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천문학자가 과학자로서 사는 삶에 대한 에세이. 제목에서 역설하듯이, 천문학자에 대한, 과학자에 대한 일반인의 선입견을 바로 잡아주는 부분이 많다.
대부분의 삶이 그렇듯, 대단히 드라마틱한 계기가 있거나 목적의식이 있어서 천문학자가 되었다기 보다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자신을 천문학자로 만든 과정을 솔직하게 적어 인상깊었다.
또한 여성으로서, 여성 과학자로서 살아가는 고된 장벽들과,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비겁함을 성찰하는 부분, 이소연 과학자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는 글(<최고의 우주인 부분)은 꽤나 감동적이었다.
이 책이 이과생의 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감상적이다. 글의 면면엔 저자의 문학적 소양까지 엿보이는데, 저자는 본인을 이과형 인간이라고 칭하지만 내가 보기엔 상당히 전인적인 완성형 학자로 보였다.
나도 학창시절 지구과학에 깊이 매료된 적이 있었고, 지금의 동반자도 천문학 동아리에 나갔을 만큼 밤하늘과 관련된 소소한 인연이 있다. 예전엔 잘 알던 내용인데 지금 다시 보니 천문학에 대한 강의나 천문학사 내용은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아 이해하기 힘들었다. 특히 무엇보다 이 책이 좋았던 건 저자가 천문학에 대한 관심을 구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그래서 그런지 저자가 책에서 비판했던 ‘코스모스‘와 많이 상반된다.) 천문학에 관심이 없고, 앞으로 관심을 가질 계획이 없더라도,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는 과학자의 소소한 일상이나 감정을 느낄수 있는 책이다. 그렇지만 나는 천문학에 대한 관심을 배우자와 함께 다시금 높여볼 계획이다. 천문학자처럼 데이터를 분석할 능력은 없지만, 다시 밤하늘을, 별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생겼다.

일기 속에는 두려워하는 내가 있다. 졸업할 수는 있는 걸까 두려웠고, 졸업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려웠다. 어쩌면 졸업 후의 더 큰 두려움을 유예하기 위해 수료생의 고뇌에 천착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도중에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떠날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남은 채 버텨내는 데도 역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걸으면 된다는 것을. 파도에 이겨도 보고 져도 보는 경험이나를 노련한 뱃사람으로 만들어주리라는 것을. - P31

대학이 수행하고 있는 기능이란 어리둥절한 채 성인이 되어버렸으나 실상은유예된 청소년에 지나지 않는 이들의 귀중한 스무 살 생명표를 꼭 쥐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해 태어난 국민 중 팔 할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는 사회. 학생들은 대학에 학문을 배우러 오지 않는다. 초등학교 다음 중학교에 갔고, 중학교 다음 고등학교에 간 것과 같이 고등학교를 마쳤으니 대학에 진학할 뿐이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학비보다 열 배는 비싼 등록금이요, 모두가 입어야 하는 교복 대신모두가 가져야 하는 스펙을 등에 업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젊음은 싸구려 술과 술값보다 비싼 커피와 크고 작은 성추행과 미필자조차 향유하는 선배들의 군대식 갑질, 전공과목 들을 시간을 뺏는 교양 강의와 대학생다운 교양을 쌓을틈을 주지 않는 전공 강의, 토익 시험과 한국사 시험과 각종컴퓨터 자격증과 크고 작은 기업의 공모전과 인턴 경력에소모된다. 과제로 수많은 보고서를 작성하지만 제대로 된글쓰기를 연습할 기회는 별로 없다. 대신 비문으로 A4 용지다섯 장을 채워내는 끈기, 남의 것을 베끼되 표절 여부를 자동으로 검사하는 프로그램에 걸리지 않게 몇몇 표현을 바꿔치기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그 비용과 시간과 어처구니없는 문화와 그 젊음은 대체 무엇을 위한 제물인가. - P55

문제는 그다음이다. 내 논문과 문제의 인터뷰에 대해 비교적 단순명료한 기사들이 몇 차례 나간 뒤에는 다른 종류의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천문학을 선택하게 된극적인 이야기와 ‘업적‘을 이룬 경험을 공유해 다른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달라나. 나는 연구 과제가 끝나면 급여도 경력도 바로 단절이기 때문에, 과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외에도 먹고살기 위해 다음, 또 그다음 연구과제를 수주할생각에 머리가 복잡한데, 한 해에도 몇 번씩 정규직 채용공고에 원서를 내고 탈락하기를 반복하고 있는데, 그런 상황이 결코 누군가에게 희망적일리 없다. 내가 이 직업을 포기하지 않은 채 정규직으로 취직하고, 내가 기여한 연구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완수되고, 후배 천문학자들의 연구를 도와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 다음에라야 과거의 고군분투가무지갯빛 희망으로 물드는 것 아니겠는가.
나를 더욱 곤란케 하는 것은, 내가 어떤 대단한 계기로 천문학을 선택한 것도, 어릴 때부터 오매불망 천문학자가 되기만을 그리다 마침내 꿈을 이룬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누구에게나 각자 인생의 흐름이 있는 것이고, 나는 삶을 따라 흘러 다니며 살다보니 지금 이러고 있다. 어느 분야로 가든 대학원은 다닐 생각이었기 때문에, 평행우주 속 나는 지금쯤 생물학자거나 영문학자거나 고고학자일 수도 있다.

우주 탐사에는 막대한 예산이 들어가는데, 당장 상업적으로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아이템은 아니기 때문에 대기업이돈을 대는 일은 드물다. 정부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그러려면 정부에 우주 탐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그것이 국가에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비전을 제시해주는 자문단이 필요하다. 그 조언을 바탕으로 정책을 만드는 전문가, 이를 승인하는 최고결정권자와 국회, 그리고 그 실무를 담당하는 수많은 공무원이 현장을 방문하고, 공문서를 작성하고, 예산 집행 내역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낸 세금을 기꺼이 우주 탐사에 쓰도록 허락하고, 공감하고, 지지하고, 애정 어린 눈길로 지켜봐주는 국민이 필요하다. 당신이 꼭 필요하다. 천문학자가 아니라도 우주를 사랑할 수 있고, 우주탐사에 힘을 보탤 수 있다. 우주를 사랑하는 데는 수만 가지방법이 있으니까. - P180

많은 사람이 놓쳤지만, 우주인 프로젝트의 명목상 목적은 우주정거장에서의 과학 실험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우주 실험을 수행할 사람이 마침 학계에서 과학 하던 사람이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행운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 P100

우주 비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소연은 수백 차례의 대중강연과 인터뷰를 하며 애초 계약했던 의무기간의 갑절 되는 동안 우주인으로서의 소임을 수행했다. 그러나 우주인 프로젝트는 일회성 사업이었고, 앞으로도 우주인 이소연이 할 만한 일은 11일간의 비행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우주에서 돌아온 후 4년간 그랬듯이. 그렇다고 몇년 만에 다시 DNA를 다루는 공학박사 이소연의 길로 돌아가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 P1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