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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저녁이면 수박향이 그리워진다.

약간은 비릿하면서도 달콤한 수박은 입속의 행복이다. 빈부의 격차 없는 포만감.

 

수분과 당분이 많이 포함된 붉은 과육은 풍요의 상징이다. 그 어떤 과일도 갖지 못한 볼륨감은 덤이다.

 

간혹 씨가 많이 박혀있는 수박은 씨를 채굴하는 과정이 수고롭긴 하지만 씨를 뱉어내는 즐거움도 있다. 요즘은 함부로 말하면 무안해지는 씨 없는 수박도 있다.

 

수박은 먹기 좋게 잘랐을 때 꼭지 부분이 가장 달다. 전체로 보면 중간이다. 두꺼운 껍질 부분으로 갈수록 당도는 떨어진다. 때론 무맛이 나기도 한다.

 

어릴 적 일찍 철이 든 남자 아이는 부모님과 누이들에게 수박 가운데 토막을 양보하곤 했다. 부모님은 맛있는 부분을 먹기 편하고 드시라고, 어린 누이들은 나중에 시집가서 엄마가 되면 맛있는 부분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되어 애를 네 명이나 낳았다. 이제는 수박 가운데 토막을 먹을 수 있을까 했지만, 초롱초롱한 눈망울 여덟 개를 보고 있노라면 여전히 가운데 토막을 들지 못한다. 하여 먹기 힘들고 당분이 적은 바깥 토막을 집어들 수밖에 없다. 아내는 있지도 않은 당뇨병에 도움이 될 거라면서 위로를 전한다. 언제쯤이면 수박 가운데 부분을 먹을 수 있을까? 할아버지가 돼서나...

 

수박은 둥글게 모여앉아 웃으며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가끔 웃다가 수박 폭탄을 앞사람에게 터트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웃는 사람들이 가족이다. 냉장고가 귀하던 시절 우물 속에서 수박을 꺼내다가 빠트려 우물 속으로 들어가 수박을 들고 나온 적도 있다. 지금은 전화 한통화로 수박을 배달받고 800리터짜리 냉장고 덕분에 여름이면 매일 밤 수박잔치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구멍 난 하얀 메리야스를 입은 아버지와 모깃불 속에서 깔깔거리며 수박을 먹던 그 여름밤은 어디로 갔을까? 수박씨를 뱉어내듯 툭툭 던져버린 시간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굳이 수박 가운데를 차지하고 베어 먹지 않더라도, 우리 가족의 삶은 언제 가장 달콤할까? 내 삶은 언제 가장 달콤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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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는 A는 두 대의 스마트폰은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신이 구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회사에서 지급한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직원의 업무편의를 위해 회사에서 지급한 것이다. 명목상 직원의 편의성 도모이지만 실질상 관리와 감시용이다. 해당 직원이 회사 어디에 있던지 윗사람들은 A의 위치를 파악하고 업무지시를 하곤 한다. 퇴근 후에도 업무용 스마트폰을 통해서 업무지시가 내려오고, 이는 다음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처리해야한다. 사생활과 사적인 시간의 경계가 무너진 지 오래다.

 

고등학교 2학년 진학예정인 B는 겨울방학이 시작되자 엄마로부터 첨단 시설의 독서실을 소개받았다. B는 아침 일찍부터 학원과 독서실을 부지런히 오가면서 공부를 하고 있다. 문제는 이 독서실이 지문인증을 통해 학생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출입의 기록은 곧바로 부모의 스마트폰으로 전송된다. B가 언제 독서실에 들어왔는지 언제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는지를 전부 기록해서 친절하게도 부모에게 실시간으로 알려주고 있다. 고맙게도(?) 하루 종일 공부한 시간까지 체크해서 일일 공부시간과 월별공부시간을 부모에게 알려준다. 공부하기 위한 공간이 의도하지 않은 감옥이 되어버렸다.

 

중학교 진학예정인 C는 엄마로부터 책상을 선물받았다. 독방감옥형 책상이라고 한다. 바깥에서 문을 잠글 수도 있는 통제 가능한 신형 책상이라고 한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몇 명이 이미 사용 중이고 다른 몇명은 부모로부터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C의 엄마는 C의 초등학교 5학년생인 동생 D에게도 동일한 책상을 사줄 예정이다. C는 엄마가 짜준 계획표에 따라 학원가는 시간을 제외하고 오전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 갇힌 상태에서 공부를 한다. 독방감옥형 책상은 이미 독방감옥이다.

 

 

#2.

파놉티콘은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제레미 벤담이 생각해낸 감옥의 건축양식을 말한다. 벤담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본다를 뜻하는 ‘opticon’을 합성하여 소수의 감시자가 모든 수용자를 감시할 수 있는 형태의 감옥을 제안했다. 즉 벤담이 말하는 파놉티콘이란 진행되는 모든 것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공리주의자인 벤담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비용(감시)으로 최대한의 효과(통제)를 거두는 파놉티콘은 이상적인 사회의 축소판으로 보았을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벤담의 파놉티콘을 좀 더 근대적이며 철학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파놉티콘은 벤담이 제안한 감옥시설의 의미를 벗어나 근대적 감시의 원리를 체계화한 건축물이었고, 한명의 권력자가 다수의 군중을 감시하는 규율사회로의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푸코는 파놉티콘에 대한 이러한 해석을 통해 감시와 통제를 전제로 한 권력의 새로운 행사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벤담의 제안이나 푸코의 해석을 변용하면 권력자나 부모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으로 군중이나 아이를 통제하고 싶어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CCTV나 스마트폰의 위치정보를 통해 우리의 모든 행동이 감시되는 죄수가 아닐 수 없다.

 

 

#3.

21세기 한국사회는 나름 열린사회(?)이자 정보화된 사회이다. 정보화된 사회의 각종 정보화기기들은 편리성이라는 장점과 더불어 이를 이용한 감시와 통제기능도 가지고 있다. 의식했든 아니했든 간에 지금의 각종 정보화장비들은 전자적인 감시를 부수적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 것도 거의 모든 곳에서, 거의 모든 시간에.

 

정보화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각종 시스템을 통해 정보는 집중될 수밖에 없고, 이렇게 수집된 정보는 정교한 시스템을 통해 분류되거나 재생산된다. 재분류되거나 새로운 형태의 정보는 누군가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사실은 과장되거나 영화에 나올법한 이야기는 아니다. 음흉한 권력자가 꿈꾸는 은밀한 세상의 이야기도 아니다.

 

회사원 A, 학생 B, C의 사례는 결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우리 이웃과 우리 아이들의 현실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진행 중인 불편한 진실이다.

 

우리의 현실이 이러함에도 우리 스스로 감옥 몇 개를 만든다. 부자되기, 성공하기, 끊임없이 성장하기라는 강박관념이 만들어낸 감옥. 경쟁지옥인 한국사회에서 뒤처지면 끝장이라는 두려움이 낳은 자발적인 감옥 말이.

 

우리는 늘 유토피아를 꿈꾸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쩌면 디스토피아에 가깝다.

 

진정 우리는 감옥에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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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회’를 가장 많이 남기는 법(法)은 어떤 법일까?

 

물권 채권 등 재산관계를 다루고 친족 상속에 관한 내용을 규정한 민법일까?

채무를 줄이고 채권을 늘렸으면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텐데. 가족에게 잘했다면 이혼하지 않았을 테고, 부모에게 좀 더 잘했으면 상속재산이 많았을 텐데. 하면서 후회하는.

 

아니면 일정한 범죄의 구성요건을 충족하면 특정 범죄에 속하는 형법일까?

아! 그 순간 범죄에 관한 충동(고의)을 참지 못한 내가 바보지. 이제 와서 후회해서 무슨 소용일까? 하면서 후회하는.

 

좀 더 영민한 누군가는 국가의 기본질서, 국민의 기본권과 국가를 구성하는 체계를 규정하고 있는 헌법을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는 민주공화국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다음 생에는 헬조선에서 태어나지 말아야지. 하면서 후회하는.

 

아이러니하게도, 후회를 가장 많이 남기는 법은 후회의 전제가 되는 ‘가정법’이 아닐까?

 

 

#2.

가정법은 “만약 내가 ~ 어떻게 ~ 한다면” 어떨까 하는 문제이다. 누군가는 불확실한 미래를 알고 싶어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과거의 선택과 기억을 바꾸고 싶어 한다. 그렇다. 가정법은 불만 가득한 오늘로부터 온다.

 

만약, 내일 모레를 안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까?

내가 어제 그제로 돌아간다면 그때 어떻게 내일 모레를 준비할까?

 

하지만 내일을 알 수 있을까, 어제를 바꿀 수 있을까? 현재까지의 과학적 지식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의 가능성도 없다. 가끔 영화 속에서 소재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아직 미래나 과거로 이동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오늘은 어제 한 선택의 결과이고, 내일은 오늘 한 선택의 결과물이다.

 

결국은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늘밖에 없지 않을까?

 

수많은 가정법은 오늘이라는 현재가 존재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실제로 가장 쉬운 것은 어제나 내일을 바꾸기보다는 오늘 당장 변화하는 것이다.

 

일요일의 내가 토요일 오후로 돌아간다면 제일 먼저 하는 행동은 로또 구입일까?

아니면, 토요일 저녁 말다툼 때문에 일요일까지 썰렁했던 아내를 배려하는 일일까?

 

어느 누구도 절대적으로 후회하지 않을 수는 없다.

자신의 행동과 현재에 끊임없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하는 실존주의 철학자들마저도. 그들도 수많은 선택의 결과를 후회했을 것이다.

 

가정법은 현재의 불만을 동기로 하여 오히려 지금을 더 충실하게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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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분쟁이나 갈등의 원인에는 서로 다른 시선이 있다. 그 시선 이전에는 서로 다른 인식과 생각이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인간의 수만큼의 다양한 시선이 존재한다. 올바르거나 바람직한 시선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은 처음부터 어리석다. 애당초 시선이라는 것이 평가적 기준을 정할 수 없는 극히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불행하다.

 

  “미움받을 용기”란 책이 2년여 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아들러의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쓰인 대화체 형식의 이 책의 인기비결은 무엇일까?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라는 주문에 대한 화답이 아닐까? 우리는 지금까지 아니 지금도 타인의 시선에 얽매인 삶을 살고 있어서일까? 대한민국이라는 피곤한 삶속에서 얻은 이 책의 영광이 역설적으로 안타깝다!

 

  시선은 그물코다. 각 그물이 목적하는 만큼 그물이 가진 코의 크기는 다양하다. 농어를 잡거나 전어를 잡는 그물이 같은 코를 가질 수는 없다. 농어 잡이를 주로 하는 배의 어부와 전어 잡이를 주로 하는 배의 어부는 서로 우열을 따지거나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배가 가진 그물의 그물코가 그 배의 품격이나 어부의 인격을 나타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서로 같은 바다에서 그물을 내릴 때에도 같은 어종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경쟁하거나 갈등할 필요가 없다. 서로의 그물이 얽힌다면 그것은 서로가 양보하지 않은 조급함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시선 속에서 하루를 산다. 우리 자신의 시선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향하고 있다.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은 결코 나의 내면을 바라보지 못한다. 내 자신의 시선도 타인의 속내를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시선의 교차 속에서 혹은 비교 속에서 괴로워하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내면이다. 바라볼 수도 보여줄 수도 없는 내적인 세계가 가볍게 스치는 바람 같은 시선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이다. 무언가 옳지 않다. 심지어 부당하기까지 하다.

 

  조정래의 시선, 조르바의 시선, 니체의 시선 등 그 어느 것도 나를 구속할 수는 없다. 그들의 시선이 위대하고 존경스러울지라도 그렇다. 내가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의 시선이 아니라 내 사고체계로 걸러진 그들의 생각일 뿐이다. 한낮의 태양에서 빛의 줄기보다는 따뜻함을 받아들이듯이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내게 유리한 자양분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것도 독립적으로. 내 삶의 온기와 만족도는 내가 정한다. 그것이 내 삶을 위한 진정한 용기다.

 

  내 방식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 시선의 꿋꿋함을 간직한다는 것이다. 내 방식대로 산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삶은 아니다. 그것은 서로간의 시선이 옳고 그름의 차이가 아니라 서로 다름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는 방식의 삶이다. 또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어떤 하루를 지날 것인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내가 정하는 삶이다. 그것이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내방식대로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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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근 후에 넷째인 막내아이를 데리고 풍납토성길을 걷는다.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들어서인지 이른 시간임에도 푸릇한 잔디위로 땅거미가 걸린다. 어둑해진 거리에는 주점의 불빛이 술꾼들을 부르고, 아득해진 노을 꼬리에 조각달이 얼굴을 내민다. 하루가 저무는 시간에는 사람은 물론이고 사물도 차분해진다. 온종일 주위를 헤매던 시선도 이제는 안으로 향한다. 다섯 살 먹은 아이와 함께하는 저녁은 순결하고 평온하다.

 

  저녁시간의 토성길은 건강을 위해 산책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이어폰을 귀에 꼽고 음악을 들으며 힘차게 걷는 이십대, 어린아이의 유모차를 미는 삼십대 부부와 유모차에 자신을 의탁하는 칠십대가 공존한다. 낮 시간에는 단절되었던 가족 간의 대화의 실마리도 활동하는 약동의 시간이기도 하다. 가끔씩 출입이 금지된 애완견이 가족인 주인을 따라 나와 달빛 환한 길을 뛰어다닌다. 이 시간만큼은 모두가 살가운 하나의 그림이고 풍경이 된다. 그래서일까. 바벨탑처럼 높아만 가는 롯데월드 타워의 위용마저도 정겨운 풍납토성의 구릉아래 한수 아래일 수밖에 없다.

 

  토성길 끝자락에는 화덕피자와 파스타와 맥주를 파는 이층집이 있다. 분위기 있는 음악과 시원한 맥주에 한층 흥에 겨운 목소리가 창문을 넘어 나온다. 토성이 내다뵈는 테라스에서 음식과 술잔을 나누는 사람들의 표정은 붉게 물들어져 새하얀 달빛과 조화를 이룬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이층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식냄새와 분위기에 군침을 다시고 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민을 한다. 그 집 3층에는 텐트와 바비큐를 할 수 있는 캠핑도구들이 있다. 도심 속에서도 야외에서 즐길 수 있는 캠핑의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노을이 사라지는 순간 토성은 적막하다. 토성을 따라 지어진 아파트에 하나 둘씩 불이 켜지고 인간의 부재에서 존재로의 증명을 밝힌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할머니들 사이로 아이가 세발자건거를 타고 지나간다. 이른 저녁을 마친 노인들은 하루라는 삶의 시간을 지나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들의 시선에 비친 아파트 창가의 토성은 쓸쓸하며 아늑하다. 천년을 넘어 이야기들이 쌓여 역사가 된 토성을 보면 쓸쓸하고,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부모를 반갑게 맞이하는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들을 보면 아늑하다. 생명의 순환은 개별적인 이야기를 낳고 그 개별성은 모두 모아져 역사라는 강을 이룬다. 할머니에게서 어머니에게로, 어머니로부터 다섯 살배기 아이에게로 유전되는 기억은 곧 우리의 삶이 된다.

 

  어두운 하늘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성급하게 고개를 내미는 별빛 몇 개가 보인다. 어린 아이들은 그 별들의 조급함을 빨리 찾아내는 신통함이 있다. 별의 이름은 모르지만 저 별이 조금씩 움직이며 반짝이는 것도 그들의 눈에는 쉽게 들어온다. 어른들 눈에 어른거리는 별빛은 찾아내기가 어렵다. 찾아보려는 의지나 노안도 문제거니와 동심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둥글어지거나 사그라지는 달의 모양과 별의 움직임은 신기함 자체이다. 아이들에게는 한낮 동안의 운동장만큼이나 밤하늘도 호기심 가득한 놀이터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늘 묻고 또 묻는다.

 

  하루를 온전히 살아낸 대가로서 저녁밥상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반찬 가짓수를 따지지 않는다면 식탁에서 받아들이는 만족감도 공평할 것이다. 저마다 준비한 저녁거리가 분주한 손길을 거쳐 식탁에 오르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오붓하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학원에서 돌아온 가족이 저마다의 외형적 직분에서 해방되는 시간이다. 오직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식탁에 둘러 앉아 숟가락을 든다. 물론 돌아오지 않는 가족 때문에 저녁시간이 유예된 가정도 많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저녁밥상은 가족이야기의 오아시스이며 향기로운 꽃밭이다. 그 밥상둘레에서 아이들은 부모들의 말과 태도와 감정을 나누는 법을 배운다. 부모들은 아이의 눈동자와 말투 속에서 하루를 지나온 그들의 즐거움과 비애를 읽는다. 살아가는 참맛은 이렇듯 가족이 함께하는 저녁식탁에서 결정되지 않을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저녁은 바라볼 수 있는 별빛만큼이나 유한하다. 그 유한함을 숙명으로 여기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진지하게 찾으려고 노력할 때 우리의 저녁은 풍성해질 것이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 같은 저녁이어서는 안 된다. 어느 하루라도 그저 그렇거나 무의미한 저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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