사회관계로까지 확장된다. 우리는 왜 중립적 호칭을 놔두고 굳이 가족적 거리를 암시하는 표현들을 점점 더 많이 쓰게 되었을까?

그게 가장 두드러지는 영역은 아마 회사가 아닐까 싶다. 직장가족주의는 직장을 가정의 확장된 장소로 보고 가족 내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속성이 조직과 구성원들의 의식과 행태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기업에서는 흔히들주인의식을 고양시킨다는 명목으로 가족주의를 표방한다. "종업원을 가족처럼, 회사를 내 집처럼", "우리는 모두한 가족" 등과 같은 사훈社에서 나타나듯 직장가족주의에는 가족과 유사한 관계를 중심에 놓는 유교적 이념이 내포되어 있다.
직장가족주의를 통해 구성원의 충성, 헌신, 공동체, 집단성, 소속감을 강조하며 부모-자녀의 수직적 관계가 직장에서는 상사-부하의 서열구조로 나타난다. 구성원과 경영진의 관계에서도 가족 내에서 자녀의 부를 공경하는태도를 기대하고 요구하기도 한다.

‘정상가족‘의 안팎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의 문제들을 지켜보며 내가 한국 가족주의에 대해 가졌던 의문들, 즉가족 안에서는 개별성, 가족 밖에서는 다양성이 왜 존중받지 못하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본 답은 이렇다. 첫째, 가족의 생활을 지원하는 공공의 역할 부재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 없이 사적 안전망인 가족에게 모든 ‘보호’를 떠넘겼고 당장의 생존이 목표인 가족이 구성원의 개별성을 고려할 리는 만무하다. 둘째, 치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가족 단위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개별성과 다양성의 설 자리는 없다. 셋째, 자기 집단만 중시하는 가족주의가 사회로 확대되면서 배타적인 태도가 굳어졌고 타인과 사회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다.

폭력 없이 아이를 키운다고 해서 우리가 영원한 평화의 상태 안에서 살아갈 새로운 인류를 만들 수 있을까요?
아마 어린이 책 작가들만이 그렇다고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유토피아겠지요. 이 가난하고 아픈 세상에서 평화를 원한다면 해야 할 다른 많은 일들이 있음을 압니다.

가족 내에서 양육을 할 때 폭력을 사용하는 행위를 국가가 금지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가족의 탈사생활화를 요구하는 조치라고 볼 수도 있다. 가족 내에서 이뤄지는 행위들이 전부 사생활은 아니게 된 것이다.

스웨덴인들은 정반대로 이를 지극히 개인주의적 삶의 방식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2011년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서 스웨덴 역사학자 라르스 트래가르드Lars Trägårdh가 발표한 ‘스웨덴식 사랑 이론swedish theory of love‘이그런 논리다.
이 이론은 진정한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고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놓이지 않는 개인들 사이에서만가능하다고 말한다. 자율적이고 평등한 개개인 사이에서만 사랑과 우정 같은 인간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심지어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서로 의존적이고 굴욕을 강요하는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한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다고바라본다. 국가는 이런 굴욕감에서 개인을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스웨덴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삶은 개인주의적으로 살고, 해법은 집단주의적으로 찾을 때 저출산을 비롯하여 우리가 겪는 위기를 해소할 길이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스웨덴과 비교하면 한국은 거꾸로다. 삶은 집단주의적이고 해법은 개인주의적이다. 개인의 개별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가족과 온갖 배타적 관계에 둘러싸여 집단주의적으로 살아가면서 육아, 교육, 주거 등은 다 각자 알아서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말이다.

반면 지금 우리 사회는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각자 가족 밖에서 다른 일을 하는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또 권력을 가진 사람은 대체로 공감력이 낮다. 다른 사람 처지에 서보려고 애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이코패스나 나르시시스트처럼 공감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그들이 느끼기를 원하면 공감을 느낄 수 있다. 자기 집단내의 사람이라고 느낄 경우 사이코패스들도 공감력을 보인다. 공통의 경험도 꼭 공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같은 일을 겪은 사람이 현재 그 일을 겪는 사람에게 가장 덜 공감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런 공감의 한계 때문에 심리학자 폴 블룸Paul Bloom은 세상을 더 낫게 만들려면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어보는방식의 공감력 향상보다는 되레 한발 물러나 객관적이고 공정한 도덕에 근거해 판단하는 이성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한다.26 그는 미래의 위험을 예방하는 정책을 세우려면 공감을 제쳐놓고 생각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기후변화, 고령화 사회 등에 대처하려면 미래의 추상적인 혜택을 위해 현재의 사람들에게 비용을 부과해야 하는데, 대체로 사람들은 막연한 대중의 고통, 미래의 큰 비극보다 특정한 개인, 눈앞의 아픔에 더 공감하기 때문이다.

"네 이웃과 적을 죽이지 마라. 설령 그들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러나 젊은 세대의 강한 거부감의 이유가 단지 공동체와 공공성을 헷갈리는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에 대한 반감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다. 아마 각자 겪어본 공동체의 경험이 대체로 부정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사사건건통제하고 간섭하며 구성원을 존중해주지도 않는, 수긍할 만한 원칙도 없고 권위를 가진 사람 마음대로인 폐쇄적공동체들, 가족에서 학교, 회사에 이르기까지 겪은 부정적 경험이 공동체 일반에 대한 반감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아닐까.
공동체의 억압적 측면을 주로 경험하며 성장한 사람들에게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된 개념이 아니라는 말은 그저 공염불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하고 양자택일의 대상처럼 경험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생각엔 공동체가 작동하는 원리로 공공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공공성이 강화될수록 사생활의 자유는 오히려 커진다"

철학자 새뮤얼 셰플러 Samuel Scheffler가 『죽음과 사후생Death and the Afterlife (국내 미출간)에서 설명한 것처럼 나의사후에도 인간 세계가 지속될 것이라는 암묵적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나은 치료법을 찾고 더 나은 기술을연구하고 더 새로운 것을 창작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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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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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듣고 있으면 상대방에게도 마음이 열리고, 자신에게도 길이 열린다.
김혜진 작가의 책은 불행해서 좋았고 더욱 더 처절한 비극을 기대했는데, 예상과 달리 오랜만에 기분 좋은 해피엔딩 소설을 볼 수 있었다. 상담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난관에 부딪혀 절망의 한가운데 방황하면서 길고양이에게 자신의 비관을 대입해 보기도 하고, 자신의 자존심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주변 사람들과 맞서려 하지만 쉽게 용기를 내지도 못한다. 원래 상담사라는 직업은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주인공 해수의 경우는 ‘조언하는 사람’으로 상담을 했던 사람인 듯하다. 상담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본다면 조금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겠지만, 원래 ‘자기 일’을 ‘남의 일’처럼 냉철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임해수 박사는 한 방송에서 대본에 주어진 대로 잘 알지도 못하는 연애인에 대해 발언하다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발언의 당사자 배우 박정기는 자살을 해버린다. 배우의 자살 원인은 모두 해수에게로 쏟아졌고, 해수는 자신이 다니던 상담센터에서 해고된다. 해고되는 과정에서 해수는 자신의 직장 후배인 조민영이 내부 회의 때 배우의 자살과 관련된 센터 운영의 어려움에 대해 임해수 박사의 사죄가 필요하다고 발언해 충격과 배신에 휩싸인다. 방송을 통해 유명세를 얻은 덕분에 주변의 시선도 그녀를 견딜 수 없게 하고, 사건 이후로 남편과의 잦은 갈등으로 이혼 절차를 밟고 있다.
해수는 해고 이후 매일 집에서 이성목 기자에게 자신의 발언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갔다는 추측성 기사를 쓴 것을 사괴하라고, 상담센터 대표 이한성대표에게는 조민영씨의 발언이 대표와 사전에 논의된 계획이었는지를 밝혀달라고 요구하는 편지를 쓴다. 또 박정기의 아내 노은아 씨에게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결백함에 대해 변명하는 편지를 쓴다. 하지만 모든 편지는 결국 끝을 맺지 못하고, 고민만 하다가 버려진다.
황세이는 해수와 함께 순무라는 길고양이를 돌보는 학생이다. 해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는 길 고양이에게 연민을 느낌과 동시에 동질감을 느낀다. 세이는 같은 심정으로 고양이를 돌보다 만났다. 세이는 부모님이 이혼하고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지만 해수 앞에서 자신의 고통에 대한 내색을 하지 않는 아이다. 세이와 해수는 동네의 캣맘인 마루맘과 함께 순무를 구출하여 병원치료를 받게 해주려고 하지만 사람 손을 타지 않는 순무는 쉽게 잡히지 않는다. 세이와 가까워진 해수는 세이의 학교에 찾아가 세이가 피구대회 연습을 하는 것을 지켜보지만 피구 연습은 반 친구들이 세이를 집단 구타하는 것과 다름 없었고, 상담사였던 해수는 자신이 겪은 일로 대화하는 법을 잊어 그런 세이를 지켜보면서도 아무런 조언을 하지 못한다.

’아줌마, 근데요. 그럼 그냥 듣기만 할 수 있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요.‘(182p.)

어느 날 순무를 거의 잡을 뻔하다 놓친 해수는 자신이 순무를 잡다 생긴 상처에 그만 순무 구출을 포기해 버리지만 세이가 다시 찾아와 다시 구조하기로 마음 먹는다. 쉽게 잡히지 않던 순무는 결국 세이에 의해 구출되고, 병원에서는 순무의 기력이 회복될 때까지 수술을 미룬다.
해수는 박정기의 아내 노은아 씨를 어렵게 만나게 되고 죄송하다며 사과하는 해수에게 노은아 씨는 말한다.

‘전 가끔 그런 생각해요. 요즘 사람들은 다 반성에 미쳐 있는 게 아닌가. …… 이제 와서 어떤 말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요? 해수 씨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잖아요.’(246p.)

세이의 준결승 대회가 열리는 날 세이를 응원하러 간 해수는 학부모 중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의 무례한 호기심을 버티고 있었고, 세이는 대회 도중 억누를 수 없는 감정에 복받쳐 싸움을 벌이고 만다.
세이의 아빠를 만난 해수는 세이 아빠의 하소연을 듣다가 배우의 자살 이후로 자신이 겪은 지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번 폭력 사건은 세이가 상대 학생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말을 하여 아빠를 당황시킨다. 동물 병원에서 기력을 회복한 순무는 수술을 받고, 세이 엄마와 함께 온 세이는 엄마의 허락을 얻어 순무를 입양한다. 그들은 병원에서 나와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세이는 피구는 연습해봤자 결국 시합에서 지고 나면 아무 의미없는 멍청한 스포츠리고 말하자 해수는 답한다.

‘시합은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지는 쪽이 언제나 배우는 게 더 많은 거야.‘(292p.)

해수는 자신이 겪었던 일로 말로 하는 상담이라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대화의 의지도 잃는다. 그런 과정에서 세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세이기 말을 하고 싶어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준다. 결국 세이가 피구는 아무리 연습해도 결국 공에 맞으면 죽는 허망한 것이라는 말에 삶이라는 것도 결국 무너지고 지는 경기이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조언을 스스로에게 해주며 자신이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할 의미를 찾게 된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상대방에게도 마음이 열리고, 자신에게도 길이 열리는 것이었다. 해수와 세이가 모두 자신의 처지를 이입했던 순무도 다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해수도 모든 소송을 철회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전 그런 사람들이 아니에요. 전 그런 사람들과 달라요.
남들과 선을 긋는 말들. 다른 사람들을 멀리 내모는 말들. 결국 자신의 올바름과 정의로움을 도드라지게 하는 말들. 그러나 그녀에게 그 모든 말들은 차이가 없다. 사람들의 말은 그녀가 지나온 시간들을 상기시키니까. 여전히 모든 게 조금도 잊혀지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끈질기게 자신의 이름이 회자될거라는 경고니까. 그건 그녀의 자격지심이고 피해 의식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휘말리고 싶지 않다. 그게무엇이든, 어떤 일이든, 더는 연루되고 싶지 않다. - P15

그녀는 가까운 편의점으로 가서 우유와 닭 가슴살 한팩을 사 온다. 그 작은 생명의 허기를 달래 주기 위해서. 담배꽁초와 비닐, 온갖 쓰레기로 뒤덮인 어둠으로부터구해 주기 위해서. 아니, 그녀는 그 불쌍한 고양이를 빌미로 다시금 자기연민에 빠진다. - P18

그녀는 환하고 넓은 길과 어둡고 좁은 길 사이에 위치한 자신의 집을 돌아본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못한 상태로 상반된 두 세계의 경계가 된 집. 그녀는 정처없이 떠오르는 기억을 따라 걷는다. 그러면서 어떤 기억을, 어떤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지난날의자신을 상기한다. 떨쳐 내려고 할수록 생각은 끈질기게달라붙고, 그녀는 이런 식으로 과오를 깨우치게 하는 시간의 무자비함을 실감하는 중이다. - P34

끝없는 의미 찾기.
그게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어요?
상담사였을 때 그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그것이었다. 그렇게 질문하면 정신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던 내담자들은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런 후엔 다급하게 찾아낸 의미들을 더듬거렸다. 그녀가 보기엔 확실하지도, 분명하지도 않은 이유들이었다. 그녀는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대신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의미들이란 결국스스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위해. 진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그러나 자신이 만들어 내지 않는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 진짜 의미와 가짜 의미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녀는 허상을 좇는 것과 다름없는 의미 찾기 놀이를 그만둔 지 오래다.
결국 그녀는 순무를 돕겠다고 결심한다. 거기엔 어떤의미도, 이유도 없다. 그런 걸 찾고 싶은 생각도 없다. 마음을 정하고 나자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다. - P47

그러나 더 두려운 말은 따로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들이 아니라그녀가 기꺼이 삶을 공유한 이들이 간직한 말들. 그녀가표정과 눈빛을 단번에 읽어 낼 수 있는 가까운 사람들. 조심스러운 표정 뒤에 그들이 감추고 있는 의구심과 안타까움 같은 것들이 그녀를 괴롭힌다. - P47

차라리 자신에게 직접 해명을 요구한다면, 면전에서손가락질한다면, 드러내고 질책을 한다면, 오히려 그렇게 한다면 그녀는 흔해빠진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뻔한 변명이라도 늘어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얼마나 억울하고 괴로운지 항변이라도 할수 있었을 것이다.
N그러므로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예의와품위의 장막 뒤에 숨어 약속이나 한 듯 이처럼 간접적인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실은 그녀를 가장 괴롭힌다는 것을. 그것이 자신들이 가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강력한처벌의 방식이라는 것을.
그때 이미 그녀는 대화하는 법을 잊은 상태였다. 아니, 태주가 말한 것처럼 침묵을 무기 삼아 대화를 거부하기로 작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 속에서 그녀의 말문을 열기 위해 위로하고, 설득하고, 닦달하고, 다그치며안간힘을 쓰던 태주의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 P95

마루맘은 물러서지 않는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입장은 확고하고 나름대로의 명분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누가 옳고 그른지 단정하지 않는다.
판단을 유보하는 일. - P101

사람들은 못마땅한 표정을 거둬들이지는 않지만 말을 더 얹을 생각도 없어 보인다. 원하는 게 바로 그런 굽실거리는 모습이었다는 듯이. 이 문제에 관해서라면 자신들의 허락이 필수라는 것을 인지시키려는 듯이 아니, 그들이 보여 준 건 그녀에 대한 흔해 빠진 동정인지도 모른다. - P103

생명을 지니고 태어난 것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내야 할 숙명이 있다. 그건 선택의 문제가아니다.
그녀가 그것을 모르는 게 아니다. - P106

가슴이 아프다.
동정, 연민, 연약하고 가여운 동물에게 느끼는 흔해빠진 감정.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없다. 자신이 안타까워하는 것이 순무를 사로잡은 고통인지, 그런 고통에 노출된 삶인지, 고통을 견뎌 온 지금까지의 시간인지, 얼마가 될지 모르는 앞으로의 시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것이 순무에 대한 것인지, 자신에 대한 것인지, 그둘이 뒤섞인 것인지도. - P109

그녀는 알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루맘이 이일을 계속하는 이유를. 나아지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는 길고양이의 비통한 삶을 매일 마주하는 이유를. 그 안에서 마루맘이 발견하고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를.
이유 같은 건 없어요.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고양이들도 뭐 이유가 있어서 사는 건 아니잖아요. 태어났으니까사는 거지. 저도 그래요.
마루맘은 끝없이 의미를 쫓아다니는 그녀를 꾸짖듯그런 대답을 하고는 돌아선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면언제든 연락 달라는 말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 P111

교문 앞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말로, 언어로, 아이를위로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있다. 상담사로서 자신이 가졌던 굳건한 믿음의 실체가 이처럼 허약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녀는 어떤 말에도 확신을 가질수 없다. 자신이 한 말이 어떤 식으로 변형되고 왜곡되는지 짐작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진작 깨달아야 했을 말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 P123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선택일 수 있고, 때로는 뭔가를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말을그녀는 삼킨다. 그런 이유로 그녀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아니니까. 이것은 결정이라기보다는 보류에 가까운 선택이니까. - P155

이 남자는 자신이 뭘 안다고 생각하는 걸까. 자신이 하는 말은 뭐가 다르다고 여기는 걸까. - P169

남의 일에 입대는 게 무슨 도움 되는 이야기야. 다 저 좋자고 하는 이야기지.
뭐요? 나 좋자고 하는 이야기라니. 이게 어딜 봐서 나 좋자고 하는 이야깁니까? 그렇게 함부로 말씀하시면 안되죠.
함부로? 여기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누구야? 다 입다물고 잠자코 있는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게 누구야? - P171

아줌마, 근데요. 그럼 그냥 듣기만 할 수 있어요? 아무 말도 안 하고요. - P182

그러나 이 순간은 이 순간일 뿐이다. 그녀가 과거에 겪은 어떤 일의 결과도, 원인도, 이유도 아니다. 시간은곧게 나아가지 않는다. 삶의 모든 순간들이 인과의 직선을 따라가지 않는 것처럼. 그녀 자신이 단 하나의 얼굴로만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 P185

저 애가 소리라는 아이일까. 친구들의 인기를 등에업고 세이를 골탕 먹인다는 그 애일까. 하지만 진실이 그렇게 단순할 리 없다. 세이의 진실과 소리의 진실은 각자다른 방향에서 날을 벼리고 있을 것이다. - P233

이 일로 해수 씨도 타격을 입었겠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테고 해명도 하고 싶겠죠. 자기 입장, 자기 처지. 사람들이 말하려는 건 결국 그런 거잖아요. 난 그런 거, 반성이라고 생각 안 해요.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반성에 더 가깝지 않나요? 이제와서 어떤 말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요? 해수 씨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잖아요. - P245

생각해 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질문들이다. 난생처음보는 사람에게 호구조사나 다를 바 없는 이런 무례한 질문을 퍼붓고 있는 꼴이라니. 게다가 그녀는 이런 질문을할 만큼 고양이의 삶과 습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동물을 돌보는 것에 관해서라면 이들 가족이 그녀보다 훨씬 더 전문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여자는 불쾌한 기색 없이 그 모든 질문들에 성실하게답한다.
따로 계약서 같은 건 안 쓰셔도 돼요? 쓰시는 게 안심되면 그렇게 하셔도 돼요. - P260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흔들림이 없다. 그건 그녀가 자신으로부터 한 걸음, 또 한 걸음 최선을 다해 물러서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연민과 자기비하 더는 그런것들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정말 가능할까. 남의 일을 말하듯 스스로에 대해냉정을 유지하는 게 가능할까.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할 수있을까. - P282

연습은 그냥 연습이잖아. 진짜 시합은 연습한 거랑은다르고, 진짜 시합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거니까.
그녀가 답하고 아이가 되묻는다.
그럼 뭐 하러 연습해요? 아무 도움도 안 되는데요.
진짜 그렇게 생각해?
아줌마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아이가 묻는 건 정말 피구에 관한 것일까. 어쩌면 삶에 관한 것이 아닐까. 아이는 그녀에게 질문을 하는 것일까. 선문답 같은 대화를 통해 교훈을 주려는 것일까.
물론이지. 그렇게 생각 안 해. 시합은 다시 시작하면되니까. 지는 쪽이 언제나 배우는 게 더 많은 거야.
정말 그런가. 진짜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생각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자신이 한 그 말에서 위로라고 할 만한 것을 얻는다. - P292

그래요. 뭐, 그렇게 마음을 정하셨다니 더 말하진 않겠습니다. 한 가지만 말씀드리죠. 박사님, 사람을 너무믿으시면 안 됩니다. 선의라는 건 좋을 때나 선의예요. 상황이 바뀌면 다들 선의를 가장 먼저 버립니다. 예외 없이요. 어떤 경우든 최악을 생각하셔야 해요.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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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94966 2023-01-18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회생활은 사람과 더불어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상대방과의 대화가 가장 중요하지요 상대방과의 대화의 기본은 말하기 보다 먼저 상대방의 말에 귀를 열고 들으면 상대방도 내가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게 되지요 듣기가 대화의 기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금테 안경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희정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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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를 배경으로 사회적으로 차별과 박해를 받던 유대인과 동성애자 두 주인공의 쓸쓸한 내면의식을 보여준다. 같은 차별과 박해를 받지만 유대인과 동성애자의 연대에는 연결점을 찾을 수는 없기에 서로의 처지를 안쓰러워 하지도, 위로를 얻지도 못하고 침울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더욱 처량해지기만 한다.

페라라의 의사이자 동성애자인 파디가티는 강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볼로냐를 오가는 열차에서 대학생 화자의 무리들인 데릴리에로스, 니노, 비안카와 어울리게 되고, 중년의 나이를 뛰어넘어 친구가 된 그들 중 빼어난 외모를 가진 델릴리에르스와 동성관계를 가진다. 화자의 가족들이 리초네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파디가티와 델릴리에르스도 같은 장소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고, 그들의 ‘볼썽사나운 소문’이 점차 퍼져나가던 중, 델리리에로스가 파디가티와의 언쟁 중 폭력을 휘두르고 파디가티의 모든 짐을 훔쳐 달아나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한다.
휴가를 마치고 페라라로 돌아온 화자의 가족들은 ‘인종법’시행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점차 붉어져 불안해진다. 그러던 중 화자는 니노를 만나 델릴리오스가 돈 많은 게이들과 염문을 뿌리고 다닌다는 소문과 인종법에 대해 비난하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만 결국 자신은 이탈리아의 유서 있는 문중이라며 문화담당관일을 제안받은 것을 자랑하며 화자의 처지를 비참하게 만든다.
화자와 우연히 만난 파디가티는 성정체성에 관한 소문으로 병원에서 해고되었고 불결한 유대인인 화자와 동성애자 파디가티는 주인을 잃은 개와 함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동종의식을 공유한 채 페라라 거리를 걷는다. 파디가티와 화자는 점심약속을 잡지만 서로 당일에 연락을 하지 않았고, 얼마 뒤 화자는 신문에서 파디가티의 자살 단신을 본다.

중간에 작가 본인이 유대인 차별과 학살을 자행한 극단의 시대를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 조금 더 소설의 심연에 빠져들 수 있었다. 화자는 아버지가 고위 공직자에게 들은 인종법이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에도 오히려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고독감이 바로 그 순간 한층 더 심해졌다’(142p.)는 불안과 절망의 심리상태를 보인다. 그러던 중 발견한 파디가티의 자살 소식으로 소설은 끝나고, 파디가티 자살이라는 결말은 화자의 미래도 (역사적 사실대로) 어두워 보인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탈리아를 배경이 적막하고 쓸쓿한 감성을 더 증폭시키는 것 같았다.

안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 더는 궁금해하지 않는 것, ‘내버려두는 것’과 같았다 - P20

그는 울화통을 터뜨리듯 기묘한 외침으로 말을 마쳤다. 마치 마지막에 델릴리에르스가 훔쳐간 물건의 목록을 열거하는것이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더 강력한 자부심과 쾌감으로 바꿔놓기라도 하는 것처럼. - P98

그러고는 잠시 뒤에 입을 열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해. 최***...
근 너와 네 가족을 자주 떠올렸거든. 정말이야. 하지만 내가훈수를 좀 둬도 된다면, 만약 내가 네 입장이라면…
"뭘 해야 하지요?" 나는 맹렬하게 그의 말을 막았다. "내가나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순응하는 것?"
"나로서는 네가 왜 그러면 안 되는지 모르겠어."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봐, 내 소중한 친구,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게 훨씬 더 인간다운 거야(그렇지 않았다면, 넌 여기 나와 같이 있지도 않았을 테지!). 왜 거부하고, 왜 맞서야 하지? 내 경우는 너랑 완전히 달라. 지난여름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난 스스로 견딜 수가 없었어. 더는 용납할 수 없었고, 해서도 안 되었지. 어떤 때는 거울 앞에서 수염을 깎는 것조차 견딜 수 없었다면 믿을 수 있겠니?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은 옷을 다르게 입는 것이었어! 하지만 이 모자.…… 이 외투..…… 내 분신이나 다름없는 이 안경이 없는 나를 상상할 수 있겠어? 그런데도 이렇게입는 것이 너무 우스꽝스럽고 기괴하고 터무니없게 여겨지는거야! 오, 그래, 온 곳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이 상황을 말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할 순 없어. 정말이지, 내가 할 수 있는거라곤 아무것도 없다고!" - P124

아버지의 기쁨은 부당하게 쫓겨났다가 선생님의 복귀 명령을 받고 교실로 돌아온 학생의 기쁨과 같았다. 삭막한 복도에영영 추방되어 있으리라는 예상과 달리 갑작스럽게 친구들이있는 교실로 돌아가는 것이 허락된 그 학생은, 벌칙을 면했을뿐 아니라 아무 잘못이 없음을 인정받고 완전히 명예를 회복했다고 기뻐한다. 결국 아버지가 그 아이처럼 기뻐하는 것이옳지 못한 걸까? 나에겐 그렇다. 지난 두 달 동안 내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고독감이 바로 그 순간 한층 더 심해졌다.
총체적이며 결정적이었다. 나는 나의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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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기완을 만났다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죄책감은 우리가 삶을 포기해야하는 사유일까, 계속 살아가야하는 이유일까.

윤주는 김작가와 류재이 피디가 함께 성금을 모금하는 연민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한 17세 소녀이다. 윤주의 아버지는 과거 공사장에서 떨어지는 벽돌에 맞아 허리를 쓰지 못하게 됐고, 그런 자신을 평생 스스로 학대하며 살았다. 엄마는 혼자 가족을 부양하다 어느 날 윤주와 동생에게 피자를 사주고는 말없이 집을 떠났다. 그날 이후로 윤주의 오른쪽 뺨이 부풀어 올랐고, 김작가와 피디는 윤주의 신경섬유종 치료를 위해 프로그램에 섭외했다. 다가오는 명절 기간에 편성을 맞추기 위해 김작가는 윤주의 수술을 예정보다 몇 달간 미루기로 했는데, 그 사이 조직 검사를 다시 한 결과 윤주의 혹은 심경섬유종이 아닌 악성 종양으로 판정이 났고, 김작가는 자신의 계획으로 윤주의 증세를 키웠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방송을 도피하듯 관두고 류재이 피디의 청혼도 거절한다 .

로기완은 북한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5살 때 죽고 엄마와 함께 탈북해 연길에 체류한다. 중국 공안을 피해 고단한 삶을 이어오던 엄마가 교통사고로 즉사하고, 로는 자신의 신분 때문에 죽은 엄마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친척을 통해 죽은 엄마의 시신을 판 돈으로 벨기에로 향한다. 로는 호스텔에서 지내며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지만 자신이 북한 주민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해 아무런 구제를 받지 못하고, 노숙자가 되어 구걸을 하며 지내다 어느 날 경찰서에서 깨어난다. 경찰은 언어가 통하지 않고 어린 아이처럼 보이는 로를 고아원으로 보내고, 그곳에서 한국어 노래를 흥얼거리는 로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챈 원장 엘렌은 로를 난민신청국으로 보내 준다. 심문실에서 로는 북한 출신 벨기에 의사 박을 만나고, 박은 통역과 로의 신분을 검사하는 과정에서 로가 북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그를 도와 북한 국적을 인정받게 하고 난민 지위를 얻어 준다. 정식으로 신분을 갖게 된 로는 중식당에서 일하며 동료 필리핀 여자 라이카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라이카는 불법체류 단속에 걸려 외국인 수용소에 감금이 되었다 도망쳐 나온다. 로는 불법체류자들에게 호의적인 영국으로 라이카를 도피시키고,자신도 자신의 난민 지위를 모두 포기한 채 라이카를 따라 영국으로 떠난다.

박은 평양 출신으로 월남 후 서울에서 의대를 다니다 정치사건에 연루되어 도피성 유학을 떠난 후 벨기에에 자리잡은 의사이다. 박은 김작가가 벨기에에서 로기완의 인터뷰를 맡았던 잡지의 기자를 통해 알게 되었고, 박은 로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는 김작가에게 자신의 아파트를 빌려주며 로가 남긴 일기장을 건네주어 김작가가 로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게 해준다. 김작가는 로기완의 일기를 보며 그가 머물렀던 장소들을 찾아다닌다. 박은 김에게 자신이 진료했던 환자 중 하반신 마비가 된 환자가 원하던 안락사를 해주지 않아 3년 뒤 그 환자가 자살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이 어쩌면 그 환자에게 3년간의 고통의 시간을 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말기 간암 환자에게 결국 안락사를 시켜주고 의사생활을 접었다는 이야기를 한다. 김은 그 말기 간암 환자가 박의 아내라는 것을 눈치챈다. 김도 윤주에 대한 자신의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는 상황에서 박이 짊어지고 있는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저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살아야 했습니다.’(124p.)

김이 로를 찾아 벨기에로 떠날 결심을 한 로의 문장은 로가 가지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김은 벨기에에서 로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로가 처절하게 살아남아야만 했던 과정을 따라가며 자신의 죄책감을 지고서라도 살아가야하는 이유를 찾는다. 그런 과정에서 박이 자신의 과거로부터 비롯된 죄책감이 로에게 공감하며 헌신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타인에게 진심으로 호의를 다하는 모습이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이유라고 생각한 듯하다.

박은 뒤늦게 로의 자취를 따라갈 시간을 준 뒤 김에게 현재 로의 영국 주소를 알려주었고, 윤주는 종양 제거 수술을 하고 귀까지 절단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김은 윤주의 잘린 귀를 평생 자기가 짊어질 죄책감으로 받으들이고, 영국으로 향해 로와 라이카를 만난다.

얼마 전 이기호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진정한 환대라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같은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이,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진정 서로를 환대하고 타인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답을 얻게 된 것 같다.

우리의 삶과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단서들이란 어쩌면 생각보다 지나치게 허술하거나 혹은 실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의도와 관계없이 맺어지는 사회적 관계들, 관습 혹은 단순한 호감에 의해 만들어지는 수많은 커뮤니티, 실체도 없이 우리 삶의 테두리를제한하고 경계짓는 국적이나 호적 같은 것들은 혼자가 아니라는위로는 줄 수 있겠지만 그 위로는 영원하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다. 회사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프린트된 명함이나 우리의 출생과죽음, 결혼과 건강을 기록하는 관공서의 수많은 서류들도 개인의절대적인 존재감을 증명해주지는 않는다. 지갑 속의 기념사진, 일주일 단위로 약속과 일과를 적어내려간 수첩, 이국의 어느 공항 출입국심사대에서 경쾌한 소리와 함께 찍힌 여권 속의 스탬프들, 어딘가로 들어갈 수 있는 녹슨 열쇠나 읽고 있던 책의 접힌 페이지같은 것들 역시 우리 삶의 부분적인 단서는 될 수 있을지언정 생애전체를 관통하지는 못한다. 심지어 아침 7시면 눈이 떠지고 저녁 6시가 되면 온몸이 피로해지는, 씨스템에 길들여진 몸의 리듬마저변하지 않는 소속감을 약속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나무둥치에 주저앉은 날개가 젖은 새처럼하늘로 날아갈 수도 땅으로 떨어질 수도 없는 순간순간을 살고 있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 P10

육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기품과 자존심을 지키며 고집스럽게 늙어왔다는 인상을 주었다. 쓸데없는 감정적인 소모나 의도하지 않은 상처로부터 아주 오래전에 해방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검은 테의 두꺼운 안경 너머 눈동자는 고독해 보였다. 그는내게, 안타깝게도 그 탈북인은 1년여 전 브뤼쎌을 떠났고 현재는영국 런던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안타깝게도,라고 그는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안타까움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괜찮다고, 지금 당장 그 탈북인을 만나지 않아도 상관은없다고 대답했다. 그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판단할 수 없어 호칭은생략한 채였다. 기자는 그를 박사님이라고 불렀으나 어쩐지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 호칭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 P20

이토록 풍요로운 세계 저편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난하고 기근에 허덕이는 거대한 공동체가분명 하나의 국가로 존재한다는 것이 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 그 세계로부터 왔다는 사실은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머나먼 연회장을 초대장도 없이 찾아온 이상한 방문객이 된 것처럼, 고향을 떠올린 그 순간 로는 스스로가 이유없이 부끄러워졌다. - P40

유럽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집시다. 집시들은 갓난아기를 안고 구걸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언젠가여행책자에서 읽은 적이 있다. 사람들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데 굶주리고 추위에 떠는 아기만큼 효과적인 유인책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거리를 걷는 대부분의 브뤼셀 사람들은 아기가 유발하는 동정심 따위엔 이미 면역이 되어 있는 듯 좀처럼 집시여인의 때 묻은종이컵에 동전을 던져주지 않는다. - P44

자식들을 위해 부엌을 드나들 수도 없었던 윤주의 아버지는 자신이 아무쓸모없는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 자기학대적인 혼잣말을 반복했다. 무려 2년 가까이 윤주의 아버지는 형체도 없는 자기 앞의거대한 괴물과 싸워야 했던 것이다. - P45

마음이 아픈 사람은 어디든 떠날 곳이라도 있지만 몸이 아픈 사람은 병원 외에는 갈 곳이 없다는 걸그때 처음 알았다. 누구나 아는 당연한 사실인데도 솔직히 가슴으로는 깨닫지 못했다. - P49

출연자의 고통을 어떻게든 전달해보려는 진심이 느껴졌다고, 재이는 그날 그런 말도 했었다. 드디어 써브 작가에서 벗어나 메인작가가 되었다는 들뜬 마음뿐이었으므로 나는 그가 채워준 소주잔을 든 채 열심히 고개만 끄덕였을 뿐, 나의 진심 같은 건 나 역시 모르는 일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진심인지 아닌지를 헤아리고 진심이 아니라면 왜 그리되었는지 곰곰이 성찰하면서 진심이 아님에도 기계적으로 대본을 써대는 자세를 반성하는 시간은 빡빡한 방송 스케줄 속에선 향유할 수 없는 우아함이었다. 눈 뜨면 촬영날이었고 밤새도록 쓰고 좀 쉬려고 하면 편집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출연자들은 수시로 연락을 해왔고 현장에서는 늘 돌발상황이 생겼으며 피디들은 내가 쓴 대본을 흔들며 "좀더 극적으로!"를 외쳐댔다.
방송국에서 4년여 동안 스크립터와 써브 작가로 일하며 나는 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무엇을 했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쉴새없이 방송용 대본을 썼다. 한번 전파를 타고 난 후에는 누구도 다시는 들춰보지 않는 종이뭉치 속에서 내 이십대가 소모됐다. 일은 더없이 단순했지만, 일 이외의 것들은 늘 피곤했다. 어쩌면 나는 그 4년여 동안 일자체에 몰두했다기보다는 일 이외의 것들을 견디기 위해 일을 이용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견디고 또 견뎠다. 하루종일 책상만 지킨 채 출연자 섭외뿐 아니라 장소 헌팅까지 작가들에게 일임하던나태한 피디와 새벽에도 수십통씩 전화를 해오던 히스테릭한 메인 작가, 택시비 대기엔 빠듯한 월급 받는 거 뻔히 알면서도 굳이막차시간 지날 때까지 붙잡아놓고는 같은 말만 반복하던 상사들을 나는 견뎌야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생리대 심부름을 시키던 선배 작가와 프로그램 종방 때쯤 되면 여기저기 눈치 보며 줄대기에 바빴던 동료 작가들도 내가 견뎌내야 하는 목록에 포함됐다. 다른 사람의 기획안을 거의 그대로 베껴서 제출하던 사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옆사람을 깎아내리던 사람, 사실 확인도 안된 소문을 가공하고 부풀리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던 사람……… 그 모든 사람들을 견디고 지나오면서 나는 제법 성공적으로 사회화되었다. 적당히 타성에 젖어 있고, 열정은 근거없는악의나 질투에 쏟아붓고, 책임을 두려워하고, 그 누구도 절실하게필요로 하지 않는, 충분히 자족적인 사람. 그러면서 늘 결여되어 있는, 잘 웃지도 울지도 않는 메마른 사람. 몇개의 프로그램을 거치는동안 내게 진심이란 단어는 자연스럽게 망각의 목록에 포함되어갔다. 그래서 5년 전의 나는 진심 운운하는 피디의 말에 부끄러움도느끼지 않았다. 그가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은 출연자의 고통은 어떻게 해도 전달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일종의 부정문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P51

언젠가 재이는 신이란 자신과 세계를 속이면서 살아 있음을 영속시키려는 나약한 자들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소아암에 걸린 딸을 위해 기도밖에 할 줄 모르는 이십대 초반의 어린 엄마를 촬영하던 때였다. 그때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원한 삶이 아니라 순간적인위로가 필요해서 신을 믿는 것이라고 반박했었다. 만약 그렇게라도 위로받을 수 있다면 신은 그것만으로도 존재가치가 있는 것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하지만 알 수 없었다. 의사로부터감히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그 뜻밖의 소식을 전해들은 후로 내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이었고, 내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이란 애초에 이토록 불운한 삶을 하필이면 윤주에게 배당해놓은 신에 대한야속함, 분노, 그뿐이었다. - P56

그때 내 안에서 뭔가 쾅, 하고 무너졌지. 나는 그환자에게서 약물로 편히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 대신 3년 동안의 엄청난 스트레스와 죽음 직전까지 이어졌을 극한의 고통을제공한 셈이오. 그때 처음으로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회의를 느꼈던 것 같아. - P78

윤주에게 내가 걸었던 희망은 윤주의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는 것, 그래서 나 역시 그애의 그 미워하는 마음만큼 서운해하며동시에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는 그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그 진실마저 외면하는 순간, 내 남은 생애는 이가 갈릴 만큼, 지극히 인간적으로 영원히, 언제까지고 영원히, 스스로를 미워하고 또 미워해야 하는 나날뿐일 테니까. - P97

이게 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한 사람의 영혼이, 그 사람이 살아온 숭고했던 시간들이 잔인하게 병든 육체에 갇혀서 서서히 증발된다는 말이오. 그것도 끔찍한 고통 속에서. - P119

저는 귀하께 로기완의 글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보냅니다. 그는 비록 북한 신분증을 갖고 있지 않지만, 저는 그가 북한 사람임을 확신합니다. 저는 우리가 그를 돕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사명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외면해서는 안되는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무적이고 정치적인 방식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그를 도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적인 문제에몰두하고 있는 동안 놓치게 되는 것은 개개인의 고통이며, 이것이 우리의 비극임을 부디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 P149

로와 박의 유대는 로가 푸아예 쎌라를 나와 중국 식당에서 일하며 중국인, 베트남인, 파키스탄인과 함께 아파트를 빌려 생활하는동안에도 이어졌다. 더이상 보고서 같은 건 쓰지 않아도 되던 때였지만 언제나 박이 먼저 연락해 로의 아파트를 찾아갔다. 로에 대한박의 관심과 애정은 박 역시 모친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뼈저린 회한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리고 또하나, 어머니의 죽음이 자신 탓이라고 여겼던 로의 죄의식은 아내의 죽음을 도울 수밖에 없었던 박에게는 절대적으로 공감하는 영역이었을 터이다. 바로 그죄의식이 박과 로를 이어주는 공통의 상처였다. 박은 로를 외면할수 없었다. - P156

"나는 늙었어요, 김작가 늙었다는 말의 의미를 아오? 감정이 다사치가 된다는 뜻이에요. 남은 시간이 빤하니 저절로 그리되어가는 거요. 관용이라면 관용이고 체념이라면 체념이겠지." - P171

네? 묻는 윤주에게 나는 런던에서 그 사람을 만나고 나면 곧바로서울로 돌아가겠다고, 이번엔 늦지 않겠다고, 너무 늦어버려서 네가 나를 가장 필요로 할 때 또 그렇게 외면하며 지나가버리는 일은없도록 하겠노라고 빠르게 말한다. 윤주는 풋, 하고 웃는다. 그러고는 자신이 찍은 재이의 사진을, 개중 멋지게 나온 것들만 골라서내 이메일 주소로 보내겠다고 일러준다. - P182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는 박에게 윤주 이야기를 한다. 살아 있는한 계속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부정하는 고통 역시 살아가는 과정에 포함되는 이상한 아이러니를 이미 알아버린 그 열일곱살 소녀에 대해서. 박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긴 하지만 서울에서 방송국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과정에 나의 책임은 없다는 식의 부질없는 위로는 해주지 않는다. 자세한 것을 묻지도 않고 섣부른 판단도 하지 않는다. 박은 그저 묵묵히 들어준다. 내 이야기가 다 끝난 후에야 박은 조심스럽게 말할 뿐이다.
"때로는 미안한 마음만으로도 한 생애는 잘 마무리됩니다." - P183

살아 있는 나를 긍정하게 된 과정을 적은 이야기, 한 달 동안의 여정을.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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