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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확인 기록 - 판타스틱 픽션 BLACK 1-15 ㅣ 케이 스카페타 시리즈 15
퍼트리샤 콘웰 지음, 홍성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3월
평점 :
퍼트리샤 콘웰의 ‘스카페타 시리즈’ 15권인 <미확인 기록>의 국내 번역판은 전작인 14권 <약탈자>로부터 1년 8개월 만에 출간되었습니다. 1년에 1권씩 발간되는 원서의 15권이 2007년 10월에 나왔음을 감안한다면 번역본의 인터벌이 상당히 많이 벌어진 셈이지요.
콘웰의 스카페타 시리즈의 특징을 역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수사물인 로버트 페터슨의 ‘우먼스 머더 클럽’ 시리즈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점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페터슨의 소설에서는 모두 4명의 여성 주인공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여성들끼리의 girl talk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가만히 읽다보면 지극히 여성적인 말투와 소재를 조근조근하게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30대 초반의 전문직 여성들의 대화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그 까닭은 대화의 내용이나 말투 자체가 남성들이 상투적으로 떠올리는 여성들의 피상적인 모습일 뿐이지, 실제 여성들의 대화나 내면 심리와는 너무나도 다른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여성들 간의 우정이나 여자들끼리만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묘사되는 형태나 그 내면은 너무나도 상투적이어서, 실제 여성들의 행동 방식이나 여성들 특유의 사고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남성이 표면적으로 관찰하고 묘사한 여성들의 모습이라는 흔적이 너무나도 역력하게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그에 비해 콘웰의 주인공인 스카페타는 보다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며, 그런만큼 훨씬 더 사실적인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수많은 연쇄살인과 복잡한 미제사건들을 해결한 천재적인 법의학자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스카페타 박사는 남성 작가가 쓴 수사물의 히로인이라면 영웅적이고 빛나는 모습을 중심으로 그려지겠지만, 콘웰은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가학적이고 정신병적인 악의에서 비롯된 사건들과 인간의 탈을 쓴 진혹한 범죄자들을 계속해서 보고 겪는 과정에서 스카페타와 주위 사람들의 정신이 서서히 피폐해져가는 모습으로 그려냅니다. 사실 범죄자들을 잡는 쾌감에만 도취된 영웅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고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라면 이쪽이 더 당연한 것이겠지요.
스카페타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연인인 벤턴 웨슬리도 불가피하게 자신의 죽음을 위장해야 했던 시기에 스카페타를 멀리서 지켜만 보아야만 했던 당시의 기억 때문에 계속해서 힘들어 하기 때문에 벤턴의 생환이 확인된 이후로도 두 사람의 관계는 에상했던 해피 엔딩과는 거리가 먼 갈등과 고민으로 점철되고, 거리상으로도 늘상 유리된 삶을 이어갑니다. 스카페타의 조카인 루시 역시 IT 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거머쥐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어 미국에서 가장 큰 사설 법의학 연구소를 직접 짓고 운영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불안정하고 파괴적인 충동에 시달리며, 급기야는 뇌종양 진단마저 받게 됩니다. 스카페타의 단짝인 피트 마리노 형사는 스카페타와 함께 한 화려한 검거 실적에도 불구하고 아예 경찰을 그만두고 맙니다.
20여년 동안 장장 14권에 걸쳐 이어져 온 화려한 경력과 수많은 영웅적인 검거 실적에도 불구하고 주인공과 그녀의 주변 사람들의 삶과 정신이 오히려 극도로 피폐해진 데에는 미국의 현실도 상당 부분 반영되어 있습니다. 스카페타가 버지니아 법의국의 법의국장으로 승승장구할 때는 시기적으로 클링턴 정부 때였습니다. 스카페타의 모습은 종종 힐러리 클링턴을 연상시키기도 하죠.
하지만 부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스카페타의 주변 환경은 급속도로 비효율적이고 불신에 가득찬 관료 조직화되어 갑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법의국장 자리마저 내놓게 되는데, 이번 편에서는 버지니아를 떠나 정착했던 플로리다가 태풍으로 인해 회복불능의 피해를 입는 바람에 다시 찰스톤으로 이주하여 오래된 마굿간을 개조한 허름한 사무실에서 혼자서 모든 일을 직접 처리해야 하는 처지로까지 몰리게 됩니다.
스카페타의 본거지는 플로리다에서 찰스톤으로 바뀌었지만, 지난 편의 가장 큰 문제였던 정신과 의사 셀프 박사는 이번 편에서도 스카페타의 가장 큰 적으로 여전히 건재하게 등장하며, 셀프 박사의 영향을 받은 마리노의 이해하기 힘든 타락은 더욱 정도를 더해갑니다.
이번 편의 표면상의 범죄자는 로마에서 테니스 스타인 젊은 여성을 처참하게 살해하고 찰스턴에서도 참혹한 살인들을 연이어 저지른 샌드맨이지만, 샌드맨의 정체를 밝혀가는 과정에서 셀프 박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샌드맨의 가계도가 밝혀지고, 샌드맨의 범행이 단지 이라크 파병 미군의 심리적 외상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범죄와 사이코 패스적인 DNA의 영향이 훨씬 더 절대적이었음이 밝혀집니다. 샌드맨과 셀프 박사의 연계에는 나이 설정 등 다소 간의 자의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셀프 박사의 행동에 대한 설명이나 카타르시스라는 점에서는 설득력이나 재미는 충분합니다.
오랫동안 불안정하고 균열 상태였던 스카페타와 벤턴, 스카페타와 루시의 관계는 이번 편에서 마침내 서로 화해를 거쳐 관계가 급진전되지만, 셀프 박사의 악의적인 조종에 놀아난 마리노는 스카페타와의 관계에 결정적인 균열을 내고 잠적해 버립니다. 20여년 동안 스카페타를 돌봐온 헌신적인 비서 로즈는 폐암으로 남은 생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비극적인 사실이 밝혀지고요.
지난 권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권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20여년 동안 지속되어 온 살인자들의 만행과 언론과 주변 기관, 사람들의 악의에 지쳐버린 스카페타가 나약한 심경을 수시로 드러내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여성 작가만이 그려낼 수 있는 치밀하고 중층적인 설명과 묘사로 그려진다는 점입니다. 섬세하고 감각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냉정하고 사실적인 모습으로요.
이 시리즈의 묘미인 법의학을 통한 과학 수사는 이제는 어지간한 것들은 대부분 다 보여준 만큼 특별한 것은 없는데, 초반부에 로마 경찰들이 사용하는 사건 현장의 3D 사진 기법은 최근의 3D 열풍을 떠올리며 상당히 흥미로운 느낌을 줍니다.
다음 편인 16권의 부제는 ‘스카페타’라고 합니다. 주인공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내세운 만큼 20년에 걸쳐 15권 동안 지속되어 온 설정과 전개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마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무척 큽니다.
ha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