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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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문학계의 거장 '슈테판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전기작가이다. 그의 전기와 평전을 차례로 읽어가겠다 하면서 먼저 만난 [초조한 마음]에 흠뻑 매료되어, [낯선 여인의 편지]와 [체스 이야기]도 구입해두었는데, '바하의 그녀 님' 덕분에 이 책을 먼저 만나게 되었다.

일찍이 남과 다른 시적 감수성을 간직하고, 심리학과 '프로이트 학설'에 대한 관심으로 섬세한 성격묘사가 주 특기인 그는,

보통 사람들 보다 섬세한 결을 지닌 사람이었겠으므로 남다른, 다분히 예술가적인 죽음을 선택했고 그래서 그가 선택한 죽음이 항상 화두가 되기도 하는데, 이 책의 말미에 유서의 전문이 실려있기도 하다. '자유로운 의지와 명료한 정신의 삶으로부터 이별하기 전, 적절한 때 당당한 자세로 삶을 마감하고 싶었다'고..

짧은 이야기이지만, 처음부터 몰입하게 되는 책이다.

고백서의 형식으로, 주인공 '롤란트'가 60번째 생일과 30년간의 교수 생활을 기념으로 문집을 발간하는데, 자기 인생의 진정한 전기문으로 세심하게 기록하였지만, 진정한 한 사람, 자기 운명을 결정하고, 지금의 자기이게끔 했던 '그분'은 기록하지 못하였다 하면서 40년 전 '그분'의 이야기를 꺼낸다.

- 세심하게 기록된 목차에는 200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단 한 분, 나의 모든 창조적 충동의 원천인 그 사람의 이름은 없습니다. 내 운명을 결정하고, 두 배의 힘으로 젊은 시절의 나를 다시 소환한 그의 이름은 여기에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지만 내게 진정한 언어를 부여한 사람, 그의 숨결을 통해 비로소 내가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든 바로 그 사람에 관한 내용만은 적혀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평생 나는 여러 사람의 모습을 묘사해 왔고, 지난 수백 년의 인물들을 현대적인 감각에 어울리는 가장 모던한 초상화로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18

'롤란트'는 베를린 대학에서 영어 전공을 하게 된다. 원래 선원이 되고자 하였지만, 대학의 학장인 아버지와 타협 끝에 자신의 꿈에 그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 선택한 진로였던 것.

그가 머물게 된 도시 베를린은 자신의 성장에 스스로 놀라움에 사로잡힌 곳으로, 그 기세등등한 탐욕이 충동적 젊은이인 자기 자신과 닮아 있었고, 자신의 남성적 흥분을 더 고양시키는 곳이었다 한다.

그의 방탕과 탐닉의 위험한 수준, 다시 말해 정신적인 몰락을 진정시켜준 어떤 우연이 일어나기까지 그는 그렇게 살았다.

어느 날 자기 집에서 여자아이와 시시덕 거릴 때, 아버지가 불시에 방문을 했다.

아버지의 설교와 훈계를 질색하여 마찰을 예상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인내했고, 그 모습에 뭔가 긍정적인 동요가 일어난 '롤란트'는 아버지의 권유로 작은 지역의 대학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러해서 3개월간 그의 허황된 사상누각을 허물고 정신적인 것에 온 힘을 쏟으려는 갈망으로 학업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기로 맹세를 하고

새로운 대학의 강의실을 둘러보다가 영문학 강의실에서 운명의 그분을 우연처럼 만나게 된 것.

'셰익스피어'에 관한 강의였는데, 자석 같은 마력에 끌려 강의실로 들어서면서 압도적인 힘에 사로잡히고, 전기에 감전된듯한 감동을 받는데, 그 교수의 용모는 정신적 기풍이 베여있는 독일 고딕체 문자의 구성 같았다. 그리고 수강신청을 위해 그 교수와 미팅을 하고, 다음 강의에 들어갔는데

그 수업은 몹시 실망스러웠다. 그의 용모 또한 평범한 나이 든 남자의 지치고 피곤한 모습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후 세미나 수업에서 그 열정을 다시 만날 수 있었는데, 그 교수의 열정과 역량은 학생들과 벌이는 토론식 수업에서 발휘되는 것이었다.

[중간 생략]

 

'롤란트'는 40년이 지나도록 그때의 그 시간이 지금의 나를 결정지어 버렸노라고..

강의에 몰입하고 있을 때면 자신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술을 빌린 그분이 말하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면서 그의 음성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한다.

교수의 자기 억제 회초리가 너무 가혹하다.

선천적으로 그에게 내재된 어둡고 위험한 곳으로 이끄는 힘에 맞서고자 경련과도 같은 긴장의 연속에서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의지,

그의 도피..

위험하고도 아슬아슬한 이 이야기는 그런 비밀을 간직한 선생을 향한,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롤란트'라는 영문 학도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바탕으로 한 심리의 묘사를 미학적으로 승화시켰다.

그를 한눈에 사로잡은 그 교수의 용모가, 정신적인 기풍이, 독일 고딕체 문자의 구성 같았다는 표현이 절묘하여 상상해 본다.

제목이, 처음부터 인상적였지만, 다 읽고 난 후에도 적절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떤 우연한 순간, 어떤 대상에게 이끌리고, 사랑이 시작되는 감정은 온통 그렇게 혼란으로 찾아오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혼란은 묵직하게 남을 수도 있겠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이고 소년이었기에 가능하다는 것.

 

- 순수한 존경의 마음을 담은 남자의 열정이 한 여인에게 향하게 되면, 그 열정은 무의식중에 육체적인 결합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이끌리게 됩니다. 자연은 서로의 육체를 소유함으로써 최고의 결합을 이루도록 정열을 아로새겨 놓았으니까요. 그렇지만 남자가 남자에게 바치는 정신의 열정, 충족되지 않은 그 열정은 어찌해야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정열은 존경하는 인물 주위를 쉼 없이 맴돌면서 항상 새로운 황홀함을 향해 타오르지만, 자신을 바치는 최후의 순간에도 결코 가라앉지 않습니다. 정신이 항상 그러하듯 열정은 계속해서 흐르지만 영원히 충족되지 못하고 완전히 흘러가지도 못하고 맙니다. 10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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