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따라 우리는 플루타르코스를 플루타크, 플프타르크로도 불렀다. 우리말은 외국말의 우리말표기에도 뛰어난 언어라서, 이렇듯 인명이건 지명이건 외래어 표기의 변천에서도 시대 흐름을 읽을 수 있게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리스어를 원전 그대로 충실하게 읽은 것으로(옮긴이 천병희 님), 앞으로도 그를 플루타르코스라고 하는데 이의는 없을 듯하다. 가령, 플라타너스를 프라타나스, 플라타나스로 발음하고 표기했던 때를 생각해보면, 인터넷 검색에서도 그렇고 한순간에는 힘들겠지만, 외래어표기에 대한 기준이 정착되었으면 싶다.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정확하게는 그의 <<비교열전>>에도 플라타너스가 언급이 된다. <테미스토클레스 전>에서,
"아테나이인들이 진심으로 자신을 존경하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플라타너스 취급을 한다며, 날씨가 궂으면 가지 밑으로 피신을 하지만 날씨가 좋아지기만 하면 가지를 쳐 자라지 못하게 한다고 말하곤 했다."(158면, 천병희 옮김, 숲 펴냄, 2010년)
책을 읽다가 이 대목 좋아, 언젠가 쓸모가 있을 거야, 라는 생각에 밑줄을 긋거나 내 생각을 덧붙여놓는 그런 대목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오늘 그런 대목 가운데 하나, 플라타너스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테미스토클레스에 관해서는 앞서 한 개의 글을 이곳(알라딘)에 쓴 적이 있거니와 그에 대해 아는 이들은 정말 그다운 말이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리라. 그만큼 그의 인생이 그랬고 그가 민중(시민)들의 마음을 휘어잡을 때도, 또 그들의 질투와 시기 혹은 경계심 때문에 도편추방까지 당해 쓸쓸한-이전의 화려한 인생에 비교하여- 노년을 보낸 점을 생각하면 절묘한 지점이다. 이렇게 민중들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이, 왜 추방까지 당했을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하는데, 자신의 재능을 믿고 너무 나대다가 그런 불행을 자초하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뒤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지음, 천병희 옮김, 숲펴냄(2010)
플라타너스는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가로수이면서 녹음수이다. 위 인용은 좀더 정확하게는 '날씨가 궂으면'의 경우, 날씨가 궂여 눈비가 오는 날일 것인데, 비오는 날에 우산이 없으면 한동안 그 넓은 잎파리가 비막이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가장 그 고마음을 느끼는 때가 요즘처럼 땡볕의 폭염기가 아니겠는가.
필자의 초등학교 교정에는 운동장 한 귀퉁이에 거대한 플라타너스 나무 한 그루가 지금도 떡 하니 버티고 있다, 그런데, 그 모양이 기괴하다. 마치 말잔등 모양으로 밑둥에서 2미터쯤 되는 지점부터 한 차례 구브러지고 그렇게 말등에 해당하는 부분이 3미터쯤 이어지다가 다시 수직으로 솟구쳐올라 멀리서 바라보면 말뚝박기 놀이감으로 보이는 것이다. 실제로 어린시절 우리는 말잔등에 오르듯 그 나무를 타고 올라 놓았던 추억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 나무 거대한 그늘 아래에는 비록 시멘트로 만든 것이지만 의자들이 있었고, 오르간을 옮겨 음악수업을 하곤 했는데, 우리는 그곳을 녹음교실(綠陰敎室)이라 불렀다.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초록빛 바닷무울에에~" 그런 합창이 이어지는 동안 어느덧 의자도 조무래기들도 오르간도 모두 초록으로 물들어버리지 않았나 싶다.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학교의 건물이 불탔는데 당시는 지붕이 기와였다고 한다. 그런데 불에 달궈진 기왓장이 날아와 이 나무의 줄기에 상채기를 냈는데 그것이 허리가 구부러지게 된 전설이고 내막이다. 믿거나 말거나, 그러나 그런 기막힌 사연이 있지 않고서야 학교 운동장-이 넓기도 했고 한가운데는 아니지만-의 어정쩡한 위치에 서 있어 당장 파내서 옮겼어야 할 나무가 애매한 지점에 서서 버티게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그 사연이 아주 터무니없는 것은 아닌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어쨌거나 지금도 내 기억 속 플라타너스는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가로수는 아니다.
가로수로서의 플라타너스는 참으로 가혹한 운명을 해마다 반복적으로 맞이한다. 아주 속성으로 자라니까 전국의 산에 아카시나무나 들판 곳곳의 포플러나무가 그러하듯, 플라타너스는 녹화사업을 주창하던 개발독재 시대에 안성마춤인 수종이었으리라. 가령, 귀화식물 군(群)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줄기차게 자라는 메타세쿼이아(영화 <화려한 휴가>의 첫 장면인가 담양의 그 가로수)와 비교하면 해마다 거의 모든 가지가 잘리는 아픔을 견뎌야 하는 플라타너스의 운명은 가혹하다. 서울의 가로수 가운데에는 상당수가 은행나무이고-늦은 가을 혹은 초겨울 첫서리가 내릴 즈음에 거의 한 나절 만에 잎을 떨구는 은행나무에서 인생무상을 느낀다. 그리고 은행나무가 늘 가까이 있었음을 인지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곳에 따라 감나무(양천구의 경우, 구의 상징나무라고 함)도 있고, 드물게 마로니에(서초구 구반포에서 신반포-고속터미널로 이어지는 대로에 있다)도 있지만 플라타너스의 비중이 크지 않나 싶다.
그런데, 과연 테미스토클레스가 살았던 그 시대에 플라타너스가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였던 것일까? 나는 앞서 인용에서 전기 전체에서는 그야말로 곁가지에 해당하는 이 나무에 대한 탐색에 들어갔다. 내 상식으로 우리가 '플라타너스'라고 부르는 나무는 미국 혹은 북아메리카 원산이고, 우리말로는 '양버즘나무'로 불린다. 그리고 '서양 버즘나무'를 즐겨 심은 때가, 메타세쿼이아가 가로수로 많이 심어진 역사와 거기서 거기라고 알고 있다. 버즘나무(혹은 양버즘나무, 플라타너스)는 그 줄기가 얼굴(혹은 피부)에 난 버즘처럼 생겨서 그리 부르게 되었다. 표준어로는 '버짐'이 맞다.
정확성을 위해 실제로 검색해보니, 양버즘나무(Platanus occidentalis L.)는 <북아메리카 동부가 원산지인 거대한 교목으로 흔히 플라타너스로 불린다.>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아테나이)에서 플라타너스라고 불리는 이 나무는 우리가 아는 플라타너스와는 조금 다른 나무라고 할 수 있다. 해서 이번에는 버즘나무(Platanus orientalis L.)를 찾아보았다. "버즘나무는 서아시아에서 지중해 지방에 이르는 지역이 원산지인 나무"라고 나와 있다. 분명하게 서아시아와 지중해를 언급하고 있다. 흔히 외래어로 부를 때는 '플라타너스'라고 하면 그것이 양버즘나무도 버즘나무도 포괄한다고 할 수 있지만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버즘나무'로 번역하고, 주를 달아 저간의 사정을 간략하게 밝혔으면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버즘나무의 경우,
"30m까지 자라며 가로수로 많이 심는다. 특성상 천근성, 속성수이므로 뿌리가 얕고 위로 높게 자라며 잎이 넓기 때문에 다른 수종에 비해 여름철 우기시 비바람에 의해 도복될 우려가 있어 가로수의 경우 매년 늦겨울에서 초봄사이에 전정작업를 실시한다." (위키백과)
우리 주변에서 보는 플라타너스(양버즘나무)와 그 생태가 크게 다르지는 않다. 가혹하고 무참한 전정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을 알 수 있다. 정말 앙상하고 을씨년스럽게 거의 원줄기만 남기는 특단의 조치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또한 테미스토클레스의 비유나 그것을 전기에 인용한 플루타르코스의 섬세함이 새삼 돋보이며, 2천년도 넘은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다. 고백하자면 이 글을 쓰게 된 것이, 원문에 대한 직역과 의역 사이에 다소 의역에 가깝지 않나 하는 한 예시로 꼽았기 때문이다.
이제 다른 옮긴이의 번역을 살핀다. 특별히 어느 것을 골랐다기 보다는 집에 있는 것으로, <<플루타르그 영웅전1>>(홍사중 옮김, 동서문화사)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 인이 자신을 존경하거나 찬미하지 않고 대나무처럼 여긴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날씨가 궂을 때 그 나무 밑으로 피했다가, 날씨가 좋아지면 바로 그 잎을 뽑거나 가지를 자르기 때문이라고 했다."(220면)
놀랍게도 홍사중은 플라타너스를 '대나무'로 번역하고 있다.
대나무가 가로수처럼 흔한 나무인가 하는 질문은 접어두자. 그 밑으로 피할 수 있는 나무인가, 잎을 뽑는 것은 할 수 있으나 대나무의 가지를 잘라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대나무로 번역한 것도 문제지만, 본래 발화자의 비유와 한참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다른 번역서를 봤다. 범우사의 <<플루타르크 영웅전1>>(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38-1, 김병철 옮김, 범우사 펴냄, 1999-02-05)에는,
"그는 말하기를 아테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으며 그저 쥐방울나무 취급을 할 뿐이라, 날씨가 사나울 때는 그 그늘 밑에서 피신하지만 날씨가 좋아지면 곧 잎을 따고 가지를 쳐버린다고 하였다."(330면)
양버즘나무는 쥐방울나무로도 불린다. 서양 버즘나무(플라타너스)인데, 아메리카프라타너스, 서양플라타너스, 양방울나무로도 불린다. 그러니 여기서는 '플라타너스=양버즘나무'라는 등식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쥐방울나무라고 함으로써 학명상 '버즘나무'일 수도 있는 가능성은 배제된다. 그런데 '잎을 따고'라는 풀이는 위 홍사중의 '잎을 뽑거나' 못지 않게 녹음수로도 쓰이는 거대하게 큰 플라타너스에 대한 표현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사다리를 놓고 올라서 잎을 따겠는가, 아니면 잎을 딸 정도 크기의 플라타너스 아래서 눈비를 피하고 드센 태양광을 피하겠는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리스로마신화 등 관련서적을 많이 펴낸 이윤기 씨의 해석을 살폈다. 아마도 조선일보에 연재한 것을 어느 카페에 옮겨넣은 글을 통해서인데, 이 분은 <[플루타크 영웅열전] 아리스테아데스④ - 정적 테미스토클레스>(조선일보 (1997.11.24)에서, 아리스테아데스를 다루면서 테미스토클레스를 언급하고 있다. 참고로, 이분은 영웅열전으로 왜 테미스토클레스를 다뤘는지 모르겠다며 회의적이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열전에서와는 달리 별도로 연재글에서는 테미스토클레스를 다루지 않고, 아리스테이데스(천병희 님 표기)의 인물됨됨이를 보완하는 자료 정도로 쓰고 있다. 어쨌거나 이윤기는,
"아테나이 사람들은 나를 사랑하지도 존경하지도 않아. 그들에게 나는 버짐나무(plane tree)와 같아. 날 궂으면 내 아래로 모여들지만 날이 개면 내 잎을 따고 가지를 잘라 버릴 것이거든."(출처는 위 본문에)
이라고 옮겼다. "plane tree"라는 영어명 표기에 '버짐나무'라고 표기했다. 그런데, '버즘'은 '버짐'의 옛말로, 강원도나 제주에서 사용하는 방언이다. 그런데 우리말 나무명으로 굳어진 말이 '버즘나무'이므로, 고유명사에서까지 '버짐'을 고집하는 것은 너무 나가지 않았나 싶다. 어쨌거나 대체로 원만한 번역이나 "잎을 따고"라고 하는 대목은, 적절치 않게 생각되는 위의 두 건의 번역과 대동소이하다. [버즘[명사]<방언,옛말> 1. ‘버짐’의 방언(강원, 제주). 2. ‘버짐’의 옛말.]
누가 딱딱한 논문을 읽는 듯한 주석을 읽고 싶어하겠는가, 그러나 원전에 충실한 번역을 하고자 할 때는 설명이 불가피하다. 그냥 지나쳐도 대세에 지장이 없다고 할 수도 있는, 사소해보이는 이 대목이 테미스토클레스의 생각이나 인물 됨됨이를 단적으로 읽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주민소환제가 발의되는 과정에서 또 그 실효성을 두고도 아테나이의 도편추방제도는 아주 중요하게, 그리고 대입수험생들의 논술주제로도 예시되지 않았던가, 테미스토클레스는 민중들의 존경과 사랑에 힘입어 아리스테이데스를 도편추방해버리며, 나중에는 자신이 도편추방을 당하는 처지가 되기도 하는데, 대중들의 사랑과 그들로부터의 인기라는 것이 어느 순간 물거품이 된다는 비유는 어느 대목 못지 않게 < 테미스토클레스 전>에서는 중요한 것이다. 나는 그리스어 원문을 본 적이 없지만, 또한 봐도 정확한 번역을 할 수도 없지만 아마도 영어로 된 책을 번역 원본으로 삼은 데서 다른 세 권의 책이 '잎을 딴다'는 것과 같은 공통점을 보이는 것은 아닌지. 이외에도 여러 권의 번역서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다만 이 글을 쓰는 동안 구할 수 있었던 것들만을 비교대상으로 삼았음을 밝혀 둔다.
플라터너스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김현승 시인(1913~1975)이다. 시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잡문은 거의 남기지 않으셨다는 것, 에세이도 거의 쓰지 않았으며 오로지 시 쓰고 강의(숭실대학교)하고 사셨다고 한다. 그는 <플라타너스>라는 시를 짓고 세상에 발표하던 무렵, 그 이전부터 그후로도 오랫동안 광주(광역시)의 양림동에서 생활했다.
"나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플라타너스> 2~3연>
어느 문학평론가는 이 시를 소개하고, "외로울 때 같이 걸어주는 길 플라타너스 모가진 왜 저리 댕강댕강 처벼려 살벌하게 하나요!"라고 느낌을 적었다(인터넷 글쓰기 같아 이름은 소개하지 않는다). 플라타너스를 생각할 때 공감이 가는 한마디다.
김현승 시인이 광주에 머물던 시절에 자주 어울렸던 천경자 화백은, 위 대목을 인용하며 김현승 시인을,
"이제 알 것 같다. 내 나이 오십이 넘어서도 깨닫지 못했던 김현승 씨의 절대고독과 견고한 고독의 경지를 말이다. 그분은 삼십 대에 다 깨달았던 것이고 그 숭곡한 차원에서 뭇 속물들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았던 것이다." (<<김현승 시 논평집>>김인섭 지음, 숭실대학교출판부, 2007-06-28, 재인용)
라고 회고하고 있다. 시인은 궁핍한 화가를 찾았다. 아들 손에 쌀자루를 들려 안으로 보내고 문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그 기억을 천 화백은 아른 기억으로 되살린다.
김현승 시인이 오래 살았던 광주 양림동은 그 지역의 작가와 시인, 화가 등 문화예술인들에게 파리의 몽마르뜨언덕에 비유할 만큼(다리 아래로 흐르는 광주천 거기는 세느강이 되나) 특별한 곳이다. 필자 또한 그곳의 작가와 화가를 만나기 위해 자주 들렀던 곳이지만 거기에서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보았는지 기억은 또렷하지 않다. 그 화가 중 한 사람이 한희원 화백인데, 2005년 초(1.28-2.11) <오아시스 광주전>(광주신세계 갤러리)에 한 화백은 특별한 작품들을 출품 전시했다. 당시에는 양림동의 오래 되고 낡은 집들이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헐리는 중이었고(2005년 5월부터 철거작업에 들어가고 7월부터 본격적인 재개발공사가 시작되었음) 이미 700여 세대가 양림동을 떠난 시점이었던 것.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지상의 마지막 풍경을 향해 먼지 나는 거리며, 낡은 전봇대 사이로 보이는 퇴락한 골목길, 거의 쓰러져 가는 집들 사이로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의 누이와 형, 친구들이 걸었던 풍경 속으로….”(<전라도닷컴>, 2005-03-16, 재인용>
(사진은 <전라도닷컴>, 한희원 화백의 그림 중에서) 그리고 한 화백은 철거작업이 진행되는 양림동 헐려진 집들 사이를 하루종일 걸으며 버려진 창틀을 주웠다. 한때는 그 창틀로 보았을 풍경들을 생각하며 창틀을 액자 삼아 그림을 그렸다.
문화의 거리니 예술인의 거리니 예술인 아파트니 하지만, 정작 이런 곳이야말로 일부라도 남길 수 있는 운치가 있는 예향(藝鄕)고 문화수도 어쩌고 하는 그이들에게는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자본과 이윤을 앞세운 시대흐름에는 속수무책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김현승의 시 <플라타너스>의 고향도 사라졌다. 가혹한 전정(전지)작업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생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영어 원서를 줄줄 읽으셨다는 김현승 시인의 '플라타너스'와 어감도 비슷한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의 한 대목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원전은 원전대로 옮기면서 우리말과 우리가 쓰는 고유명사(학술용어)에 충실하면서, 우리의 정서에도 걸맞는 번역을 해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찌는 여름,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바라보며, 혹은 그 아래를 거닐며 너무 많은 생각을 해버렸다. 플루타르코스의 플라타너스, 너의 파아란 우산 아래에서,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아래 사진은 위키백과에서, 추후에 본문과 관련된 사진으로 대체할 예정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