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그러나 그들은 테르모퓔라이에서 아르테미시온으로 보낸 사자들에게서 레오니다스(스파르테 왕으로, 페르시아군의 남진을 막기 위해수 테크로퓔라이 고갯길을 지키다가 300명의 결사대와 함께 옥쇄했다.)가 전사하고 크세르크세스가 고갯길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쪽의 헬라스 내륙으로 철수했다. 이 때 전쟁에서 크게 용맹을 떨치고 고무되어 있던 아테나이인들이 후미를 맡았다. 테미스토클레스는(<플루타르코스영웅전> '테미스토클레스 전', 143면, 9장)
[2]헤로도토스는 <역사> 후반부인 제7~9권에 이르러서야 전쟁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마라톤에서 좌초한 다레이오스의 원정에 이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의 전쟁 결의, 군대의 사열, 영화 <300>으로 널리 알려진 테르모퓔라이 전투, 아르테미시온 전투에 이어 살라미스, 플라타이아이, 뮈칼레에서 거둔 그리스의 대승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역사』는 절정을 이룬다. (헤로도토스 책소개)
[3]<역사>의 해당부분으로 가보자. "테르모퓔라이에서 페르시아 왕을 기다리는 헬라스인들은 다음과 같다. ..." 헤로도토스는 역사 제7권 202절부터 239절, 제7권의 끝부분까지 테르모퓔라이 전투를 다루고 있다. 몇 년 전에 개봉되었던 영화 <300>은 이 전투를 다루고 있다. 앞서 언급하였거니와 <역사>의 이 부분이 영화의 배경이면서 소재이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았을 것이므로, 영화에 대한 얘기도 <역사>에서의 이 부분에 대한 얘기도 생략하거나 아주 간단하게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겠다.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이 협곡을 지키는 군의 지휘자는 가장 경탄할 인물은 아낙산드리데스의 아들 레오니다스라는 라케다이몬인(스파르테)이다. 그는 자신에게 배정된 300명의 전사들-슬하에 아들이 있는 자들 중에서 선발해-을 데리고 테르모퓔라이로 향했다. 그리고 이들은 비교가 되지 않은 페르시아군을 무찌르며 결사항전으로 막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 페르시아 진영에서 이 협곡으로 산을 넘어 접근할 수 있는 오솔길이 있었는데, 이곳은 포키스인들이 산 위에 올라 지키고 있었다. 페르시아 왕이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나 고심하고 있을 때, 에피알데스라는 멜리스인이 나타나 테로모퓔라이에 이르는 산속 오솔길을 알려주고,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오솔길을 따라가도록 군대를 파견했다. 페르시아 인들은 밤새 행군하여 동틀무렵 산 정상에 도착한다. 그곳은 1000여 명의 포키스 중부장보병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자국을 방어하고 오솔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온산이 참나무로 덮여 있어 포키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올라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결국 이 길을 뚫림으로써 스파르테의 전사들은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이 길을 열리고 만다. 페르시아의 2차 그리스 침략 때인 기원전 480년 8월의 이야기다.
[4]'대 카토'로 불리는 마르쿠스 카토는 기원전 234년에 태어나 149년 85세에 사망했다. 그는 로마의 웅변가, 정치가로 유명한데 그의 수명으로 볼 때 절반쯤에 해당하는 40대 초반 때의 일이다. [기원전 194년 카토는 집정관 티투스 샘프로니우스의 사정로 활동하며 트라케 지방(그리스 북동지방)과 히르테르(도나우강의 하류) 유역을 정복하도록 도왔다. 그는 또 마니우스 아킬라우스 휘하 참모장교로 안티오코스 대왕(3세-재위 기원전 223~194년에는 세레우카이아 왕조의 세력을 부활하고 동지중해 지방에서 로마의 세력에 대항하려 했다.)에 대항하여 싸웠다.
안티오코스는 헬라스인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헬라스를 침공했다(기원전 192년). 이때 동요하는 코린토스인들과 파르라이인들과 아이가이인들, 코린토스 만에 있는 도시들을 달랜 것은 카토였다. 안타오코스는 테르모퓔라이의 고갯길을 군대로 막고 그곳의 자연적 요새에 울짱과 방벽을 덧붙인 다음, 헬라스에 적군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믿고 그곳에 눌러앉았다. 그리하여 로마인들은 정면 공격으로 그곳을 통과하기를 포기했다. 바로 이때 카토는 페르시안둔이 헬라스군의 방어망을 우회하여 포위했던 유명한 작전을 떠올리고는 약간의 군대를 이끌고 야음을 틈타 출발했다. 우여곡절 끝에 적진에 가까이 간다.
"그러나 얼마쯤 갔을 때 길이 끊어지며 발아래 낭떠러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또다시 겁이 나고 낙담했으니, 사실은 자신들이 찾던 적군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알 수도 볼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플루타로코스 영웅전)
어느새 날이 새고 실제로 낭떠러지 아래도 헬라스식의 울짱과 전초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자 카토는 부하 몇몇에게 지시하여 적군 파수병들 가운데 한 명을 생포하게 하고, 그를 심문하여 적군의 주력부대는 왕과 함께 고갯길에 진을 치고 있음을 알아낸다. 그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고 경계가 소홀하다는 것을 알고 카토의 군사는 낭떠러지를 내려가 공격한다. 그 사이 평지에 있던 마니우스(집정관)가 고갯길로 전군을 투입하여 적의 방벽을 공격했다. 안티오코스는 돌에 입을 맞아 이가 부러지자 괴로워 말머리를 돌렸고, 그의 군대는 도처에서 로마군의 공격을 받아 뒤로 물러섰다. 도망갈 길이라야 지나기 어려운 험로뿐이고, 깊은 늪이나 가파른 절벽은 통과해보았자 미끄러지고 떨어질 게 뻔했지만, 안티오코스의 군대는 고갯길을 지나 그렇듯 위험한 길들로 뛰어들었고 로마인들의 칼에 맞을까 두려워 서로 밀치고 짓밟다가 자멸하고 말았다.
이상은 <플루타르코스영웅전> '마르쿠스 카토 전' 13장과 14장의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카토는 자화자찬에 어색해하는 사람이 아닌 데다 공공연한 자랑도 위대한 공적의 당연한 귀결이라 여기고 전형 주저하지 않았지만, 이때의 공적에 관해서는" 특히 자랑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군사적 업적을 본 사람들은 "그가 로마 국민에게 신세진 것보다 로마 국민이 그에게 신세진 것이 더 크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했다는데 대표적인 '자랑질'의 사례다. 집정관 마니우스가 그를 껴안으며 "자기도 로마의 모든 국민도 그의 선행에 적절히 보답할 길이 없을 것"이라며 함성을 질렀다고 한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카토는 자신의 승보를 몸소 전하려고 로마로 출발했다. 좀 낯 뜨거운 일이긴 한데, 기원전 191년의 일이다. [이보다 앞서 기원전 279년에도 그리스인들은 침입해오는 켈트족을 바로 이곳 테르모퓔라이에서 지연시켰다.]
[5]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 (Herodotos, 기원전484?∼BC425?)와 마르쿠스 카토(기원전 234년~149년)의 생몰연대를 비교해보라. 단지 책 형식이 아니라도-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아니라도- 앞선 시대의 전쟁사는 장군들에게 반드시 익히고 기억해야할 커리륨럼이었으리라. 어쨌거나 "기원전 191년에 셀레우코스 왕 안티오코스 3세가.. 로마군을 막기 위해 이 길을 요새화했"던 것을 역발상으로 무너뜨린 사례는 당연하면서도 흥미로운 일이다. 마르쿠스 카토가 특히 테모퓔라이에서의 자신의 승리에 쾌재를 부르고, 끊임없이 '깔대기를 들이댔던' 것은 테모퓔라이에서 벌어진 앞선 전쟁의 사례를 적절히 활용했기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그렇다면 안타오코스는 이곳에서 벌어진 레오디다스 왕과 페르시아 크세르크세스 사이의 전투사례를 몰랐을 것인가!
[6]테모퓔라이 협곡은 아테네 북서쪽 약 136㎞ 지점이다. 고대에는 이 길의 절벽이 바다에 가까이 있었으나 물에 의해 운반된 침니 때문에 그 거리가 1.6㎞ 이상으로 넓어졌다. '뜨거운 통로'라는 뜻의 이곳 지명은 유황 온천수가 있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길이 7.2㎞의 이 고개는 수많은 침략으로 인해 유명해졌으나, 이제는 협곡이라고 할 수 없으니,
[7]역사(전쟁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유사한 케이스의 승리나 방어벽을 구축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만약 카토가 이 토론에서 여느 때 자신의 작품에서 그랬던 것보다 더 유식해 보인다면 그것은 그리스 문학 덕분이라고 생각하게나. 그가 노년에 그리스 문학을 열심히 공부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 말일세"(키케로가 <노년에 관하여>에서 주 대담자로 나선 마루쿠스 카토에 대해 소개하는 대목)
"나는 노인이 되어서야 그리스어를 배웠으니 말일세, 나는 마치 오랜 갈증을 식히려는 것처럼 열심히 그리스어를 배운 까닭5에 자네들도 들었다시피 방문 인용한 문장들을 알게 된 거라네..아무튼 그르시어만큼은 나는 열심히 배웠다네."(<노년에 관하여 8장 후반부, 마르쿠스 카토가 하는 말)
마르쿠스 카토가 테모퓔라이에서 승리를 거둔 때의 나이는 43세 무렵이다. 아마도 노년에 이른 마르쿠스 카토가 그리스어를 더욱 열심히 배운 동기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힙입은 전공을 회상하는 즐거움과 겹치는 것은 아니었을까?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원정 중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베개속에 넣어 베고 잤을 정도로 애독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그만큼 <역사>의 한 페이지와 이어진 전쟁사. 한 장소에서 벌어진 두 개의 전쟁이야기는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