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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병운 지음 / 민음사 / 2022년 9월
평점 :
그냥 책을 보면서 작가의, 아니 어느 누군가의 일기를 훔쳐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안책방에서 했던 ‘아아공필‘ 북토크에 참석했는데, 당시의 경험까지 책에 나와 있는 것을 보니 이 사람의 진솔한 편지를 받은 기분이랄까.
독특한 경험을 서술하는데 느껴지는 보편성은 결국 세상에 다를 게 없다는, 차별이 차이를 만들 뿐이라는 것을 다시 새겨본다.
나는 성소수자를 연민하고동정하는 감독의 시혜적인 시선과 선민의식이 거북했고, 내가 끝내 지켜야 하는 것이 퀴어로서의 자존심인지 아니면 배우로서의 성장 기회인지 알 수가 없어 갈팡질팡했다. - P11
어째서 당신이 우리의 스피커가 되어야 하는가. 잘알지도 못하고 잘 알 수도 없으면서 당신이 게이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마 다음에는 트랜스젠더인가. 다다음에는 퀘스처닝에 인터섹스, 무성애자이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기만 하면, 선의와 정치적 신념을 담보하기만 하면 당신의 발언은 정당해지는가. 당신이 성소수자를 도구화해서 재생산한 편견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지는가. - P19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으나 그게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유일신 같은 감독님이시고 나는 발에 채는 일개 배우일 뿐이라고, 그런 하극상은 나 같은 무명에게는 허락되지 않으며이건 예의나 도의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 P21
남들과는 다른 욕망을 지녔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신체에수치심과 모멸감을 적립해 온 사람이라면, 반복되는혼란과 부정 속에서도 기어코 규범을 거스르는 쾌락쪽으로 향하는 자신에게 진저리쳐 본 사람이라면, 제아무리 벽장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한들 이 소설에서 자신의 어떤 시절을 겹쳐 보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 P114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이지면이 어떤 성소수자들의 희생으로 비로소 가능해진 미래라고 생각하는 게 결코 무리는 아니리라 확신하면서. - P123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고 결심했으면서, 섣불리 연민하거나 동정하지 말자고 다짐했으면서, 나는 어느새 그걸 또 잊고 있었다. - P209
그러니까 상황은 뻔했다. 이쪽은 저쪽에 끌리나 저쪽은 이쪽에 끌리지 않는 것. 이쪽은 갈급하나 저쪽은 아쉬울 게 없는 것. 나는 여러 번에 걸친 곁눈질로두 사람을 유심히 살폈고, 물감이 번진 듯한 요란한무늬의 남방을 입고 있는 내 쪽의 남자보다는 집에서잘 때나 주워 입을 것 같은 흰색 티셔츠에 밤톨 같은머리를 하고 있는 건너편의 남자가 훨씬 더 일틱해 보인다는 것을 확인했다. 건너편의 남자는 시종일관 느긋하고 편안해 보였는데, 아무래도 자신의 남성성을부풀리거나 연출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외형적 조건이 남자를 이따금 미소 지으며 대답만 해도 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듯했다. 그래 봤자 게이이므로그건 정말이지 같잖은 기득권이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그런 사람에 끌렸고 그런 사람으로 비치길 원했으며 그게 잘 안 돼서 힘들었다.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나는 누군가의 마음에 들고자 나를 가장하는 일에 완전히 지쳐있었다. 남자다운 분 선호합니다, 여성스러운 분 죄송합니다, 운동하는 분이 좋습니다, 끼순이는 사양합니다라고 적혀있는 데이팅앱 프로필 문구를 볼 때마다 다들 참 양심도 없다고 혀를 차면서도 자꾸만 내 모습을 점검하게 됐고, 어쩌다 연이 닿아 누군가를 만날 때도 진짜내 모습을 들켰다가는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불안에시달렸다. 게이들이 선호하는 매력 자본이 부족한 사람. 선섹스 후연애라는 이쪽 세계의 작동방식에 부적합한 사람. 너무 많은 거절과 너무 잦은 낙담에 어느덧 자존감이 바닥나 버린 사람. 그게 나였다.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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