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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머리 여인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평점 :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존재의 비밀 속으로 이끌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대로, 태생적으로,, 결코 아버지도 아들도 될 수 없는 나는, 관찰자의 관점으로밖에는 그 존재들을 바라볼 수 없었지만, 또 그 당사자가 아니어서 다른 이해도로 접근하며 때로는 즐기면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를 파헤치게? 되었다.
남자 작가라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야기해보고 싶은 로망들이 있는지, 그 낯섦을 여러 작품을 통해 이미 경험해본 탓에 자연스럽게 어느 꼭지에서는 웃음과 분노의 감정도 이입되면서 읽을 수 있었다.
아들이란 존재의 발칙한 반란과, 아버지란 존재의 아시아적인 고리타분한 권위..
이제는, '아들은 아버지를 깨부수고 나와야 비로소 남자가 된다'는 명제도,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를 파괴하고 성장한다'는 구절도 좀 시시해질정도인데, 또 누군가는 그런 말도 했었다.
남자는 아들을 낳아 키워봐야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남다르다~~나, 딸만 키워서는 절대 모를 그런 게 있다면서, 암튼 그렇다고 했는데 다른 종인 나도,, 살면서 끄덕이게 되는 순간이 있다.
소설 속 모녀의 관계에서는, 딸이 '엄마처럼은 살기 싫어' 정도의 수동적인 모티브가 고작이라면
아들들은 아버지를 파괴해야, 깨부숴야 한단다...
다시 한번 아버지도 아들도 되어 불 수 없음이,, 다행인 건가 하면서 ㅎㅎ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지질학 엔지니어 겸 건축업자가 된 '나', '젬'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
약국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정치적인 동지들과 어울리면서 한때 정치 관련 부서로 연행되어 전기고문도 받았던 역사가 있는데 이번 가출은 그때와는 다른 뭔가가 있다.
잘생기고 멋쟁이고, 몸매도 좋은 아버지는 좌익 주의자로 바람둥이였다. '젬'은 그런 아버지의 외모를 쏙 빼닮았다.
이스탄불에 살고 있던 '젬'은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이 끊기자 대학 입학 학원비를 모으려고 서점에서 일하며 책을 읽고, 작가가 되리라 했다. 아버지가 사라진 후 어머니와는 좋은 친구로 지낼수 있었다.
이모부 집에 세 들어 살면서 밭을 지키는 일로 용돈을 받던 '젬'이, 유명한 장인 '마흐무트 우스타'의 우물파기 작업을 구경한다. '젬'에게 깊은 우물은 파내려 갈수록 아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별들의 곁으로 신과 천사들의 나라로 올라가는 듯한 신비한 체험이었다.
우물 파는 일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제의에 어머니 반대를 무릅쓰고 장인의 조수 일로 따라나섰고, 그들은 이스탄불의 옆 동네 왼괴렌의 천막에서 기거하며 새로운 우물파기 작업에 착수한다.
그땐 천공기가 없던 시절이라, 몇천 년 동안 이어진 대로 직감에 의해 수맥을 찾아 우물을 파는데, '젬'은 '마흐무트 우스타'를 보면서 막연하게 아버지를 느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마흐무트 우스타'는 '젬'과 함께 아침부터 우물을 파고, 저녁이면 함께 담배를 사고 철물점, 목공소에 들르러 마을로 내려간다. 그는 코란에서 인용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젬'을 훈육하였다. 그는 '젬'의 스승이자, 아버지였다. 우물파기의 장인과 조수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처럼 되어야 하고, 자신도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우물파기의 기술을 배웠고 '젬'또한 그의 훌륭한 조수가 되려면, 자신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젬'은 '마흐무트 우스타'를 자신의 아버지와 비교하고 그를 통해 그리워하면서 지낸다. '젬'에게 '마흐무트 우스타'는 자신의 아버지를 대체할 새로운 아버지였다.
늘 이야기를 들어오던 '젬'에게 너도 이야기해달라고 했을 때, 왠지 '젬'은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날 마을의 기차역 광장에서 일행들과 함께 있는 '빨강 머리 여인'을 처음 본 '젬'은 그녀의 큰 키와 특이하고 매력적인 아름다움에 사로잡힌다.
그녀 역시 그를 계속 주시했다.
매일 밤, 그녀를 또 보고 싶어서 그녀의 방인듯한 창문을 바라보다가 천막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던 중, 그녀 일행을 발견했다. 그들은 유랑극단의 단원들이었다.
우물파기는 이십여 일이 지나도록, 물의 행방을 예측할 수 없었다. 큰 바위가 연이어 나타나고 흙의 상태는 수맥을 예상할 수 있는 빛깔도 습도도 아니었다.
그들은 고된 노동에도 불구하고 희망 없음에 지치고, 사업시행자의 아들이자 또다른 조수였던 '알리'도 떠나지만, '마흐무스 우스타'는 그래도 확신한다며 계속 진행한다.
마을에 내려가 극장을 찾은 '젬'은 '빨강 머리 여인'의 연기를 본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 나이는 더 들어 보이고, 자기의 생각보다 아름답지도 않았지만, 그녀의 장난기 가득하고 달콤한 표정이 삼주 넘게 계속되는 우물 파는 고된 노동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된다.
그녀가 속한 유랑 극단은 허름한 정치 성향의 민간 극단이었다. 그들은 혁명적인 민중 연극을 공연하며 명맥을 유지했는데 정치적인 탄압을 피해 아주 오래된 사랑 이야기나 전설, 이슬람과 신비주의에서 유래하는 이야기들을 촌극으로 다루었다.
(중간 생략)
2006년 노벨 문학 수상자 '오르한 파묵'은,
우리나라에서 제법 많은 팬들을 독자로 갖고 있는 작가이다.
1년에 한 번씩은 꼭 만나야 하는 사람.. 이 책은 그의 최신작인데,, 아직도 작가로서 앞날이 창창하고, 그의 서술의 힘과 독창성,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는 빼어난 스킬은 동양과 서양이 공존하는 터키라는 나라의 존재감과 함께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을 우물 같은 이야기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고 여겨져 고무적이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은 추리적인 요소도 가미되고 씨실과 날실을 넘나드는 숙련된 언어의 직공같단 생각도 든다. 현대남자 작가의 플롯에 대한 기교면에선 단연으뜸이라고도ᆢ
다음엔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다룰지 또 기대하며, 그가 세운 '순수 박물관'은 언제나 보러 갈 수 있을까 헤아려본다.
'젬'이 밤하늘의 별을 보는 장면의 묘사가 종종 나오는데, 군청색 밤하늘에 가득 찬 별들을,, 아직도 이스탄불에서는 만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동안, 이 이미지에 사로잡혔다. 내게 있어 이 책의 컬러감은 '궐지한'의 '빨강 머리'가 아니라 별이 빛나는 '군청색의 밤하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