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14층 아파트 옥상위에서 멍한 눈으로 잿빛하늘을 바라보며 서있다. 다른 누군가는 한강대교 중간에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고등학교 5층 옥상위에서 텅 빈 운동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러한 장면에서 얼마든지 긍정적인 마무리로 스토리를 구성할 수 있지만, 우리 사회는 이러한 장면을 비극으로 만들고야 마는 어두운 면이 있다.

 

경제적인 문제로 일가족이 운명을 달리하고, 취업을 비관한 취업준비생이 세상을 달리하고, 성적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던 학생이 꽃다운 생명을 버리는 안타까운 사연은 하루도 빠짐없이 뉴스거리가 된다. 어떤 문제의 심각성이 이들에게 절망을 주었을까?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서 우리사회의 어떤 측면이 이들에게 그토록 비극적인 선택을 하도록 했을까?

 

개인에게 선택이라는 단어는 지나치게 매혹적이다. 특히나 자유라는 말과 더불어 사용될 때는 이상한 마력을 발회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유로운 개인의 선택이 매력적인 경우는 그 영역이 정당한 개인의 영역이고 그 개인에게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경우에 한정된다. 다시 말하면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영역에서나 개인이 책임질 수 없는 영역에서의 강요된 개인의 선택은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유형의 선택은 선택이 아닌 강요이고 억압된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재앙사회에 가까운 우리사회는 언제부턴가 개인의 영역과 국가의 영역, 사회의 영역이 혼란스럽게 존재한다. 원론적인 측면에서는 어떨지는 모르지만, 개인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이 마냥 바람직하지만은 않다. 이를 기화로 국가나 사회는 이 영역의 문제를 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사회안전망과 교육시스템과 경제적인 구조, 국가의 미래가 절대 개인적인 문제일수는 없다. 하지만 무책임한 우리사회는 부실한 사회안전망으로 인한 개인의 상실, 철학 없는 교육시스템으로 인한 아이들의 절규, 거미줄 같은 경제구조 속에서의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개인의 영역으로 분류한다.

 

일례로 한 달에 사교육비 400만원을 들여 공부시키는 강남의 아이와 방과 후 학습마저도 듣기 어려운 아이의 경쟁이 과연 정당한가? 많은 이들이 침묵 속에서 부당하게 생각하는 그 부정의가 우리사회의 경쟁의 룰이 된지는 오래전의 이야기다. 정당한 과정과 공정경쟁의 룰은 도외시하고 오로지 결과만을 생각하는 승자독식의 사회는 도구가 부족한 개인들에게는 절망의 다른 이름이다. 국가나 사회가 책임져야할 영역에서 많은 개인들은 자신의 것이 아닌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으로 인해 절망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다.

 

좌절하고 패배의 늪에 허덕이는 이들을 위로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걸그룹의 현란한 몸동작에 환호하고 잔혹한 살인범에 공분하기도 하지만, 칼끝에 서 있는 개인들을 감싸주거나 위안을 주기위해 노력한 적은 별로 없다. 내가 혹은 당신이 이미 그 칼끝에 서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퇴로 없이 절벽 끝에 서있는 처연한 눈동자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 절망감을 가슴으로 안아주지 못할 때 우리는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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