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에 넷째인 막내아이를 데리고 풍납토성길을 걷는다.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들어서인지 이른 시간임에도 푸릇한 잔디위로 땅거미가 걸린다. 어둑해진 거리에는 주점의 불빛이 술꾼들을 부르고, 아득해진 노을 꼬리에 조각달이 얼굴을 내민다. 하루가 저무는 시간에는 사람은 물론이고 사물도 차분해진다. 온종일 주위를 헤매던 시선도 이제는 안으로 향한다. 다섯 살 먹은 아이와 함께하는 저녁은 순결하고 평온하다.

 

  저녁시간의 토성길은 건강을 위해 산책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이어폰을 귀에 꼽고 음악을 들으며 힘차게 걷는 이십대, 어린아이의 유모차를 미는 삼십대 부부와 유모차에 자신을 의탁하는 칠십대가 공존한다. 낮 시간에는 단절되었던 가족 간의 대화의 실마리도 활동하는 약동의 시간이기도 하다. 가끔씩 출입이 금지된 애완견이 가족인 주인을 따라 나와 달빛 환한 길을 뛰어다닌다. 이 시간만큼은 모두가 살가운 하나의 그림이고 풍경이 된다. 그래서일까. 바벨탑처럼 높아만 가는 롯데월드 타워의 위용마저도 정겨운 풍납토성의 구릉아래 한수 아래일 수밖에 없다.

 

  토성길 끝자락에는 화덕피자와 파스타와 맥주를 파는 이층집이 있다. 분위기 있는 음악과 시원한 맥주에 한층 흥에 겨운 목소리가 창문을 넘어 나온다. 토성이 내다뵈는 테라스에서 음식과 술잔을 나누는 사람들의 표정은 붉게 물들어져 새하얀 달빛과 조화를 이룬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이층집에서 흘러나오는 음식냄새와 분위기에 군침을 다시고 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민을 한다. 그 집 3층에는 텐트와 바비큐를 할 수 있는 캠핑도구들이 있다. 도심 속에서도 야외에서 즐길 수 있는 캠핑의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노을이 사라지는 순간 토성은 적막하다. 토성을 따라 지어진 아파트에 하나 둘씩 불이 켜지고 인간의 부재에서 존재로의 증명을 밝힌다.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할머니들 사이로 아이가 세발자건거를 타고 지나간다. 이른 저녁을 마친 노인들은 하루라는 삶의 시간을 지나왔던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들의 시선에 비친 아파트 창가의 토성은 쓸쓸하며 아늑하다. 천년을 넘어 이야기들이 쌓여 역사가 된 토성을 보면 쓸쓸하고,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부모를 반갑게 맞이하는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들을 보면 아늑하다. 생명의 순환은 개별적인 이야기를 낳고 그 개별성은 모두 모아져 역사라는 강을 이룬다. 할머니에게서 어머니에게로, 어머니로부터 다섯 살배기 아이에게로 유전되는 기억은 곧 우리의 삶이 된다.

 

  어두운 하늘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성급하게 고개를 내미는 별빛 몇 개가 보인다. 어린 아이들은 그 별들의 조급함을 빨리 찾아내는 신통함이 있다. 별의 이름은 모르지만 저 별이 조금씩 움직이며 반짝이는 것도 그들의 눈에는 쉽게 들어온다. 어른들 눈에 어른거리는 별빛은 찾아내기가 어렵다. 찾아보려는 의지나 노안도 문제거니와 동심을 잃어버린 까닭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둥글어지거나 사그라지는 달의 모양과 별의 움직임은 신기함 자체이다. 아이들에게는 한낮 동안의 운동장만큼이나 밤하늘도 호기심 가득한 놀이터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늘 묻고 또 묻는다.

 

  하루를 온전히 살아낸 대가로서 저녁밥상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반찬 가짓수를 따지지 않는다면 식탁에서 받아들이는 만족감도 공평할 것이다. 저마다 준비한 저녁거리가 분주한 손길을 거쳐 식탁에 오르는 시간은 하루 중 가장 오붓하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학원에서 돌아온 가족이 저마다의 외형적 직분에서 해방되는 시간이다. 오직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식탁에 둘러 앉아 숟가락을 든다. 물론 돌아오지 않는 가족 때문에 저녁시간이 유예된 가정도 많이 있을 것이다. 아무튼 저녁밥상은 가족이야기의 오아시스이며 향기로운 꽃밭이다. 그 밥상둘레에서 아이들은 부모들의 말과 태도와 감정을 나누는 법을 배운다. 부모들은 아이의 눈동자와 말투 속에서 하루를 지나온 그들의 즐거움과 비애를 읽는다. 살아가는 참맛은 이렇듯 가족이 함께하는 저녁식탁에서 결정되지 않을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저녁은 바라볼 수 있는 별빛만큼이나 유한하다. 그 유한함을 숙명으로 여기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진지하게 찾으려고 노력할 때 우리의 저녁은 풍성해질 것이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 같은 저녁이어서는 안 된다. 어느 하루라도 그저 그렇거나 무의미한 저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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