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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넬의 소녀들
앨리스 호프만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92024194593333.jpg)
어린 시절 읽었던 [ 작은 아씨들 ] 이 워낙 감명적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구하기 힘들었던, 아마도 국내에 딱 한 종 뿐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2부의 완역본(아마 아직도 1부는 완역본이 두 어 종 되지만 2부는 완역본이 거의 없고, 3, 4부는 국내에 제대로 번역조차 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키다리 아저씨 ] 역시 비슷하게 2부의 번역본은 찾기가 어렵죠. [ 빨강머리 앤 ] 은 다행히 전 10부가 모두 세트로 나왔는데 말입니다)을 보았는데, 1부에서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전개에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베스의 죽음 이후에 로리가 조우가 아닌 에이미와 결혼한 것이 소년소녀 문학의 전형적인 해피엔딩과 거리가 멀게 느껴져서 결정적으로 실망하였고, 조우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베어 선생이라는 별다른 매력없는 캐릭터와 갑작스럽게 결혼을 하게 되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학생 시절에는 싫어했던 제인 오스틴의 [ 오만과 편견 ] 을 나이가 든 후에 다시 읽어보고는 [ 작은 아씨들 ] 2부에서 실망했던 점들이 오히려 이 작품에서 훨씬 더 고전적인 형태의 해피엔딩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인 오스틴이 완성해 낸 19세기적인 로맨스 문학의 원형으로써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시대 설정이 반세기 가량 앞서기는 했지만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 작은 아씨들 ] 의 전개는 [ 오만과 편견 ] 보다 훨씬 더 현대적이었던 셈이지요. 제인 오스틴의 시대에는 여성이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올코트의 시대에는 조우처럼 여성이 자신의 이름으로 전업 소설가로 활동하는 것이 가능해진 시대가 되었으니까요.
[ 작은 아씨들 ] 은 [ 키다리 아저씨 ], [ 빨강머리 앤 ], [ 소공녀 ] 등과 함께 소녀 소설의 고전으로 시대를 초월한 인기를 여전히 얻고있는 만큼, 아마도 영미권에서는 그 작품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거나 아예 오마쥬를 바치는 작품이 적지않게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국내에 번역된 작품은 거의 본 적이 없어서(마르셀라 세라노의 <작은 아씨들이여, 영원히 안녕> 라는 작품이 있더군요) 이 작품이 시대에 따라 또는 현대적으로 변주된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이 이 작품의 팬으로써 적지않게 아쉬웠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세대의 소녀들의 고전인 [ 작은 아씨들 ] 을 21세기인 지금의 감각에 맞춰 새롭게 쓴다면 어떤 작품이 될까요? 이런 궁금증에 답을 주는 소설이 바로 앨리스 호프먼의 [ 아넬의 소녀들 ] 입니다.
사실적인 설정 속에 몽환적이고 마술적인 요소를 삽입한 ‘매직 리얼리즘’ 기법으로 가족 관계나 로맨스를 그려내어 많은 호평을 받고 있는 앨리스 호프먼이 2009년에 발표한 [ 아넬의 소녀들 The Story Sisters ] 는 [ 작은 아씨들 ] 에 대해 직접적인 오마쥬를 바치고 있는 작품입니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92024194593334.jpg)
[ 아넬의 소녀들 ] 의 주인공은 이혼한 어머니 애니와 함께 살고있는 세 자매 엘브와 메그, 클레어입니다. [ 작은 아씨들 ] 에서는 남북전쟁에 참전한 아버지가 이 작품에서는 시대적 추이에 맞춰(?) 이혼한 것으로 나오고, 등장하는 비중도 딱 [ 작은 아씨들 ] 후반부에 등장하는 아버지 정도입니다.
주인공인 스토리 자매의 이름이 엘리자베스([작은 아씨들] 에서는 ‘베스’라는 애명으로 불리지만, 이 작품에서는 ‘엘브’라는 애명으로 나옵니다), 메그, 클레어로 3명 중 2명이 [ 작은 아씨들 ] 의 네 자매 중 두 명의 이름과 똑같습니다. 심지어 엘브의 애인의 이름은 아예 [ 작은 아씨들 ] 에서 조우의 남자친구 이름과 똑같은 ‘로리’입니다.
이외에도 [ 작은 아씨들 ]에서 이국적인 장소로 자주 등장했던 파리가 이 작품에서는 제2의 무대로 나옵니다.
이처럼 [ 작은 아씨들 ] 에 명백하게 오마쥬를 바치는 설정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 작은 아씨들 ] 의 주인공 자매들이 21세기에 태어났더라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을까 하는 궁금증을 지극히 사실적인 설정과 전개로 보여줍니다.
이야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인공 격인 인물은 세 자매 중 큰 딸인 엘브인데, 풍부한 상상력으로 아넬이라는 가상의 지하 세계와 언어를 창조하고, 스스로를 어린 시절에 인간에 의해 유괴된 아넬의 천사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이야기는 고전들과는 달리 어둡고 비극적인 내용으로 시작되고 전개됩니다. 어린 시절 클레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엘브는 학교 선생인 변태 성추행범의 차에 클레어가 타자 동생을 내리게 하고 자신이 동생 대신 끌려가 끔찍한 일을 당합니다. 엘브의 마음 속에 내제되어 있는 그 어두운 기억은 엘브를 현실에서 도피하고 아넬의 세계에 집착하게끔 만듭니다. 아넬의 이런 태도는 학교와 일상 생활에의 부적응으로 이어져 불량한 남자 아이들과 어울리다가 약물에도 손을 대면서 결국 강제로 특수 학교에 보내지게 됩니다.
어둡게 변한 언니의 태도에 메그는 물론 클레어마저 거리를 두게 되는데, 특수 학교에서 만난 동급생의 형인 ‘로리’와 사귀게 되면서 마약마저 하게 되고, 결국 아버지의 차를 훔쳐 두 동생을 태우고 운전하던 엘브가 사고를 내어 메그가 죽게 됩니다.
메그의 죽음 이후 클레어는 실어증에 빠져 파리의 외할머니에게로 가고, 엘브는 마약 복용으로 교도소로 가게 됩니다. 자매의 어머니인 애니가 엘브의 추적을 의뢰한 사립탐정인 피트와 가까워지고, 출소한 엘브가 경제적으로 안정된 로리와 동거하게 되는 것으로 안정을 찾는 듯도 싶지만, 애니가 백혈병으로 죽고, 로리도 해로인 중독과 그에 연류된 사고로 죽음으로써 엘브는 다시 혈혈단신의 처지가 됩니다.
현대 미국의 병폐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어두운 전개이지만, 원본이 [ 작은 아씨들 ] 인 만큼 소설의 마지막 100쪽은 로리의 아기를 낳은 엘브가 총명한 딸 미미와 함께 정상적인 사회 생활로 복귀하는 모습과 클레어가 보석세공사로 일하면서 서서히 마음을 열고 마침내 자신의 짝을 찾아 결혼식을 올리게 되는 과정을 교대로 그려낸 후, 클레어의 결혼식을 위해 파리에 온 엘브가 마침내 클레어와 재회하는 모습을 마지막 장면으로 보여줌으로써 스토리 자매의 긴 이야기는 밝고 따뜻한 해피 엔딩으로 끝맺습니다.
소녀 소설의 영원한 고전인 [ 작은 아씨들 ] 에 오마쥬를 바치며 원본의 틀을 충실하게 옮겨온 작품이기는 하지만, 현대 미국의 어둡고 병든 면들을 회피하지 않고 사실적으로 적용시킨 까닭에 후반부 20%를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들은 전체적으로 비관적이고 우울한 전개로 일관하고 있어서, 아직 [ 작은 아씨들 ] 의 아름다운 세계에 동경을 지니고 있는 미성년의 독자가 읽기에는 다소 부담스럽고 불편할 부분이 많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고전 명작을 동시대의 무대로 옮겨와 현대의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원작이 발표되었을 당시에 받았을 느낌을 나름의 감각으로 재현해 낸 이 작품은 고전의 현대적인 재창조의 사례 중에서 손가락에 꼽을 만큼 우수한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빼어납니다.
프랑스어 표기가 다소 이상한 부분이 종종 눈에 띄는 점과 작가와 작품에 대한 해설이 없는 점은 다소 간의 아쉬움을 남깁니다.
haj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