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을 다녀오던 용인의 어느 길에서

세월호 유가족을 보았다.

찢어진 심장과 눈물만 남은 그들의 고독을 보았다.

삼보일배를 하며 진도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걷고 있는 그들의 의지를 보았다.

노란 깃발은 더위와 무관심에 지치고,

하루의 생을 다한 석양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들에게 무슨 말이 필요할까.

어떤 위로가 이들의 눈물을 거둘 수 있을까.

순례의 길도 구도의 길도 아닌 천릿길을

이들은 어떤 심정으로 헤치고 걸어왔을까.

잠시 멈춰 숨을 고르는

그들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본다.

한걸음 한걸음이 그들이 뿌려낸 눈물인 것을

지나가는 행인에게서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서럽게 멍드는 것은 유가족과 행인의 가슴뿐만이 아니기에

이들과 노을 그 어느 것에도 눈을 마주치치 못한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을 가진 것은 우리 모두의 업일진대

유독 이들만 길을 걷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우리 모두는 이들에게 희망이어야 한다.

이들이 걷고 있는 길 위의 절망과 부조리한 눈초리로부터

이들을 보호하고 안아주어야 한다.

이들이 곧 우리이고,

이들의 아이들이 곧 우리의 아이들이므로.

영혼이 없는 밥을 먹고 살아가는 하루는

인간의 삶이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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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 시절 사소하지만 거대한 의문 한가지. 시간은 왜 이렇게 느리게 흘러가고, 무한하게 주어진 것일까? 마치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우물물처럼 끊임없이 내게 필요한 시간이 주어질 수 있을까? 하지만 그 의문에 대한 깨달음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우리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은 머리카락뿐만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그 깨달음을 얻는 순간 우리의 삶은 팍팍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한 편의 정겨운 동화처럼 보이던 세상이 삭막한 현실로 가득한 일간신문의 어느 한 면이 되고 만다.

 

시간에 대한 개념이 부족할 때에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시간에 대한 관념이 명확해질 때에는 그 부족함으로 인해 허둥거리지 않기 위해 결국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의 결론이 무엇이던지. 한번뿐인 삶을 살아가는 동안 현자들은 모든 것을 알려고도 모든 것을 행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그 것을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시간을 보낸다.

 

봄꽃처럼 한번 피고 지는 인생을 사는 우리는 가끔씩 시간여행을 꿈꾼다.

 

시간여행이라는 소망은 불편한 현재에 사로잡힌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기도 한다. 적어도 마음속으로는. 하루를 살다보면, 우리는 어느 하루 인생 최고의 하루를 살기도 하고 최악의 하루를 살기도 한다. 누구든지 최악의 하루를 산 날은 시간여행을 통해 비참한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한다.

 

 

#2.

영화 어바웃 타임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가족의 이야기다. 시간여행의 능력은 이 가족들 중 남자들에게만 그것도 21살 이상이 되었을 때 생긴다. 평범한 외모의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적인 여자친구를 만들기 위해 시간여행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프레디삼촌은 돈을 위해 시간여행을 했다가 불행한 인생을 살았고, 아버지는 세상의 모든 책을 읽기위해 시간여행을 했다고 한다.

 

이 가족의 일원처럼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최고의 가치에 시간을 투자한다. 우리에게 인생의 모든 시간을 바쳐 얻고자 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우여곡절 끝에 주인공은 세 가지 교훈을 얻는다. 두 가지는 아버지를 통해서, 마지막 한 가지는 자신이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첫 번째 교훈은, 평범하게 하루를 살라는 것이다.

 

두 번째 교훈은, 시간 여행을 통해 똑같은 하루를 다시 살아보라는 것이다.

 

똑같은 하루일지라도 두 번째 하루에서는 첫 번째 하루에 보지 못했던 숨겨진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하루에서 보았던 삶의 비경과 삶의 비의로 인해 우리의 하루는 더욱 풍부해지고 많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깨달은 마지막 교훈은,

 

이제는 시간여행을 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마치 시간여행을 한 것처럼, 오늘 하루가 이 세상 마지막 하루인 것처럼 열심히 시간을 보내라는 것이다. 특별하면서도 즐겁고 후회 없는 하루.

 

아무리 시간여행을 거듭하여 과거를 바꾼다 할지라도 현재 사랑하는 가족과의 모든 경험과 기억마저도 바꿀 수는 없다. 때로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현재 간직한 소중한 기억을 뒤바꿔놓기도 한다. 사랑하는 아이의 성별이 바뀌거나 최고로 기억되는 하루의 기억이 없거나.

 

어쩌면 우리 모두는 하루하루 시간여행을 하고, 그 중에서 선택된 최고의 하루를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가 선택한 이 하루를 즐기는 것이다.

 

 

#3.

영화 속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반복된 시간여행을 통해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에 은퇴를 결정한다. 50대 초반에 대학교수라는 직업에서 조기은퇴하고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하게 된 계기는 시간여행자마저도 변화시킬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이었다. 주인공은 생의 막바지에 다다른 아버지가 가족과 본인을 위해 아주 여러 번의 시간여행을 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불어 시간여행자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3차원의 공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시간여행을 했다는 물리적인 증거는 없다. 하지만 데자뷰(기시감)에 대한 설명은 어떻게 할 것인가? 간혹 기시감에 시달리는 누군가는 스스로 시간여행을 했었다는 의혹을 가져볼만하다. 이 역시 증명할 수는 없지만.

 

모생명보험회사의 광고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평균수명을 전제로 하루 중에 순수하게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의 총량을 계산하는 것이다. 가족과 잠자는 시간마저 빼보면 평범한 대부분의 개인들은 3년을 넘기가 힘들다. 당혹스런 결론에 의해 우리는 고통의 시대를 살아가는 소소한 개인들의 애환과 가족의 참된 가치를 스스로에게 질문케 된다.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생의 소중한 가치는 나라는 개인과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발원하지 않았던가?

 

누군가 나에게 시간에 대해서 묻는다면, 그에게 다시 되묻고 싶은 말이 있다.

 

두 번 혹은 그 이상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나요?”

 

그 답이 무엇이던지 우리에게 남은 결론은 하나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시간여행을 아무리 반복해도 결국은 선택의 문제만 남을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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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은 늘 가까이 있다. 몸과 정신에 대한 분별, 속과 겉에 대한 분별, 사랑과 미움에 대한 분별처럼. 하지만 오늘 저녁은 그 분별을 잊고, 아니 잃어버려 혼란스럽다. 내 몸과 영혼이 분별을 잃었다. 차가운 내 몸을 바라보는 내 영혼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생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분별이었기 때문이다. 생과 사에 대한 깨달음이 시작되는 또 다른 분별이다. 그럼 이제 내가 살아있지 않은 것인가?

 

멀리 빛이 보인다. 나는 저녁을 먹고 있었고, 오래전 세상을 떠난 부모의 얼굴이 나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안타가운 손짓으로 거친 손사래를 치며 나를 말린다. 그들에게 제사를 올릴 때마다 영정사진 속에서 기억은 하나씩 잃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말리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직은 이르다는 것일 터인데,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것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살아온 모든 것들이 착각이었던가. 짧은 시간동안 오래전 기억부터 최근의 내 마음까지 모두 내 생각의 통로를 지나고 있다. 천천히 멀어져가는 봄 아지랑이처럼 아스라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짧고 강열한 전율이 영혼의 핏줄을 떨리게 한다. 마음이 아리게 아프다.

 

어느 때인지 자세한 기억은 없다. 그때 양복을 입고 찍은 내 사진이 영정사진이 될 줄, 그때는 몰랐었다. 좀 더 환하게 웃을걸.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아내와 아이들을 바라보았으면 좋았을 걸. 모든 후회는 항상 나중에 온다지만. 이번 후회는 너무 늦었다. 그들에게 용서를 빌 시간도 이제는 허용되지 않는다. 함께 했던 시간보다 함께 하지 못할 시간들에 대해 그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데. 그들이 내 마음을 이해할까. 두려운 마음이 장막처럼 나를 감싼다. 그럼에도 나는 남겨진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안경을 쓴 영정사진은 나조차도 낯설어 보인다. 검은 상복을 입은 이들이 외딴 섬처럼 점점이 떠있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원래 외로운 섬이다. 한때는 엉겨서 붙어살기도 하고, 영영 떠나버려 정처 없는 섬도 있다. 나로 인해, 내가 낳은 섬들이 보인다. 그들의 탯줄을 자르고 숨결을 불어넣던 기억이 새로 돋아난 새싹 같다. 그들로 인해 내가 얻었던 세상의 기쁨을 말도 다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 자잘한 애정표현마저도 다하지 못하였다. 속내를 감춰두는 것이 미덕이 아니었는데, 나는 아직까지도 그 고마움을 마음속에서 꺼내지 못하고 있다. 진정 미안하다.

 

맏상주인 아들의 눈빛은 오늘따라 유난히 할 말이 많아 보인다. 과묵하게 다문 입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속으로 삼킨 눈물이 어찌 서럽지 않을까. 그래서 아들의 숨겨진 슬픔 때문에 내 마음은 더욱 무거워진다. 그 아들의 아들, 그러니까 손자가 나를 보고 웃는다. 아직은 할아버지의 부재를 몸소 깨달을 수 없는 나이다. 그에게 나의 부재는 하나의 일상일 수밖에 없다. 아홉 살 먹은 조카손자가 나를 위해 향을 사르고, 거듭 거듭 절을 한다. 죽음이라는 의미를 알 수는 없겠지만 이 의식이 가져다주는 슬픔은 알고 있는 눈치다. 그래서 그가 보내준 인사가 고맙고 또 고맙다.

 

멀리 캐나다에서 오는 비행기는 아직 태평양 상공에서 날짜변경선을 넘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 보이지 않게 흘린 눈물이 태평양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드문드문 흩뿌려진 작은 섬들이 시야에서 급히 사라진다. 난기류에 접어들지 않았음에도 기체는 작은 어깨의 흐느낌에 흔들린다. 조급한 마음이야 이미 태평양을 몇 번이나 건넜으리라. 몸이 느끼는 슬픔보다 마음이 느끼는 서글픔이 먼저 날아온다. 나의 고통을 통해 나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나를 위한 마지막 의식은 나흘이나 이어져 왔다. 일부 직계가족의 부재는 나의 소멸을 하루 더 늦추고 있다. 평생은 기다려왔을 이 적막한 순간에 나는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나흘 동안 그들도 나처럼 잠도 못 이루고 있다. 충혈된 눈동자가 나를 더 슬프게 한다. 육친의 정은 이토록 깊고 넓은 것임을 왜 예전에는 몰랐을까. 그들이 보여준 참다운 슬픔에 대해 나는 할 말이 없다. 진정 고맙다.

 

한 가지에 난 누이들과 동생들의 가슴에 멍이 들었다. 실핏줄이 불거진 눈동자에는 한여름 밤의 강물이 흐른다. 어느 가을날 내장산에서 보았던 붉은 애기단풍만큼이나 애달픈 서러움이 낮게 깔린다. 해가 저물고 그들이 마지막 눈인사를 보냈지만 나는 애써 못본척하고 만다. 어느 해인가 어머니를 영계로 떠나보내고 처음 맞이한 생신날 느꼈던 비통함을 그들도 공감한 것일까. 그들의 술잔에 흘러넘치게 술을 따른다. 쓰디 쓴 술잔이 달디 달도록.

 

조급한 발걸음이 내 딸의 것인 줄 알았다. 그가 걸어온 발걸음의 수를 하나하나 헤아리고 있다. 이것이 내 마지막 기억이 될 수도 있어 내 딸이 격하게 내놓은 울음의 개수를 기억하고자 한다. 속절없는 안타까움은 부녀의 인연의 끈을 쉽게 놓지 못한다. 무엇이 급한지 나와 눈을 맞추지도 못한다. 무엇이 그리 미안한지 미안해, 미안해하고 거듭 고백한다. 머리를 들지 못하고 몸은 바닥에 낙엽처럼 눕는다. 처량하게 젖은 목소리가 침묵을 삼킨다. 눈물이 가진 힘이 또 블랙홀을 만들고 내 마음은 텅 빈 우주와 같다. 내 사랑하는 딸이 무어가 미안할까. 오히려 더 사랑해주지 못한 내가 더 미안하지.

 

태평양을 딸과 함께 날아온 두 사람 중 한사람. 40년 결혼생활을 함께한 여인이 오늘따라 외로워 보인다. 내 인생의 혁명과 같은 사랑을 일깨워준 그녀에게 내가 무슨 위로를 할까. 무슨 말을 건네며 앞으로의 생에 대하여 이야기할까. 이미 커버린 아들딸을 대신한 손주를 키우는 재미에 대해 어떻게 그 즐거움을 다시 나눌까. 말수가 적은 나를 위해 그녀가 풀어준 수많은 말들의 향수를 내가 어찌 잊을까. 허약한 나를 위해 붕어즙과 보약을 고던 그녀의 하얀 손길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다시 한 번만이라도 만져볼 수 있을까. 그 여인을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가족들은 나의 부재를 생각하겠지. 제사상 위에 어색한 얼굴의 내영정이 걸리고, 나는 또 내 생전의 기억을 떠올리겠지. 푸른 나뭇잎같은 수많은 생전의 기억을 내 영혼이 기억하고 있다. 무등산의 일출, 광주 댐에서 붕어낚시, 딸의 결혼식, 아들의 대학입학식, 월남에서의 달빛아래 전투, 생과 사는 늘 함께 했었다는 것을 이제 알겠다. 모든 게 소중하다는 것도.

 

나한테 음복은 과한거지. 평생 분에 넘치는 술잔을 기울였음에. 어느 날은 아침부터 소주잔이 나를 삶의 활기로 이끌었고, 어느 날은 낚시터에서 피라미라면과 소주잔이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늘 술잔을 비우면 별 하나가 떨어져 가슴속에 긴 꼬리를 남기곤 했다. 별자리를 대신한 수많은 술 취한 밤에 나는 누구에게 가족의 행복을 빌었을까. 그때도, 지금도 소중한 이들에게 이제는 내가 그들의 행복을 빌어야 한다.

 

그래, 빛이 가까워지고 있다. 멀리 있던 등대가 마지막 항로를 비춰주는 것처럼. 머지않아 나의 육신은 분별을 넘어 분토되어 흩어질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닌 기억은, 내가 살아온 기쁨의 흔적은 내 가슴에 영원토록 안고 갈 것이다. 지구라는 별에서 내 소우주를 가능케 했던 작은 섬들의 추억과 행복의 조각들을 영원의 기억속에 지니고 있을 것이다. 다음에, 아주 나중에 그대들을 다시 만날 때 다시 꺼내볼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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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많은 상황을 마주한다. 세속적 리얼리티는 편하거나 불편하거나, 어렵거나 좌절을 주거나, 간혹 당혹스런 성공을 주거나. 때론 익숙지 않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지만, 추론과 결론은 쉽지 않다.

 

부딪치는 상황 모두에서 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인가?

가능성의 문제를 넘어서 그 해답이 의미 있을 것인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근심을 만들면서 생각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만들 때가 많다.”(루이 스퀴트네르, 프랑스 시인)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한다고 하는 것의 시점이 과거인 경우는 추억이거나 후회정도일 것이다. 그 시점이 미래인 경우는 기우에 가까운 걱정이거나 추측에 불과한 경우일 것이다. 이는 생각을 만드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그 주체가 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시점은 지금 현재이어야 한다.

 

내가 오늘이라는 현재를, 내 상황을 분명하게 집중해서 바라본다는 것이 생각이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진지하게 상황을 바라보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해진다.

 

비로소 내 생각을 하는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전제는 나의 존재와 내 생각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것이 무엇이냐는 우문에 대한 현답은 나 자신이라는 존재이다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눈을 감으면 온 우주가 눈을 감는 것과 같기 때문이. 11월의 붉은 나뭇잎과 청명한 가을하늘과 사랑하는 가족의 따스한 눈빛도 나라는 존재가 있기에 의미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것은 나의 생각과 오늘이다. 온전히 오늘이라는 현재를 생생하게 살아갈 때, 형식이나 외피가 아닌 실체적으로 존재할 때, 삶의 실존적 의미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삶의 리얼리티가 오늘에 토대를 두고 세상에 관한 인식의 뼈대를 세울 때, 좋은 삶은 시작된다. 좋은 삶은 오늘이 지나더라도 음미해볼 가치가 있는 삶이다.

 

당신의 오늘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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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14층 아파트 옥상위에서 멍한 눈으로 잿빛하늘을 바라보며 서있다. 다른 누군가는 한강대교 중간에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고등학교 5층 옥상위에서 텅 빈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러한 장면에서 얼마든지 긍정적인 마무리로 스토리를 구성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는 이러한 장면을 비극으로 만들고야 마는 어두운 면이 있다.

 

경제적인 문제로 일가족이 운명을 달리하고, 취업을 비관한 취업준비생이 세상을 달리하고, 성적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던 학생이 꽃다운 생명을 버리는 안타까운 사연은 하루도 빠짐없이 뉴스거리가 된다. 어떤 문제의 심각성이 이들에게 절망을 주었을까?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서 우리사회의 어떤 측면이 이들에게 그토록 비극적인 선택을 하도록 했을까?

 

개인에게 선택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매혹적이다. 특히나 자유라는 말과 더불어 사용될 때는 이상한 마력을 발회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이 매력적인 경우는 그 영역이 정당한 개인의 영역이고 그 개인에게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경우에 한정된다. 다시 말하면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영역에서나 개인이 책임질 수 없는 영역에서의 강요된 개인의 선택은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유형의 선택은 선택이 아닌 강요이고 억압된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재앙사회에 가까운 우리사회는 언제부턴가 개인의 영역과 국가의 영역, 사회의 영역이 혼란스럽게 존재한다. 원론적인 측면에서는 어떨지는 모르지만, 개인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이 마냥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이를 기화로 국가나 사회는 이 영역의 문제를 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사회안전망과 교육시스템과 경제적인 구조, 국가의 미래가 절대 개인적인 문제일수는 없다. 하지만 무책임한 우리사회는 부실한 사회안전망으로 인한 개인의 상실, 철학 없는 교육시스템으로 인한 아이들의 절규, 거미줄 같은 경제구조 속에서의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개인의 영역으로 분류한다.

 

일례로 한 달에 사교육비 400만원을 들여 공부시키는 강남의 아이와 방과 후 학습마저도 듣기 어려운 아이의 경쟁이 과연 정당한가? 많은 이들이 침묵 속에서 부당하게 생각하는 그 부정의가 우리사회의 경쟁의 룰이 된지는 오래전의 이야기다. 정당한 과정과 공정경쟁의 룰은 도외시하고 오로지 결과만을 생각하는 승자독식의 사회는 도구가 부족한 개인들에게는 절망의 다른 이름이다. 국가나 사회가 책임져야할 영역에서 많은 개인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으로 인해 절망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

 

좌절하고 패배의 늪에 허덕이는 이들을 위로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걸그룹의 현란한 몸동작에 환호하고 잔혹한 살인범에 공분하기도 하지만, 칼끝에 서 있는 개인들을 감싸주거나 위안을 주기위해 노력한 적은 별로 없다. 내가 혹은 당신이 이미 그 칼끝에 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퇴로 없이 절벽 끝에 서있는 처연한 눈동자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 절망감을 가슴으로 안아주지 못할 때 우리는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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