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네 살배기 막내가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 태윤이는 정말 싫어, 오늘도 친구들을 괴롭혔어

아빠가 답한다.

왜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지 않고, 너도 괴롭혔어

막내는 얼굴을 찌푸리고 한마디 더한다.

아니, 그게 아니고”(아빠는 왜, 내가 태윤이를 싫어하는 느낌을 알려고 하지 않을까?)

 

2인 셋째가 아빠에게 이야기한다.

아빠, 나 내일 학교에 안가면 안 될까?”

아빠가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 학교에 안가면 머할려고?, 집에서 혼자 놀게

셋째는 한숨을 쉬고 한마디 더한다.

아니, 그게 아니고”(아빠는 왜, 왜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지에 관한 내 감정을 읽어내지 못할까?)

 

2인 큰딸이 아빠에게 말한다.

아빠, 오늘 친구 보영이랑 싸웠어. 아침마다 내가 기다리는데도 미안하다는 소리를 한마디도 안하잖아

아빠는 무심하게 대답한다.

, 제일 친한 친구라면서 사이좋게 지내지 않고

큰딸이 한마디 더한다.

집에 올 때 보영이가 나한테 사과했는데...”

아빠가 대답한다.

너도 사과해, 그래야 사이가 더 좋아지지

큰딸은 그게 아니라는 듯고개를 내저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아빠는 왜, 상식적인 선에서만 이해하려 하고, 내 말속에 숨어있는 내 감정을 알아듣지 못할까?)

 

 

#2.

윗글은 평범한 가정에서 볼 수 있는 보통 수준의 대화내용이다. 우리 집에서도 가끔 이런 상황을 목격한다. 아이들은 아빠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고, 아빠는 아이들이 말하는 무엇을 놓치고 듣지 못했을까? 네 살배기, 2 큰아들, 2 큰딸이 왜 대화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을까?

 

아이들과 대화할 때 부모들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경향이 있다. 더 큰 문제는 듣는 내용마저도 부모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분명 아이는 자신이 전달하고픈 이야기를 자신의 감정과 더불어 표현했는데, 부모들은 그 이야기도 감정도 모두 놓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아이는 부모가 자신의 얘기를 들을 능력이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고 판단할 것이다. 아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면 부모는 아이의 속마음을 알 수가 없게 되고, 부모 또한 불소통의 상황 속에서 아이의 태도에 불만을 갖게 된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바람직한 부모와 자녀관계 형성에 분명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자칫하면 치유하기 힘든 악순환의 고리를 갖게 된.

 

현재 부모가 가진 기준과 가치는 하루아침의 결과물이 아니다.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개선 내지 변경된 것이기 때문에 그 기준은 아이에게는 가혹할 수 있다. 부모인 우리 자신도 어려운 것이 인생살이고 관계의 문제다. 하물며 아직 성장단계에 있고 세상을 알아가는 아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불통이 습관화된 사이에서는 서로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갖기가 쉽지 않. 부모와 아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불필요한 감정소모와 부정적인 선입견으로 인해 작은 화가 큰 분노를 낳는다. 가장 소중한 관계인 가족들 간에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관계형성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지적하기를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이고 끝이라고 한다. 즉 잘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다. 어떻게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을까?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그 속뜻과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될 터인데 쉽지가 않다. 그 이유는 이야기하는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듣고 있는 부모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잘 듣기위해서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잘 못 듣는 부모의 오류를 시정하는 일일 것이다.

 

 

#3.

* 평범한 부모 - 부모도 특별한 존재는 아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특별한 사람이기를 원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특정한 부모도 특별한 사람은 아니다. 모두가 평범한 감정을 가진 보통(?) 인간이다. 누구나 작은 일에 속상해하고, 소소한 분노 때문에 일상이 흔들리고, 과거의 후회로 인해 현재가 발목 잡히는 그런 하루를 지낸다. 네 명의 아이들 둔 부모라고 해서 특별한 인격과 더 단단한 감정을 가질 수도 가질 필요도 없다.

 

부모들 스스로가 특별한 존재가 아닌 평범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아이들의 이야기를 편하게 들을 수 있다. 특별한 존재가 되려는 순간 스스로가 만든 틀에 구속당할 수밖에 없고, 그 틀의 시각으로 타인의 말을 재단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그런 부모의 시각에 불편해하고, 상황은 어려워진다.

 

* 상황에 대한 이해 - 세상사에 정답은 없다

매사에 정답을 구하려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나름 치밀해 보일 수는 있지만 사고의 유연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정답이 없는 문제나 상황이 얼마나 많은가? 최소한 두 갈래 길에서도 선택의 문제는 존재하고 후회가 남을 수도 있다. 부모들의 세상과 아이들의 세상은 다르지 않다. 부모와 아이들 사이에는 다양한 상황과 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부모들도 스스로도 아이들도 특정 상황에서 정답을 구하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다만 좀 더 유연하게 상황을 바라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오히려 교과서적인 정답을 요구하는 서투른 시각을 경계하여야 한다. 아이들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이고 부모는 이들의 가능성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즉 상투적 시각으로 아이들을 바라봐서는 안 될 것이다.

 

* 판단하지 말 것 - 특정한 기준에 얽매이지 말자

아는 만큼 보이고 보고 싶은 것만 보인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열려있는 만큼 들리고 듣고 싶은 것만 들릴 것이다. 부모들의 경험과 지식도 제한적이다. 결국에는 내가 구성한 틀에 내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만 들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 만든 기준에 얽매이다보면 내 방식으로 상대방을 판단하려고 할 것이다. 상대방을 내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곧 상대방과 상대방의 의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이야기에 특정한 기준을 내세우지도, 그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 진정한 소통이 시작된다. 아이들도 자신의 이야기가 잘 전달되고 생생하게 살아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진정성을 드러내기도 쉬울 것이고, 부모 입장에서 아이를 이해하기도 쉬울 것이다.

 

* 일관성에서 탈피 - 아이마다 상황마다 다른 눈빛이 필요하다

부모가 아이들을 대할 때 일관성을 유지하라는 조언을 많이 받는다. 따라서 많은 부모들이 각각의 아이들이나 그 상황에 상관없이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열 손가락을 깨물면 특별히 더 아픈 손가락이 있듯이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애정과 관심에도 차별과 가식이 있을 수 있다.

 

매순간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부모 스스로도 아이들에게도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아이마다, 상황마다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말하는 부모의 모습이 아이들에게는 좀 더 자연스럽다. 부모들만큼이나 아이들도 부모들의 행동에서 진정성과 가식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평범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서로가 인정하고, 자신의 틀로 아이들을 판단하지 않고, 아이마다 상황마다 다르게 들을 수 있을 때 부모와 아이들 의 관계는 그 전보다 훨씬 따뜻해지고 자연스러워질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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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ytone 2015-04-04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청, 어렵지만 관계의 핵심이죠..
제 경우에는 아이의 감정보다 아이가 처한 상황, 그리고 문제에 초점을 맞출 때 100% 실패하더라고요. 아이가 ˝엄마가 지금 내 말을 잘 이해 못한 것 같은데,˝ 라는 말의 뜻이, ˝엄마가 지금 내 감정이 뭔지 잘 모르는 것 같은데,˝라는 걸 이제서야 조금씩 깨닫고 있어요. ㅠ.ㅠ
감정 받아주고, 수용해주는 게 정말 어렵더라는... 특히 부정적인 감정일 때 말이죠.

지성파파 2015-04-07 22:50   좋아요 0 | URL
듣는게 어렵기도 하지만, 정답이 없기때문에 아이들과의 관계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서로의 눈높이에 맞는 대화가 되어야 하는데, 부모가 아이의 눈높이에 맟추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아이가 부정적인 감정상황일때에는 오히려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눈빛과 침묵으로 부모가 알아차리고 있음을 표현하면 좋을 듯 합니다. 부모라 할지라도 엄연히 타인으로서 상대방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기란...오히려 부모의 욕심이 아닐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