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정말 쇼비뇽 블랑같은 오후였어 - 연극보다 드라마틱하고 와인보다 향기로운 43가지 인생 레시피
신리 지음, 이희숙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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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보그 > 지의 음식 평론가인 제프리 스타인가튼이 쓴 [ 모든 것을 다 먹어본 남자 ]를 보면 현재 파리의 레스토랑 트렌드는 오랫동안 화려한 명성을 자랑하며 현대 요리 문화를 주도했던 오트 퀴진들이 차례로 문을 닫고, 낮은 가격에 대중성을 표방한 음식점인 오트 비스트로가 그 자리를 급속하게 대체해 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앙토넹 카렘에서부터 시작되어 에스코피에가 기틀을 확립하였고 이후 19~20세기에 걸쳐 저명한 요리 장인들인 화려하게 꽃을 피운 미식 문화의 한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근대 이후 미식의 수도로 군림해 온 파리에서 이러한 세기적인 격변이 일어나고 있고, 현대 미식의 수도라는 영예조차 파리에서 뉴욕으로 발빠르게 옮겨지고 있는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이제는 식사의 보조가 아니라 완연하게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완성한 프랑스 와인의 기세는 오히려 점점 더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이는 물론 세계화로 인해 극단적이 된 소득의 양극화 추세로 인해 세계 부(富)의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부상한 미국과 아시아의 부유층과 상류층 사이에서 와인에 대한 감식안과 미감, 고가 와인 수집이 필수적인 소양처럼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기 타다시 - 오키모토 슈의 만화 [ 신의 물방울 ]이 국내에서 만화책으로써는 이례적으로 대히트를 친 데에는 와인에 관심을 가져보려는 직장인들 사이에서 가장 쉬운 와인 입문서로 소문이 났기 때문이라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입니다.
 

대형 마트에서 와인 코너가 다른 주류나 음료 코너보다도 훨씬 더 큰 데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듯이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위기에도 사그라들기는 커녕 오히려 더 확산되어 가고 있는 이러한 와인 붐을 타고 소믈리에나 와인 애호가들의 와인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사이에서 이 [ 그날은 정말 쇼비뇽 블랑같은 오후였어 ] 는 유난히도 독특한 느낌을 줍니다. 

 
 

대부분의 와인 책들이 3~40대 직장인이나 40대 중반 이상의 중년 남성들을 주 대상으로 하여 큼지막한 판형에 분위기 있는 와인 바와 고가의 와인 보틀들을 찍은 화려한 컬러 사진을 푸짐하게 싣고, 중간중간에 전문적인 각주들을 곁들여 권위를 강조한 것과는 달리, 이 책은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아담한 판형에 책 전체에 걸쳐 와인 보틀이나 와인 잔의 사진은 단 한 컷도 없으며, 그 대신에 아기자기하고 예쁘장한 올 컬러 그림들이 매 쪽마다 곁들여져 있어서 한 눈에 보기에도 여성들을 주된 독자로 한 책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노안이 오기 시작하는 50대 이상의 남성분들은 거의 읽기 힘든 8포인트의 작은 서체로 빼곡하게 채워놓은 편집이 특히나 더 말입니다.
 

예상대로 이 책을 쓴 사람은 서래마을에서 와인가게인 ‘맘마키키’를 열고있는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인 ‘싱글맘’ 신 리 씨이고, 그림을 그린 사람도 여성 일러스트레이트인 이희숙 씨입니다.
 

책의 외형이나 모양새에서 짐작되었던 것처럼 이 책은 와인 애호가들을 위한 본격적인 와인 소개 책이나 진지한 와인 에세이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와인이 모티브나 배경으로 살짝씩 등장하는 와인 미셀러니에 더 가깝습니다.

 
 

짧은 글은 원고지 2~3매, 긴 글은 원고지 7~8매 분량인 각 장들은 캐나다와 미국, 남미, 유럽 등을 넘나들며 연극학을 전공한 뒤 연극배우 겸 연출가로 활동해 온 저자가 국내와 해외에서 만났던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과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겪었던 다채로운 에피소드들을 주된 소재로 삼아 가볍게 써내려 간 수필들인데,  

 

“...그러다 알게 됐어요.

백 명의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다 보면

나의 눈동자엔 빛이 사라진다는 것을요.

누군가에겐 좀 덜 괜찮은 사람이어도,

누군가에겐 좀 덜 만족스러운 사람이어도,

나의 우주가 멈춰버리는 건 아니라는 것도.

내가 나를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건

삶이 가져다준 가르침이었어요.

마음의 노래를 따라가다보면

상상하지 못했던 곳에 도착하기도 해요.”

처럼 적지않은 나이에 여러 국가를 옮겨다니며 연극이라는 수익성이 낮고 불안정한 직업을 택한 싱글맘인 저자가 특히 힘주어 말하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것보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바라보며 살아간다는 것’의 소중함에 대한 고백들이 특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친한 여자 후배에게 들려주듯 조근조근한 말투로 써내려 간 글투와 거기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예쁜 그림들의 어울어짐도 멋지고요.
 

와인에 관한 이야기는 저자가 유학 시절에 처음 접하고 이후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마셨던 와인에 얽힌 정겨운 기억들과 ‘맘마키키’를 열면서 와인에 맞춰 내놓았던 다양한 요리와 안주들에 담긴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데, 일반적인 와인 서적들처럼 특정 와인의 명칭이 구체적으로 거론되지 않고 피노 누아, 쇼비뇽 블랑, 샤르도네, 카베르네 쇼비뇽, 메를로 같이 주된 포도 품종의 명칭 정도만만 언급되어, 어려운 와인 레이블과 에티켓, 빈티지가 주는 부담감이나 스트레스없이 포도 품종에 따른 맛과 기분의 차이 정도에만 중점을 두고 있어 묘사해 놓아,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 기억할 수 있게끔 만들어 줍니다. 



 

와인 전문가나 매니아들이 보기에는 다소 가볍고 피상적이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와인을 어렵고 부담스럽게 인식하고 있는 여성들에게는 책을 읽고 있노라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이 와인 한 번 마셔 볼까?’하는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맛깔스러움이 담뿍 담겨져 있습니다.
 

덧붙임 : 신 리 씨는 아마 해외에서 이 애니메이션을 보신 것 같은데(71쪽), ‘미와자키 하야오’씨의 ‘마술 가게 마녀 키키’는 국내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 마녀 배달부 키키 >라는 제목으로 출시되어 있답니다~
 

ha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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