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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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얇은 책이라고 내용까지 얕은 건 아니다. 주인공 한탸는 35년째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압축기로 폐지를 압축하는 일이다. 지하실에서 폐지를 압축하면서 한탸는 버려지는 책들을 읽고 수집한다. 그의 집은 사방이 다 책이며 침대 위에도 수없이 많은 책들을 쌓아둬 자면서도 깔려 죽지 않을까 걱정한다. 어쩌면 한탸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책에 깔려서 죽거나 스스로 책과 함께 죽거나.

책덕후를 자칭하는 내가 과연 한탸와 상대나 될까.

그는 책을 사랑하고 35년간 그 사랑이 책에 대한 존경을 넘어 외경심으로까지 발전했다. 심지어 상상의 무게에 짓눌려 키가 9센티미터가 줄어들었다.
녹색 버튼을 누르면 앞으로 가고 붉은색 버튼을 누르면 후진하는 압축기를 홀로 작동시키면서 잠시도 쉴 틈 없이 일을 하는 한탸는 몸에서 오물 냄새가 나도 얼굴에 미소를 띤다. 가방에 책들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괴테, 헤겔, 니체, 쇼펜하우어를 챙기면서 그는 남들이 알 수 없는 고상한 정신의 소유자가 된다.

이런 그의 주위에서 고상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난다. 그 죽음이 결코 마음 편치 않지만 그때마다 그는 그들을 아름다운 말로 표현해 주고, 아름답게 보낸다. 엄마가 죽었을 때는 화장터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고 '엄마가 어여쁜 모습으로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라고 표현하고, 돌연사한 삼촌의 손가락 사이에는 이마누엘 칸트의 아름다운 글귀를 끼워넣어 주었다.
집시 여자에게는 둘이 함께 날아오르면 되지 않느냐고...

한탸에게 위기가 닥친다. 부브니에 거대한 압축기가 생겨나 책 더미를 몽땅 파괴하는 거다. 아주 효율적이다. 자동으로 작동되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책을 찢어 던지면 그만이다. 대형 자동 작업장이니 사람들은 작업복을 입고 휴식 시간에는 샌드위치와 우유, 코카콜라를 먹고 떠들며 휴가로 그리스와 불가리아를 다녀올 거라고들 한다. 한탸에게 폐지를 압축하면서 쉬는 시간이 웬 말이고 휴가가 웬 말인가.

무엇보다 그들이 낀 장갑에 한타는 모욕을 느꼈다. 그는 종이의 감촉을 더 잘 느끼고 두 손 가득 음미하기 위해 절대로 장갑을 끼지 않는다.
책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이다. 진정한 애서가이다. 며칠 전 읽은 헤르만 헤세의 애서가 정신에 이미 한 번 놀랐는데 한탸는 우리가 생각하는 책덕후, 애서가의 정신을 넘어선 어떤 차원에 도달해있다.

1장에서 7장까지는 반복적으로 35년간 폐지를 압축해왔다는 얘기가 마지막 8장에서는 더 이상 반복되지 않는다. 서운함을 맞이할 준비가 필요하다.
한타는 멜란트리흐 인쇄소 지하실에서 백지를 꾸리느니 자신의 지하실에서 종말을 맞기로 한다.

폐지가 가득한 압축통 속에 들어가 녹색 버튼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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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6-14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애서가를 위한 책이군요. 이책 평이 나뉘는거 같아 고민했근데 리뷰보니 책 좋아하는 사람은 이 책을 꼭 읽어야 할거 같아요~!!

책읽기.com글쓰기 2022-06-14 1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운이....ㅜㅜㅜㅜ
가시질 않아서.. 한번더
읽어보고 싶어요..ㅜ

그레이스 2022-06-16 2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말씀하신 것처럼 얇지만 빨리 쉽게 읽기 힘든 듯요^^

책읽기.com글쓰기 2022-06-17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죠ㅜㅜ
전 아주 감동깊게 읽었는데 얇은책이 결코
얇지 않아요~ 다 읽고 나시면 짠~하실거예요^^
 

몸에서 맥주와 오물 냄새가 나도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건, 가방에 책들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내가 아직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 일깨워 줄 책들. - P16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 P18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엄마가 죽었을 때 내 안의 모든 것이 울었지만 막상 내게는 흘릴눈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화장터를 나서자 한줄기 가느다란 연기가 하늘로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엄마가 어여쁜 모습으로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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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생각을 바꿀 수 없다. 
큰일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사소한 일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 당연시하는 태도는 쇠퇴의 시작이다. 인류를 존중한다면서 자기가 부리는 하인은 괴롭히는 것, 조국이나 교회나 당은 신성하게 받들면서 그날그날 자기 할 일은 엉터리로 대충해치우는 데서 모든 타락이 시작된다. 
이를 막는 교육적 방책은 오직 하나뿐이다. 즉 스스로에 대해서든 타인에 대해서든 신념이나 세계관이나 애국심 같은 이른바 거창하고 신성한 모든 것은 일단 제쳐두고, 대신 사소한 일, 당장에 맡은 일에 성심을 다하는 것이다. 자전거나 난로가 고장 나서 기술자에게 수리를 맡길 때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인류애도 애국심도 아닌 확실한 일 처리일 것이요, 오로지 그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할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 - P50

작가의 업이란 침잠하고 눈을 밝혀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그럴 때에 우리의 일은 때로 불면의 밤과 구슬땀이 따를지라도 ‘노동‘이 아닌 소중한 ‘천직‘인 것이다.
(1909) - P65

그렇다한들 장차 책의 고사를 염려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시간이 지나면 오락적 욕구나 대중교육 등 일정 부분은 새로운 매체가 담당하게 될 것이고, 그럴수록 책은 위엄과 권위를 되찾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이야 진보에 취해서 천방지축이지만 머지않아 글과 책에는 불멸의 기능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인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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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세계
헤르만 헤세 지음, 김지선 옮김 / 뜨인돌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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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서평을 두 번 나누어서 써야겠다. 서평의 기준이 있다면 초반부터 완전 '땡' 이겠으나, 책에 밑줄을 너무 많이 긋고 너무 많이 접어서 서평이 길어져도 너무 길어질 것 같다. 내가 소장해야 할 책이 한 권 더 늘었다. 살까 말까 고민만 하다가 누군가의 서평을 읽고 오래간만에 밑줄을 많이 그은 책이라 하여 바로 구매해서 읽었더니 과연 그렇다. 그 서평가분께 너무나 감사드린다. 그래서 서평의 역할이 꽤나 중요한가 보다. 책의 구매에 큰 길라잡이가 된다. 나의 서평들도 단 한 사람이라도 누군가의 구매 망설임에 굵은 발자국이 되길 바란다.

헤르만 헤세의 책들은 완독한 것도 꽤 있지만 읽다가 읽히지 않아서 그냥 덮어 둔 것도 있는데 이 책을 계기로 다시 다른 번역판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싯다르타도 3~4개의 출판사 책을 구매해서 읽었던 터다.

이 책은 문학이 아니라 헤세의 글들을 몇 개 모아 묶어 놓은 형태다. 헤세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생각들을 알 수 있게 되어서 꽤 귀한 자료처럼 간직하고 싶고 그래서인지 가독성이 아주아주 좋다. 묵직하게 느껴지는 헤세의 문학을 읽다가 이 글들을 읽노라니 헤세의 이중적인 면을 훔쳐보는 듯하다. 문학작품들을 만년필로 써 내려갔다면 이 책은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연필로 써 내려간 느낌인데 오히려 독자와 작가를 향해 펜촉보다 더 날카로운 일침을 쏘는 것 같다.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사업을 하듯이 해야 하고,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시력과 정신력을 소모하지 말라. 책을 읽는 내내 반성을 하게 되는 책들은 곁에 두고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스승이다.

이제 혼나기 시작인데 벌써부터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 쉽게 책장이 안 넘어간다. 나의 시력만 저하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고 자꾸 되뇌어본다.

책을 읽는 내내 애서가의 향기가 진동을 한다

p.31
나는 괴테의 《친화력》 을 지금까지 네 번쯤 읽었는데, 만약 지금 그 책을 또 한 번 읽는다면 그것은 젊은 시절 처음으로 엄벙덤벙 읽었던 《친화력》과는 완전히 다른 책 아니겠는가!

진정한 장서가의 향기도 진동을 한다.

p.40
우리의 원칙은 '가치가 없는 건 가급적 장서로 들여놓지 말고 일단 검증된 것은 내버리지 않기! 다.

소설을 읽다가 11호에서 12호로 바뀐 사소한 실수를 보고 헤세는 자전거나 난로가 고장 나서 기술자에게 수리를 맡길 때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인류애도 애국심도 아닌 확실한 일 처리일 것이고 오로지 그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한다. 작가라면 이런 사소한 실수조차 용납이 안되는 거다. 뜨끔하지 않은가.

그의 생각은 이렇다.
큰일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사소한 일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 당연시하는 태도는 쇠퇴의 시작이다. 인류를 존중한다면서 자기가 부리는 하인은 괴롭히는 것, 조국이나 교회나 당은 신성하게 받들면서 그날그날 자기 할 일은 엉터리로 대충 해치우는 데서 모든 타락이 시작된다.

인도와 중국 문학에도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고 주역은 우리도 읽기 힘든데 곁에 두고 마치 신탁에게 묻듯 읽곤 했다 한다. 작가에 대한 강한 자부심도 글 속에서 종종 느낄 수 있다.

작가의 업이란 침잠하고 눈을 밝혀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그럴 때에 우리의 일은 때로 불면의 밤과 구슬땀이 따를지라도 '노동'이 아닌 소중한 '천직'인 것이다.

책의 중반부를 향해가면 <세계문학 도서관>이라는 목차가 나온다. 이 목차는 전체 다 밑줄 긋고 귀퉁이 접기를 하다가 포기하고 그냥 책을 한 권 더 주문했다. 이 목차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부분이다. 출판사의 의도일까? 딱 중간에 배치한 보석 같은, 다이아몬드보다 더 반짝이는 유물을 숨기려는?

난 발견했다!!

이 책으로 우리는 헤르만 헤세의 '책'이 아닌
'헤르만 헤세'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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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6-11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헤세를 좋아해서 이 책 읽으려고 보관함에 담아놨는데 책읽기글쓰기 님이 극찬하시니 곧 주문해야 겠습니다 ^^

책읽기.com글쓰기 2022-06-11 1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하도 줄긋고 접고해서 한 권더
주문했어요 ^^
부디ㅜㅜ 새파랑님께도 보물이 되길..♡

transient-guest 2022-06-17 0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말 즐겁게 읽은 책입니다. 읽는 내내 따뜻한 조언, 약간의 질책, 그리고 제 독서관과 비교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쓰인 지 백년이 지나도 이렇게 힘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대단합니다.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은 우리 같은 작가들에게 반가운 일이지, 불평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태도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길게 보면 어떤 직업이든 온통 오해받고 오용되는 게 달가울 리 없듯이, 인세 수입이 대폭 줄어들지언정 심드렁한 독자 수천보다는 단 열 명이라도 제대로 알아주는 독자들이 더 고맙고 기쁘다. - P12

인생은 짧고, 저세상에 갔을 때 책을 몇 권이나 읽고 왔느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가치한 독서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미련하고 안타까운 일 아니겠는가?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책의 수준이 아니라 독서의 질이다. 삶의 한걸음 한 호흡마다 그러하듯, 우리는 독서에서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더 풍성한 힘을 얻고자 온힘을 기울이고 의식적으로 자신을 재발견하기 위해 스스로를 버리고 몰두할 줄 알아야 한다.  - P14

작가의 업이란 침잠하고 눈을 밝혀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그럴 때에 우리의 일은 때로 불면의 밤과 구슬땀이 따를지라도 ‘노동‘이 아닌 ‘천직‘인 것이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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