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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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천문학자가 과학자로서 사는 삶에 대한 에세이. 제목에서 역설하듯이, 천문학자에 대한, 과학자에 대한 일반인의 선입견을 바로 잡아주는 부분이 많다.
대부분의 삶이 그렇듯, 대단히 드라마틱한 계기가 있거나 목적의식이 있어서 천문학자가 되었다기 보다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자신을 천문학자로 만든 과정을 솔직하게 적어 인상깊었다.
또한 여성으로서, 여성 과학자로서 살아가는 고된 장벽들과,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비겁함을 성찰하는 부분, 이소연 과학자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는 글(<최고의 우주인 부분)은 꽤나 감동적이었다.
이 책이 이과생의 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감상적이다. 글의 면면엔 저자의 문학적 소양까지 엿보이는데, 저자는 본인을 이과형 인간이라고 칭하지만 내가 보기엔 상당히 전인적인 완성형 학자로 보였다.
나도 학창시절 지구과학에 깊이 매료된 적이 있었고, 지금의 동반자도 천문학 동아리에 나갔을 만큼 밤하늘과 관련된 소소한 인연이 있다. 예전엔 잘 알던 내용인데 지금 다시 보니 천문학에 대한 강의나 천문학사 내용은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아 이해하기 힘들었다. 특히 무엇보다 이 책이 좋았던 건 저자가 천문학에 대한 관심을 구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그래서 그런지 저자가 책에서 비판했던 ‘코스모스‘와 많이 상반된다.) 천문학에 관심이 없고, 앞으로 관심을 가질 계획이 없더라도,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는 과학자의 소소한 일상이나 감정을 느낄수 있는 책이다. 그렇지만 나는 천문학에 대한 관심을 배우자와 함께 다시금 높여볼 계획이다. 천문학자처럼 데이터를 분석할 능력은 없지만, 다시 밤하늘을, 별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생겼다.

일기 속에는 두려워하는 내가 있다. 졸업할 수는 있는 걸까 두려웠고, 졸업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웠다. 어쩌면 졸업 후의 더 큰 두려움을 유예하기 위해 수료생의 고뇌에 천착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도중에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떠날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남은 채 버텨내는 데도 역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나를 노련한 뱃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 - P31

대학이 수행하고 있는 기능이란 어리둥절한 채 성인이 되어버렸으나 실상은유예된 청소년에 지나지 않는 이들의 귀중한 스무 살 생명표를 꼭 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해 태어난 국민 중 팔 할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사회. 학생들은 대학에 학문을 배우러 오지 않는다. 초등학교 다음 중학교에 갔고, 중학교 다음 고등학교에 간 것과 같이 고등학교를 마쳤으니 대학에 진학할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학비보다 열 배는 비싼 등록금이요, 모두가 입어야 하는 교복 대신모두가 가져야 하는 스펙을 등에 업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젊음은 싸구려 술과 술값보다 비싼 커피와 크고 작은 성추행과 미필자조차 향유하는 선배들의 군대식 갑질, 전공과목 들을 시간을 뺏는 교양 강의와 대학생다운 교양을 쌓을틈을 주지 않는 전공 강의, 토익 시험과 한국사 시험과 각종컴퓨터 자격증과 크고 작은 기업의 공모전과 인턴 경력에소모된다. 과제로 수많은 보고서를 작성하지만 제대로 된글쓰기를 연습할 기회는 별로 없다. 대신 비문으로 A4 용지다섯 장을 채워내는 끈기, 남의 것을 베끼되 표절 여부를 자동으로 검사하는 프로그램에 걸리지 않게 몇몇 표현을 바꿔치기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 비용과 시간과 어처구니없는 문화와 그 젊음은 대체 무엇을 위한 제물인가. - P55

문제는 그다음이다. 내 논문과 문제의 인터뷰에 대해 비교적 단순명료한 기사들이 몇 차례 나간 뒤에는 다른 종류의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천문학을 선택하게 된극적인 이야기와 ‘업적‘을 이룬 경험을 공유해 다른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달라나. 나는 연구 과제가 끝나면 급여도 경력도 바로 단절이기 때문에, 과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외에도 먹고살기 위해 다음, 또 그다음 연구과제를 수주할생각에 머리가 복잡한데, 한 해에도 몇 번씩 정규직 채용공고에 원서를 내고 탈락하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그런 상황이 결코 누군가에게 희망적일리 없다. 내가 이 직업을 포기하지 않은 채 정규직으로 취직하고, 내가 기여한 연구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완수되고, 후배 천문학자들의 연구를 도와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다음에라야 과거의 고군분투가무지갯빛 희망으로 물드는 것 아니겠는가.
나를 더욱 곤란케 하는 것은, 내가 어떤 대단한 계기로 천문학을 선택한 것도, 어릴 때부터 오매불망 천문학자가 되기만을 그리다 마침내 꿈을 이룬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누구에게나 각자 인생의 흐름이 있는 것이고, 나는 삶을 따라 흘러 다니며 살다보니 지금 이러고 있다. 어느 분야로 가든 대학원은 다닐 생각이었기 때문에, 평행우주 속 나는 지금쯤 생물학자거나 영문학자거나 고고학자일 수도 있다.

우주 탐사에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데, 당장 상업적으로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아이템은 아니기 때문에 대기업이돈을 대는 일은 드물다. 정부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그러려면 정부에 우주 탐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그것이 국가에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비전을 제시해주는 자문단이 필요하다. 그 조언을 바탕으로 정책을 만드는 전문가, 이를 승인하는 최고결정권자와 국회, 그리고 그 실무를 담당하는 수많은 공무원이 현장을 방문하고, 공문서를 작성하고, 예산 집행 내역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낸 세금을 기꺼이 우주 탐사에 쓰도록 허락하고, 공감하고, 지지하고, 애정 어린 눈길로 지켜봐주는 국민이 필요하다. 당신이 꼭 필요하다. 천문학자가 아니라도 우주를 사랑할 수 있고, 우주탐사에 힘을 보탤 수 있다. 우주를 사랑하는 데는 수만 가지방법이 있으니까. - P180

많은 사람이 놓쳤지만, 우주인 프로젝트의 명목상 목적은 우주정거장에서의 과학 실험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우주 실험을 수행할 사람이 마침 학계에서 과학 하던 사람이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행운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 P100

우주 비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소연은 수백 차례의 대중강연과 인터뷰를 하며 애초 계약했던 의무기간의 갑절 되는 동안 우주인으로서의 소임을 수행했다. 그러나 우주인 프로젝트는 일회성 사업이었고, 앞으로도 우주인 이소연이 할 만한 일은 11일간의 비행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우주에서 돌아온 후 4년간 그랬듯이. 그렇다고 몇년 만에 다시 DNA를 다루는 공학박사 이소연의 길로 돌아가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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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의 집
사샤 나스피니 지음, 최정윤 옮김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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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외딴 마을 레 카세에 범죄자 사무엘레가 돌아온다. 사무엘레는 에세드라의 손자이며 니코데모에게 체스를 사사받은 제자이고 레 카세로 돌아와 마리오의 상점에서 일하는 엘레오노라와 사랑에 빠진다.
에세드라는 과거 레 카세의 부호 이사스티아 대령의 하녀로 이사스티아 대령의 살림을 총괄하는 우두머리였다. 대령과 결혼해 재산을 차지하려던 미모의 신입 하녀인 아델레 첸티니는 살림의 지휘권을 차지하기 위해 계단에서 에세드라를 굴러 떨어지게 만들고, 대령의 딸인 키아라 마리아까지 절벽에서 떨어뜨려 죽여버린다. 대령과의 결혼이 계획대로 이루어질 무렵 대령의 수행비서인 마르첼로의 아이를 임신하고, 에세드라의 결혼 선물에 같이 전달되어 온 전갈에게 물려 유산이 되어 혼전, 혼외 임신이 들통나 버린다. 충격에 빠진 이사스티아 대령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물려줄 후손을 만들길 포기하고 파리로 가 모든 재산을 탕진해 버린다. 아델레는 대령 집안의 모든 하인들을 실직자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으며 대령의 집에서 쫓겨 나온다. 그러나 아델레는 레나토가 당첨된 복권을 줍게 되고, 그의 당첨금으로 다시 부유한 삶을 살면서 에세드라에게 복수할 날을 꿈꾸지만 에세드라가 복수하기 전에 먼저 죽어 버리고, 그의 손자인 사무엘레에게 복수할 날을 꿈꾸며 산다. 사무엘레가 실종된 엘레오노라오 함께 있다는 것을 경찰에 신고한다.
사무엘레를 사모하는 마리엘라는 디보의 아내이자 아킬레, 레나토 등 동네 여러 남자들과 불륜을 일삼는 문란한 여자다. 레나토 스타촐리는 동네 담배가게 주인인데, 그는 충동적으로 구매한 복권이 운 좋게도 당첨된다. 누구에게도 복권이 당첨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자신만 알고 있는 비밀로 간직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복권을 잃어버린다. 자신의 불륜녀인 마리엘라를 의심하며 디보의 행색도 유심히 살피지만 그들이 복권 당첨금을 받은 정황을 찾아내지는 못한다. 아델레가 복권을 주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평생 복권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과 열패감에 빠져 우울하게 지내다 아내인 카테리나마저 그를 떠나버린다.
에세드라는 남편 마타피리와 함께 아킬레 세랄리니의 부모님이 판 아래층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에세드라의 딸 키아레타가 외국인과 교제하다 아이를 출산하고 에세드라에게 남겨두고 도망을 갔는데, 그 아이가 사무엘레다. 아킬레 세랄리니의 쌍둥이 동생 안졸리노는 동성애자로 스위스 출신의 애인에게서 많은 재산을 받아 쌍둥이 형 아킬레보다 부유한 삶을 살았다. 아킬레가 디보를 폭행해 치료비를 물어주다 모아둔 돈을 다 써버리자 안졸리노는 형에게 사줬던 비안차르디 집의 지하실을 팔라고 하지만 이를 거부한다. 안졸리노가 아킬레와 마리엘라가 바람을 피며 주고받은 쪽지를 지하실에 있던 책에서 발견해 아킬레를 협박하자 아킬레는 안졸리노를 죽여버리다. 안졸리노의 죽음을 자신이 죽은 것 마냥 위장해 버리고 자신은 안졸리노로 분장해 살아간다. 아킬레 세랄리니는 사무엘레가 돌아오고 난 후 아래층에서 엘레오노라와 함께 있는 사무엘레를 몰래 지켜본다.
조반나 지난네스키는 뚱뚱보 조반나로 불리는 노처녀이다. 과거 알프레도라는 남자를 사랑했는데 친구 발렌티나 코케티가 알프레도와 바람피는 걸 목격하고 알프레도에 대한 마음을 접는다. 그러다 알프레도가 갑작스럽게 죽게 되고, 자신을 찾아와 알프레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코케티를 끔찍하게 폭행하고 감금해 버린다. 조반나의 아버지 가스파레는 어느 날 잔인하게 학대 당해 사람의 형체를 잃은 코케티가 사슬이 풀려 지하실에서 나온 모습을 보고 놀라 심장마비로 죽어버린다.
독일군인 아미코 프리츠는 부대가 철수하던 마지막 날 사창가에 머물다 시간을 놓쳐 마렘마에 남게 된다. 프리츠를 숨겨 준 니코데모의 어머니는 전쟁에서 자신의 아들을 잃은 현실을 부정하고자 프리츠를 니코데모로 만든다. 독일식 억양을 고치게 하고, 니코데모처럼 염색을 시키고, 부러진 앞니마저 똑같이 만들기 위해 망치로 이를 부셔 버리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니코데모가 전쟁 후에 조금 정신이 이상해진 것이라 생각했고, 프리츠는 큰 어려움 없이 니코데모로 변장하여 살아간다. 그러다 술집에서 사람들이 체스를 두는 것을 보고 체스에 빠지게 되고, 어느 프로팀에 스카웃이 돼 체스 챔피언의 자리까지 오른다. 은퇴 후 사무엘레에게서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본 니코데모(프리츠)는 사무엘레에게 자신의 체스 기술을 전수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사무엘레가 사라진다. 이후 TV에서 사무엘레가 흉악범으로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충격에 빠진다.
레 카세 사람들의 엽기적인 행각들을 전부 꿰뚫고 있는 사람들은 근친상간으로 난쟁이 농아로 태어난 피에라와 줄리아노다. 이들은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이 자신들을 왕처럼 대접해주며 탑으로 올라가는 놀이를 즐겼는데, 이는 사실 난쟁이 남매를 동네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미신의 재물로 바치는 행위였으며, 어느 날 전설대로 탑에 번개가 내리치고 피에라와 줄리아노는 청력을 얻게 된다. 자신들이 청력을 회복한 것을 절대 티를 내지 않고 살아가기로 한 피에라와 줄리아노는 동네 사람들이 자신들이 귀가 안 들리는 줄 알고 털어놓는 비밀들을 전부 기록해서 책을 출판하고,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된다.
수산나 코키가 운영하는 벨솔레호텔에서는 레 카세 사람들의 불륜이 벌어지는 장소이다. 수산나는 눈치껏 예약자들의 시간을 조율하며 마을 사람들의 불륜을 관찰하는 쾌감을 즐긴다. 벨솔레 호텔은 과거 부호 쿠티니 변호사의 저택이었다. 마르크 팔라체시의 아버지는 쿠티니의 권유로 별장으로 이주해 별장의 집사가 되고, 쿠티니의 아들 라니에로와 마르크는 신학교를 다니며 친해지지만 라니에로가 마르크에게 기습적으로 키스를 한 이후로 관계가 소원해진다. 전쟁이 끝나고 쿠티니의 부패 스캔들이 터지자 쿠티니 가족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수산나 코키가 별장을 헐값에 매입해 호텔로 리모델링한다. 마르크는 자신의 바람대로 외과 의사가 되었고, 호텔 오픈 파티에서 마르크를 만난 라니에로는 마르크에게 커밍아웃을 하며 자신의 감정을 고백한다.
오만과 편견을 보며 자신만의 사랑을 꿈꾸던 엘레오노라는 공황장애가 있는 아버지가 자신의 책(오만과 편견)을 버려 집을 뛰쳐나온다. 넨초니 집안의 제재소에서 일하는 알바니아 남자들의 차를 히치하이킹하여 그들의 숙소에서 살림을 하고, 그들의 우두머리인 보리안의 여자가 된다. 하지만 엘레오노라는 숙소에서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아 마리오의 상점에 일을 나가기 시작하고, 밖에서 일하는 엘레오노라가 내키지 않았던 보리안과의 갈등이 커져간다. 그러다 사무엘레가 등장하였고, 보리안이 자신을 하루 동안 감금시킨 이후 엘레오노라는 보리안의 숙소에서 도망쳐 사무엘레의 집으로 들어간다.
사무엘레는 에세드라가 죽고난 후 레 카세를 떠났다.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며 클라라라는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 주변의 다른 남자들에게 강한 질투심도 느낀다. 클라라는 사무엘레가 들려주는 레 카세 마을에 흥미를 가졌다. 둘이 코르시카로 휴가를 가는 첫 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적은 책의 가제본을 보여준 클라라는 코르시카를 여행하는 내내 라 카세에 대한 화재를 주고 받으며 지내다 갑자기 사라지고, 이틀 뒤 바위에 낀 변사체로 발견된다. 사무엘레는 평소 강한 질투심을 보였다는 주변 사람들의 증언대로 용의자로 의심받지만 명확한 증거가 없어 가택 구금만 내려지고, 레 카세로 돌아와 클라라의 분위기를 닮은 엘레오노라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엘레오노라와 오토바이를 타고 도주를 하던 사무엘레는 레 카세의 절벽으로 떨어져 큰 부상을 입고 며칠 뒤 깨어나 엘레오노라를 찾지만 형사들과 함께있는 마르크에게 엘레오노라는 다 환상일 뿐, 너는 우라니오에서 레 카세로 도망치다 사고가 난 것이라는 얘기를 듣는다.
레 카세는 폭풍으로 도시가 침몰하고, 엘레오노라와 사무엘레는 꿈에서 서로를 만난다. 사무엘레는 자살을 하고 엘레오노라는 혼수상태에서 숨을 거둔다.

어마어마한 등장인물과 각각의 인물들이 가진 사연이 다들 드라마틱해서 수십개의 단편을 모아놓은 작품집 같다. 소설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인물들은 어느 날 갑자기 레 카세로 돌아온 에세드라의 손자이자 흉악범으로 언론에 나타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사무엘레와, 제재소의 일꾼들과 동거를 하며 마리오의 상점에서 일하다가 실종된 엘레오노라이다. 이들과 연관된 조연급 인물들은 정리를 해 보았지만 그 외에도 연결고리가 하나씩 이어져 있는 제재소집안의 아들 필리포 넨초니, 점쟁이 그라치엘라, 점점 미쳐가는 마리오의 아내 아델라이데, 돈 라우로 신부, 아킬레의 아내인 소니아, 두에포르테 바의 바리스타 토니노(마소),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 생활하는 도메니코 피오라니 가족들, 복권에 당첨되고 죽어 집안에 돈이 숨겨져 있을 거라는 비안차르디 가족의 집,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살리니 의사 등등의 엽기적인 이야기가 풍성하게 들어가 있다.
한 마을의 그로테스크한 사연들을 엮었다고 볼 수 있지만, 우리가 이런 소설에 일부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삶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다들 이런 비정상적인 비극이 하나씩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복잡하고 기괴한 이야기가 소설의 마지막에서는 엘레오노라와 사무엘레의 애절한 사랑으로 귀결되지만, 이들의 사랑은 너무 괴상하고 지난한 배경이 깔려있어 거북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만 물러나 사랑을 하는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보면, 우리도 결코 사무엘레나 엘레오노라, 혹은 아델레 첸티니와 같은 결점과 얼룩투성이인 인물들과 다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고딕소설에서 인간 보편성을 느꼈다.

그런데 하루하루가 무척 길었다. 처음에는 오두막을 정돈하는 일이 신선하게 느껴졌었는데 채 이 주도 지나지 않아서 생각이달라졌다. 아이들의 빨래를 널고 있으려니 내가 부엌데기가 된 것같았다. 마렘마의 신데렐라가 되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수렁을피하려다 다른 수렁에 빠진 걸 몰랐어.‘ 속으로 생각했다. 텔레비전도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축복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나를 힘들게 한다. - P429

나는 그 권력이 탐났다. 아빠에게 이런 말은 하지 않았지만의사가 되겠다고 생각한 게 바로 그때였다. 부자든 가난한 자들모두 내 도움을 필요로 했다. 머지않아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내 집 문을 두드릴 것이다. "부탁이에요, 저를 구해주세요." 그러면 난 주저 없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 줄 것이다. 그게 바로 내게 주어진 임무니까. 죽음의 웅덩이에서 빠져나온, 조금은 내 소유이기도 한 그 영혼들을 지배하면서 말이다. 어느 누구도 성전처럼 높이 솟아 있을 내 정원을 털끝만큼도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더 이상 나를 부엌 식탁에서 피난민처럼 식사하게 만들 수도 없을 것이다. - P396

경찰은 그에 대해 몇 마디 말을 했다. 저택과 토스카나의 수많은 건물의 소유주인 그는 카지노에서 전 재산을 걸고 도박을 즐기고 있다. 온갖 상상을 하기 시작했던 게 바로 그 시점이었다. 그는 이제 가문을 물려줄 자손이 없었기 때문에 늑대의 밥이 되기를자처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모든 재산을 탕진하는 데 이십여 일이걸렸다.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에게 가문의 전 재산을 물려주느니차라리 이게 낫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실소가 터져 나왔고 발작이 일 것만 같았다. 나의 경솔한 행동으로 그가 받은 상처가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나 자신에게 말했다. "그는 내게 모든 걸 주려 했어. 그걸 배신한 건 너야. 그의 사랑을 얼마나 더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어쩌면 대령은 가문에 영광스러운 후손을 남기기 위해 정말로 아이를 낳으려 했는지 모른다. 내게 함부로 손을 대지 않던 그의 신념이 이제는 그립다. 그와 지낸 몇 달 동안 내가 받은 유일한 선물은 존중이다. 이 세상의 어떠한금이나 펜던트보다 값진 선물이었다. 마렘마의 산간벽지에서 태어난 보잘것없는 나 같은 사람은 받아 보기 힘든 것인데. "무지하면 이런 일을 겪는 거야." 혼잣말을 했다. "넌 보물을 받아서 그걸 엉덩이 닦는 데 쓰고 더러운 물과 함께 버렸어." 동시에 나 때문에가족들이 길바닥으로 쫓겨날 거란 생각은 못 했다. - P288

애써 특별한 배려를 하지 않고 똑같이 대해 주는 것이 좋았다. 그들의 무관심이 우리를 평범한 사람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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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황가한 옮김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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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나이지리아의 부호이자 기독교 광신도이다. 자신의 부로 군사 쿠데타에 맞서 민주적 성향의 신문사를 후원하며, 나이지리아의 토속 신앙을 뿌리 뽑아 기독교를 전파하려 한다. 그의 위치는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있지만 가정에선 폭력적인 가장이다.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는 아버지를 이교도라며 가족들과의 접촉을 일체 금하고, 교리를 지키기 위해 아내 비어트리스에게 무리한 일정을 요구하다 유산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들 자자와 딸인 캄빌리는 유진이 정해놓은 규율에 벗어나지 않는 하루 일과를 보내야 하고 성적은 항상 수석을 유지해야 하며, 이를 어길 시 정도를 벗어난 체벌을 당한다.
유진의 고향이자 유진의 아버지 파파은누쿠가 사는 아바에서 가족들은 매년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파파은누쿠는 아직 개종하지 않고 전통적인 신앙을 믿고 있으며, 유진은 이교도에 대한 굳은 거부감 때문에 자신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었을뿐더러, 킴벌리와 자자가 할아버지를 만나는 시간도 분 단위로 제한한다. 반면 유진의 동생이자 대학교수인 이페오마와 그의 사촌 아마카, 오비오라는 파파은누쿠와의 가족적인 유대감을 가지고 지낸다.
아바에서 이페오마의 간곡한 설득 끝에 킴벌리와 자자는 고모와 사촌들과 함께 방학을 보낸다. 이페오마의 집에서 지내며 캄빌리는 아마디 신부를 알게 되고 아버지 유진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으며 교리를 엄격하게 지키는 베네딕트 신부와 비교하며 문화적 충격을 받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호감을 느끼기도 한다. 또한 아마카의 부에 대한 질투심으로 규율과 복종에 익숙한 생활습관이 조롱을 받기도 하지만 이페오마의 도움으로 점점 둘의 우정이 깊어져 간다.
파파은누쿠의 건강이 악화되어 은수카의 이모네로 요양을 오게 되는데, 할아버지와의 접촉이 금지된 캄빌리와 자자는 아버지 유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게 걱정이 되지만, 사촌들처럼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도 간절하다. 결국 고향 아바에서의 소식통으로 파파은누쿠가 이페오마의 집에서 요양하고 있다는 것이 발각되고, 유진이 분노하여 은수카로 오는 길에 할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되어 돌아가신다. 이페디오라는 파파은누쿠의 장례를 전통 방식으로 치르려고 하지만 유진은 기독교식 장례를 강행하고, 캄빌리와 자자는 에누구의 집으로 돌아와 이교도와 함께한 죄를 씻는다는 명분으로 끓는 물을 발에 붓는 벌을 받는다. 또 캄빌리가 이모의 집에서 파파은누쿠의 초상을 몰래 가져온 것이 들통나 유진에게 빼앗기는 과정에서 반항하다 구타를 당해 뇌출혈과 골절상을 입고 입원한다. 아마디신부와 함께 병원을 찾아온 이페디오라는 상황에 경악하며 자자와 캄빌리를 은수카로 데려간다.
유진은 자신이 후원하는 신문사의 편집장 아데 코커가 살해당하고, 쿠데타 정부로부터 살인 위협을 받으며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다. 캄빌리와 자자는 두 번째로 방문하게 된 은수카에서 아마디신부와 고모 가족들과 함께 더 많은 경험을 하며 아버지를 벗어나 자립하려는 의지를 키우고 쿠데타와 학생시위로 교수직을 잃게 된 이페오마는 미국으로의 이민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던 와중 어머니 비어트리스가 유진의 폭행으로 또 유산을 당하고 이페디오라의 집으로 도피해 온다. 이페디오라는 비어트리스와 조카들을 보내고 싶지 않지만 유진의 협박과 현실적인 실리를 따져 결국 비어트리스는 아이들과 함께 에누구로 돌아온다.
에누구로 돌아온 캄빌리와 자자는 더이상 예전 같지 않은 태도로 유진을 대하고, 자자가 영성체를 거부하는 사건이 발단이 되어 유진의 권위는 점점 더 무너져 내린다. 이페디오라가 해고통보를 알려오던 날 자자와 캄빌리는 유진에게 은수카로 간다는 통보를 하고 에누구를 떠나온다. 이페오마의 비자가 발급되고 미국으로 이민 갈 짐을 다 쌀 무렵, 캄빌리와 자자는 집에서 갑작스럽게 유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에누구로 돌아온다. 유진의 장례 미사 전 비어트리스는 캄빌리와 자자에게 자신이 유진의 음식에 약을 타 살해했다고 실토하지만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자자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자수하면서 수감이 된다. 비어트리스의 발언은 남편과 사별한 부인의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실언으로 받아들여진다.
시간이 지나 캄빌리와 비어트리스는 출소를 앞 둔 자자를 면회하고, 캄빌리는 사건 이후 말을 잘 하지 못하는 비어트리스에게 자자의 출소 후 은수카로 간 뒤 이페디오라와 사촌들이 있는 미국으로 갈 계획이라고 말한다.

나이지리아의 문학을 접한 건 아프리카 문학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지만, 치마만다의 아프리카에 대한 편견과 성평등 의식에 대한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관심을 가진 계기가 더 크다.
나이지리아에서 개몽적인 전도사이자, 군사 독재에 저항하는 지식인이며 성공한 자산가 가장의 폭력적인 실상을 보여주지만, 유진의 사회적 명망과 가정에서의 폭력성은 이중적인 인격의 발로가 아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부를 이용해 스스로를 신격화한 자아가 사회와 가정에서 보이는 모습의 결과가 빚어지는 점을 유의해서 봐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성공과 명망을 가진 사람의 명암인 것이다.
캄빌리와 자자 역시 유진을 이중적이거나 위선적인 사람이라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유진이라는 절대적인 권력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성장기를 거친다. 유진은 어렸을 때부터 통제와 순종에 길들인 캄빌리와 자자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군림하지만, 캄빌리와 자자는 유진의 여동생 이페오마의 집에서 방학을 보내면서 기존의 질서를 깨는 세계의 방식을 접하게 되고 아버지 유진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겪는다. 에누구의 집처럼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는 못하지만 은수카의 고모집에서 캄빌리와 자자는 사촌들에게 자율적이며 주체적인 삶을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오비오라의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며 자자는 독립심을 키워나가고, 아마카의 냉소적이지만 자유분방한 행동을 보면서 캄빌리 역시 순종적인 자신의 외피를 벗어 던지고 당당함을 키워나간다. 또한 캄빌리는 아마디 신부의 예배 방식과 파파은누쿠가 아침마다 행하던 전통의식 ‘이투은주’를 통해 아버지의 그릇된 광신도적 종교 생활에서 성찰적 종교 생활을 배워나간다는 점에서 일반 성장소설과 차별성을 갖는다.
이 책이 나이지리아 가부장의 가학적인 현실을 고발하려는 소설이 아니듯이, 종교적 색채가 짙은 책 또한 아니다. 성공이라는 빛나는 상징성에 묻은 추악함과 그 속에서 성장을 이루어 나가는 객체들에 대한 응원과 용기의 메시지이다.

그것은 건축가가 성당이 아니라 주거용 건물을 설계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처럼 생긴 집이었다. 식당으로이어지는 아치는 제단 입구처럼 보였다. 크림색 전화기가 놓인 벽감은 성체를 받아 먹을 준비가 된 입같았다. - P43

우리는 매년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냈다. 버라니카 수녀는 그것을 이보족의 민족 대이동이라고불렀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단어를 혀끝까지 굴려보내는 아일랜드식 악센트로 이렇게 말했다. 왜 수많은 이보족 사람들은 고향에 거대한 저택을 지어서 12월에 일이 주밖에 안 쓰고나머지는 일 년 내내 도시의 좁아터진 집에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느냐고. 하지만 나는 버라니카 수녀가 왜 굳이 이해하려 하는지의아할 때가 많았다. 그냥 원래 그런 것일 뿐인데. - P71

"오빠가 왜 이페디오라랑 사이가 안 좋았는 줄 알아요?" 또다시 들리는 이페오마 고모의 속삭임은 아까보다 더 사납고 시끄러웠다. "이페디오라가 오빠 면전에 대고 자기 생각을 말했기 때문이에요. 이페디오라는 진실을 말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죠. 하지만 오빠는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진실에 대해서는 꼭 싸우려 들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죽어 가고 있어요, 알겠어요? 죽어 간다고요. 노인네가 사실 날이 얼마나 남았겠어요, 그보? 그런데 오빠는 아버지를 이 집에 오지도 못하게 하고 인사드리러 가지도 않죠. 오조카! 오빠는 하느님 행세를 그만둬야 해요. 하느님은 다 큰 어른이니까 당신 일은 당신이 하실 수 있어요. 아버지가 조상님 방식을 따르기로 한 것에 대해 하느님이 벌하실 거라면 오빠가 아니라하느님이 벌하시게 놔두란 말이에요." - P124

"나는 학교에 충성하라고 월급 받는 게 아니야. 내가 진실을말하는 게 결과적으로 불충이 된 거지."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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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박서련 지음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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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세상에 날리는 조소가 너무나 재밌는 소설이다. <더 셜리 클럽>에서 다소 진부한 전개가 실망이었지만, <호르몬이 그랬어>나 젊은 작가상에 실린 이 책의 표제작이 너무 인상적이라 다시 박서련을 집어 들었다. 몇 번을 소리내서 웃었다. 이런 무거운 내용을 보고 웃었던 건 아무래도 재미보다는 공감이었던 것 같다.


<미키마우스 클럽>
아이돌 가수 니나의 임신으로 니나의 매니저이자 엄마인 화자는 활동 중단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연다. 기자회견이 마무리 되어 갈 무렵 한 기자가 매니저가 니나의 엄마라는 소문이 사실이냐는 질문에 화자는 기자가 니나의 임신사실마저 알고 있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에 마이크를 기자에게 집어던져 아수라장을 만들어 버린다.
화자는 미국으로 입양갔던 재미교포이다. 화자에게는 어린 시절 미키마우스클럽의 마우스캐티어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지만, 마이클잭슨 분장을 한 다른 지원자와 다툼이 생겨 자격을 박탈당한 과거가 있었다. 자신의 꿈을 딸 니나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화자에게는 구속이 되더라도 기자의 입을 막는 것이 절실했다. 소설의 초반은 화자와 니나의 대조되는 외모는 물론 성향과 운명을 보여주며 진행된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화자와 니나의 접점을 이뤄가는 반전이 전개된다.
화자가 수사를 받으면서 자신이 양부모와 함께 디즈니랜드에 갔던 기억과 니나와 함께 디즈니랜드에 갔던 기억이 중첩되며 혼란스러워 하는 것부터 화자의 꿈과 니나의 현실을 평행이론처럼 반증해 나가기 시작한다. 화자의 꿈은 마이클잭슨 분장을 한 지원자와의 싸움에서 틀어졌듯이, 니나의 현실은 상대가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임신을 통해 무너지려고 한다. 그리고 피해자 기자의 기자회견이 예정돼 있던 자리에 순진한 줄만 알았던 니나가 나타나 화자의 간교함을 넘어서 대중을 기만하는 모습에 화자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니나 속의 자신을 보게 된다.

<보>
보혜는 목사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하지만, 이유도 듣지 않고 남편은 자신의 잘못을 빌기 시작한다. 부유한 아버지의 지원으로 교회유적지 인근의 개척교회 목사가 된 남편과는 자신의 뜻을 반드시 이뤄내고 마는 아버지의 의지대로 영혼 없이 남편과 결혼했다. 보혜는 남편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하지만 이것이 단순히 선교 여행 때 프라이빗 비치에서 잠시 스쳐간 현지인 여성을 회상하며 둘러대는 것인지, 정말 여성을 사랑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버지와 남편으로 이어지는 지긋지긋한 남성들에 의해 자신의 삶의 지휘권을 빼앗기는 점에 질린듯한 느낌은 확실하다. 남편은 보혜를 강간하려 들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보혜의 가여운 눈총만 받고 만다.

<곤륜을 지나>
자영은 회사에서 근속10주년 기념으로 받은 여행상품에 대한 정보가 남편을 통해 시어머니로 흘러들어가 중국 곤륜을 함께 여행하게 됐다. 애초에 친정엄마와 함께하려고 했던 것을 평소 고부갈등으로 긴장이 팽배한 사이인 시어머니가 낚아 챈 것이었고, 역시나 이 와중에 남편은 면세주류만 탐하는 진상을 부린다. 계속되는 불편한 여정에 시어머니는 웬 본인 시어머니하고 겪었던 갈등을 토로하며 자영을 이해하는 척, 위로하는 척 하는 둥 친한 척을 해대고, 친정엄마는 몸이 불편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속은 뒤집히는 상황에 진상 남편은 연락도 되지 않는다. 여행가이드는 곤륜산을 오르면 영혼이 맑아진다는 설명을 약장수처럼 하고 시어머니는 곤륜에 오면 업이 씻어진다는 말에 왔다며 전날 못 다한 푸념을 늘어놓더니 주저앉아 소변을 지리고 울기 시작한다. 자영은 본인의 업만 씻겨버리고 가이드의 말대로 육체가 가벼워지고 갓난아이의 영혼으로 돌아간 시어머니를 보고 체념하며, 끓어오르는 분노와 욕지거리를 참아내고 시어머니를 업어 산을 오른다.

<기미>
공장을 전전하며 삶을 이어가던 원희는 엄마가 치매에 걸리자 시골로 내려와 엄마를 간병하며 친구 성미의 학원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산다. 자신에게 생전 들어보지 못한 심한 욕을 해대는 엄마에 억지로 익숙해지며 자신의 삶을 이어가던 원희는 성미의 제안으로 산악회에 나가 군인아파트에 사는 독신 남자와 잠깐의 만남을 이어가지만,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는 원희에게 엄마에게 상한음식을 먹여 자연사 시키라는 소리를 듣고는 기가 막혀 집을 빠져 나온다. 성미는 군인아파트에 학원차가 보인다는 민원이 들어왔다며 조심하라는 일침에 남자를 다시 만나 정사를 나누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이것봐. 보라고./나는 살아 있어./ 너희들처럼 살아 있다.’(173p.)
원희가 천변도로에 나가 경적을 울리며 소리를 질러대는 것은 치매에 걸린 엄마의 구속, 학원의 학부모에게 오는 구속을 견디며 자신의 존재를 구원하기 위한 발악이라고 느껴진다. 하지만 엄마는 계속 치매에 걸려있고 원희는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이어나간다.

<그 소설>
화자(작가)가 문예지에 청탁받은 소설을 송고한다. 대학생 시절 합평 때 혹평을 받았던 소설을 조금 수정해서 냈는데, 과거의 자기 소설을 누군가 도용해 공모전에서 가작을 받은 것을 알게 된다. 도용범을 잡아내 소설은 문예지에 실렸지만, 그런 사건이 있는 동안 ‘내 얘기’라는 소설을 새로 쓴다. 과거 합평 때마다 교수들이 뻔한 낙태에 관한 소설을 식상해하던 기억에 맞물려 독자들에게 정말 진정한 작가의 얘기인 것 마냥 소설을 쓴다.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던 때쯤이라 시대상을 반영하는 듯했고, 소설이 발표되고 난 뒤 상까지 받는다. 지인들의 축하전화가 봇물처럼 이어지지만 ‘내 얘기’라는 소설 제목처럼 가족과 지인들의 의심을 받고 추궁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문제는 전 남자친구로부터 온 전화였는데, 자신이 엮인 이야기를 전 여자친구가 써 유명세를 타는 게 분했는지, 뒤늦게 자신의 핏줄에 대한 연민이 분노로 표출했는지 작가에게 욕설과 악담을 퍼붓는다. 작가는 사실 계류유산의 경험으로 소설을 써 낙태 경험을 한 적은 없었다.
진실과 사실은 구분되지 않는다. 작가는 문예지에 자신이 도용당했던 소설을 싣는 과정과 문예지의 ‘불미스럽’다는 해명이 어쩐지 자신을 향한 듯한 찝찝함을 느끼고, 편집자가 생각할 수 있는 갖은 오해를 상상하지만 도용되었다는 사실을 규명하고 말뿐, 진실을 호소하는 일까지는 관심이 없다. 사실도 아닌 낙태를 진실이라 착각하고 전화를 건 전 남자친구에게도 할 말은 많지만 ‘마음대로 해 봐.’(204p.)라는 한마디를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린다. 무엇이 진실이건 간에 ‘새로운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204p.)을 무기력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죄를 100점이라고 하고새치기같이 작은 죄는 1점이라고 하면, 살인 한 번보다새치기 백한 번이 조금 더 나쁜 게 아닐까요? - P74

보혜는 헤어지자고 한 이유를 아직 말하지 않았다. 남편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들켰다고 생각하는구나. 또 무슨 일을 저질렀구나. 보혜는 피로를 느꼈다. 환멸이 아니라 남편은 보혜에게 환멸처럼 거창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 P84

애초에 기도라는 것은, 듣는 사람이 있는 기도라는 것은, 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저연극적인 방식으로 자기할말을 하는 거라는 생각이든다고 보혜는 썼다. 고등학교 때였다. - P86

또 편할 때만 하나님 법 찾고 유리할 때만 세상 법 찾지요? - P104

우리 엄마 원래 그래.
WAN남편은 자영의 하소연을 매번 그런 말로 일축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자영은 원래 그렇다는 말의 편리함을 곱씹어 보곤 했다. 늙은이를 마주할 때마다 자영은 인간 미만의 어떤 존재가 되는 것 같은 형언할 수 없는비참함에 휩싸이는데, 그런 기분을 다 설명하기도 전에남편은 그 이유를 한마디로 줄여 말하는 것이었다. 늙은이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영도 원래 그런사람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싹싹하고 눈치빠른 며느리 같은 것이 될 소질은 자영의 몫이 아니었다. - P127

자영은 화장실을 나오자마자 바람을 쐬다며 휴대폰을 들고 베란다로 갔다.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떤 의도로 말을 꺼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어설픈 사과나 위로라면 절대 받고 싶지 않았다. 누가 사과하랬나. 위로해 달랬나. 도리어 크게 모욕당한 느낌이 들었다. 그깟 말 몇 마디로 자기 혼자 편해지려고? 자기 마음만 편해지면 그만이고, 그간잘못한 것 있으면 다 잊어버리라고? - P137

빌어먹을 년. 도둑년. 더러운년 언니! 언니! 언니 이 씨발년아. 개흘레를 붙을 년아. 이게 엄마의 본심일까. 몸만 상하고 정신은 멀쩡했을 때가 어쩌면 위선의 시절이었던 걸까. - P157

열려 있는 문틈으로 남자 가수가 부르는 발라드 곡이 흘러나왔다. 난 네게 상처를 줬지만 여전히 널 그리워하고 그래도 날 용서하진 말고 대신 잊지도 말아 달라는 둥 앞뒤 안 맞는 가사로 된 고음 차력쇼 듣고 있자면 정서가 오염되는 것 같아서 승희 스스로 그런 노래를튼 적이 단 한 번도 없을뿐더러, 그런 노래를 틀 만한 장소에도 발을 들이지 않고 지내 왔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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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걸 보면 네 생각이 나 - 먼 곳에서 선명해지는 시간의 흔적들
청민 지음, Peter 사진 / 상상출판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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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가같은 달달하고 가벼운 문장들

물론 영화가 끝나는 순간부터 내 삶은 다시 이어지겠지만 잠시 이렇게 어딘가에 기대어 마음을 쉬어본다. 이 영화가 끝나고나면 나는 아주 조금 행복해질 거야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거면 된다는 만족으로. - P17

사람 마음이란 게 나이 먹는 법이 달라서, 몸은자라도 순수하게 좋아했던 마음은 그 시절의 나이로 남아 있는법이니까. - P23

점원에게 내 발자국은 지워야 할 수많은 발자국 중 하나였을 테지만 그가 닦은 건 사실 발자국 모양을 한나의 작은 외로움이었다는 걸, 지나고서 알게 되었다. - P33

그런데 여기 오고서야 알 것 같았다. 굳이 나까지 쨍한 사람이 될 필요는 없다는 걸 조금 어두워야 더 선명히 보이는 빛깔이 있다는 걸. - P44

내일의 불안함을 미리 당겨오지 않고, 오늘 주어진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어 좋다. 그저 하나의 생각만으로 시간을 채울 수 있는 게 여행이 주는 기쁨 아닐까. - P50

살면서 그날의 남산을 자주 떠올렸다. 내게 그날은 힘들 때 꺼내 먹는 기억이 되었다. - P79

아무리 문밖의 세계를 좋아해 즉흥적으로 떠나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그건 문안의 평범한 안정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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