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트룸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5 로마사 트릴로지 2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근대 이후에 씌여진 서양 역사서들 중에서 누구나 최고의 역작이자 필독서라고 첫 손에 꼽는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 ]90년대 초에 간행되었던 까치의 일본어 중역판 번역본 이래 무려 26년 만에, 제대로 된 완역본으로는 사실상 처음으로 2010년에 완간된 인문학계에서는 중요한 사건이 인터넷 대형 서점 사이트들에서는 별다른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은 현재 우리나라 독서계가 처해있는 극도로 열악한 상황을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해 보여주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 풍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작 아시모프와 윈스턴 처칠에서부터 조지 루카스까지 수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을 매료시켰던 기번의 이 역작이 정작 권위있는 영문학자나 역사학자의 공들인 번역으로 발간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번 번역본의 번역자들은 대학원생과 강사들이어서 번역의 신뢰성에 적지않은 불안감을 던지고 있습니다)은 우리나라 역사학계와 영문학계의 심각한 직무 유기라고까지 할 수 있는데, 그나마 이 대작의 출판조차 기번에 비하자면 권위나 신뢰성에 있어서는 한참 떨어지고 국내에서는 사실상 기번의 대중화 버전이나 쉽게 풀어쓴 대안으로 읽혀왔던 시오노 나나미의 [ 로마인 이야기 ]의 성공에 힘입어 이루어진 것이라는 뒷 이야기는 본말이 한참이나 전도된 우리의 빈약한 인문학적 토양을 개탄케 할 정도입니다.

 

아직 시오노 나나미만큼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작가적 역량이나 작품의 균일한 완성도, 소설적인 재미, 그리고 팬들의 한결같은 충성도에 있어서는 가히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인 로버트 해리스가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새로운 역사 소설 3부작의 첫 번째 대목인 [ 임페리움 ]이 출간된 시기가 공교롭게도 기번의 명저와 비슷한 때라는 절묘한 우연은 이미 로버트 해리스의 필력을 알고있는 팬들에게는 상당한 기대와 즐거움, 그리고 비교의 묘미를 선사해 줍니다.

 

2차 세계 대전 전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 대체 역사 장르에 속하는 [ 당신들의 조국 ][ 이니그마 ], 그리고 [ 아크엔젤 ]의 세 작품을 발표한 후에 로버트 해리스는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시대인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 폼페이 ][ 임페리엄 ] 두 작품과 현대의 영국과 미국을 배경으로 한 [ 고스트라이터 ]라는 무려 2000년이라는 긴 세월의 양 끝에 놓여있는 전혀 다른 경향의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함으로써 작가 스스로 앞으로의 작품 전개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이들 중 가장 최근인 2008년에 발표된 [ 고스트라이터 ]는 현재의 영국과 국제 정치계의 부패하고 어두운 면을 직접적인 비유를 통해 통렬하게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어서 그의 작품으로는 다분히 어조가 직설적이다는 생각을 안겨 주었는데, 아마도 이는 작가가 현실 정치에 대한 분노와 우려를 자신의 글에 고스란히 담아 동시대적인 관점에서 독자들에게 고발한 측면이 크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에 비해 [ 폼페이 ]는 로마 시대의 수도교를 중심으로 한 도시와 생활의 정교하고도 생생한 묘사가 후반부의 화산 폭발의 충격적인 표현과 함께 놀랄만큼 압도적인 느낌을 줌으로써 작가가 로마 시대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매우 방대하고 충실하게 했구나 하는 감탄을 안겨주어 로버트 해리스에 의한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또 다른 작품을 기대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상과 기대에 부응하듯 해리스는 로마 시대를 무대로 한 [ 임페리움 ][ 폼페이 ]를 발간한 이듬 해인 2006년에 발표함으로써 [ 폼페이 ]를 준비하면서 습득한 고대 로마 사회에 대한 방대한 자료들을 정교하게 재구성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강대하고 화려했던 로마 제국의 사회와 정치를 본격적으로 파헤쳐 나간다는 야심찬 계획을 본격화하고, 2009년에 발간할 차기작 역시 로마를 배경으로 한 [ 루스트룸 ](처음에는 [ 타이탄 ]으로, 그 다음에는 [ Conspiracy(Conspirata) ]로 알려졌었죠)이라고 밝힘으로써 2차 대전사에 이은 로마사 3부작의 완성을 일찌감치 예고하였습니다.

 

 

 

 

 

A.D 79년에 발생했던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화산 폭발을 중심 사건으로 삼음으로써 수도 로마가 아닌 이탈리아 남동부 변방에서 발생한 대규모 재난 드라마적인 플롯에 중점을 두었던 [ 폼페이 ]와는 달리 [ 임페리움 ]은 제국의 중심부인 로마를 공간적 배경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는 [ 폼페이 ]보다 150년 전인 B.C 7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1000년에 걸친 로마 역사상 가장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던 공화정이 제정으로 넘어가던 시기를 배경으로 삼음으로써 로마사의 가장 격동적이었던 순간의 한복판으로 과감하게 뛰어들었습니다(시오노 나나미의 [ 로마인 이야기 ] 3권 후반부인 폼페이우스 시대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 시기의 이야기를 이끌어 갈 중심 인물로 로마 역사상 최고의 웅변가이자 문장가, 그리고 변호사이자 정치인, 철학자였던 키케로를 중심에 놓고(작중 화자로는 키케로의 개인 비서이자 속기술의 창안자인 자유 노예 티로로 설정하였습니다), 그 주위에 1차 과두정의 두 거인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그리고 막 로마 원로원에 발을 들인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배치함으로써 그 이름들만으로도 눈이 부신 초호화 캐스팅을 구성하였습니다.

 

[ 임페리움 ]27세의 키케로가 웅변과 변론술, 그리고 철학을 공부한 후 30대 초반의 나이에 막 원로원에 발을 디딘 정치 신인인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두 부분으로 나눠진 소설의 1부에서는 키케로가 속주의 총독이었던 베레스가 임기 중에 저지른 폭정과 살인, 가혹한 착취를 고발하여 귀족 계급의 온갖 방해와 회유를 물리치고 마침내 그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일약 로마의 유명 인사가 되는 계기가 된 사건을 중심으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같은 당대의 집정관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들을 법정 소설 형식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2부는 1부에서 거둔 성공을 토대로 조영관과 법무관을 차례로 역임한 키케로가 고전적인 공화정을 붕괴시키고 향후에 결국 제정으로 가게 되는 과도기인 과두정을 기도하는 폼페이우스를 돕고, 험란한 과정을 거쳐 로마 정계의 정상인 집정관에 당선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작품이 해리스의 기존 대체 역사소설들과 가장 크게 차이나는 점은 이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주요 사건이나 인물들이 대부분 실제로 발생했던 역사적인 사건들이고,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 역시 역사적인 기록과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 해리스는 이 작품에서 가공의 대체 역사를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인물과 사건들을 기록과 자료에 근거하여 치밀하게 복원해 내고 그 사이사이의 공백 부분들을 유추가능한 논리적인 추론에 근거하여 보완함으로써 2000년 전의 역사를 완벽하게 재현해 놓은 것입니다. 가공의 역사가 아닌 실제로 그랬을 인과성이 높은 역사를 기록과 논리에 근거하여 정교하게 짜맞춰 재구성해 내는 이러한 시도는 대체 역사보다도 훨씬 더 가치있는 창작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46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관통하여 독자를 단숨에 사로잡는 것은 바로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시기인 B.C 70년 경의 로마에 거주하였던 키케로를 비롯한 역사적인 인물들의 생활 풍경을 마치 직접 TV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손에 잡힐 듯이 생생하게 그려낸 사실적인 모습들입니다. 이 책보다 2배 이상 더 두꺼운 한 세대 전의 노벨상 수상작인 솅키에비치의 [ 쿼 바디스 ]나 루 월레스의 [ 벤 허 ]가 그려냈던 것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생동감과 사실감을 느끼게 해주는 데에는 바로 20세기 후반부에 급격하게 발전된 고대사 연구 결과들을 전폭적으로 반영하고, 거기에 로버트 해리스 특유의 역사 속의 유물들을 살아 숨쉬게 만드는 활기찬 필력이 더해진 이상적인 결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노골적으로 카이사르 추종자를 자처하는 시오노 나나미의 극도로 왜곡된 시선으로 인해 지나치게 신격화, 정당화되고 있는 카이사르의 권력욕과 그 반대편에서 공화정의 이상을 수호하려는 키케로의 역사적 무게를 제대로 균형잡아 그려낸 점이 인상적이고, 로마의 정치 체계가 안고있는 구조적인 문제점이 현대 미국의 그것과 유사한 점도 주목할 만 합니다.

 

2000년 전 고대 로마의 가장 긴박하고 흥미진진했던 한 시기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로마사 최고의 영웅들의 모습을 마치 [ 글라디에이터 ][ 로마 ]를 보듯이 눈 앞에 살아 숨쉬는 모습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로마와 인류의 역사를 극적으로 전환시킨 드라마틱한 사건 전개 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를 현재에 완벽하게 살려내었다는 점에서 [ 로마인 이야기 ]보다도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을 로마 매니아로 끌어들인 가능성이 크다고 할 것입니다.

 

 

 

 

[ 임페리움 ]에 이은 로버트 해리스의 로마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인 [ 루스트룸 ][ 임페리움 ]에서는 아직 본격적으로 활동하지 않은 카토와 카틸리나가 로마 역사의 중대한 사건에 중심 인물들로 등장하고, 카이사르가 삼두정치를 거쳐 집정관에 취임하는 영웅 시대를 그려낼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2009년에 발간되고 2년 뒤인 201112월에 국내판으로 출간된 [ 루스트룸 ]은 그러한 예상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내용은 훨씬 더 복잡하고 드라마틱합니다.

 

[ 루스트룸 ]의 이야기는 마침내 집정관으로 당선된 키케로가 한 편으로는 집정관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해 준 벌족 귀족들의 압력에, 다른 한 편으로는 카이사르와 크라수스를 비롯한 민중파들의 압력을 받으면서 그 중간에서 아슬아슬한 권력의 조율을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공화국의 영토를 빈민들에게 무상으로 할양하고, 나아가서는 벌족 귀족들의 재산을 압류해 빈민들에게 나눠주겠다는 허황된 공약을 미끼로 빈민들을 앞세워 권력을 차지하려는 카이사르의 권력을 위한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그의 추종자들인 카틸리나가 키케로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속에서 권력을 위한 여러 세력들의 암투가 치열하게 펼처집니다.

 

가문의 후광도, 군사적인 영예나 힘도, 부나 파벌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로마 원로원의 정점에 선 키케로인 만큼 카이사르의 추종자들과 크라수스의 막대한 금력, 가문의 권위와 후광을 앞세우는 벌족 귀족들의 지배력, 거기에다가 동아시아에서 4만의 정예 군단병을 거느리고 로마 귀환을 획책하는 폼페이우스의 군사력에 맞서 오직 자신의 두뇌와 웅변력, 필력으로만 막강한 세력들 사이에서 연이어 닥치는 위기 상황들을 타파해나가는 키케로의 모습은 어떤 정치 드라마보다도 훨씬 더 흥미진진하고 드라마틱한 재미를 안겨줍니다.

 

카이사르가 간교한 계략으로 최고 제사장에 선출됨으로써 이후 그의 로마 정복의 발판이 마련되지만, 키케로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군사력을 모아 반란을 획책한 카탈리나 일파의 음모를 분쇄함으로써 불과 1년에 불과한 집정관 임기에서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둡니다.

하지만 집정관에 올라 로마 공화국을 위협하는 온갖 음모에 성공적으로 맞서 싸우는 영웅적인 모습을 그렸던 1부와는 달리 2부에서는 집정관에서 물러난 키케로가 과거의 영광에 지나치게 도취된 나머지 승자의 혼미에 빠져들고, 원로원의 쇠약해짐을 틈타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낸 카이사르에 의해 로마의 유력 인사들이 차례로 무릎을 꿇고 마침내는 키케로마저 가까스로 로마를 빠져나가 망명의 길에 오르는 씁쓸한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 루스트룸 ]2000년 전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여기에서 그려지는 모습은 현재의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모습입니다. 이상적인 문민 정치를 실현하려는 개혁주의자가 오직 권력 쟁취의 야욕에만 가득 찬 극도로 방탕하고 이기적인 야심가에게 밀려나 축출되고, 그 배후에는 정의나 인의보다 말초적인 욕심과 이기심에 휘둘리는 무지몽매한 민중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욕심에만 눈이 멀어 거짓말쟁이 사기꾼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민중들이 선거라는 허울 뿐인 민주주의의 절차를 팔아넘긴 결과 민중에게 최대의 고통을 안겨주는 독재자가 탄생하는 모습은 현재의 우리나라나 얼마 전의 미국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있어 답답할 정도입니다.

 

아직 3부작의 마지막 권이 남아있지만, 지금까지 발간된 [ 임페리움 ][ 루스트룸 ]만으로도 충분히 로버트 해리스는 로마를 배경으로 한 결정적인 명작을 창조해 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극적인 재미마저 가득한 이 두 책은 현대 역사 소설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ha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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