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만남에서 깨달은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생각은 그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결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완고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설득하거나 주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 P14
그리고 강의라는 프레임도 허물어야 합니다. 학부 강의에서 가장 불편한 것이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강의라는 틀입니다. 문제 중심이어야 하고 정답이 있어야합니다. 개념과 논리 중심의 선형적型的지식은 지식이라기보다 지실의 파편입니다. - P15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래된 인식틀을 바꾸는 탈문맥입니다. - P19
이처럼 문사철은 세계의 정직한 인식틀이 못 됩니다. 언어와개념 논리라는 지극히 추상화된 그릇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담을 수 없음은 물론이고 방금 일별한 것처럼 문학, 역사, 철학 역시 세계를 온당하게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사철이라는 완고한 인식틀에 갇혀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의 시작임은 물론입니다. - P25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한 고민이기도 하지만 진실이 사실보다 더 정직한 세계 인식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보는 것은 그때 그곳의 조각에 불과합니다. 시적인 관점이라는 것은 사실성과 사회미에 충실하되 사실 자체에 갇히지 않는 것입니다. - P32
시 이야기가 기승전결과 정반합까지 이어진 까닭은 시가 본질적으로 세계 인식의 틀이기 때문입니다. 시란 문학서사 양식을 뛰어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시서화는 보다 높은 차원의 인식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와 숫자로서 세계를 인식하고 있는 것이 현 수준의 우리들의 세계 인식입니다. 혹시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 부르던 노래입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은 것은 백두산." 여기까지 읊고 나서 노래를 시작합니다. "백두산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우리들이 구축하고 있는 논리의 실상을보여줍니다. 원숭이에서 백두산까지의 연결에는 최소한의 인과관계도 없습니다. 시를 읽는 오늘의 현실은 매우 안이합니다. 시뿐만니라 시서화악 모두 교양 또는 예술이라는 장식적 그릇에 담아 두고있습니다. 시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란 것만은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시적 정서와 시적 사유가 돋보이는 사람이있을 것입니다. 유연한 시적 사유는 비단 세계 인식에 있어서뿐만이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를 대단히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 P37
현실을 현실로서만 보는 경우는 없습니다. 산에 나무 한그루를 심고 내려올 때에도 ‘저 나무가 10년 후에는 이만큼 자라겠지‘하는 상상을 안고 하산합니다. 현실과 이상은 반드시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은 ‘현실의 존재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 끊임없이 이상화되고 반대로 이상은 끊임없이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엄마와 딸‘, ‘현실과 이상‘ 만이그런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물이나 상황이 그렇습니다. - P42
기 위해서입니다. 공자가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했습니다. 서술만하고 창작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 있습니다. 사실 나도 교도소에서 생전 안 보던 고전들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미 다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 실감났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가 브로델이 이야기하는 장기 지속의 구조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 P58
자리와 관련해서 특히 주의해야하는 것은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그 자리의 권능을 자기 개인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그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알튀세르LouisAlthusser의 비유가 신랄합니다. "히말라야 높은 설산에 사는 토끼가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동상이 아니었습니다. "평지에 사는 코끼리보다 자기가 크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부려서 하는 일이 자기의 능력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과 자리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 득위와 실위의 이야기로 이해하기 바랍니다. - P64
니다. 배울 것이 없는 상대란 없습니다. 문제는 배울 것이 없다는 폐쇄된 사고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열린 사고입니다. 남과 북의 통일과 화화에 대한 열린 사고입니다. - P85
물건으로 가득 찬 방은 방으로서의 쓰임이 없습니다. 이 장의 결론은 "유有가 이로움이 되는 것은 무無가 쓰임이 되기 때문이다"입니다. 무無란그냥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입니다. 세상은 무와 유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있는 것이 노자의 생각입니다. - P123
강의 첫 시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나는 자주 사람을 두 종류로 대별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당당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과 반대로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비굴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오만한 사람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조합(combination)은 없습니다. 강한 사람한테 비굴하지만 약한 사람한테 관용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원칙 없이 좌충우돌하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연대는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추종이고 영합일 뿐입니다. 연대는 물처럼 낮은 곳과 하는 것입니다. 잠들지 않는 강물이 되어 바다에 이르는 것입니다. 바다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 P135
노동시간을 연장하여 얻는 잉여가치를 절대적 잉여가치라고 하고 필요노동시간을 단축하여 얻는 잉여가치를 상대적 잉여가치라고 합니다. 너무 간략하게 설명 드렸습니다만 기계의 본령은 바로 이 상대적 가치를 생산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기계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계가 도입되면 6시간 걸리던 필요노동시간이 3시간으로 줄어듭니다. 기계가 갖는 효율로 말미암아 6시간 걸리던 것이 이제 3시간밖에 걸리지 않게 된다는 것은 그 생산물의 가치가 6에서 3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치량이란그 속에 담긴 노동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효율성이 높은 기계를 사용해서 만들었거나 효율성이 낮은 기계를 사용해서 만들었거나시장에서 동일한 가격으로 거래되기 때문에 가치와 가격을 같은 뜻으로 이해합니다만 기계는 가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줄이는 역할을 합니다. 더 효율적인 기계가 광범하게 도입되면 우리가 살아가는데에 필요한 물건들을 생산하는 데에 필요한 노동시간이 훨씬 더 줄어듭니다. 1일 8시간 노동이 4시간으로 단축될 수 있습니다. 주 5일근무가 주 3일 근무로 단축될 수 있습니다. 노동시간이 단축되지 않는 이유를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쨌든 기계는 가치를 줄여 주는 역할을 합니다. 늘려 주는 역할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기계란 무엇인가? 기계란 한마디로 과거 노동입니다. - P142
모신 하미드Mohsin Hamid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에서 주인공인 파키스탄 출신의 찬게즈Changez가 WTC빌딩 9·11테러를 일컬어 ‘이슬람이 미국을 무릎 꿇린‘ 통쾌한 사건이라고 당당히 주장합니다. 소설에서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상대가 미국의 CIA비밀요원이란암시가 없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미드는 ‘미국 사람들도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무자비한 포격과 파괴를 게임 즐기듯 보지 않았는가!‘라고 반론합니다. 미국의 일방적 이데올로기 지배하에 있는우리들로서는 좀처럼 듣지 못하는 놀라운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 P166
간디가 열거하는 ‘나라를 망치는 7가지 사회악‘이 있습니다.
원칙 없는 정치 Politics without principle 노동 없는 부Wealth without work 양심 없는 쾌락Pleasure without conscience 인격 없는 교육 Knowledge without character 도덕 없는 경제 Commerce without morality 인간성 없는 과학Science without humanity 희생 없는 신앙 Worship without sacrifice
1930년대의 인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가 성찰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 P191
이러한 대비가 그렇게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대비 개념은 보완관계로 읽어야 합니다. 대립관계로 읽는 것은 결정론적 사고입니다. - P195
나는 같은 추억이라고 하더라도 당사자들의 마음에 남아 있는 크기가 서로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힘겨운 삶을 이어 왔을 그들에게청구회에 대한 추억이 나의 것과 같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 P209
내가 전기고문을 당하다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간신히 정신이들었을 때입니다. 취조관이 의무실에 전화를 걸었습니다.‘의료 처치를 요청하려나 보다‘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게아니었습니다. 아침에 우리 집 애 감기약 부탁했는데 그걸 퇴근하기전에 내 책상에 갖다 놓으라는 전화였어요. ‘남의 아들에 대한 전기고문과 자기 딸의 감기약‘, 그 극적 대비는 차라리 슬픈 것이었습니다. ‘나는 절대 결혼하지 않아야지. 저 지독한 가족 이기주의를 난들어떻게 할 거야.‘ 인간에 대한 실망이었습니다. 권력의 오만함과 잔혹함에 이어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마저 포기해 갔던 절망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남산 취조 현장의 경험을 서로 이야기하다가 놀랍게도 ‘감기약‘ 이 연출된 수사 기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사람 역시 비슷한 경험을 토로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스스로를 냉혹한 인간으로 연출함으로써 피의자를 몸서리치게 하는 수사 기법은 한 인간에 대한 절망을 넘어서정치권력 그 자체에 대한 소름끼치는 공포였습니다. 남한산성은 이러한 절망의 끝 부분에 놓여 있습니다. - P217
그러나 차이와 다양성은 그것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어야 합니다. 나는 그 집 그림 앞에 앉아서나 자신의 변화를 결심합니다. 창백한 관념성을 청산하고 건강한 노동 품성을 키워 가리라는 결심을 합니다. 차이는 자기 변화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출발이어야 합니다. 차이는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의 대상이어야 하고, 학습의 교본이어야 하고, 변화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 P232
인간적 신뢰나 인간관계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고용 관계가 인간관계의 보편적 형식입니다. 고용 관계란 금전적 보상 체계입니다. 그것이 만들어 내는 인간관계에 신뢰나 애정이 담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 P237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기술을 익히고 언어와 사고를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 완성될 수는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는 옆 사람만큼의 변화밖에 이룰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P239
예술은 사물이나 인간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합니다. 그특징의 하나가 클로즈업하는 것입니다. 야생화 한 송이를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 것과 같습니다. 유심히 주목하면 하찮은 삶도 멋진예술이 됩니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수많은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훌륭한 회화는 우리가 무심히 지나친 것을 액자에 넣어 사람들에게들어 보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술의 본령은 우리의 무심함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 P252
‘아름다움‘이란 뜻은 ‘알다‘ ‘깨닫다‘입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세계와 자기를 대면하게 함으로써 자기와 세계를함께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불우한 처지의 생명을 위로하기보다는그것을 냉정하게 직시하게 함으로써 생명의 위상을 새롭게 바꾸어가도록 합니다. 그런 뜻에서 ‘아름다움‘은 우리가 줄곧 이야기하고있는 ‘성찰‘’, ‘세계 인식‘과 직결됩니다.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림이지만 우리가 처한 세계의 실상을 대면하게 한다는 점에서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 P253
나는 사람을 볼 때그 사람의 신분보다는 그 사람의 얼굴을 주목합니다. 얼굴을 주목하는 경우에도 이목구비보다는 얼굴에 담겨 있는 분위기를 주목합니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달관이 있는 경우를 최고로 칩니다. 좋은 피부와 아픔이 없는 얼굴은 높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얼굴‘의 옛말은얼골입니다. 얼골은 얼꼴에서 왔습니다. ‘얼의 꼴‘ 다시 말하자면 ‘영혼의 모습입니다. 그 사람의 영혼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위가 바로 얼굴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였습니다. 얼굴에는 자연히그 사람의 ‘얼‘이 배어 나오게 마련입니다. 나는 검찰청에 출두하는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사진 기자들이 포진하고 있는 포토라인에 서는 저명인사들도 많습니다. 여러 가지 표정을 만나게 됩니다. 태연하게 이야기하기도 하고, 아무 말 안 하기도하고, 가볍게 웃기도 하고, 여러 가지 얼굴 표정을 만납니다. 나는 그러한 겉 표정과는 다른 표정이 숨어 있는 것을 잘 간파합니다.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은 많은 얼굴들 중에 가장 인상적인 얼굴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사회 명사가 아니라 죄수였습니다. 쏟아지는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단 한순간도 평정한 표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애써 꾸미려는 위선이 없었음은 물론 침통한 표정도 아니었습니다. 한마디로 대단히 철학적이고 자기 성찰적인 표정이었습니다. 왜 그 자리에 자기가 서 있는가를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습니다. 나는 막심 고리키Maxim Gorky의 『어머니』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파벨이 재판정에서 최후진술을 합니다. "이 자리에는 죄수와 심판자가 있는것이 아니라, 승리자와 패배자가 있을 뿐이다" 어머니는 처음으로 아들의 참된 모습을 깨닫습니다. - P254
창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성직자가 이 노랑머리에게 여성다운 품행을 설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그 사람의 처지에 대해서는 무심하면서 그 사람의 품행에 대해서 관여하는 것을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 여자의 삶을 파괴하는 폭력입니다. 그 여자를 돌로 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오만함과 천박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무지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을인간답게 하는 순수한 어떤 것을 상정한다는 것은 참으로 왜소한 인간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 P260
위악이 약자의 의상이라고 한다면, 위선은 강자의 의상입니다. 의상은 의상이되 위장僞裝입니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 그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주 보는 시위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있습니다. 붉은 머리띠, 문신입니다. 단결과 전의를 과시하는 약자들의 위악적 표현입니다. 강자들의 현장은 법정입니다. 검은 법의의 엄숙성과 정숙성이 압도합니다. 시위 현장의 소란과 대조적입니다. 닛타 지로알래스카 이야기』에서 읽은 눈썰매 이야기의 입니다. 알래스카에서는 눈썰매를 끄는 여러 마리의 개중에서 가장병약한 개의 줄을 짧게 맨다고 합니다. 개들이 빨리 달리게 할 때에는 짧게 매여 있는 개를 채찍으로 때립니다. 그 병약한 개의 비명이다른 개들을 더욱 빨리 달리게 합니다. 그 병약한 개가 죽고 나면 나머지 개 중에서 가장 병약한 개가 그 자리에 묶입니다. 혹시라도 자기가 썰매를 끄는 위치에 있다면 엄벌을 주장하면 안 됩니다. 엄벌을 주장하는 사람은 썰매를 끄는 사람이 아니라 썰매를 모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엄벌이란 병약한 개를 채찍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충분히 연구되어 있습니다. 엄벌과 공포는 사회를 경직시킵니다. 반대로 참여와 소통은 많은 사람들의 잠재력을 고양하고 사회역량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와 소통 구조는 자칫 썰매 위의 자리가 침범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그리고 사회란 원래 썰매의 위아래가 엄연히 구분되어 있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약한 개를 채찍으로 때려 왔습니다. 법과 정의 그리고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강자의 위선입니다. - P268
그 험악한 범죄자들 속에서 어떻게 20년을 살았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험악함의상당 부분은 강자들이 약자들에게 입힌 옷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절도범과 강도범 중에서 어느 쪽이 더 간이 크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의 생각이 틀렸습니다. 절도범이 간이 더 큽니다. 겪어 보면 압니다. 자기들끼리도 그런 논쟁을 합니다. 절도범이 강도범더러 얼마나 간이 크면 칼로 일을 보느냐고 합니다. 그러면 강도범이 절도범더러 사람들이 자고 있는데 조용히 일을 보는 놈들이 간이 더 크다고합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약한 동물들은 비명을 지릅니다. 약한 동물을 먹이로 삼는 맹수는 소리 없이 움직입니다. 문제는 위선이 미덕으로, 위악이 범죄로 재단되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강자의 논리입니다. 테러는 파괴와 살인이고 전쟁은 평화와 정의라는 논리가 바로강자의 위선입니다. 테러가 약자의 전쟁이라면, 전쟁은 강자의 테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테러와의 전쟁‘ 이란 모순된 조어가 버젓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 P270
폭력투쟁은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폭력으로 승패가 납니다. 누가 옳고 그른가는 가려지지 않고 힘센 놈이 이깁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이 억압될 뿐입니다. 다행히 정당한 쪽이 이기는 경우라도 그 정당성이 논의되는 과정은 부재합니다. 지겹지만 서로 욕지거리 섞어 가며 주장에 주장을 거듭하는 이른바 이론 투쟁(?)은 우여곡절을 겪어가지만 그래도 쟁점에 근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P272
함께 뒤섞여 있습니다. 감옥은 물론 범법자들을 물리적으로 격리 구금하는 시설입니다. 그러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옥을 다르게정의합니다. ‘감옥은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는 착각을 주기 위한 정치적 공간입니다. 역설적진리입니다. 폴 윌리스Paul Willis의 『학교와 계급재생산』(Learning to Labor)에는 날라리와 범생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영국에서는 범생이를 ‘earole‘이라고 부릅니다. 귀(ear)와 구멍(hole)을 합성한 단어입니다. ‘귓구멍‘은 경멸적 표현입니다. 귀는 신체 기관 중에서 자기 표현이 없는 가장 수동적인 부위입니다. 듣기만 하는 녀석들이란 뜻입니다. 날라리들은 스스로 사내(lads)라고 자부합니다. 날라리들은 학교 교육을 간파(penetration)하고 있습니다.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면계층 상승이 가능하다는 것이 허구임을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칠판에 적는 것, 책에 쓰인 것, 선생의 가르침을 오로지 듣기만 하는 귓구멍들과는 판이합니다. 날라리들은 비공식적인 또래 집단을 만들어 자기들의 정체성을 집단적으로 확보하고 자기들의 비판적 세계관을 공유합니다. 공부, 실력, 자격, 성실 등이 부질없음을 간파하고그것들을 거부합니다. 반항을 통해서 다져지는 결속, 거기서 확인되는 우정과 의리에 가치를 부여합니다. 날라리들을 위악적이라고 할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회의 위선은 간파하고 있는 집단입니다. 그러나 윌리스는 결론 부분에서 이야기합니다. 귓구멍들을 경멸하고 공부와 정신노동보다는 육체노동의 가치를 평가 절상하는 그들의 계급의식이 결국은 사회의 제약(limitation)이라는 일련의 시스템 속에서좌절됩니다. 결국은 그들이 저항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 사회의 노동력을 충원하는 집단으로 전락됩니다. 기존 체제의 위선에 대한 저항이 그 사회를 개혁하는 동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다시 그 체제의 효과적인 작동에 봉사하게 되는 설에 마음 아파합니다. 위선과 위악에 대한 통찰이 비록 뛰어난 것이고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하나의 조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통찰을 차폐하는 사회적장치는 치밀하게 짜여 있습니다. 통찰 그 자체로서는 사회적 역량이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찰에서 시작되어야 함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도소의 반문화와 민중적 감성은 내게매우 중요한 성찰의 원천이었습니다. 오랫동안 범생이로 살아온 나로서는 감옥은 ‘대학‘이었습니다. - P275
아우슈비츠에 대한 최고의 증언자로 평가받는 프리모 레비PrimoLevi는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이야기합니다. 아우슈비츠를운영하고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이 보통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그것이 일부 괴물들에 의해서 자행된 것이었다면 얼마나 다행한 것일까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의 요점은위선과 위악의 베일을 걷어내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그 점에서 우리들은 실패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무대와 의상, 오디오와 비디오의 현란한 조명, 그리고 수많은 언설이 만들어 내는 환상 속에서 우리가 그 실체를 직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실패의 더 큰 원인은 이러한 장치가 아니라 우리들의 인간 이해의천박함에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애증을 고르게 키워 가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노력이 부족함을 탓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공부는 우리의 동공을 외부로 향하여 여는 세계화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향하여 심화하는 인간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곤히 잠들어 있는 가슴에서 눈 부릅뜨고 있는 문신들은 가난한사람들의 슬픈 그림입니다. - P276
여기서 우리는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이라는 명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입장의 동일함을 계급의 의미로 좁게 읽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계급은 생산에서 차지하는지위와 역할을 의미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는 결정적입니다. 경제적 계급은 그 위력이 경제적 범주에 국한되지않고 문화와 인간을 규정할 정도로 위력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는 경제주의 관념 때문에 그 위력이 지나치게 과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계급과 경제적 조건은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빵 없이 살 수 없지만, 빵만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경제적 동물이 아닙니다. 삶은 광범위한 관계망 속에서 영위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강의도 관계와 인식의 문제에서 인간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모든 과정의 시작이고 끝입니다. - P283
그의 말처럼 자부심은 고난을 견디게 합니다. 물질적 도움보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더 큰 힘이 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 P290
그 처지가 같지 않고, 그 정이 같지 않은 사람의 동정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물질적으로는 도움이 되기도 하겠지만 동정 받는사람에게는 상심이 됩니다. 동정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동정 받는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하게 합니다. - P291
우리가 처한 힘든 상황이 그런 표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당사자인 그에게 그만한 결함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우리가 처한 혹독한 상황이 그런 공공의 적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여러 사람을 보내고 나서 뒤늦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 P301
‘자기가 익숙한 공간과 사고를 결별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 P323
여행은 떠나고 만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종착지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 변화된자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는 비단 여행에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하면 여행만 여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 하루하루가 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통과 변화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존재 형식입니다. 부단히 만나고, 부단히 소통하고, 부단히 변화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여행도 그렇고, 우리의 삶도 그렇고, 우리가 함께 만들고 있는 인문학 교실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P324
니다. "없이 사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사정을 구구절절 다 얘기하면서 살아요? 그냥 욕먹으면서 사는 거지요."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대개 먹물들은 자기의 사정을 자상하게 설명하고 변명까지 합니다. 못배운 사람들은 변명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짧은 것이라 하더라도자기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사람이 아예 없습니다. 그냥 단념하고욕먹으면서 살 각오를 합니다. - P325
원테쥔溫鐵軍은『백년의 급진에서 자본주의는 유럽 국가들이국내의 빈민층과 범죄인들을 식민지로 유출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가능했다고 주장합니다. 금은의 유입과 노동력의 유출이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자본의 유입은 자본의 상대적 과잉이 되고 노동력의 유출은 노동력의 부족으로 이어져 자본과 노동의 계급 타협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 계급 타협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중산층 중심의 다이아몬드형 사회 구성이 가능한 것이 바로 콜럼버스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모든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이 바로 이러한 근대의 발전 경로를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중국은 근대사회의 이러한 발전 경로를 모델(Path-dependency)로 하지 않고 내발적內發的 경로를 만들어 간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유럽의근대화 모델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인구의 50% 정도에 달하는 빈민층을껴안고 가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렴한 자본의 공급과 빈민층의이출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 P331
콜럼버스 이후 지금까지의 세계 질서는 본질에 있어서 조금도변함이 없습니다. 유럽의 근대사는 한마디로 나의 존재가 타인의 존재보다 강한 것이어야 하는 강철의 논리로 일관된 역사였습니다. 이러한 논리를 모든 나라들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조선을 흡수 합병한 메이지明治 일본의 탈아론脫亞論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논리의 희생이 된 나라들마저도 그러한 논리를 모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그러한 논리와 싸워야 할 해방운동마저 그러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개인이든, 회사든, 국가든 언제나 ‘나의 존재성을 앞세우고 다른 것들을 지배하고 흡수하려는 존재론의 논리에 한없이 충실합니다. 더러는 자신을 낮추거나 뒤에 세우는 경우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프로그램의 일환일 뿐입니다. ‘마키아벨리의 지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단기적으로는 다소의 손해를감수하더라도 장기적인 이득을 염두에 둔 계산된 희생이 어쩌면 우리가 도달한 지성의 현 수준인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의미의 연대와공유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세계화는 콜럼버스의 세계화입니다. 오늘날도 콜럼버스는 살아있습니다. 콜럼버스 개인에게는 야박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개인이 아닙니다. 콜럼버스는 험한 파도와 사투를 벌인 한 사람의 바다 사나이일 뿐이라 할 수 있지만 그는 근대사회의아이콘입니다. 콜럼버스는 지금도 살아 있습니다. 오늘날도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고 이 발상의 전환을 강조하는 예로서 반드시 콜럼버스가 등장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계란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계란을 책상 위에 세우지 못하는데 콜럼버스만이 계란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단지 발상의 전환에 관한 일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란의 모양은 어미 닭이 체온을 골고루 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모든 알이 그렇습니다. 어미 품을 빠져나가 굴러가더라도 다시 돌아오게끔 만들어진 타원형의 구적입니다. 바로 생명의 모양입니다. 이것을 깨트려 세운다는 것은 발상의 전환이기에 앞서 생명에 대한 잔혹한 폭력입니다. 잔혹한 폭력을 발상의 전환이라고 예찬하는 우리의 무심함은 무심함이 아니라 비정함에 다름 아닙니다. 사람의 판단력에 끝까지 집요하게 끼어드는 것이 콤플렉스입니다. 콤플렉스는 합리적인 판단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본인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우리들의 의식 속에는 상당한 콤플렉스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멕시코대학에서 꼬박 하루를 보냈습니다.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오히려 내가충격을 받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그렇게 많은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오는 이유에 대하여 은근히 시비를 걸었습니다. 칠레의 네루다Pablo Neruda부터 콜롬비아의 마르케스Gabriel García Márquez, 멕시코의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Lozano, 페루의 바르가스 요사MarioVargas Llosa에 이르기까지 노벨문학 수상자가 즐비합니다. 우리나라는 단 한 개의 노벨문학상에 목매달고 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의 노벨문학상은 유럽이 라틴아메리카를 그들의 중하위에 견인해 두려는 정치적 배려가 아닌가 하고 질문했다가 호되게 야단맞았습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주경기장이 멕시코대학이었습니다. 대학 운동장과 건물마다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벽화가 화려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학생들이 리베라를 이야기했습니다. 그가 바로 피카소를 결별하고 벽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은 궁정과 귀족들의 거실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광장에서 민중들과 공유하는 정치학이라는 것이 리베라의 정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리베라의 불행한 부인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의 이야기도충격이었습니다. 자기의 그림을 유럽의 어떠한 개념으로도 부르지말 것을 요구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에 이르면 라틴아메리카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창조적인가를 실감합니다. 한마디로 라틴아메리카는 ‘아버지 죽이기‘로 불리고 있을 만큼 유럽정전에서 자유롭습니다. 우리의 경우 피카소를 결별할 수 있는 미술인은 없습니다. 더구나 고전의반열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유럽의 문학과 음악에 이르면우리는 한없이 왜소해집니다. - P338
상품이 나타나기 전에는 ‘가치‘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물론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하듯이 일반적 의미로 쓰이기는 합니다. 그러나경제학에서 가치라고 하는 것은 교환가치입니다. 사용가치가 아닙니다. 쌀의 가치는 일용하는 곡식이 아닙니다. 그것이 다른 것과 교환될 때의 비율이 가치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가치는 쌀을 팔지 않을 경우에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상품이 출현하기 전에는가치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로빈슨 크루소가 큰 진주조개를 주웠다 하더라도 그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팔 수 없기 때문입니다. - P347
부부 관계 역시 등가관계로 인식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사례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상품문맥에 갇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 P350
여기서 우리가 짚어 봐야 합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벌써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아름다움은 ‘앎‘입니다. 숙지성熟知性이 그 본질입니다. 오래되고 친숙한 것이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상품미학의 경우 더구나 패션은 ‘모름다움‘에 탐닉하는 것입니다. 미적정서의 역전입니다. 한자로 ‘美‘는 ‘羊+大‘ 입니다. 양이 큰 것을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 고기는 먹고, 그 털은 입고, 기름은 등유로 사용하고, 뼈는 화살촉을 만듭니다. 물질적 삶의 실체입니다. 그런 양이풀밭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것을 보고 있을 때의 흐뭇함, 그것이 미적정서의 근본입니다. 생명 그 자체를 뒷받침하는 안정감, 그것이 미의 본질이고 아름다움의 내용입니다. 상품미학은 ‘모름다움‘ 입니다. 오래되고 친숙한 것보다는 낯설고 새로운 것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합니다. 회사의 상표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부채표 ‘활명수‘뿐이라고 합니다. 회사명과 로고도 빠르게 외국어로 바뀌었습니다. 모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이것은 단지 미적 정서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의 미적 정서가 이처럼 역전되고 있는 까닭은 상품미학 때문만은 아닙니다. 문화적 자부심이나 주체성이 없는 사회의 일반적 특성이기도 합니다. 주변부의 문화적 콤플렉스입니다. 모든 권력은 바깥에 있습니다. 식민 모국에 있고 패권 국가가 행사합니다. 새로운 물건은 항상 배를 타고 해외에서 왔습니다. 최종적인 결정은바깥에서 이루어집니다. 모름다움의 권력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패션이라는 이미지의 변화가 사회변화를 대체한다는 사실입니다. 사회 변화의 실천적 열정을 희석시킵니다. 상품미학에 민감한 젊은 층의 사회의식이 현실로부터 이미지 쪽으로 급속하게 이동해 버린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상품사회는 이처럼 상품-화폐 구조 속에 우리를 가둠으로써 인간적정체성을 소멸시킬 뿐 아니라 우리들의 미적 정서 그 자체를 역전시칩니다. 그리고 변화 그 자체를 이미지화함으로써 현실의 개혁과 진정한 변화의 열정을 소멸시키고 있습니다. - P355
에피쿠로스의 도표에 의하면 행복과 소비는 비례하지 않습니다. 소비가 아무리 증가하더라도 행복은 증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경제원칙은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것"입니다. 참으로 비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최대의 희생으로 최소의 효과를 얻는 것‘이 훨씬 더 인간적입니다. 고뇌와 방황과 좌절이 인간을 얼마나 성숙하게 하는지에 대하여 경제원칙은 무지합니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구호도 비인간의 극치입니다. 단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최대의 소비는 전쟁입니다. 전쟁이야말로 미덕이 된다는 역설입니다. 지금 그것이 현실이기는 합니다. - P359
생산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나는 의자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벌 받고 있는 그림을 자주 보여줍니다. 소외의 전형적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의자를 만들 때는 그 위에 편히 앉으려고 만듭니다. 그런데 그것을 머리 위로 치켜들고 서 있다는 것은역설의 극치입니다. 자기가 만든 생산물로부터의 소외입니다. - P365
세월이란 강물처럼 흘러가면 그만인 것, 굳이 1월 1일이라고 무엇을 각오하라는 것이 잘 이해가 안 된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어렸던 우리들도 충격이었습니다. 어린이들이었지만 우리 교실은 그 말이 갖는 철학(?)적 깊이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저 이야기를 내가 할걸.‘ 그 친구의 이름은 끝끝내 기억해 내지 못했습니다. 공부도 운동도 전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친구였습니다. 신나게 리듬을 타고 ‘숙제‘ 아니면 ‘심부름‘을 댔던 나로서는 뼈아픈 후회로 남았습니다. -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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