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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부분의 아침을 셋째인 큰아들과 함께 집을 나선다. 새벽을 깨우는 잠 없는 참새마냥 아빠를 향해 무언가를 조잘거리는 아이. 말없이 아이를 진지하게 응시하는 아빠. 이들의 대화는 삼거리에서 지하철역과 학교로 갈라서기 직전까지 계속된다. 아이의 아톰머리처럼 정리되지 않은 뒷머리가 든든하기까지 한 아빠의 출근길은 가볍기만 하다. 아빠와 이런저런 얘기를 통해 기가 살아난 아이의 어깨는 잔뜩 힘이 들어간다.

 

  퇴근길에는 막내를 데리고 풍납토성길을 걷는다. 다섯 살 먹은 우리 집 막내는 아빠에게 하루 종일 있었던 일을 속사포로 내뱉는다. 무어 그리 할 말이 많을까? 유심히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아빠와의 대화를 기다린 하루가 보인다. 가끔은 아이의 말도 안 되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이며 백제토성길을 걸어 나간다.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아빠를 보고는 아이는 토성길을 벗어날 때까지 말로 일기를 쓴다.

 

  분명한 것은 사랑과 존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눈빛부터 다르다는 점이다. 또한 타인에 대한 애정지수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포함한 자존감이 높다는 사실이다.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 사람으로 만든다”는 책을 썼던 전혜성 박사도 부모의 아이를 대하는 태도를 중요시했다. 오죽했으면 부모가 자녀를 섬긴다는 표현까지 썼을까. 전박사님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존중하고 있을까?

 

 

#2.

부모세대와는 다른 세상을 사는 현재의 젊은 부모들에게 아이들은 어떤 존재일까? 사회경제적으로 나아진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좀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을까? 아이는 부모의 소유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대등한 인격체로서 자유롭게 아이를 대할 수 있을까? 경쟁이 심화된 한국사회는 오히려 부모와 아이들에게 더 큰 부담을 지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재의 우리사회는 극심한 피로사회다. 무한 경쟁이 제도화되어 ‘루저’와 ‘00포기자’가 신조어가 된지도 오래다. 놀이터와 골목이 학원으로 대체된 사회,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문제풀이를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지쳐간다. 우리 부모들은 아버지 때문에 많이 주눅이 들었지만, 요새 아이들은 이러한 사회분위기 때문에 주눅이 든다. 문제는 아버지 때문에 주눅 든 아이들보다 사회분위기 때문에 주눅 든 아이들이 받은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성적이라는 결과 위주의 판단이 주를 이루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비교 당한다. 미디어매체에서 보는 연예인과의 비교, 소위 엄친아들과의 비교, 부모의 사회경제적 신분으로 인한 비교 등 이들을 특정한 잣대로 비교하는 것들이 주눅 든 아이들을 또다시 멍들게 한다. 멍든 가슴을 부여잡고 힘든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한들 이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을까?

 

  학원과 과외를 통해 원하는 대학에 가더라도 그게 끝이 아니다. 취업이라는 거대관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청년실업이 만성화된 한국사회에서는 안정된 정규직에 취업하기가 쉽지 않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취업전선에서 좌절을 맛보는 이들에게 미래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주눅 들고, 비교당하고, 경쟁에 지쳐 미래가 암울한 아이들에게 과연 온전한 꿈이 있을까? 이들이 자신을 존중하고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수 있을까? 이는 크게는 사회적인 문제이지만 작게는 가정 내에서 아이의 자존감에 관한 문제이다.

 

 

#3

* 모든 아이들은 결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 모든 아이들은 한 인격체로서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 모든 아이들은 학교성적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되어져서는 안된

  다.

* 모든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스스로 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한 이 명제들은, 우리 모두가 잘 알면서도 현실에서 적용하기 쉽지 않은 사실들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들이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자존감이 강한 존재로 커 나가게 할 수 있을까?

 

* 부모로부터 존중받는 아이

  바람직한 관계의 시작은 부모의 아이에 대한 존중이다. 우리도 모르게 아이들을 부모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행동이 비일비재하다. 우리는 가부장적인 아버지로부터 받았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아이들 스스로가 부모로부터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정받을 때 아이는 비로소 독립적인 개체로서의 인간이 된다. 자신만의 독특한 아이덴티티와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전제가 충족되는 것이다. 부모가 가정에서 아이를 대등한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것도 하나의 습관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습관을 갖느냐가 문제다. 이 습관은 아이의 실수와 성취에 대한 부모의 반응과 관련된다. 결국 부모인 나에게 문제해결의 열쇠가 있다는 얘기다.

 

* 부모와 아이의 신뢰관계의 형성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상호대화를 전제로 한 소통과 이를 통한 신뢰관계의 형성이 중요하다. 부모와 아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최근 소통이 화두가 되고 있지만, 이를 돌려말하면 불통의 시대라는 반증이다. 부모와 아이의 정보격차와 상호이해의 부족은 서로의 대화의 장벽이 될 수 있다. 진실한 대화가 빠진 소통은 없다. 밥상머리나 거실에서의 사소한 대화부터 성적이나 진로문제 등 무거운 주제까지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특히 부모가 아이의 눈높이에 맞는 대화를 할 수 있을 때 아이는 부모에게 마음을 연다. 아이의 솔직한 말 한마디와 이를 지켜봐주는 부모의 따뜻한 눈빛은 서로에게 신뢰를 자라게 한다. 사춘기 시절의 아이에게 일관되게 따뜻한 미소를 보이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어찌되었건 일단 노력해볼 일이다.

 

* 긍정적인 관심과 아이의 자존감

  흔히들 학교성적이 좋은 아이들이 자존감이 높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성취욕구의 충족이라는 측면에서는 어느 정도 타당한 얘기다. 하지만 학생이라고 해서 성적이 그들의 전부가 아니듯이 성적이 자존감에 미치는 영향 또한 일부분에 불과할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에 자존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타인과의 관계가 아닐까 한다. 우리의 생활은 대부분 타인의 삶과 결부된다. 특히 밀접한 타인인 부모의 지속적인 관심과 긍정적인 피드백은 아이의 자존감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부모가 아이의 성적뿐만 아니라 교우관계나 선생님에 대한 평가, 장래의 진로문제 등까지 관심을 갖고 아이에게 반응을 보일 때 아이는 건강한 자존감을 갖게 될 것이다. 훈육위주의 부모나 일관성이 없는 부모는 성적과 관계없이 아이의 자존감을 낮게 할 가능성이 크다. 일단 나부터 뒤돌아보자.

 

*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권한의 부여

  가정의 대소사를 논할 때 아이의 의견을 묻는 것도 중요하다. 아이는 그 논의 과정에서 자신도 가정의 구성원이라는 뿌듯함을 느낀다. 부모와 대등한 주체로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아이는 크게 자란다. 특히 자신의 문제에 관한한 부모의 입장이 주가 되지 않고 자신의 견해가 반영될 때 아이는 그 결론에 대한 책임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우리가 그랬듯이 부모가 일러준 대로 때로는 일방적으로 지시한대로 행동할 때 아이는 독립적이지 않다. 아이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에 책임진다는 생각을 할 때 비로소 독립적인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면서도 아이와 의논을 할 때 내 입장을 먼저 이야기하고 결론마저도 내 생각대로 이끌려는 경향이 강하다. 아이는 마냥 가르치고 따라만 오는 대상이 아님에도 말이다. 우리가 우리 부모들에게 불만을 가졌듯이 그 부정의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 또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즉시 옮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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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량휴업으로 인해 ○○초등학교 휴업이라는 문자가 왔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은 이유 불문하고 이 소식을 반긴다. 그저 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학생일 때에는 학교에 가는 것과 공부하기가 싫다. 직장인인 경우에는 직장에 나가는 것과 일하는 것이 싫다. 그렇다.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의 유전자를 가진 모든 인간은 학교와 직장을 싫어한다.

 

마냥 공부하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 좋을까? 꼭 그렇지만은 아닐 것이다. 놀고 즐기는 본능만큼이나 생존과 성장의 본능 또한 강하다. 하지만 아직 초등학교 3학년인 아이에게는 생존을 위한 돈의 품격이나 자아실현을 통한 성장의 희열은 머나먼 안드로메다의 이야기다. 그냥 노는 게 좋다. 특별한 놀이도구가 없어도 놀고자하는 마음과 공간, 시간만 있으면 된다. 더불어 마음에 맞는 친구가 몇 있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2.

아들이 여덟 살 때까지는 그림책과 동화책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아빠가 봤던 와인 관련 만화책까지 여러 번 읽어서 누나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화장실에 가서도 30분은 예사로 책을 보고 항문질환을 걱정하는 부모의 얘기는 귓등으로 흘리곤 한다. 주말이면 학교 개방도서관과 작은 소나무언덕 도서관에서 각 3권씩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과정이 일과가 됐다. 책을 못 보게 한다는 것이 최고의 벌이 되었다.

 

아이들의 키가 커가는 만큼 호기심의 분야도 다양해진다.

 

어느 날은 종이접기에 빠져서 간단한 비행기부터 까다로운 동물 및 공룡까지 갖가지 사물을 종이로 접는 신공을 보여주었다. 신공의 결과물이 가는 곳은 늘 쓰레기통이지만 몰입의 과정에 더 만족하는 듯 했다. 누나들의 레고 조각과 본인 소유의 레고 부속품으로 교본에도 없는 레고작품을 만들어 아빠에게 보여주곤 한다. 아빠가 볼 때는 별 탐탁지 않은 놀이와 그 결과물이지만, 아들에게는 나름 심오한 작업의 결과물이거나 놀이문화로 보인다.

 

유튜브에 보면 종이접기에 관한 동영상이 많다. 한동안 누나들 때문에 걸 그룹의 춤사위에 빠져있던 아들은 얼마 전부터 종이접기 동영상을 즐겨본다. 종이접기가 비행기나 배를 만드는 것으로 생각하는 어른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것도 하나의 예술분야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물을 종이로 만들어내는 장인들이 있다. 특히 일본 쪽에서 이런 문화가 잘 발달되어 있다. 그들의 개인주의적 문화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으리라 생각된다. 아들은 한 시간짜리 동영상을 보면서 색종이를 비롯한 갖가지 종이로 자신의 작품을 만든다. 11월 첫 번째 주에는 학교에서 전시회도 연다고 한다.

 

우리 아들은 다른 아이들보다 자전거를 늦게 배웠다. 본래 겁이 많아서인지 두발을 동시에 페달에 올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 공포를 이기기까지는 자전거 뒤를 잡아주는 아빠의 거친 말투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무튼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 타고 다닌다. 친구들과 학교운동장과 골목길을 쏘다니며 라이딩을 즐긴다. 아빠랑 한강 자전거 전용도로에서 신나게 타보는 것이 목표이긴 한데 아직은 무섭다고 한다. 겁이 많은 것은 아빠의 업보다.

 

요즘은 아파트 단지마다 아이들을 위한 놀이공간이 있다. 부모가 어릴 적에는 학교 운동장에만 있었던 놀이도구들이 현관문만 열면 도착 가능한 공간에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해가 지고 부모가 부를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사십년 전에 우리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땅거미진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찾는 것은 짠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우리 아들도 엄마 아빠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갈 때까지 놀이터에서 오지 않는다. 다섯 살 터울인 유치원생 동생과 전혀 격의 없이 미끄럼틀과 시소를 탄다. 서로 티격태격하면서 잘도 어울려 다닌다. 때로는 울고불고 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형제애는 두 사람에게는 큰 자산이다. 부모에게는 그들이 보람이다.

 

아들은 방과 후 수업으로 바둑과 로봇공학을 한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본인 주장에 의하면 바둑을 상당히 잘 둔다고 한다. 그 그룹에서는 적수가 없다고 하는 뻥도 친다. 어찌됐건 바둑을 배우는 것은 바람직하게 보인다. 바둑을 배우는 사람들은 자고로 엉덩이가 무거워야 한다. 한수 한수 두어야 하는 침착함과 다양한 수를 생각해야 하는 진지함까지 갖춰야할 것이 많다. 로봇공학에서는 일종의 조립식로봇을 설계하여 조립하고 해체하는 법을 배운다. 원하는 목적에 따라 로봇의 뼈대를 구성하고 전자칩을 고정시키고 이를 전자적으로 구동하는 것이다. 바둑과 로봇을 만들면서 아들은 지금까지의 놀이와는 전혀 다른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몸을 쓰지 않고 머리와 손으로만 두는 바둑과 로봇공학은 그 세계가 넓고 깊다. 앞으로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고민해야 할 것이다.

 

 

#3.

다양한 놀이문화에 푹 빠진 아들을 보면 아빠도 즐겁다. 이는 의무적으로 학원에 보내지 않고 특별히 배워야 할 과외활동이 적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 몰입은 아이에게 즐거움뿐만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에 진짜 흥미를 느끼는지를 알게 해준다. 아이들의 미래는 가능성의 시간이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현재의 시간을 여러 분야에서 스스로 탐색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 속에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고 그 꿈의 성취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자신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

 

가끔씩 우리는 아이의 미래를 직업을 위한 경쟁이라는 분야에 한정시켜 생각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놀이는 아주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고 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교양을 위해 피아노를 배우고 운동을 위해 태권도를 배우고 나머지 시간은 온통 학과공부와 선행학습에 치중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한번 열 살 먹은 아이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공부와 학원 학습이 즐거운 것인가를.

 

아이들의 호기심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과 같다. 아이들 스스로 그 공의 운동성과 방향성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부모가 그 공이 함부로 튀거나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워 공에 실을 매달아놓는다면 그 공은 이미 아이의 것이 아니다. 부모가 아이의 동심과 호기심을 키우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그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그냥 놔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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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등학교 하교시간, 종이 울리면 기다리는 엄마들은 손을 흔들고 노란색 미니버스는 문을 연다. 교과목을 가르치는 학원부터 태권도, 악기, 각종 체육활동을 지도하는 학원까지 그 유형도 다양하다. 반면 하교시간 시끌벅적해야할 골목길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거의 들을 수 없다. 간혹 학원을 오가는 학생들의 바쁜 발걸음과 폐지를 주어 생계를 유지하는 노인들만 보인다. 중학교, 고등학교의 하교시간 풍경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요즘의 아이들은 골목길에서 더 이상 놀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놀 시간이 없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풍경은 경쟁이 치열하고 학원이 많은 동네로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진다. 학원의 강의실이 그들이 부대끼는 놀이터가 된지 오래다. 간혹 학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도 함께 놀 수 있는 친구가 없어 집밖에 나오지 않는다. 집안에는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이용한 게임과 24시간을 시청할 수 있는 TV가 있어 혼자 있는 시간이 심심하지는 않다. 부모 입장에서도 뉴스에 나오는 흉흉한 소식에 오히려 아이들이 집에 머무르는 걸 환영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어디서 무슨 놀이를 하면서 놀까?

 

#2.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라고 지적한다.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놀이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모든 즐거움은 아닐지라도 살아가면서 느끼는 유희의 상당 부분이 놀이로부터 비롯된다. 생의 에너지를 제대로 방출할 수 있는 재미가 덧붙여진 놀이가 없다면 그 무엇이 인간을 즐겁게 할 수 있을까? 혹자는 일에서도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부분의 진실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일과 놀이를 구분할 줄 안다. 심지어 누군가는 즐겁지 아니하면 인생이 아니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얘기다.

 

지금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놀이 자체가 하루의 중요한 일부이던 때도 있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신작로와 동네의 골목길은 온통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학교 운동장뿐만 아니라 마당, 산골짜기, 들판이 모두 아이들의 놀이터였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때의 아이들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배고픔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도 모르고 육체적 에너지를 소모했다. 그 소모된 에너지는 다시 선순환의 고리를 거쳐 내일을 위한 충만한 열정의 원천이 되었음을 그때를 지내본 사람들은 안다.

 

온전히 사계절의 순환을 느끼고, 자연 속에서 사물과 감정을 교류하고, 또래친구들과 맨몸으로 부딪치면서 이들은 미래의 주체로서 자라났다. 비록 하루하루의 삶은 가난했지만 그들은 놀이라는 해방구를 통해서 양질의 자양분을 얻을 수 있었고, 보다 창의적인 잠재력을 가진 성인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지나고 보니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마냥 놀던 그때가 행복한 시절이었다. 우리의 기억은 소멸되었을지라도 우리의 몸은 그 시절을 기억한다.

 

돌조각 몇 개로 팔방을 하고, 사금파리로 땅따먹기를 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골목길에서 부모들이 일하는 논밭으로 흘러간다. 그 웃음은 그 시절 부모들에게는 비타민과 같았다. 냉장고에서 바로 꺼내 든 시원한 청량음료 같던 아이들의 미소로 인해 부모의 땀방울은 건강하게 흘러내렸다. 환상속의 유토피아는 그렇게 늘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2015년 지금, 초등학교 6학년생은 대학 수능을 걱정하고 부모들은 그 아이의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 불온한 상상에 그치면 좋으련만, 그저 웃고 지날 일은 아닌 것 같다.

 

 

#3.

우리가 생각하는 놀이공간인 골목은 따뜻한 햇볕, 아이들의 웃음과 이를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으로 구성된다. 바람직한 놀이공간은 땀방울 밴 웃음소리와 돌아보는 눈길이 서로 교차되고 공감할 때 완성된다. 아이들은 골목과 놀이터에서의 시간과 공간을 온몸으로 기억한다. 감나무 사이로 다가오는 뜨거운 여름태양과 나무대문 사이로 드나드는 부드러운 바람의 줄기를 기억한다. 소낙비에 분연히 일어서는 흙먼지 냄새와 다가설수록 멀리 물러서는 찬란한 무지개를 기억한다. 땅과 햇볕과 땀방울의 유혹을 느끼면서 아이들은 성장하는 것이다.

 

학교 운동장과 좁다란 골목,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마음껏 뛰어놀아야 한다. 보습학원의 보충수업과 영어학원의 숙제를 걱정하지 않고, 하고 싶지도 늘지도 않은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지 않고도 시간이 흘러갈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에, 부모가 부르는 손짓에 배고픔이 사라지는 그 순간을 느껴야 한다.

 

아이들이 뛰노는 그곳은 단절과 차단의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 개방성을 원칙으로 하되, 따뜻한 배려와 관심이 동심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팍팍한 세상의 어두운 면으로부터 벗어나있되, 그 세상의 중심에서 세상을 향해 마음껏 외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어야 한다. 그 곳에서 아이들은 달력과 시계속의 시간이 아닌 스스로 몸이 원하는 시간을 누리며 하루를 채워나가야 한다. 그 채움으로 인해 아이들은 단순하면서도 자명한 삶의 원리를 몸으로 체득할 필요가 있다. 즐거움은 놀이로부터 온다는 사실. 놀이로부터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는 진실.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놀고 있을까? 우리, 부모들에게 질문을 던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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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때 천사였다. 아니 천사였을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천국이 아닌 순수한 영혼이 모여 사는 천사의 나라. 난 그곳에서 살고 있다가 엄마의 간절한 부름을 받아 엄마에게로 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빠를 통해 엄마에게로 왔다. 모든 빛과 모든 색상이 존재하는 그 곳에서의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내가 천사였다는 사실은 내 천진난만한 미소에 남아있다. 사람들은 내 미소와 눈망울을 보고는 천사의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래서 엄마는 나에게 주문을 하곤 한다.

엄마에게 사랑의 하트를 날려봐

나는 한 눈을 찡긋 감고(실제로는 두 눈을 감고), 두 손으로 작은 하트를 만들어 발사시키면 주위의 모든 사람은 쓰러지고야 만다. 마치 큐피드의 화살이라도 맞은 것처럼. 나는 그들에게 입술을 둥글게 내밀어 온기를 불어넣고 천사의 사랑을 일깨워준다.

 

빅뱅이론은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는 이론임을 나는 알고 있다. 위대한 이 이론이 어찌 우주의 탄생만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모든 인간은 하나의 소우주임을 나는 안다. 나 또한 천사의 신분에서 인간으로 변화할 때 이 이론의 도움을 받았다. 이른바 엄마 아빠의 감정의 폭발. 그 것은 어떠한 감정보다 위대했으며 값진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르는데, 천사들은 누구보다 사랑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천사의 기억을 머금은 젖먹이 시절 우리는 옹알이로 부모의 행위에 반응한다. 부모들은 자신의 눈빛과 손짓에 반응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속에 깃든 사랑의 감정에 반응한 것이었다.

 

감정의 대폭발을 거친 육체는 열정과 환희를 꿈꾼다. 엄마와 아빠는 사랑의 기쁨이 넘치는 작고 소란스런 행위를 통해 나를 불러내는 신기한 재주를 가졌다.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비밀스런 행위를 통해 잠자고 있던 나의 영혼은 깨어났다. 그동안 오랜 시간을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우리 천사들은 한 가지를 빼고는 모든 것을 가졌다. 가족이라는 명사. 그래서 천사들에게 꿈이 있다면, 행복한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불러준 우리 엄마, 아빠에게 감사드린다. 그리고 누나들과 형에게도. 앞으로 몇 년 동안 그들은 나로 인해 사랑과 감동으로 충만한 시간을 갖게 될 것이다. 부모와 가족이라는 이름이 가져다주는 그 무한한 기쁨. 물론 그 뒤로는 이를 보장해주지는 못할 수도 있지만.

 

현재의 내 이름이 지어지기 전, 사람들은 나를 길동이라 불렀다. 혹자는 강동구 길동에서 낳은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그 것은 아니다. 2월의 어느 새벽 송파구에 위치한 저명한 산부인과 병원 앞 인도에서 나는 첫울음을 터뜨렸다. 나를 받아낸 산파는 의사가 아닌 레깅스라는 분이었고, 라면을 먹고 귀가하는 이름 모를 취객의 도움(간호사를 불러왔다고 한다)도 받았다. 엄마가 정신줄을 놓은 상황 속에서도 침착함과 유연성을 잃지 않았던 레깅스라는 분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 당시 길을 지나던 여러 사람들도 어쩔 줄 몰라 했었다는 후문이다. 그들에게는 살면서 두 번 보기 힘든 광경이었으리라.

 

아홉 살 먹은 형은 학교가기 싫은 날이면 배가 아프다고 한다. 나는 다 안다. 나도 어린이집이 가기 싫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마다 묻는다.

엄마, 아빠, 오늘 어린이집 가는 날이야? 안가는 날이야?”

돌아오는 대답은 늘 그렇듯이 실망스럽게도,

, 어린이집 가는 날이야! 얼른 치카치카하고 옷 입자

이때는 천사시절에 익혔던 애교가 덩어리로 발사돼도 통하지 않고, 결과는 유모차 탑승이다. 천사의 미소도 통하지 않는 세상의 실망스런 규칙이 있는가보다.

 

천사의 나라엔 온갖 신화가 있다. 그 중에서도 곰에 관한 신화도 있는데, 인간 세상에도 곰에 관한 이야기가 존재하고 있었다. 비록 세 마리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그래서 나는 천사 때의 기억을 되살려 곰 세 마리라는 동화를 노래로 열심히 부른다. 그런데 왜 아빠곰은 늘 뚱뚱하고 엄마곰은 날씬한지 의문이다. 내가 몇 년 동안 봤던 현실은 정반대가 많았다.

 

엄마는 나에게 내가 좋아하는 멍멍이와 같은 강아지라는 별명을 부른다. 아니 천사의 윙크와 미소를 가진 나를 멍멍이에 비유하다니, 분명 이건 나에 대한 모독이다. 하지만 강아지라는 말도 우리 강아지, 우리 강아지라고 자꾸 듣다보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스스로 보물 강아지로 부르게 했다. 이왕이면 보물강아지가 더 좋지 않은가? 주위에서 보물강아지로 불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다. 난 우리 집에 엄마, 아빠의 부름을 받고 온 네 번째 천사이자 유일한 보물강아지다. 나는 서열상 22남 중 막내이지만, 우리 가족 중에서는 슈퍼 갑이다. 네 살 먹은 세상에서는 아무도 나를 이길 수 없다. 그리하여 아빠는 슈퍼 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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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엄마, 아빠가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주로 반찬, 청소, 말투 등)로 말다툼이 있었다.

 

엄마는 왜 그게 문제가 되냐고?”

아빠는 그것이 문제가 안 되면 뭐가 중요한 문제냐고?”

 

엄마는 남자가 그런 것은 대충 넘어가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문제 삼어?”

아빠는 그러면 당신한테 중요한 문제는 무엇인지 나를 이해시켜봐

 

엄마는 멀 이해를 시켜, 척하면 알아야지. 꼭 이야기해야 알겠어?”

아빠는 나랑 18년을 살고도 아직까지 나를 이해 못해, 내가 허수아비랑 살고 있는 건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막내인 네 살배기는 분위기가 수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간파하고 엄마에게 있는 애교 없는 아양을 다 떨려고 노력해본다. 살살 눈웃음을 치면서 엄마 품을 파고들었으나, 아빠랑 감정싸움에 짜증이 날대로 난 엄마는 오히려 네 살배기에게 화풀이를 한다.

 

, 생긴 것은 꼭 지 애비 닮아가지고, 저리 가. 느그 아빠한테나 가

 

엄마의 예상 밖의 반응에 놀란 네 살배기는 눈만 껌벅거리며 갑자기 몸이 굳었다가 아빠한테 달려간다. 그러면서도 엄마 품에 대한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다.

 

 

#2.

삼십년, 사십년 전에는 이런 풍경은 흔했다. 동네방네 사랑싸움도 아닌 지지리도 못난 감정싸움 때문에 집집마다 아이들은 경기를 일으키곤 했다. 말다툼이 좀 커지면 밥상이 방에서 부엌으로 날아다니곤 했다. 그래서 그때는 장날마다 상고치는 사람이 부러진 상다리를 수선하는 재미를 보곤 했다. 이건 옛날 얘기다. 하지만 그때 밥상 주변에서 서성이던 아이들은 다 기억한다. 날아간 밥상 때문에 못 먹었던 밥도 국도 다 아쉬웠다. 배도 고팠고 마음도 아팠다.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부모들은 잘 몰랐다. 왜냐고? 부모들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기 때문에.

 

현재의 부모들은 자신의 부모들보다 덜 싸우기는 하지만 여전히 말다툼을 피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어쩌면 인간의 본성이나 부부의 본질 속에 분쟁의 속성이 담겨있는지도 모르겠다. 부부만큼이나 쉽게 이야기하고 속내를 드러내기 쉬운 인간관계도 없다. 그만큼 편안 사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서로에 대한 조심성이 없다. 사소한 감정도 쉽게 드러내고 결국은 그것 때문에 다시 분쟁이 야기된다.

 

부부는 어떠한 문제에 관해서든지 말다툼을 할 수 있고, 자신의 감정 상태에 충실해서 상대방을 설득할 수도 있다. 부부관계에 어찌 이성적인 판단과 냉철한 분석에 기한 생활만이 존재하겠는가? 전직 대통령을 지낸 어떤 분도 밥상에서 배우자님이랑 수없이 싸웠다지 않는가? “어째 오늘은 찌개가 좀 짜네. 자네 말수가 없는 것을 보니 나한테 감정 있는가?” 하면서 말이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로 끝날 수 있으나, 이 싸움을 관전하는 아이들은 물 베기로 끝나지 않는다. 아이의 성장단계에 따라서 부모의 다툼에 대한 반응은 다양할 것이나, 아직 감정처리에 성숙하지 못한 아이들은 작은 상처를 입거나 커다란 분노를 배우기도 한다. 말다툼에서 비롯되는 언어에 고상한 교양과 고품격의 매너가 끼어들었다는 얘기는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결국 상처를 주거나 선하지 못한 말들이 오갈 수밖에 없는 고성의 현장에서 아이들은 심박동이 빨라지고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3.

어찌되었건, 다음날 엄마는 네 살배기를 데리고 어린이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평소에 말이 많던 네 살배기가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말이 없었다. 엄마는 영문도 모르고 이를 궁금해 하던 차에, 아이가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어젯밤에는 내 마음이 세모마음이 되어버렸어

 

엄마는 세모마음이라는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의미를 깨닫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젯밤에 벌어진 사단 때문에 아이가 자신의 마음이 동그란 마음에서 세모마음이 되었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부모의 말다툼과 엄마의 표현이 네 살배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의미였다. 네 살짜리다운 표현이었다.

 

아무튼 네 살배기의 입에서 세모마음을 들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엄마 아빠의 말다툼이 그냥 지나가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잊혀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이나 사단도 아이에게는 충분히 불편한 상황일 수 있고, 그 것이 아이마음에 무엇인가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어린 시절은 부모로부터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아이의 나이가 어릴수록 부모와의 감정견련성이 크다. 부모 입장에서는 부모의 다툼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과소평가되기 쉬우나, 아이들 입장에서는 쉽게 지워지기 않는 마음의 생채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부모가 사소한 다툼이라도 아이들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하지만 우리의 부모들이 이 점을 소홀히 했듯이 현재의 부모들인 우리들도 많이들 이 점을 잊고 살아가고 있다.

 

 

#4.

엄마, 이젠 내 마음이 다시 동그래졌어.”

 

어린이집에서 네 살배기를 데리고 돌아오는 도중에 엄마는 이 말을 들었다. 멀리 초승달이 수줍게 웃고 있었고, 엄마 마음속의 불편함도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다. 아이들이 가지는 마음의 모양은 세모나 네모가 되어서는 안 되고, 동그란 모양을 가져야 한다. 동그란 마음.

 

아이들은 그렇게 동그란 마음으로 세상을 동글동글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상처로 인해 마음이 세모나 네모가 되어 각진 마음을 갖게 되면 세상도 각지게 보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 마음을 동그란 마음으로 키워줄지 아니면 세모마음으로 아프게 할지는 우리 부모들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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