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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과의 대화
리처드 오스본 지음, 박기호.김남희 옮김 / 음악세계 / 2010년 11월
평점 :
20세기 클래식 음악 지휘계를 푸르트벵글러와 함께 나란히 양분한 명실상부한 20세기 후반 지휘계의 제왕이자 현대적인 오케스트라 지휘 방식과 스타일을 확립한 혁신가, 그 자신으로 대표되는 카리스마 넘치는 거장 지휘자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전파한 아이콘적인 존재였던 만큼 미국 아마존에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이름을 넣어 검색해보면 무려 300권에 가까운 카라얀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올 정도이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국내에 번역되거나 출간된 카라얀에 대한 전기나 평전은 찾아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빈약한 것이 국내 음악 출판계의 취약한 현주소이다.
오랫동안 국내에서 유일한 카라얀 평전으로 군림해 온 로베르트 바흐만의 <음악의 황제 카라얀 - 그 영광의 뒤안길>은 저자 스스로가 아예 카랴안으로부터 공식적인 전기를 의뢰받았다가 일방적으로 중단을 통보받은 데에 대한 울분을 서문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격렬하게 성토하여 시작할 정도로 카라얀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이 토대에 짙게 깔려있는 전혀 공정하거나 객관적이지 못한 책이고, 국내 번역과 출간 역시 카라얀에 대해 직접적인 반감을 수도 없이 공개적으로 표출해 온 특정 잡지사에 의해 부실하게(표지와 본문 어디에도 저자의 이름이 없다!) 이루어짐으로써 80년대 일부 구세대 평론가들에 의해 무분별하게 조작되고 전파된 카라얀 혐오론의 근거로 악용되었을 뿐이다.
이처럼 문제 많은 바흐만의 책이 국내에서 사실상 유일한 카라얀 평전으로 군림해 온 이해하기 힘든 기형적인 현실은 무려 20여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카라얀 사후 근 20년이 지난 뒤인 2009년에야 비로소 새로운 카라얀 전기인 페터 윌링의 <카라얀 - 불꽃의 지휘자>(21세기북스) 단 1종만이 새롭게 출간되었을 뿐이다.
카라얀과 대비되어 온 존재인 푸르트벵글러에 대해서는 헤르베르트 하트너에 의한 방대한 푸르트벵글러 전기가 두툼한 양장본으로 국내에서 출간(마티)되었기에, 음악 애호가들은 가장 권위있는 카라얀 전기로 평가받고 있는 리처드 오스본이 1998년에 출간한 < Herbert von Karajan - A Life in Music >(Chatto & Windus, London)이 국내에도 번역되어 나오기를 오랫동안 학수고대해 왔는데, 이미 몇 년 전부터 국내 출판사에 의해 정식으로 계약되어 번역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863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때문인지 아직까지도 번역본이 출간되지 않고 있어서 애호가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그런데 2010년 말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리처드 오스본이 저자로 된 <카라얀과의 대화>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저자의 이름만을 보고 많은 애호가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온 바로 그 책으로 여기고 앞다투어 주문했다가 배송되어 온 책의 얇은 두께에 의아해 했는데, 이 책의 저자는 < Herbert von Karajan - A Life in Music >의 그 리처드 오스본이 맞지만, 이번에 음악세계사를 통해 출간된 <카라얀과의 대화>는 그의 유명한 카라얀 전기가 아닌 그가 카라얀과 나눴던 인터뷰들을 정리하여 단행본으로 묶어놓은 보권 격인 별개의 책이다.
오스본은 1977년 5월부터 카라얀이 사망하기 직전인 1989년 6월까지 약 12년 동안 잘쯔부르크와 베를린 등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카라얀과 공적인 인터뷰와 사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중 초기의 인터뷰들은 요악되어 오스본이 평론가로 고정 기고하고 있는 [그라모폰]지에 실려 독자들의 호평을 받았는데, 그후 카라얀이 명예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던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의 제안을 받아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이 이 책이다.
오스본이 밀도높게 압축하여 정리한 40쪽 분량의 카라얀의 경력에 대한 개괄에 이어지는 본격적인 인터뷰는 빈 국립 음악원 지휘과 졸업 이후 울름과 아헨 등지에서 경력을 쌓아나가던 지휘자 경력의 초창기 시절, 젊은 시절에 그가 중소 오페라하우스들에서 주력했던 베르디와 푸치니, 벨리니 등 이탈리아 오페라 작품들의 지휘와 녹음에 관한 이야기, 베를린 필과의 만남과 초기에 단원들과 관계를 쌓아 나간 과정, 지휘와 지휘법에 대한 그만의 관점을 보여주는 이야기, 그의 장기인 시벨리우스와 R.슈트라우스, 신 빈악파의 작품들과 녹음에 관한 이야기, 음반 녹음과 영상물 제작에 대한 카라얀의 견해와 후기, 에필로그 등 총 9개의 장과 부록인 카라얀의 오페라 프로덕션 목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219쪽의 상당히 얇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두께에 비해서 매우 많은 량의 수준높은 정보들이 담겨 있는데, 이런 점이 400쪽이 넘는 적지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을 카라얀의 나찌 관련 의혹과 인간적인 결점 부각에만 치중할 뿐 그의 음악 연주나 레코딩, 활동에 대한 언급은 놀랄만큼 적었던 바흐만의 책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베를린 필을 맡기 전 중소 규모의 극장들을 전전하던 카라얀의 경력 초창기의 힘들었던 이야기들이나 그가 직접 만나 의견을 나누었던 20세기 음악계의 주요 작곡가나 지휘자, 연주자, 프로듀서들에 대한 귀중한 이야기들, 수많은 연주와 녹음에 얽힌 이야기들, 음악을 영상으로 표현하고 영상물로 제작하는 작업에 대한 예술론적인 고찰 등 그동안 국내에서는 접하기 힘들었던 고급스러운 정보와 심도 깊은 내용들이 진솔한 어투로 충실하게 담겨져 있어,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는 아직까지도 번역본이 나오지 않고 있는 리처드 오스본의 본 전기의 출간이 더욱 더 기다려질 정도이다.
원문을 번역기로 돌린 뒤 대충 다듬어 출간한 것처럼 너무나도 어색한 영어 어순과 쉼표(,)의 남발로 인해 문장들을 두 세 번씩 반복해서 읽어도 이해가 잘 안될 정도로 부실한 번역과 ‘그라모폰(음반), CD 비디오(LD), 독일어 레퀴엠, 트로이의 사람들’ 같은 보편적이지 않은 단어 선택, ‘플라그슈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 같은 상당한 오역과 오탈자들은 음반 평론가와 공연 기자 출신 번역가의 공동 작업이라기에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아쉬움이 많아, 13,000원이라는 가격을 너무 높게 책정되었다고 느끼게끔 만든다.
ha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