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케의 108명이나 되는 사내들 중에 페넬로페의 마음을 흔든 이가 단 한 명도 없었을까? 오뒷세우스가 떠날 때 아들 텔레마코스는 갓 태어난 상태였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돼지치기 막사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알아보지만 여신 아테네가 개입한 덕분이다. 피를 나눈 상태는 아니라서 그런가? 귀향하여 궁궐에 와 있는 남편 오뒷세우스를 페넬로페는 알아보지 못한다. 한 나라 왕의 부재, 아버지의 부재, 남편의 부재, 그렇게 20년 세월이 흘렀다. 무엇보다 집을 떠나기 전 오뒷세우스가 아내와 아들과 함께 한 시간이 너무 짧았다. 작년에 나온 개정판 <오뒷세이라>을 최근에 다시 읽었다. 주석을 해당 면으로 옮기는 변화만이 아니라, 날로 새롭고 다듬어지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해석도 읽을 때마다 새롭다. 웨스턴 영화 <셰인>과 이 서사시의 주인공 오뒷세우스의 심리를 비교해보았다. 좀 길다.(글쓴이)

 

서부 영화의 고전 <셰인>, 1890년 초여름, 태양이 내리쬐는 어느 날. 초록빛으로 물든 아름다운 와이오밍 고원에 한 사나이가 말을 타고 나타난다. 단정한 몸차림에 침착한 태도, 눈매는 온화하면서도 예리함이 번뜩이며 뜨내기 카우보이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곳에는 동부에서 이주해 온 개척민들이 살고 있다. 개간한 토지는 그들 소유로 법률이 보장했다. 수수께끼의 사나이는 개척민의 한 사람인 죠 스타레트의 집에서 물을 얻어 마시고 저녁 식사까지 초대 받는다. 사나이는 스타레트의 호의를 받아들여 하룻밤 신세를 진다.

이 사내의 이름은 셰인, 그를 살갑게 맞이한 이들은 스타레트와 아내 마리안과 아들 조이, 단출하지만 단란한 가족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 지방에서 오래 전부터 목축업을 하고 있는 라이커 일당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라이커는 툭하면 개척민들을 못살게 들볶으며 이들의 모든 땅을 차지하려 한다. 스타레트가 부리던 일꾼들도 라이커의 등쌀에 견디지 못하고 떠나버린 상태다. 그러한 사정을 말한 스타레트는 셰인에게 월동준비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머물러 달라고 한다(신작 영화가 아니기에 스포일러에 신경 쓰지 않고 있다. 이 글은 이 영화에 대한 디테일을 기억해야만 와 닿는 것이 있을 것이기에-필자)  
부탁을 받아들인 세인은 소재지에 물건을 사러갔다가, 라이커 일당에게 곤욕을 치르지만 말썽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스타레트의 당부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라이커 일당 때문에 소재지를 오갈 때는 단체로 움직이기로 한다. 이때 또다시 시비를 걸어오는 스타레트 일당과 싸움이 붙은 셰인은 물러서지 않고 적시적절한 스타레트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를 지켜보면서 자랑스러워하는 죠이... 소년의 간절한 요청에 셰인은 사격시범을 보이고, 어머니 마리안도 셰인에게 점점 더 깊은 호감을 느끼는데 셰인 또한 그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평화는 거기까지다. 마을 사람 하나가 라이커가 고용한 총잡이 잭 윌슨에게 사살되자, 겁을 먹은 마을 사람들은 떠나려 한다. 한 집씩 떠나면 공동체는 무너지고 모든 목장부지는 라이커의 소유가 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스타레트는 라이커와의 결투를 위해 집을 나서려 한다. 셰인은 이런 스타레트를 쓰러뜨리고 대신 싸우러 가는데, 죠인와 마리안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죠이는 셰인을 뒤쫓아간다. 처음으로 소재지에 총을 차고 나타난 셰인. 생사를 가르는 결투가 벌어지고 셰인의 총에 윌슨은 나자빠진다. 그리고 나머지 라이커 일당도 처치한다. 그리고 죠이 덕분에 마지막 한 녀석까지 처치하고 자신도 한 쪽 팔에 부상을 입는다. 이제 떠날 시간이다. 그러나 그가 떠나지 말기를 간절히 요청하는 소년 죠이. 사람을 죽인 사람은 계속 머물 수가 없다고 눈물을 흘리는 소년에게 말하는 셰인에게 셰인이 당부한다.
"어머니에게 더 이상 이 마을에 총이 필요 없다고 말씀드려라"
그리고 셰인은 떠난다. "잭은 총도 뽑지도 못했어요! 돌아와요 셰인!" 하고 소리치는 소년의 메아리를 뒤로 한 채.

 

<셰인>의 줄거리다. 소년기에 TV(주말의 명화)로 보았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전편에 흐르는 이 영화의 주제는 셰인과 소년의 우정이다. 나아가 스타레트와 그의 아내 마리안과 아들 조이라는 한 가정과 정처 없이 떠돌던 셰인 사이의 특별한 우정이다. 그러나 셰인이 이들의 오두막을 찾은 바로 그날부터, 마리안이 셰인을 대하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소년 조이는 셰인에게 기대하는 것을 말로 행동으로 표현하고 셰인은 그런 소년의 요청을 받아주는 등 둘의 호감이 표면으로 드러나지만, 셰인과 마리안 사이의 호감은 미묘하면서도 잔잔하게 배경처럼 깔리고 있다.
보다 놀라운 사람은 남편이자 아버지인 스타레트다. 처한 상황 때문에 셰인의 도움과 그의 머묾이 절실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필요 때문이라고만 단정하기에는 호의적인 태도로 셰인을 맞이하고 대한다. 내 가정을 지켜야 하기에 지금 라이커 일당에게 시달리고 있지만, 나도 한때는 좀 놀아본 적이 있는 총잡이였다는 것이, 라이커 일당과 결전을 위해 떠나려고 몸부림치는 그의 대사에서 드러난다. 이를 통해 이전에 스타레트가 셰인에게 가진 감정의 일단을 짚어낼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결투에서 죽게 되면) 아내와 아들을 지켜달라는 부탁까지 한다.
앞서 스타레트를 지도자로 한 정착민들의 독립기념일 축제에서, 자신과 아내의 춤에 이어, 셰인과 자신의 아내가 춤을 추는 장면을 담담하게 지켜본다. 특히, 마리안이 남편을 담장 밖으로 밀어내면서 셰인에게 춤을 요청하는 장면에서도 그저 부드럽게 바라볼 뿐이다. 셰인과 아들 조이가 가까워지는 상태는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지만, 아내와 불과 얼마전까지는 이름도 존재도 몰랐던 떠돌이 총잡이 셰인은 너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그러므로 질투가 생길 것이고, 이를 표출할 것 같기도 한데, 결코 그러지 않는다. 아내와 자식을 공유하자는 것인가? 라이커 일당이 스타레트와 셰인 측을 자극하는 대사에서도 셋의 미묘한 상태를  언급한다. 영화 전편에 미묘한 '트라이앵글'이 설정되어 있다.

 

먼저 셰인의 입장에서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 오두막을 찾기까지 셰인의 삶은 한마디로 '길 위의 인생'이다. 단란한 가정을 만났다. 그 풍경 속에 한 사람이 되어 이제는 머물고 싶다. 그간 억누른 정착에 대한 욕망이 꿈틀댄다. 더구나 세 가족의 구성원들이 저마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보여주는 호의를 뿌리치고 싶지 않다. 마당 한가운데 떡 하니 버티고 있는 거목의 그루터기를 제거하기 위해 도끼로 이를 찍어내고 있는 장면에서 스타레트가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데, 셰인과 스타레트 둘이 힘을 합쳐 거대한 그루터기를 드러내는 시점에서 둘의 혹은 셰인과 이 가족이 맺는 협력관계는 자연스럽다. 얼마나 머물게 될지 모르지만 있는 동안만큼은 내 역할을 하자. 더구나 떠도는 삶,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누군가를 살상하는 삶에도 염증이 나 있는 상태이기에 안정과 휴식이 필요하던 참인데 참 잘된 것이다.

 

반면에 스타레트의 입장에서는, 당장은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 그러나 한 발만 잘못 내딛으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 부숴질지 모르는 행복이다. 이 상태를 그는 잘 안다. 법적으로야 합법이지만 공권력이 그 권리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해주지 않는다. 성질 같으면 라이커 일당과 한 판 겨뤄 내가 죽든, 네가 죽든 불안정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남겨질 아내와 자식, 이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머뭇거릴 수밖에. 그러한 때에 나타난 셰인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다. 어쩌면 최악의 상태에서 가장인 자신의 역할을 대신해줄 수도 있는 사람이다. 라이커 일당의 압력 때문에 떠나버린 기존의 일꾼들과는 다른 존재다. 셰인에게서는 그런 포스가 보인다. 

마리안의 남편, 곧 한 남자로서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당면한 상황을 냉정하게 살필 때, 만에 하나 자신이 잘못되어도 식구들은 살아야 한다. 스타레트게 셰인은 자신의 부재시를 대비한 남져질 가족들을 위한 일종의 종신보험이다. 젊은 날 자신도 셰인처럼 떠돌며 총잡이 생활을 했다. 정착하고 가정을 이루고는 있으나, 현재 셰인의 상태를 너무나 잘 안다. 그런 점에서도 동병상련, 동지애를 느낀다. 셰인은 부재시 자신을 대신해줄 수 있는 상태에 있음을 확신하는데, 이 점을 살피는 것도 이 영화를 새롭게 해석하는데, 관건이다. 가장으로서의 갈등과 냉정한 선택, 차선책이 필요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플라톤이 『국가』에서 주창한 도발적인 제안 처자공유제를 살펴보아야 할까? 어쨌든 집(가정)이 절실하게 그리운 한 남자와 행복하지만 그 행복을 지키느라 고단한 한 사내가 맺고 다지는 미묘한 우정이 이 영화가 간직한 함의이며, 해체를 위한 핵심키다.

이제 <오뒷세이아>를 살펴보자. 20년이 흘렀는데도 감감무소식인 남편을 기다리는 페넬로페, 참 대단하다. 한데 기나긴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도 집으로 돌아가는 오뒷세우스의 귀향도 집요함에서 한 치의 물러섬이 없다. 부창부수다. 그래서 오랫동안 두고두고 읽히는 고전이겠지만,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에게 20년의 기다림은 개연성이 좀 떨어진다. 전쟁을 치렀다는 10년 세월이야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생사를 알 수 없는 이후 10년의 기다림은 기약이 없다. 이 정도면 전사했거나 귀향하다가 사망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가장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밤이면 밤마다 가산을 축내는 파티를 하며 선택을 강요하는 108명의 구혼자들, 페넬로페에게는 108번뇌다.
아무리 지혜가 많은 오뒷세우스라지만 20년 만에 집을 찾으면서도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건 무리가 있어 보인다. 사전에 그럴만한 준비를 해놓고 떠났기 때문일까? 아들 텔레마코스의 양육을 절친인 멘토르에게 맡겼던 것처럼. [페넬로페에게나 오뒷세우스에게나 신혼 시절 맺은 맹세가 대체 무엇이었기에. 여러 평론가들이 지적처럼 <오뒷세이아>의 또 다른 주인공은 텔레마코스이며, 소년에서 성인으로 변신하는 성장이 또 하나의 주제이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은 아버지를 만나고, 그런 아버지가 제자리를 찾는 과정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면서 텔레마코스는 어른이 된다.]

<셰인>에서 가장인 스타레트는 가정을 지키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생활 기반은 안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하나뿐인 목숨을 걸어야만 그것이 기능하다. 나 하나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아! 그러나 내가 죽는다면... 아내와 아들이 겪을 고초가 눈에 밟힌다(<일리아스> 6권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이별 장면이 떠오른다). 보통의 사내라면 아버지이자 남편인 자신을 대신할 누군가 특히 다른 사내는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셰인에게 남겨질 가족을 부탁한다. 그것이 스타렉트가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소년 조이에게 셰인은 관객들이 웨스턴 영화에서 만나고자 하는 그런 영웅이다. 그러나 아직은 어른들의 세계를 이해할 수는 없다. 라이커와 그가 고용한 쌍권총잡이 잭 월슨을 모두 물리쳤다. 이제 조이네나 인근의 개척민들은 자기들이 개간한 땅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의 숙원을 이룬 셰인은 왜, 왜 떠나야만 하는 것일까? 
"잭은 총도 뽑지도 못했어요! 돌아와요 셰인!"
조이의 한마디가 긴 울림으로 남아 있다. 셰인은 결코 돌아갈 수가 없다. 자칫 자신이 대신할 수도 있었던 한 가정의 행복, 그런 아버지의 자리를 확인하였기에, 그 돌아갈 수 없다.
"어머니에게 더 이상 이 마을에 총이 필요 없다고 말씀드려라."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에게 전하란다. 전쟁은 끝났다. 이제 평화다. 그러나 셰인은 그 자체가 전쟁인 삶으로 복귀한다. 그러한 길 위에 다시 섰다.

 

호메로스는 『일리아스』를 쓰고 50년쯤 후에 『오뒷세이아>를 썼단다. 『일리아스』가 인간의 전쟁 이야기라면, 『오뒷세이아』는 평화와 안정을 찾아가는 인간의 이야기다. 오뒷세우스에게는 바다라는 막강한 적이 남아 있다. 아직 불법이 횡행하는 미국의 서부는 강한 자, 빠른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적자생존의 전장(戰場)이다. 셰인에게 서부의 사막은 오뒷세우스가 직면하여 각종 모험을 겪어야만 하는 바다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오뒷세이아』를 이끄는 힘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천병희 옮긴이 서문)이다. 정황상 다시 황야로 정처 없는 길을 떠나는 셰인에게, 10년이고 20년이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여인이나 가정이 있을 리 없다(그러나 이 기억은 쉽게 떨치지 못할 것 같다).  

오뒷세우스는 아내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나우시카아를 떠난다. 그가 파이아케스 족의 나라를 떠나는(『오뒷세이아』 13권) 대목을 떠올려 보라. 물론 텍스트에서는 이러한 이별을 밋밋하게 다룰 뿐이지만, 지난 10년의 모험담이 사실은 파이아케스 족의 나라에서 오뒷세우스가 들려준 이야기라는 점. 사윗감으로서의 적합성을 심의한 심층인터뷰였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내가 이런 사람이요! 이야기보따리만이 아니라 오뒷세우스도 거기 주저않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얘기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고, 이전에 만나 한때 안주했던 여인(요정)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끌림을 주는 인간 여인 나우시카아가 있다. 그간의 여행에 지친 오뒷세우스는 하마터면 나우시카아라는 여인을 집으로 삼을 뻔 한 것이다.

 

그는 더운 물을 보자 반가웠다./ 머릿결이 고운 칼륍소의 집을 떠난 뒤로/  보살핌을 자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그때 신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받은 나우시카아가/ 지붕을 튼튼하게 떠받치는 기둥 옆으로 다가섰다가/ 눈앞의 오뒷세우스를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그에게 물 흐르듯 거침없이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손님! 고향땅에 가 계시더라도 이따금 나를/ 생각하세요. 그대에게는 누구보다 내가 생명의 은인이니까요."/ "나우시카아여, 고매한 알키노오스의 따님이여!/ 헤라의 크게 천둥 치시는 남편인 제우스께서는 내가 그렇게/ 고향에 돌아가서 이제 귀향의 날을 볼 수 있게 해주시면 좋으련만!/ 그러면 그곳에서도 나는 신께 기도하듯 그대에게 기도하겠소,/ 언젠까지나 날마다. 그대는 나를 구해주었으니까요, 아가씨!"(『오뒷세이아』 8권 450~468행)

 

나우시카아는 담담하게 오뒷세우스를 붙잡을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속마음까지 그럴 리는 없다. 헤라의 남편으로서의 제우스를 강조하는 오뒷세우스의 말 이면에 흔들림이 있다. 서사시에서 직접 언급한 두 사람, 오뒷세우스와 나우시카아의 이별 장면. 어쩌면 나우시카아를 만남으로써 한때 안정을 찾은 오뒷세우스는 그 때문에 고향, 곧 자신의 집을 간절하게 그리고 문득 그리워하며, 다시 귀향길을 이어가게 하지 않았을까?
영화 <셰인>의 마지막 장면, 소년에게서 자꾸만 멀어지는 말 위에 오른 셰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마터면 자신이 가장(家長) 역할을 할 뻔했던 마음의 집을 떠나는 그는 그는 어디선가 자신만의 홈 스위트 홈을 찾았을까? <셰인>이 어른들(만)을 위한 흔치 않은 웨스턴 영화로 평가 받는 까닭을 나름 살폈다. 잔잔하지만 머무름과 떠남 사이에 고뇌하는 오뒷세우스의 모습도 보았다. '사랑하기에 떠나신다는 그 말'을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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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2-25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셰인>과 <오뒷세이아>를 절묘하게 엮어주셨군요. 저도 그 영화를 까마득한 옛날에 아주 흥미롭게 봤었답니다. 이렇게 다시 그 영화 속 인물들을 글 속에서 만나고 보니 그 영화의 몇몇 장면들이 눈앞에서 다시금 살아 움직이는 듯합니다. 그리고, 오뒷세우스의 기나긴 모험 이야기도 여전히 흥미롭게 들리고요. 나우시카아 공주와의 이별은 사실 영화로 꾸며졌더라도 `결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가슴 아린 장면`이 될 수밖에 없었겠다 싶습니다. 사실 오뒷세우스가 천신만고 끝에 그 섬에 안착해서 그녀와 함께 보낸 `꿈같은 세월`이 결코 적지 않았는데, 그 두 사람의 `석별`이 생각보다 너무 밋밋하고 짧게 마무리되는 게 이상할 정도이긴 했다는 말씀을 듣고 보니, 저로서도 마음 한켠에 그런 느낌을 가졌던 터라 더욱 공감하게 됩니다. 우리가 너무 `삶`을 `연연해` 하기에 그런 걸까요?
* * *
사람들은 오디세우스가 나우시카와 이별했을 때처럼, 그렇게 삶과 이별해야 한다. ㅡ 연연해 하기보다는 축복하면서.
- 니체, 『선악의 저편』



timeroad 2019-02-13 09:5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렇게 댓글까지 써주시니. 퍼내고 또 퍼내도 마르지 않은 샘이라고 비유하는데,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읽을 때마다 새로운 글감을 줍니다. 님이 쓰신 여러 리뷰에서도 그 경지를 느낍니다. 사실 페넬로페가 집 안에서 벌인 전쟁이 더 참혹하지 않았을까,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한때 전북 남원에서 살았습니다. 시내에서도 40여 분을 가야 하는 시골에서 살았는데, 오일장을 보려면 시내까지 버스로 나가야 했습니다. 공설시장 부근에 광한루가 있는데, 사는 동안 두 번밖에 둘러보지 못하였네요. 광한루라는 건물 옆 유원지의 동북쪽에는 성춘향을 모신 사당이 있는데, 묘하게도 그 건물 뒷편으로 상사화가 참 많이도 피어있었어요.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다고, 해서 평생을 혼자 사시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사찰 같은 곳에 심는 꽃이지, 여염집에서는 심지 않는다는 꽃 말이죠. 페넬로페와 춘향의 삶을 비교해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108명의 구혼자들은 오뒷세우스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죠. 나중에 거치 차림을 하고 춘향의 마음을 떠보는 이몽룡은 거지로 변장하고 페넬로페의 마음을 시험하는 것과 오버랩이 되고요. 춘향에게 러브콜을 던지 사내가 어찌 변학도뿐이었을까요? 어쨌든 페넬로페가 당면한 전쟁 같은 상황이 참혹하기에, 아우시카아와 오뒷세우스의 `사랑`이 행간을 읽어야 할 정도로 밋밋하게 처리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