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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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에 인터넷 서점들에 올려져 있는 광고나 서평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이 책의 주제는‘우익 청년의 탄생기’라는 단어였습니다. 테제가 다소 의아하기는 하지만, 제대로 된 우익이 아닌 사대주의자와 정상배들이 우익의 탈을 뒤집어쓰고 설치고 있는 현실에서 ‘제대로 된 우익’의 모습이라면 민주 투사보다도 오히려 더 ‘가짜 우익들’의 위선과 모순을 폭로하기에 효과적일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상상을 가지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다 읽고난 후의 결론은 ‘이 책에서 그리고 있는 것은 우익 청년의 탄생기라기 보다는 우리나라 우익들의 저열함과 무능력을 비꼬는 정치 우화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은 ‘금’과 ‘은’이라는 두 대학생의 1년 남짓한 대학 시절을 그리고 있습니다.

광주 출신으로 재야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노무현 대통령의 비서관을 발탁되면서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된 ‘금’의 이야기는 (내용상으로는 가장 많지만) 연상의 여성과의 관계에 탐닉하는 정도 외에는 별다른 사상적 편력이나 방황없이 지내다가, 아버지가 자살을 하자 학교를 그만두고 낙향한다는 비교적 단선적인 스토리로 그려집니다. 문학보다 사회 과학이나 실용적인 학문의 가치를 훨씬 더 높게 여겼던 금이 낙향 후 문학에 뜻을 두게 된다는 점 정도가 두드러진 변화라고 할까요.

잘생긴 얼굴에 키도 크고 체격도 건장한 법대생인 금보다도 작가의 관심은 왜소한 체구의 시인 지망생이었던 국어교육학과생 은 쪽에 더 집중되어 있는 듯 보입니다. 청와대 비서관이라는 사회적 성공을 거둔 아버지를 둔 금과는 정반대로 거듭된 파산 끝에 고향을 떠나 서울의 큰집을 봐주러 올라온 부모 밑의 은은 상대적으로 패배의식과 나약함에 가득 차 있습니다. 아버지의 자살로 현실에 회의를 느낀 금이 멸시하던 문학의 길을 걷게 된 것과 대비되듯 은은 뜻밖에도 우익 운동의 길을 선택해 걷게 됩니다.

하지만 부모의 경제적 패배와 시인을 꿈꾸던 자신의 나약한 정서, 그리고 동성애자라는 성적 정체성 등의 복합적인 열등 의식에 대한 반발과 그 돌파구로 선택한 우익의 길은 ‘박정희가 빨갱이라는 거짓(?) 사실을 유포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과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이 김정일에게 퍼주기를 한 댓가라는 다른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조차 몰랐다는 자신의 사회적 무관심에 대한 열등감’이라는 은이 우익에 빠져들게 된 계기는 물론 이후에 길게 펼쳐질 과정들 역시 ‘건강한 진짜 우익’과는 거리가 먼 왜곡된 모습만을 보여줍니다.

작가는 은에게 우익의 길을 권한 은의 작은 아버지의 말을 통해 ‘세상에는 진리란 없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강자의 이익만이 존재할 뿐이다. 엘리트들은 그 사실은 꽁꽁 감추고 도덕과 종교라는 채찍으로 대중을 조종해야 한다’라는 우익들의 가증스러운 속내를 드러내고, (누가보아도 김동길이 분명한) 거북선생이라는 우익의 원로의 입을 통해서는 ‘인류가 쌓아온 지식의 총량 중에서 우파가 쓸 수 있는 것은 5%도 안된다. 이렇게 좌파와 대적하는 우파의 논리가 허약하므로, 우파는 김대중이나 노무현에게 그냥 빨갱이라는 말만 반복하는 것이다. 논리 따지기 좋아하는 놈들에게는 다짜고짜 빨갱이라는 인장부터 찍어서 그들과의 대화를 무조건 거절하고 보는 것이 유일한 전략인 것이다’라고 ‘빨갱이로 몰기’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물론 은은 거북선생같은 친일의 원죄가 따라다니는 Old Right나 좌파에 대한 열등감과 적개심으로 가득찬 작은 아버지 세대인 New Right가 아닌 ‘강한 것은 아름답다’라는 근원적인 사상을 기치로 한 Pure Right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경멸해 마지않는 거북선생이나 변지갑(변듣보?)와 마음에도 없는 동성애 관계를 가지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스스로의 논리와 지향점과는 정반대의 모습만을 마지막까지 보여줄 뿐입니다.

금과 은의 관계는 결국 두 사람이 동성애 관계를 맺고, 사상은 정반대이지만 정신적인 유대만은 굳건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데에서 끝맺는데, 작가는 후기에서 이 두 사람의 다시 한 번 정반대로 역전되는 이후의 삶을 그린 속편의 구상을 거의 완성시켜 놓았다고 하여 금과 은의 성장한 모습에 대한 기대와 궁금증을 품게 만듭니다.

작가는 후기에서 미국의 대표적인 네오콘인 앨런 블룸과 그의 스승인 레오 스트라우스를 모델로 거북선생을 비롯한 책 속의 우파들을 묘사했고, 우리 문학사에서 아직 그려진 적이 없는 진정한 의미의 우익 청년의 탄생기를 그려보고자 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보여지는 은의 모습은 자신의 성적 소수성과 정신적, 경제적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정반대인 우익 성향으로 전화시켜 발산하는 비정상적인 모습으로만 비춰지는데(마치 동성애를 비난하던 앨런 블룸이 AIDS로 죽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작가의 아직 미완인 과정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이러한 우파의 이중성과 비정상성에 대한 야유가 이 작품의 본질인지는 읽는 이에 따라 다소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입니다(저는 후자의 관점으로 읽혔습니다).

이 작품 속에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의 많은 정치적 사건들이 실명과 실제 사건으로 계속해서 나오지만, 근본적으로 이 작품은 ‘우리 시대의 슬픈 정치 우화’에 더 가깝지 않나 하는 것이 제 개인적인 소감입니다.
  

ha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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