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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어트 걸
페터 회 지음, 박산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92024194543720.jpg)
몇 년 전에 <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이라는 길고 특이한 제목의 소설이 애서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덴마크의 코펜하겐이라는 우리에게는 이름만 낯익을 뿐 그외에는 사실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북구 출신의 작가인 페터 회가 1992년에 발표했던 이 책은 본국인 덴마크에서 만이 아니라 미국과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차례로 권위있는 상들을 수상하며 무려 33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국내에서도 첫 번째 번역본이 절판된 이후에 이 책에 대한 소문과 추천이 애서가들 사이에서 퍼져 나가면서 읽기 어렵다는 평에도 불구하고 2005년에 출판사를 옮겨 재간됨으로써 다시 한 번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은 북극에 가장 가까운 국가라는 지리적 조건과 혹한과 백야라는 인상적인 자연 환경을 지닌 도시인 덴마크의 코펜하겐이라는 (우리에게는) 이국적인 무대에 못지않게, 그린란드인의 혈통을 이어받고 눈에 대한 특별한 초감각을 지닌 여성 주인공인 스밀라가 지붕에서 추락사 한 같은 건물에 살던 소년의 죽음에 의혹을 품고 조사를 해 나가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거대한 사건과 맞부닥쳐 그 전모를 차례로 밝혀 나가는 과정을 이국적이고 독특한 필체로 서술해 낸 작품이었습니다.
작가인 페터 회가 추리와 스릴러 소설을 뒤섞어 놓은 외양을 지닌 이 작품에서 묘사해 보여준 덴마크와 그린란드라는 북구의 대륙과 도시의 자연 풍광과 스밀라를 둘러싼 다양한 등장 인물들의 강한 개성은 미국이나 영국, 일본의 추리-스릴러 소설과는 확연하게 다른 매우 특별한 분위기와 감흥을 읽는 이에게 안겨 주면서 이국적인 인상을 강하게 남겼습니다.
< 콰이어트 걸 > 은 < 스밀라~ > 이후 두 편의 소설을 더 발표한 뒤 근 10년 동안 침묵을 지켰던 페터 회가 2006년에 발표한 그의 근작입니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92024194543721.jpg)
< 콰이어트 걸 > 은 많은 면에서 그의 출세작인 < 스밀라~ > 와 닮은 점들이 두드러집니다.
< 스밀라~ >의 주인공이 30대 중반의 매력적인 여성인 것과는 달리 < 콰이어트 걸 >의 주인공은 42세의 남성인 카스퍼 크로네인 점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하지만 이 점을 제외하고는 두 소설은 설정에서부터 전개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에서 매우 흡사한 점들을 무수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때 유명한 서커스 광대였던 카스퍼는 눈에 대한 특별한 초감각을 지녔던 스밀라처럼 극도로 예민하고 날카로워 거의 초능력의 수준에 이른 청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단순히 ‘청력’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카스퍼의 귀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주변 건물들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 각각을 청력만으로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으며, 전화 수화기를 통해 전달되는 미세한 주변의 소음만으로도 넓은 시가지에서 전화를 걸고있는 특정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으며, 금고의 내부 구조나 카드에 인쇄되어 있는 안료의 무게 차이로 인한 카드의 내용까지도 청력으로 구분할 수 있는 거의 만화같은 수준의 초능력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호흡이나 목소리, 심장 박동 등으로 사람을 파악하고 본성을 알아 차리는 정도는 식은 죽 먹기죠(이런 점들은 < 향수 > 의 주인공과 흡사합니다).
스밀라의 특별한 능력이 그다지 극적으로 두드러지지는 않았던 < 스밀라~ > 와는 달리 이 책에서는 카스퍼의 놀라운 청력이 이야기 내내 초능력 무기처럼 자유자재로 광범위하게 사용됩니다.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과 구조도 흡사합니다.
같은 건물에 살던 친한 아이의 추락사를 조사하던 스밀라처럼 카스퍼 역시 자신에게 심리 상담을 받으러 왔던 어린 소녀의 실종에 의혹을 느껴 그녀의 행방을 추적하는, 얼핏 보기에는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사건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평범한 사고사처럼 여겨졌던 소년의 죽음 뒤에 거대하고 복잡한 음모가 숨겨져 있었던 스밀라의 경우처럼 카스퍼도 소녀의 행방을 찾는 과정에서 정보부와 이민국, 연구소, 정부, 해군, 그리고 의문의 수녀회와 거대 기업 등 다양한 조직의 다채로운 인물들을 만나면서 복잡하게 뒤얽혀있는 거대한 음모를 하나씩 풀어나가며 배후의 진상에 접근해 갑니다. 그 와중에 카스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팜므파탈적인 매력을 지닌 과거의 연인과도 재회합니다.
[ 아래에는 내용 상의 스포일러가 있음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
일상적인 추락사로 보여졌던 사건이 최종적으로는 < X-파일 > 같은 거대한 규모의 미스테리로 연결되었던 < 스밀라~ > 에서처럼 카스퍼가 긴 추적 끝에 마침내 직면한 진상은 놀랍게도 어린 소년소녀들이 정신력으로 거대한 지진을 일으켜 코펜하겐을 붕괴시킨다는 음모를 꾸미고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겼으며, 사건의 흑막처럼 보였던 어른들은 단지 그 사건을 이용해 부동산 투기에 따른 이익을 얻고자 했던 단순범이었을 뿐이라는 경악할 만한 결론으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음모의 주모자가 다름 아닌 카스퍼가 찾아 헤매었던 실종된 어린 소녀이며, 또한 그녀가 자신의 딸이라는 충격적인 반전도 마지막 장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12명에 불과한 어린 소년소녀들이 단지 정신력만으로 거대한 지진을 일으켜 도시를 바다 밑으로 침몰시킨다는 이야기가 허황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이 소설의 기본 설정이 거대한 지진으로 코펜하겐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뒤라는 다분히 SF적인 설정이므로 그다지 큰 위화감이나 비현실감은 없는 편입니다.
그리고 이 작품과 < 스밀라~ > 의 배경에는 공통적으로 북구 문학 특유의 환상 문학적인 전통이 투영되어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런 설정과 전개가 좀 더 받아들이기가 쉬워질 것입니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92024194543722.jpg)
젊었을 때 전세계를 돌며 갈채 속에 공연을 다녔던 유명한 서커스 광대였던 주인공이 서커스와 쇼 비즈니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사와 독백들 속에는 실제로 발레 무용수이자 배우였던 작가의 경험이 상당 부분 투영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부분은 소설 전반에 걸쳐 주인공 카스퍼의 초능력과 대등할 정도의 빈도로 인용되고 언급되는 바흐의 음악입니다. 저자의 바흐와 그의 음악에 대한 애정과 식견이 상당한 수준임을 금방 알 수 있을 만큼 바흐의 주요 작품들에 대한 작가의 평가나 분석들에서는 수준 높고 날카로운 통찰력이 엿보입니다. ![](http://blogimgs.naver.com/nblog/mylog/post/emoticon/3_48.gif)
< 스밀라~ > 를 읽은 많은 독자들이 쉽게 읽혀지지 않는 책이라는 평가를 하곤 하는데, 필자 역시 < 스밀라~ > 가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지만 흥미로운 묘사나 진행에 비해서 이상하게도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아 의아한 느낌을 가졌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분들처럼 번역의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대과거 시제를 과도하게 남발하고, ‘호로비츠’를 ‘호로위츠’라고 쓰는 등 번역에 아쉬움은 분명히 있었지만요), < 콰이어트 걸 > 을 읽으면서 그것이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페터 회의 문장 자체의 문제 때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번 책에서도 바흐의 음악에 관한 번역들에는 오역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 스밀라~ > 와 < 콰이어트 걸 > 은 공통적으로 상당히 정체가 명확하지 않은 많은 수의 등장 인물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면서, 수시로 뜻밖의 시간과 장소에서 사실감이나 당위성없이 불쑥 등장하거나 사라지곤 하며, 사건의 주요 대목들에서 아무런 설명없이 마치 점프 컷처럼 갑작스럽게 실마리가 주어지거나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나가고, 시간과 공간의 사실성이 흐려지는 부분도 많아, 독자는 수시로 ‘내가 빠뜨리고 건너뛴 부분이 있었나?’하는 당혹감을 느끼게 하곤 합니다.
등장 인물을 명확하게 묘사하거나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고, 시간적, 장소적 사실감이 모호해지는 이러한 서술은 이 소설이 사실주의적인 서술 양식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북구 문학이 지니고 있는 환상 소설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실제로 페터 회가 안데르센과 종종 연관지어 설명되곤 하는 데에서도 이런 점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이런 부분에 대해 덴마크 문학 전문가에게 해설을 맡겨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습니다).
추리-미스테리-스릴러적인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장르 소설치고는 문장이나 서술 방식이 다소 낯설고 생경해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기는 하지만, 너무 가볍게 읽히고 일회적으로 소모되는 장르 소설들이 넘쳐나는 우리 서점가에 쉽게 접하기 힘든 북구의 문학 전통에 기반한 수작 장르 소설이 출간되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접하는 기쁨과 읽고난 뒤의 뿌듯함은 남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http://blogimgs.naver.com/nblog/mylog/post/emoticon/1_05.gif)
hajin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