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7
토마스 만 지음, 홍성광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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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은 1929년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은 그의 나이 이십대에 쓴 최초의 장편소설로 자전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처음 도입 부분에서는 이 책이 독일 소설일 수 있는가? 혹은 '만'의 소설이 이렇게 수월할 수가 있는가 하는 착각을 하기도 한 것이, 마치 영국 소설이나, 러시아 소설의 서막을 여는 듯해서, 의아했지만, 역시나 그의 소설은, 그리고 독일의 소설은 관념을 포기할 수가 없는 거였다.

이야기는 1835년, 엄격한 전통을 가진 가문 부덴 브로크가가 새로 지은 집에 지인들을 초대해 모임을 갖는데서 시작된다. 영사인 '장'과 그의 아내 '베티', 그들의 부모인 '요한 부덴 부로크' 노인과, '안토아네트' 그리고 그들의 세 자녀.

그 집안의 가정교사인, 귀족 출신의 프로이센 여인 '이다 융만'과 노인의 조카딸로 엄청난 식욕을 소유한 '클로 틸데'..

영사란 직위는 지역의 총독쯤 되는 걸로, 시장도 있고 시의원도 있는데, 대물림되는 영사란 직이 있었던가 보다, 이 가문 역시 대를 이어 영사가 되고, 그의 장인 일가도 영사직을 이어받는다.

그 모임에 시인과, 가정의와 목사와 시의원, 포도주 도매상, 목재상과 장의 처가 식구 2대도 참여한다.

'장'에게는 이복형제이자 아버지 '요한'의 장남인 '고트홀트'가 있다. 그는 자기 지분에 대한 보상액을 요구한다는 편지를 보내왔는데, 아버지는 장남이 신분에 맞지 않는 결혼을 한 터라, 제 몫을 주지 않겠노라 한다.

'고트홀트'는 그 여인과 결혼해서 세 딸을 낳고 그녀들은 각종 모임에 초대되어 교류하면서 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질투와 조롱을 보내는 역할을 한다.

귀족 집안이던 이 가문은 곡물상을 운영하면서 부를 축적해왔다.

그 집안에는 가족 연대기가 있다. '요한'에게서 '장'으로 일가의 일들을 메모하는 일이 자연스레 대물림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7월 왕정 이후 공업학교, 기술학교, 상업학교들이 생겨나면서 고전적인 교양은 어리석은 것이 되어버리고 온 세상이 광산, 공장,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있다. 예술적인 기질의 '요한'은 이것을 모욕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장'에게는 넷째이자 막내인 '클라라'가 태어난다.

장남 '토마스(톰)'와 장녀 '안토니(토니)', 차남 '크리스찬'에 이어 차녀인 '클라라'..

아버지 '장'을 따라 사업 일을 배우던 '토마스'는, 사업에 수완 있음을 보여주지만, '안토니'와 '크리스찬'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막내는 그냥 명랑하다.

'토니'는 특권의식도 있고, 좀 되바라진 아이였는데 부유한 외조부모집에 드나들면서 버릇을 더 나쁘게 키운다.

할아버지 '요한'을 닮은 '토마스'는 현명하고 활동적이며 분별력 있는 아이로 합리적이고 명랑했다.

아버지 '장'을 닮은 '크리스찬'은 재주는 있지만 진지함이 결여되어 기분파로 우스꽝스러운 짓거리를 일삼기도 한다.

'장'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토니'는 기숙학교로 보내진다. 그렇게 1대 '요한 부덴부로크' 부부의 이야기가 끝난다.

성장한 '토니'에게 '벤딕스 그륀리히'가 구혼을 한다.

그는 행동거지나 외모가 우습기 짝이 없지만 부유한 상인으로 '장' 부부에게 온갖 아양을 떨어 관심을 사는데 성공하지만 '토니'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고 오히려 그를 경멸한다.

수로안내인의 집에서 마음을 추스르던 '토니'는 그들의 아들 '모르텐'과 교제한다.

대학의 학생 조합원으로 자유를 원하는 '모르텐'은 의대생으로 매우 진보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으며, 귀족들이란 경멸스러운 존재일 뿐이라고 '토니'에게 말하기도 한다.

그와의 미래를 꿈꾸기도 하던 '토니'는 아버지 '장'의 반대와 충고로 집으로 돌아오고 가족의 연대기를 보면서 스스로 메모를 한다. 증조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부모로 이어지는 사슬의 한고리로서의 자신의 책임을 자각하며, 그는 '그륀리히와 약혼'이라고 썼고 1846년 그와 결혼한다.

'장'의 장인이 죽고, 부유한 줄 알았던 사위 '그륀리히'는 지불불능 상태에 빠진다.

'그륀리히'는 '토니'와의 결혼을 담보로 사기를 쳐서, 부유한 상인인척했었고 겨우 알게 된 '장'은 딸과 손녀 '에리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요한'의 죽음 이후 '장'이 경영하던 곡물회사는 사업이 축소되고 더 이상 번성하지 못했다. '장'은 겨우 부도를 막고 근근이 사업을 이어갔으므로 사위를 도울 수 없었고 이미 사기결혼 행각을 인지한 이후였기에 무리하지 않았다. 파산한 '그륀리히'는 순순히 이혼을 받아들인다.

장남 '토마스'는 폐결핵으로 프랑스 남부 도시로 요양을 떠나고, 나이가 들면서 그리스도를 열렬히 사랑하고 의지했던 '장'은 죽음을 맞는다.

'크리스찬'은 연극에 대한 열광과 몽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으로 사업에는 무관심했다. '토마스'는 큰아버지 '고트 홀트' 사망 이후 네덜란드의 영사가 되었고 막내 '클라라'는 진지하고 경건한 성품을 지닌 여인으로 성장하여 '티부르치우스' 목사와 결혼을 시키는데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가 시에서 획득한 신뢰와 명성은 '토마스'에게 고스란히 넘어온다.

'토마스'는 '게르다'라는 바이올린을 연주할 줄 아는 여인과 결혼을 한다. 그녀는 학창 시절 '토니'의 기숙사 친구였다.

원칙에 충실한 남자로 성장한 '토마스'는 시에서 명성을 얻고 전혀 다른 기질의 '크리스찬'과의 대립으로 두 형제의 불화가 시작된다.

'토니'는 '페르마데라'는 사람과 재혼을 한다.

하지만 그는 '토니'의 지참금을 받는 즉시 실업자가 되었고 '토니'가 출산한 그의 아이는 15분 만에 죽는다.

 

[이하 생략]

 

하지만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괴로워하는 것은 더 이상 아들과 가문의 장래에 대한 걱정만이 아니었다. 다른 새로운 고민이 그를 덮쳐 사로잡고는 지친 그의 마음을 극한까지 몰아댔다. 즉, 그의 현세적인 종말이 더 이상 먼 장래에나 있을 이론적이고도 하찮은 필연성이 아니라 손으로 붙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직접적인 준비 조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골똘히 생각하고, 자신의 존재를 탐색하고, 죽음이나 저세상의 문제와 자기의 관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시도를 하자마자 당장 그 결과로, 죽음을 맞이하기에는 자신의 정신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성숙하고 그럴 자세가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실제적인 사업 의욕과 잘 연결시켰고 만년에 가서 그의 어머니도 받아들였던 그 편협한 신앙이나 광적인 성서 주의와 항상 소원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오히려 평생 동안 할아버지처럼 그것에 대해 세속적인 회의를 보여왔다. 하지만 요한 할아버지의 안일하고도 피상적인 성격은 그의 깊고 재기 넘치는 형이상학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그는 영원과 불멸이라는 문제에 대해 역사적인 대답을 해서 자기가 선조들 속에 살아 있었고 후손들 속에서도 살아 있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러한 견해는 그의 가문 의식, 족장 의식 및 그의 역사적 경건성과만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견해가 그의 활동, 명예심 및 그의 모든 삶의 태도를 뒷받침하고 강화해 주었다. 그러나 죽음을 목전에 둔 지금 그것이 스러지고 없어졌음이 드러났다. 그래서 단 한순간도 마음의 동요 없이 죽음을 맞이할 태세를 지니는 것이 불가능했다. 비록 토마스 부덴브로크가 간혹 가톨릭에 이끌릴 때도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진지하고 깊은 책임감, 스스로 고통을 느낄 정도로 엄격하고 가차없는 책임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것은 열성적인 진짜배기 신교도가 갖는 책임감이었다. 아니다, 지고하고 궁극적인 것에 대해서는 외부로부터의 도움, 중개, 면죄, 마취제 및 위로가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누구나 혼자서 너무 늦기 전에 수수께끼를 풀어야 했고, 자기 힘으로 분명한 준비 자세를 취하고 뜨겁고도 열심히 일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자포자기하여 저세상으로 가야 했다. 토마스 부덴 브로크는 실망하고 희망을 잃은 채 외아들한테서 얼굴을 돌렸다. 그는 아들을 보고 다시 젊어져서 힘차게 계속 살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두려움과 초조함 속에서 그를 위해 틀림없이 어딘가에 있을 진리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34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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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서른에는 노자를 만나라 - 시인 장석주가 전하는 1만 년을 써도 좋은 지혜
장석주 지음 / 예담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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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님 블로그 기웃거리다 바로 입수해두었던 책, 저자 '장석주'는 시인이라 한다. 그가 외국 생활을 하는 서른 즈음의 아들에게 편지로 쓴 글이다.

- 네게 잔소리하기 위함은 아니다. 그저 나날의 일들과 감회, 먹고사는 일의 고단함과 보람, 자연의 변화, 생겼다가 사라지는 마음의 무늬 그리고 사람 사는 도리에 대해 속내 드러낸 얘기를 나누고 싶구나. 애비는 그 방편으로 오래 곁에 두고 읽은 [노자]를 꺼내 들었다. 12

사십 대 중반부터 안성에 있는 금광호수 주변에 전원주택을 짓고 기거한다는 그는, 삶의 위기가 왔을 때 그곳을 선택했고, 많은 책들을 읽고 사유하고 글을 쓰는데, 특히나 동양의 고전들 중 [노자]와 [장자]를, 읽고 또 읽으며 지낸다 한다.

날마다 책을 읽는다는 그는 책을 읽지 않을 때의 정신적 허기에 허둥거림을 토로한다. 책 읽기의 최종 목적은 자식의 습득이 아니라, 사유하는 것이라고..

서점은 인생의 항해에서 등대같이 지침을 주는 책들로 가득하고, 깃발에 찢겨 귀환했을 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항구 같은 곳이라고 덧붙이며

자식에게 전하는 이 친근한 편지글에는 교훈적인 면도 있지만 에세이 같기도 한, 일상들을 술회하고 있다. 부모 세대의 연륜과 경륜만큼의 지혜를 구할 수 있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어 자꾸만 현재의 나를 돌아보게 하고, 미래의 내 생활을 그려보게 한다.

부모가 얘기하면 잔소리요, 그야말로 앉혀놓고 대화로 하자 차면 설교요~ 한 것들을, 이렇게 편지라는 형식을 빌려 썼다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인 듯..

그래서 그 자녀가 아닌 우리들에게까지 나눠주는 유익한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

- 아무것도 없는 빈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시간쯤 눈을 감고 있는다. 그때 머릿속으로 스쳐가는 잡념들이 무엇인지 본다. 그 잡념들은 '나'의 실체가 아니라 헛것이요, 먼지와 같이 떠도는 관념이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 존재를 붙들고 있는 그 유령들에 휘둘리며 사는가. 그 잡념들만 떨쳐내도 인생은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18

- 오늘 죽을 것만큼 힘들어도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 그러니 오늘의 역경에 겁먹지 마라, 움츠리지 마라. 가슴을 활짝 펴고 새날을 맞아라. 쇠붙이가 불에 달궈지며 연마되듯 사람도 역경에 단련되는 것이다. 역경을 견딘 자는 내면이 꿋꿋하고, 자태는 침착하고 늠름하다. 25

서른에서 한참 지난 나이에 이 글을 읽으면서 그의 화두들이 서른에 받아들이기엔 아직 이를 텐데 하면서, 한편으론 지루하고 딱딱하기만 할 것 같은 [노자]를 현재의 삶, 현실의 삶의 한 현상들을 제시하면서 [노자]의 가르침을 하나씩 풀어주는 편지글, 그런 편지를 받는 그 자제분이 부럽기까지 하더라는..

- 새해 들어 이 애비의 첫 결심은 '이름 없는 소박함'을 구하며 사는 것이다. 이름이란 고작해야 분별의 필요로 지어진 것이다. 가볍기로 치자면 깃털같이 가벼운 것이 이름이다. 그러나 한번 이름으로 세워진 것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그 '이름'으로 불림으로써 본디 이름이 없었고 모호함 속에 있던 '나'라는 존재자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 이름으로 호명되는 자는 어둠 속에서 홀연히 밝음으로 나서는 것과 같다. 한편으로 이름은 속박이기도 하다. 네 이름은 평생 따라다닐 네 얼굴이요, 인격의 기호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름 없음에 처하는 것은 이름이 짓는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노니는 것이겠지. 26

내가 미침 이 문장을 읽을 때가 경주에서 아침밥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경상도 여행에서 먹거리는 대개 만족스럽지 못한데, 불만 없이, 적게, 소박하게 먹는 걸로~~그렇게 사는 걸로~

편리하다는 핑계로 지향하는 것들이, 어느덧 넘쳐나있더라, 착한 소비에 대한 생각에까지 이르고, 이름 지어진, 존재들의 속박과 부대낌이 짠해지기도 했다.

- 직선이 인위라면, 곡선은 무위 자연이다.

애비가 노자를 마음공부의 근간으로 삼을 무렵 "크게 곧은 것은 구부러진 것 같다"라는 구절을 처음 접하고 크게 놀랐단다. 마치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멍했지. 진짜 곧은 것은 그 곧음을 뽐내지 않는다. 오히려 구부러진 듯 처세를 하지. 진짜로 강한 힘을 가진 사람은 그 힘을 드러내 자랑하지 않는다. 진짜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굳이 맞서 싸우려 들지 않는다. 진짜 아는 사람은 그 앎을 내세우지 않는다. 42

- 노자는 구부러진 것을 향한 예찬을 그치지 않는데, 그의 생각에는 구부러진 것이야말로 곧고, 완전한 것이다. 구부러진 것은 지극한 부드러움으로 이미 제 안에 곧음을 품는다. 도는 직선이 아니라 곡선의 작용이다. 직선의 일은 억지로 함이고, 곡선의 일은 스스로 그렇게 하도록 놓아두는 것이다. 43

-그리하여 크게 밝으면 어두운 듯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뒤로 물러서는 듯하고, 크게 높은 것은 내려앉은 골짜기 같고, 온통 흰 것은 때를 탄 것 같고, 넓은 것은 좁은 듯하고, 큰 소리는 정작 귀에 들리지 않는다. 그게 바로 조화란다. 도와 덕의 근본 작용은 조화에 이르는 것이다. 43-44

[이하생략]

 

유한한 생명을 가진 사람은 영원을 겪어낼 수 없으며 그것을 객관적으로 실감할 수도 없지. 우주의 한 작은 존재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영원에 대해 관조하는 것뿐. 57



- 아들아, 진짜 강함은 약함과 부드러움을 지킬 줄 아는 것이란다. 그러니 억지로 강건해지려고 하지 마라. 애써 이기려고 들지도 마라. 강건한 것은 꺾이고, 이기려 드는 자는 지는 법이다. 재화를 움켜쥐려 들면 흩어지고, 쇠를 두드려 날카롭게 하면 오래 보존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약함과 부드러움에 처하는 물과 같이 살아라.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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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 슈필라움의 심리학
김정운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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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운'은 문화심리학자이자, 인문학 교수이다. 언젠가 문득 tv 채널을 돌리다 독특하고 동글동글한 외모와 차림새의, 너무 재미있고도 공감 가는 강연에 혹했더랬는데, 그 후 일본화를 배우러, 일본에 건너가 어느 시골마을에서 지내는 모습도 tv를 통해 봤었다. 그때는 그 일본의 시골 마을 정경이 너무도 그림처럼 예뻐서 얼빠져 봤었다. 이름은 너무도 평범하지만, 각인시켰고, 그 후 이 책을 발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읽겠다 했다.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할 당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전공을 '비판 심리학'에서, '문화심리학'으로 바꾸었다는 그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것을 청중들에게 어필하는 힘이 남다르다. 강연이 그토록 인상적였듯이, 그의 글 또한 관심과 공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한 듯..

여행지에서 이 책을 펼쳤는데..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물론 여수로 갔었다면 금상첨화였겠으나(이 작업실의 공간적 배경이 여수인지라..),

경주와 울산을 둘러보며 가급적 숙소에 조용히 머물며 유유자적한 쉼을 누려보자는 컨셉이었으므로..

책의 부제가 '슈필라움의 심리학'이다.

독일어로 공간을 뜻하는 라움(raum)은 영어의 space나, room, place로는 전달되지 않는 독특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물리적 공간 너머, 사회학적, 경제학적, 심리학적 공간과 연관되기도 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영역을 뜻하는 '행위의 공간'이란 개념까지 포함하므로..

놀이라는 뜻의 슈필(spiel)을 더해 슈필라움은 '놀이 공간'? 우리말로는 '여유 공간' 정도로 번역된다는데, 한계는 있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공간',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을 강조한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이 공간의 당위성을 충분히 역설한다.

오래전 읽었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내게 남긴 가장 확실한 메시지는, 남자에게는 시시때때로 숨어들, 동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의 순기능이 역기능보다 훨씬 긍정적인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터라, 쉽고 그리고 충분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 한국 남자들의 이 몹쓸 분노와 적개심은 아파트라는 매우 한국적 주거 공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전통 가옥에는 사랑방이라는 가부장적 공간이 아주 폼 나게 있었다. 그러나 아파트가 들어오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남자의 공간은 사라지고 아주 못된 가부장적 습관만 남았다. 205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언급하며 물론 여자에게도 '슈필라움'이 필요하다 하지만,

특히나 남성들에게 더 필요함을 역설하는데, 오늘날 아파트 문화에서는 꿈꿀 수조차 없는 현실.

그 당위성을 설명하고자 드는 예시들이 억지스럽고 기가 막히기도 하지만 웃으면서 절로 끄덕일 수밖에 없다. 나는 여자인데도 말이지..

여자들에게는 화장대라는 공간이라도 있지 않냐며..

남자들이 운전대만 잡으면 양보하기 싫어지는 심리도 '슈필라움'의 부재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의 외로움과 궁핍함을 담보로 얻어낸 그들의 공간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도 '슈필라움'의 부재요,

한 번씩 꿈꾸는, 은퇴 이후 텃밭이나 가꾸며 살겠다는 포부 역시 '슈필라움'의 부재라는 것이다.

- 한 일에 대한 후회는 오래가지 않는다.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 결과가 잘못되었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쉽게 정당화되지 않는다. 한 일에 대한 후회는 내가 한 행동, 그 단 한 가지 변인만 생각하면 되지만,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는 그 일을 했다면 일어날 수 있는 변인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심리적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비된다. 죽을 때까지 후회한다는 이야기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기억이 그토록 오래가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60-61

그래서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2016년 귀국하여 여수에 정착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삶이란 지극히 구체적인 공간 경험들의 앙상블이라고 정의 내리고, 공간이 문화이고 기억이며 그런 그에게 있어 공간이란, 자신의 아이덴티티라는 이야기를 하는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슈필라움'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되었으면 한다고 한다.

그리고 '4차 산업혁명'이라는 표현도 꼬집는다.

작금의 이 엄청난 의식 혁명을 어찌 '산업 혁명'이라는 낡은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냐는 말이다.

[이하 생략]

- 불안한 사회일수록 다양한 문화적 경험과 예술적 체험이 탈출구다. 스마트폰의 허접한 음모론이나 들여다보고, 근거 희박한 설명으로 흥분만 하는 각종 평론가의 시사 프로그램 채널이나 만지작거리는 방식으로 존재의 불안은 절대 해소되지 않는다. 144


- 사무직에서 일했던 사람일수록 손으로 직접 하는 일을 배우는 것이 좋다. 두 번째 인생에는 노동의 결과를 눈으로 직접 판단하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을 해야 심리적으로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교수 기자 선생과 같이 말과 글로 먹고산 사람일수록 손으로 직접 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말년의 성품이 무난해지며 꼰대를 면할 수 있다. 아니면 컴컴한 방에서 혼자 인터넷에 악플이나 달며 삼십여 년을 더 살아야 한다. 달리할 일이 있는가?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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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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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문학계의 거장 '슈테판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전기작가이다. 그의 전기와 평전을 차례로 읽어가겠다 하면서 먼저 만난 [초조한 마음]에 흠뻑 매료되어, [낯선 여인의 편지]와 [체스 이야기]도 구입해두었는데, '바하의 그녀 님' 덕분에 이 책을 먼저 만나게 되었다.

일찍이 남과 다른 시적 감수성을 간직하고, 심리학과 '프로이트 학설'에 대한 관심으로 섬세한 성격묘사가 주 특기인 그는,

보통 사람들 보다 섬세한 결을 지닌 사람이었겠으므로 남다른, 다분히 예술가적인 죽음을 선택했고 그래서 그가 선택한 죽음이 항상 화두가 되기도 하는데, 이 책의 말미에 유서의 전문이 실려있기도 하다. '자유로운 의지와 명료한 정신의 삶으로부터 이별하기 전, 적절한 때 당당한 자세로 삶을 마감하고 싶었다'고..

짧은 이야기이지만, 처음부터 몰입하게 되는 책이다.

고백서의 형식으로, 주인공 '롤란트'가 60번째 생일과 30년간의 교수 생활을 기념으로 문집을 발간하는데, 자기 인생의 진정한 전기문으로 세심하게 기록하였지만, 진정한 한 사람, 자기 운명을 결정하고, 지금의 자기이게끔 했던 '그분'은 기록하지 못하였다 하면서 40년 전 '그분'의 이야기를 꺼낸다.

- 세심하게 기록된 목차에는 200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단 한 분, 나의 모든 창조적 충동의 원천인 그 사람의 이름은 없습니다. 내 운명을 결정하고, 두 배의 힘으로 젊은 시절의 나를 다시 소환한 그의 이름은 여기에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지만 내게 진정한 언어를 부여한 사람, 그의 숨결을 통해 비로소 내가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든 바로 그 사람에 관한 내용만은 적혀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평생 나는 여러 사람의 모습을 묘사해 왔고, 지난 수백 년의 인물들을 현대적인 감각에 어울리는 가장 모던한 초상화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18

'롤란트'는 베를린 대학에서 영어 전공을 하게 된다. 원래 선원이 되고자 하였지만, 대학의 학장인 아버지와 타협 끝에 자신의 꿈에 그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 선택한 진로였던 것.

그가 머물게 된 도시 베를린은 자신의 성장에 스스로 놀라움에 사로잡힌 곳으로, 그 기세등등한 탐욕이 충동적 젊은이인 자기 자신과 닮아 있었고, 자신의 남성적 흥분을 더 고양시키는 곳이었다 한다.

그의 방탕과 탐닉의 위험한 수준, 다시 말해 정신적인 몰락을 진정시켜준 어떤 우연이 일어나기까지 그는 그렇게 살았다.

어느 날 자기 집에서 여자아이와 시시덕 거릴 때, 아버지가 불시에 방문을 했다.

아버지의 설교와 훈계를 질색하여 마찰을 예상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인내했고, 그 모습에 뭔가 긍정적인 동요가 일어난 '롤란트'는 아버지의 권유로 작은 지역의 대학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러해서 3개월간 그의 허황된 사상누각을 허물고 정신적인 것에 온 힘을 쏟으려는 갈망으로 학업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로 맹세를 하고

새로운 대학의 강의실을 둘러보다가 영문학 강의실에서 운명의 그분을 우연처럼 만나게 된 것.

'셰익스피어'에 관한 강의였는데, 자석 같은 마력에 끌려 강의실로 들어서면서 압도적인 힘에 사로잡히고, 전기에 감전된듯한 감동을 받는데, 그 교수의 용모는 정신적 기풍이 베여있는 독일 고딕체 문자의 구성 같았다. 그리고 수강신청을 위해 그 교수와 미팅을 하고, 다음 강의에 들어갔는데

그 수업은 몹시 실망스러웠다. 그의 용모 또한 평범한 나이 든 남자의 지치고 피곤한 모습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후 세미나 수업에서 그 열정을 다시 만날 수 있었는데, 그 교수의 열정과 역량은 학생들과 벌이는 토론식 수업에서 발휘되는 것이었다.

[중간 생략]

 

'롤란트'는 40년이 지나도록 그때의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결정지어 버렸노라고..

강의에 몰입하고 있을 때면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술을 빌린 그분이 말하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면서 그의 음성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한다.

교수의 자기 억제 회초리가 너무 가혹하다.

선천적으로 그에게 내재된 어둡고 위험한 곳으로 이끄는 힘에 맞서고자 경련과도 같은 긴장의 연속에서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의지,

그의 도피..

위험하고도 아슬아슬한 이 이야기는 그런 비밀을 간직한 선생을 향한,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롤란트'라는 영문 학도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바탕으로 한 심리의 묘사를 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그를 한눈에 사로잡은 그 교수의 용모가, 정신적인 기풍이, 독일 고딕체 문자의 구성 같았다는 표현이 절묘하여 상상해 본다.

제목이, 처음부터 인상적였지만, 다 읽고 난 후에도 적절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떤 우연한 순간, 어떤 대상에게 이끌리고, 사랑이 시작되는 감정은 온통 그렇게 혼란으로 찾아오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혼란은 묵직하게 남을 수도 있겠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이고 소년이었기에 가능하다는 것.

 

- 순수한 존경의 마음을 담은 남자의 열정이 한 여인에게 향하게 되면, 그 열정은 무의식중에 육체적인 결합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이끌리게 됩니다. 자연은 서로의 육체를 소유함으로써 최고의 결합을 이루도록 정열을 아로새겨 놓았으니까요. 그렇지만 남자가 남자에게 바치는 정신의 열정, 충족되지 않은 그 열정은 어찌해야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정열은 존경하는 인물 주위를 쉼 없이 맴돌면서 항상 새로운 황홀함을 향해 타오르지만, 자신을 바치는 최후의 순간에도 결코 가라앉지 않습니다. 정신이 항상 그러하듯 열정은 계속해서 흐르지만 영원히 충족되지 못하고 완전히 흘러가지도 못하고 맙니다. 10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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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털리 부인의 연인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5
D.H. 로렌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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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은 중학생이 읽으면 안 된단 말이지.. 근데 책에는 왜 19금이 없냐고' 맨날 여기다 써대는데,, 하긴 중학생 정도면 이런 책의 농도를 어차피 읽어도 모른다는 뜻일지도..??

사랑의 행위에 대한 묘사나 그 심리 묘사가 너무도 정교하여 eroticism 문학의 정수라 일컫는,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한 때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시비에 놓여, 판매금지가 되었었고, 작가는 이탈리아에서 사비를 들여 출간했었고, 미국과 영국과 일본에서는 출판을 놓고 재판이 열리기도 했다는 것, 그러하다 보니 사람들은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못 구해서 안달이 나, 해적판들이 난무할 때는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기도 했다는데(1천만 원을 호가하였다고도.), 예술적인 측면에 방점을 찍어준, 미국과 영국에서는 각각 1959년과 1960년에 무삭제판 출간이 허용되었다 한다. 일본에서는 패소하였다고.. 작가는 이미 30년 전에 사망했었다.

예술적인 측면에서 탐미성을 말하는데,, 일본 소설에서 추구하는 탐미성과는 차이가 있지만, 작가 '로렌스'는 전쟁의 광기와 참상, 산업 발달의 폐해와 물질 만능주의, 계급사회의 모순을 꼬집는 흐름을 놓치지 않고 두 남녀의 不倫과 性愛의 눈뜸에 대한 심리묘사를 기저로 하여 전개하는데 이 책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논리가, 700여 페이지 분량 중에 情事에 관한 묘사는 고작 30여 페이지에 불과한다고 하는 부분이 너무 어이없어 헛웃음을 짓게 하였다.

정황의 묘사는 일본 소설 보듯 하면 되는데, 저속어가 곳곳에 등장하여, 번역의 한계인가, 내가 너무 오래된 책을 읽었나 갸우뚱~~ 좀 더 세련된 표현은 없었을까 아쉬워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나라 언어를 전공한 번역자가 우리나라 말로 표현되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다고 판단했겠지 한다. 하지만 불편했다. 실제로 원고를 정서하여 타이핑할 때 타이피스트들이 모두 거부하여 후배 작가의 아내가 했다 하는데,,

이웃 블로그를 보면서 사놓고는 이래저래 미루다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10대의 소년이, 엄마와 이웃 아줌마 사이의 포옹을 묘사할 때, 그것은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나오는 포옹이었다는 부분이 훅치고 들어와, 바로 읽게 된 책.

이 책은 80년대 한국 에로영화 시리즈들의 클리셰였다 하고, 60년대 서구 사회의 자유분방한 성문화의 도래를 알렸다 한다.

어떤 문제적인 캐릭터가 탄생할 때는 뭔가 다른 배경이 있다.

이 책의 작가 역시 그러했고, '채털리 부인', '코니' 역시 그러했다.

그리고 그 시대가 그러했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이하 로렌스)'는 죽기 2년 전에 이 책을 내놓았다. 그는 교양 없는 술주정뱅이, 광부였던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의 계급 간 차이는 가정불화의 주된 원인으로 보이며, 가난과 불화는 그의 어린 시절 성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막내인 그에게 향한 어머니의 집착은 사춘기 여성 관계를 복잡하게 만드는데 기여했다 한다.

그는 취업 부탁 차 찾아간, 대학 은사의 아내와 처음부터 서로 사랑에 빠져 함께 도주한다. 그녀는 독일 출신으로 이미 세 아이의 엄마였고 여섯 살 연상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적국 출신의 여자라 체포된 사건 이래로, 여러 나라로 밀월여행을 하며 작품 활동을 하다가 그녀의 남편이 이혼을 해주자 정식 결혼을 하였다.

유독, 남녀관계의 윤리 문제에 천착했던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출판 및 발매 금지당하기 일쑤였다. 이 책은 그의 만년에 그의 성철학(性哲學)을 펼친 작품으로 평가된다.

[안나 카레니나]의 서두만큼이나 이 책의 서두도 인상적이다.

 

 

-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큰 격변이 일어났고 우리는 폐허 가운데 서 있다. 우리는 자그마한 보금자리를 새로 짓고 자그마한 희망을 새로 품기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좀 어려운 일이다. 미래로 나아가는 순탄한 길이 이제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장애물을 돌아가든지 기어 넘어가든지 한다. 아무리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살아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콘스턴스 채털리가 놓인 대략적인 처지였다. 전쟁으로 인해 그녀는 머리 위로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사람이란 살면서 겪고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p 7

그 시대의 본질적 비극, 바로 1차 세계대전이다.

'콘스 턴스 채털리 (코니)'의 남편 '클리 퍼드'가 참전했다가 처참하게 바스러진 채 후송되어 2년간 투병 끝에 하반신 불구가 되었던 것..

신혼생활 1년 만에 전쟁에 나갔던 남편이 그렇게 되어 돌아오자 부부는 남편의 고향인 라그비 저택으로 들어간다. 전쟁에 나갔던 형도 전사했고, 그 몰골을 본 아버지도 세상을 뜨자, '클리 퍼드'는 준남작, '클리퍼드 경'이 된다.

일찍이 '코니'는 언니 '힐더'와 함께 예술가 부모를 둔 탓에, 다른 나라를 유학하며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교육을 받아, 예술의 숨결을 아는 처녀였다. 그리고 결혼 전에 이미 연애의 경험도 있었다. 부유한 지식인 계급이었던 '코니'는 자기를 잘 가누는 주체적인 처녀였고,' 클리퍼드'는 그녀보다 상류 계급의 귀족이었지만 소심하고 두려워하는 성격이었다. 불구가 된 '클리퍼드'는 더 소심하고 자의식이 강해져 옷차림 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코니'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조금씩 유명해지고 그들의 저택에는 초대손님들이 넘치기도 한다.

창작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도 하는 이들 부부는 역경 속에서 정신적으로 깊이 하나가 되지만 육체적으로는 서로에게 존재하지 않는 사이이다.

이 집에 다니러 간 '코니'의 아버지는 딸의 결혼생활을 안타까워하면서 애인을 하나 두는 게 어떻겠느냐고, 세상의 여러 재미를 맛보도록 하게 하라면서 사위에게도 충고한다.

남편에게 헌신하지만, 뭔가 공허하고 존재가 없는 삶을 산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던 '코니'는 점점 야위어가고, 초조하고, 자신이 부서져 엉망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즈음 자신의 집에 드나들던 아일랜드 출신의 희곡작가 '마이클리스'와 연인이 된다.

그와의 애정 행각에 만족감을 맛본 '코니'는 명랑해지고, 그 기운은 남편 '클리퍼드'를 자극하여 그의 최고작들이 이 시기에 쓰여지고, 그는 더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벌게 된다.

그들의 저택에 남편과 같은 캠브리지 출신 지인들이 방문하여 대화를 나누는데, 그들 당대의 젊은 지식인들은 정신적인 삶이라는 것을 믿는 자들로 그런 류의 대화들을 나누고, '코니'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화를 듣기도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코니'는 정신적인 삶이 뭔가 더 고차원적이고 올바른 삶인 것에 동의한다.

그 저택을 둘러싼 숲 역시 그 부부의 소유인데, '클리퍼드'는 이 숲을 몹시 사랑한다. 그는 여기가 바로 영국의 심장이라 여기며, 훼손되지 않도록 지켜내야 한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이곳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한다고 '코니'에게 말하면서, 다른 남자에게서 자식을 낳는 것을 고려해보라 한다.

그즈음 '코니'는 애인 '마이클리스'의 경솔함에 실망하고 있었고

숲속을 산책하다가 '클리퍼드'가 고용한 사냥터 지기 '멜러스'와 조우한다.

아이를 갖게 해줄 남자를 떠올려보다가 남편 심부름으로 '멜러스'의 오두막에 갔다가 그의 목욕하는 모습을 본다.

피를 뜨겁게 하고 존재 자체를 새롭게 만드는 건강한 인간의 官能.

그리고 '클리 퍼드'의 숙모가 '코니'의 희생을 보면서 '너의 젊은 시절을 이렇게 허비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아들여 간호사 '볼턴 부인'을 고용하자, 까탈을 부리던' 클리 퍼드'도 점차 '볼턴 부인'에게 적응하고 엄청 가까워진다. 한결 한가해진 '코니'는 자주 숲으로 달아난다.

그 숲에서 알을 품은 어미 닭들을 보면서, 아이를 품어보지 못할 자신의 운명을 슬퍼하던 때 '멜러스'가 나타난다. 그들은 가까워진다.

'코니'에게 '멜러스'는 사투리를 쓰는 하층민, 노동자 계급에 지나지 않지만, 전쟁에서 장교직을 수행했고, 뭔가 많이 지쳐있지만, 다른 노동자와는 다른 면모가 보였다. 이런 계급의 차이를 '클린 퍼드'는 경멸할 터였다. 비슷한 계급 신사와의 불륜으로 아이가 생겨나, 자신과의 관계가 바뀌지 않는 한은 상속자가 되겠지만..

산업 사회의 발달로 인한 단절을 본다. 지주와 저택들의 영국은 지나갔고 끝장난 것, 다만 그 지워 없애기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을 따름이라고,

노동 계급과 지배 계급에 대한 생각이 트이고, 전혀 다른 자본의 물결을, 역동적인 변혁의 물결을 직감하면서,

그리고 점점 노동자의 삶, 육체적인 삶을 직시하면서, 지배계급인 '클리 퍼드' 무리들이 지향하던 정신적인 삶과 비교한다.

광부들을 보면서 산업 노동자와 대중에 대해 두려움도 갖는다.

참을 성 많고 성실한 인간들, 하지만 그들은 삶에 대한 아름다움이나 직관이라곤 전혀 없이, 항상 어두운 갱 속에서만 삶을 보내지만 여전히 가난하고, 그래서 그들이 존재를 상실한 인간들로 비춰진다.

그즈음, '볼턴 부인' 덕에 컨디션이 많이 좋아진, '클리퍼드'는 자신의 영지 내, 제철과 광산 산업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사업에 집중하게 된다.

'멜러스'의 아이를 갖게 된 '코니'는

그와의 삶을 꿈꾸며 언니와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나서고, 남편에게는 거기서 한 남자를 만나 연애의 결실을 맺게 된 것으로 꾸미려 드는데

일은 수월하지 않게 돌아간다.

'멜러스'에게는 이혼하지 못한 야성적이고 상스러운 아내가 있었고(진짜 가관이다.)

'클리퍼드'는 자신이 고용한 사냥터 지기 따위와 놀아난 '코니'를 용서하지 못한다... 그래도 마지막은 삶을 바꾸려 시도하는 '멜러스'의 편지가 '코니'에게 전해지는데..

 

아무리 감상적 차원에서 좋게 생각하려 해도, 이 성관계 문제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지저분한 관계이자 예속 중 하나였다. 이것을 찬미한 시인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여자들은 항상 뭔가 더 나은 것, 뭔가 더 고귀한 것이 잇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더 명확하게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한 여자의 아름답고 순수한 자유는 그 어떤 성관계의 사랑보다도 한없이 더 훌륭한 것이었다. 다만 불행한 것은 이 문제에 있어 남자들이 여자들에 비해 너무나 멀리 뒤처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남자들은 마치 개처럼 성관계에만 집착했다. 그리고 여자는 이에 따라야만 했다. 남자란 욕구로 가득 찬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여자는 그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아이처럼 심술 사나워져 골을 내고 날뛰면서 이제껏 아주 유쾌했던 관계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기 십상이었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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