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귀가

 

별은 별빛보다 먼저 흔들린다

낯선 눈빛의 의뭉과 먼 이웃들의 살내음

사이에 술잔 하나가 둘이 되어 기울고

뒤섞이는 것들은 미지의 꽃으로 흐드러진다

만원지하철에서 밀려나온 듯, 책갈피가

소매에 붙어서 하루를 넘기고 있다

안과 밖으로 분열된 난독의 시간은

소통불능의 주파수 사이를 왕래하는

뫼비우스의 띠, 너와 나의 경계는 없다

피로의 밀도는 농염한 어둠을 닮아가고

작은 바람에도 별빛처럼 흐려진다

누군가의 얼굴을 적어 넣은 수첩은

삼생(三生) 윤회의 고리를 진술하고

소멸된 기억은 자기고백의 수고를 던다

발효의 시간을 지나 익어가는 어깨를

일으키는 두 개의 손. 통금서약을 펼친 아이들이

네모난 창가에 폐기된 계약서를 걸고 있다

어느 각진 바람에 찔린 외눈 가로등이

대신 붉은 눈물을 뿌리고 있다. 저녁은

준비된 이야기를 거리에 내놓고, 하루를 거래한

자들의 수금전표에 ‘귀가’를 표기한다. 골목

어귀에 우리 아이가 풀어놓은 한낮의 그림자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있다. 달빛도 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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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이력

 

짙은 어둠이 가신 뒤에는

아프도록 가는 실눈을 뜨기 위해 내 몸을 깎는다

지난한 탈고의 시간

뒤돌아보는 감정의 표면은 결이 없다

 

말간 눈동자는 절정이 남긴 그늘 아래에 있다

감추고 싶은 비밀이 드러날 때까지

주술에 걸린 인간의 비루를 들추지 않을 것이다

가끔 붉게 물든 눈시울이 불온하지만

누군가를 식혀줄 바람이 비구름을 몰아오고 있다

어둠이 씨줄 낙엽을 떨구고 달력을 넘길 때쯤

내 눈은 다시 초점을 맞추기 위해 부풀어 오른다

 

고요가 담긴 맑은 눈빛, 저의가 무엇이든

축원의 기도가 바다를 배부르게 한다

포만의 바다가 살의(殺意)를 부른다는 전설이 내려오지만

나를 우러르는 늑대의 울음은 구속의 사슬에 얽매인 지 오래다

인간의 절기(節氣)가 때때로 나를 반기고

그 중 몇 개는 명절의 이름으로 밥상을 올린다

 

등 뒤의 시샘으로 어둠속에서만 모습을 드러내지만

때로는 날선 시선을 피해 한낮에도 하루의 생을 산다

오가며 새벽 정화수에 몸을 담그거나

이른 저녁 감나무 가지에 앉을 때도 있다

나의 변신은 빛과 거대한 땅의 시간에 따르고

어쩌다 후광이 나를 삼키거나 내가 후광을 베어 물었을 땐

인간 세상엔 기적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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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달은 좋아합니다. 그 모양이 신기해서죠. 어느 순간에는 하늘에서 사라지기도 하고요. 차오르고 기우는 마법이 바다에 여성에게 누군가의 영감에 영향을 줍니다.

 

퇴근길에 막내아이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았던 초승달은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아이는 누군가의 눈썹같다고 깔깔깔 웃습니다. 잔뜩 부풀어오른 시점에도 토끼는 보이지 않지만 둥글어진 마음을 가진 누군가는 편지를 쓰고 기도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세상엔 기적이 필요합니다. 돌아오라는 간절한 기도가 통하고, 다시 시작하는 이들에겐 희망과 용기가 솟아나기를 바래봅니다.

 

우리 모두에게, 오늘 하루의 삶이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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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편지

 

살아가는 동안

마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절망의 사월

내가 살아갈 이유와

하루의 삶과 희망이

오롯이 너로 인한 것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 체념의 오월

앞뜰의 장미는

어미 새의 눈동자처럼 붉기만 하다

 

살아가는 동안

가슴에 묻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서러운 봄날

지독히도 헛된 바람이

팽목항에 노랗게 피어나고

주인을 잃어버린 기타와

닳지 않을 새 운동화, 만이

분노의 바다를 향할 때

믿음 없는 인간 세상엔 장미가 목을 꺾는다

 

문득, 다시금

학교에서 돌아오는

네 발자국 소리가 들릴 것 같아

라면을 달라고

식탁에서 투정을 부릴 것 같아

네 방문 앞에서 서성거려보지만

이제는 부를 수 없는

영원한 나의 십팔번

우리 딸,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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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큰 딸이 어제 수학여행을 다녀왔답니다.

작년, 오늘 수학여행을 떠나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기억합니다.

평범한 일상이 절망의 나날로 변해버린 비통한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봅니다.

우리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하루가 있다면 바로 4. 16일입니다.  

 

 

그저 자식이었다가 부모가 되면 누구나 자신의 부모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 부모님들, 아이를 낳아 키우는 하루하루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첫 아이와의 만남을 떠올려봅니다. 설레이고 감동적인 그 순간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습니다. 별이 된 아이들이 다시 엄마의 품으로 돌아와서 아빠를 눈물 나게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팽목항을 노랗게 물들이던 수많은 발걸음을 기억합니다. 노란 리본이 그렇게 간절한 희망의 상징인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세월호에는 아직 ‘사람’이 있다는 처절한 외침에 눈물샘이 마르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투정부리던 아이를 마음으로 안아주지 못했던 못난 순간을 후회합니다. 오늘은 하늘도 서러운가봅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를 대신해 마지막 편지를 띄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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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를 돌다

 

모퉁이를 돌아본 사람은 안다

아쉬움에 대한 응시는

장미넝쿨 저 너머에

두고두고 가시로 남는 법

내 상처를 남기고 가거나

네 상처를 가져가더라도

늘 그렇듯이, 삶의 경계는

순간 모퉁이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돌아선 다음에야 아는 것임을

 

모퉁이를 돌아본 사람은 안다

뻥 뚫린 것은 가슴이 아니라

그저 삶이고 하루라는 것을

돌아오지 못하거나

돌아보지 못하거나

혹은 애처로운 부름에 답할 수 없음에

흐르는 강물을 놓친 것처럼

햇살을 잃은 봄날에

가는 꽃잎으로 날리는 것임을

 

모퉁이를 돌아본 사람은 안다

별빛 담장아래에서

툭 터지듯 기다려지는 것이

편지나 전화 따위가 아닌

생각만으로도 그려지는

너의 잰 발걸음이라는 것을

거슬러 오르는 뜨거운 몸부림 속에

작약을 탐하는 달빛처럼

조금씩 다가오는 거미의 마음인 것임을

 

나는 어느 모퉁이에서

삶과 이별에 관한 질문을 던질까

 

모퉁이를 돌아보지 못한 사람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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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큰 대로를 걷더라도 반드시 모퉁이가 있습니다. 출근길에 지하철역에 닫기 위해 여러 모퉁이를 돌아 나옵니다. 세탁소와 반찬가게와 치킨집이 있는 사거리를 지나면서 우리는 여러 모퉁이를 지나옵니다.

 

살다보면 직선으로 혹은 큰 원을 그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더라도 역시 모퉁이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 모퉁이가 전환점이거나 변곡점이거나 마주하는 이유가 어찌되었건 간에. 하루에 벌어지는 많은 선택과 갈등도 이 모퉁이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어떤 길을 가던 우리에게 모퉁이는 운명이거나 필연입니다. 삶을 한참을 살아낸 후에야 우리가 지나친 모퉁이에 대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사소한 길 찾기부터 우리네 인생행로까지 많은 결정과 경계에 늘 모퉁이가 있었다는 것을.

 

때로는 길을 헤매기도 하고, 때로는 가슴 아픈 이별을 남겨두기도 하고, 때로는 인생의 중요한 결단의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이라는 모퉁이를 돌면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우리의 삶에 관해서 무슨 질문을 던져야 할까요?

 

모퉁이를 제대로 돌아본 사람만 알고, 모퉁이를 돌아보지 못한 사람은 모르는 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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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대를 부르거든

 

푸른 하늘이 그대를 부르거든

감사한 얼굴로 어제를 돌아보라

간밤의 거센 바람과 모진 비에

괴로워하는 그대를 볼 것이다

 

사연담긴 편지가 그대를 부르거든

설레는 얼굴로 그 때를 돌아보라

세상의 부름과 사람 사이에서

기다리는 그대를 볼 것이다

 

밤하늘 종소리가 그대를 부르거든

경건한 얼굴로 오늘을 돌아보라

머뭇거리다가 주위를 돌보지 못해

부끄러워하는 그대를 볼 것이다

 

못 다한 이야기가 그대를 부르거든

진지한 얼굴로 거울을 돌아보라

소녀와 클로버와 하얀 밤과 대화하는

생각에 잠긴 그대를 볼 것이다

 

못다 이룬 사랑이 그대를 부르거든

서러운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라

더 주지 못해 못내 아쉬워하던

사랑을 잃은 그대를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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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우리사회를 피로사회라 말하고, 또 누군가는 한국사회를 위험사회라 말합니다. 견디기 힘든 경쟁에 시달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오는 험하거나 가슴 아픈 소식들에 분노와 먹먹함이 교차하곤 합니다.

 

너무들 앞만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가끔은 어제 혹은 지난날의 발자취를 기억하고 돌아보는 것이 오늘의 불안을 다스리는 하나의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문득 눈이 부신 푸른 하늘에 시선을 빼앗길 때, 이제는 잊혀져간 그 옛날의 손 편지그리울 ,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은은한 교회종소리가 가슴에 메아리칠 ,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한 아쉬움이 발걸음을 잡을 , 지나간 옛사랑이 사무치도록 그리울 때

 

그때는 무조건 뒤돌아보아야 합니다. 그 누군가 그대를 부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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