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S 원숭이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나라에서도 활발하게 작품들이 번역, 출간되고 있는 일본의 대중 문학 작가들 - 물론 여기에는 무라카미 하루키나 무라카미 류 같은 순문학쪽에 가까운(?) 작가들과 특정 장르만 전문인 작가는 포함되지 않겠죠 - 중에서 꾸준하게 발표하는 신작들이 대부분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균일하게 유지하는 작가로는 히가시노 게이고, 이사카 코타로, 요시다 슈이치, 미야베 미유키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이사카 코타로인데, 특정 장르에만 치우치지 않는 소재의 다양성이라든가 소설적인 상상력과 창의력, 그리고 다채로운 문장력 등에서 볼 때 개인적으로는 천재성이 엿보이는 작가라고까지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한동안 ‘명랑한 갱~’ 시리즈나 [ 피쉬 스토리 ] 같은 오락성이 강한 작품들로 다소 실망감을 주었던 이사카 코타로가 그런 비판을 의식한 듯 2008년에 내놓은 [ 골든 슬럼버 ] 에서는 총리 암살이라는 스케일이 크면서도 현실적인 소재와 정부에 의한 국민의 사생활 감시라는 묵직한 주제를 느닷없이 총리 암살범으로 몰려 쫓기게 되는 주인공의 긴박한 도주와 음모를 꾸민 집단을 추적하는 과정을 치밀하면서도 다이내믹하게 그려냄으로써 야마모토 슈고로상과 함께 일본의 이름난 문학상들보다도 오히려 국내 독자들에게는 더 신뢰감을 주고 있는 ‘제5회 서점대상’을 수상(이사카 코타로는 1회 때부터 수상할 때까지 5년 동안 연속으로 매년 서점 대상 후보에 올랐다가 마침내 수상했으니 그 의의가 더 크다고 하겠습니다)함으로써 그의 팬들에게 ‘역시~’라는 찬탄과 함께 새삼 신뢰감을 복원시켜주었습니다.

(며칠 전에 영화로 만들어져 국내 개봉된 [ 골든 슬럼버 ]를 보았는데, 원작을 비교적 충실하게 옮겼으므로 기본적인 재미 자체는 충분하지만, 제작비 때문인지 소설 속의 중요한 장치이자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감시 장치를 생략함으로써 음모의 복잡성과 날카로운 주제 의식이 흐려진 아쉬움이 있습니다).

[ 골든 슬럼버 ] 이후 그의 신작을 기대하고 있던 팬들에게는 반갑게도 이사카 코타로가 올해 초에 발표한 신작인 [ SOS 원숭이 ] 가 일본에서 발매된 지 불과 6개월 여 만에 국내에서도 출간되어 국내에서도 그의 위상이 이전에 비해 많이 높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 해변의 카프카 ] 처럼 두 명의 서로 다른 주인공을 화자로 한 두 개의 이야기가 교대로 교차되면서 전개되어 나갑니다.

‘내 이야기’로 표시되는 첫 번째 이야기는 엔도 지로라는 청년을 화자로 하여, 대형 가전 마트에서 에어콘 판매 사원으로 일하면서 이탈리아 유학 시절에 어깨너머로 배운 엑소시즘으로 ‘악마 퇴치’를 한다는 그의 소문을 듣고 찾아 온, 어린 이절 이웃에 살던 친한 누나의 히키코모리가 된 아들 마사토를 만나 그가 하는 기이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원숭이 이야기’로 표시되는 두 번째 이야기는 시스템 개발 회사의 품질 관리 전문가로 인과성을 중시하는 극도로 이지적인 성격의 중년 회사원인 이가라시 마코토가 화자로, 300억 엔의 손실을 낸 증권 회사의 오발주 사건의 원인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접하게 되는 사건들이 차례로 펼쳐집니다.

주로 사적인 일상을 무대로 전개되는 첫 번째 이야기와 그와는 정반대로 공적인 회사와 업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두 번째 이야기는 서로 교차되어 전개되면서, 중간중간에 서로 겹쳐지는 장소인 편의점을 중심으로 특정한 사건과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등장하여 연관성을 암시하고, 거기에 공통적으로 [ 서유기 ] 와 그 주인공인 손오공이 등장하면서 환타지적인 성격도 띠어갑니다.

두 이야기가 서로 교차되며 서서히 접근하다가 ‘이가라시 마코토 이야기’로 표시되는 새로운 챕터에서 마침내 두 이야기의 화자가 공통되는 무대인 편의점에서 서로 조우하여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비로소 두 이야기 사이의 연관성이 밝혀지는가 싶지만, 여기에서 이야기는 전혀 뜻밖의 국면으로 전환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첫 번째 이야기에서 문제의 중심이었던 히키코모리 청년인 마사토가 예언(?)한 6개월 뒤의 이야기로, 6개월 후 지로가 이가라시 마코토를 만나 예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해 보니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다른 점들도 적지 않았지만 큰 줄기는 거의 일치한 것으로 밝혀집니다. 지로와 이가라시 마코토는 예언에 마지막으로 등장했던 장면인 집을 찾아가게 되고, 거기에서 손오공으로 추측되는 존재가 모든 사건의 진상을 보여주고, 그 사건들의 해결을 두 사람과 그동안 함께 등장했던 인물들에게 맡기게 됩니다.  

 


이사카 코타로 특유의 독특한 ‘이사카 코타로 월드’의 설정에 익숙한 그의 팬이라고 하더라도 느닷없이 옛 이야기 속의 존재인 손오공이 등장하는 부분에서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을 텐데, 사실 이 작품은 만화가인 이가라시 다이스케와의 공동 기획으로 시작된 작품으로, 실제 발생했던 증권사의 오발주 사건에서 착안하여 ‘손오공’과 ‘엑소시스트’라는 전혀 접점이 없는 두 가지 소재만을 공유하면서 소설과 만화를 동시에 창작하기로 한 작업의 결과물이라고 합니다. 

 
((이가라시 다이스케의 만화판은 [ SARU ] 라는 제목으로 2010년 2월에 출간되었는데,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 속의 인물들이 그대로 등장한다고 합니다).

만화가와의 공동 기획이라는 특성상 ‘손오공’과 ‘엑소시스트’라는 소재를 무조건적으로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이야기의 설정과 전개에는 다소 간의 무리가 엿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환타지적인 요소들 때문에 작가가 말하고 싶은 ‘누군가가 SOS 신호를 보낼 때 서로 손을 내밀어 도와주는 사회’라는 주제마저 흐려진 감도 있고요.

하지만 까다로운 조건을 특유의 재치있는 상상력으로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능력은 역시 이사카 코타로라는 찬탄이 흘러나올 만큼 탁월하고, 후반부의 구성 상의 반전은 탁월하게 참신한 소설적 구성 능력을 보여줍니다.

작가는 이 작품이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해 온 작품에 가깝다’고 말하였지만, 이사카 코타로의 팬으로써는 까다로운 조건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상태에서 [ 골든 슬럼버 ] 나 [ 종말의 바보 ], [ 사신 치마 ], [ 마왕 ] 같이 사회와 인간에 대한 깊이있는 관심과 강한 주제 의식이 참신하고 개성적인 방식으로 멋지게 결합된 이사카 코타로적인 작품을 다시 한 번 보여주기를 기대하게 만듭니다.

멋진 표지 디자인은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들 중에서 단연 최고라는 칭찬을 빼뜨릴 수 없네요.

ha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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