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분쟁이나 갈등의 원인에는 서로 다른 시선이 있다. 그 시선 이전에는 서로 다른 인식과 생각이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인간의 수만큼의 다양한 시선이 존재한다. 올바르거나 바람직한 시선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은 처음부터 어리석다. 애당초 시선이라는 것이 평가적 기준을 정할 수 없는 극히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불행하다.

 

  “미움받을 용기”란 책이 2년여 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다. 아들러의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쓰인 대화체 형식의 이 책의 인기비결은 무엇일까? 여러 해석이 가능하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라는 주문에 대한 화답이 아닐까? 우리는 지금까지 아니 지금도 타인의 시선에 얽매인 삶을 살고 있어서일까? 대한민국이라는 피곤한 삶속에서 얻은 이 책의 영광이 역설적으로 안타깝다!

 

  시선은 그물코다. 각 그물이 목적하는 만큼 그물이 가진 코의 크기는 다양하다. 농어를 잡거나 전어를 잡는 그물이 같은 코를 가질 수는 없다. 농어 잡이를 주로 하는 배의 어부와 전어 잡이를 주로 하는 배의 어부는 서로 우열을 따지거나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배가 가진 그물의 그물코가 그 배의 품격이나 어부의 인격을 나타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서로 같은 바다에서 그물을 내릴 때에도 같은 어종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경쟁하거나 갈등할 필요가 없다. 서로의 그물이 얽힌다면 그것은 서로가 양보하지 않은 조급함이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시선 속에서 하루를 산다. 우리 자신의 시선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향하고 있다.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은 결코 나의 내면을 바라보지 못한다. 내 자신의 시선도 타인의 속내를 바라볼 수 없다. 하지만 시선의 교차 속에서 혹은 비교 속에서 괴로워하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내면이다. 바라볼 수도 보여줄 수도 없는 내적인 세계가 가볍게 스치는 바람 같은 시선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이다. 무언가 옳지 않다. 심지어 부당하기까지 하다.

 

  조정래의 시선, 조르바의 시선, 니체의 시선 등 그 어느 것도 나를 구속할 수는 없다. 그들의 시선이 위대하고 존경스러울지라도 그렇다. 내가 받아들이는 것은 그들의 시선이 아니라 내 사고체계로 걸러진 그들의 생각일 뿐이다. 한낮의 태양에서 빛의 줄기보다는 따뜻함을 받아들이듯이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내게 유리한 자양분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것도 독립적으로. 내 삶의 온기와 만족도는 내가 정한다. 그것이 내 삶을 위한 진정한 용기다.

 

  내 방식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 시선의 꿋꿋함을 간직한다는 것이다. 내 방식대로 산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삶은 아니다. 그것은 서로간의 시선이 옳고 그름의 차이가 아니라 서로 다름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는 방식의 삶이다. 또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어떤 하루를 지날 것인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를 내가 정하는 삶이다. 그것이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내방식대로 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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