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회상록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크세노폰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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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를 '회상한' 저술들의 '발견'은 그간 플라톤에 ‘의해’ 추정할 수밖에 없던 소크라테스 읽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록>, <향연>,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그것이다. 그간 번역가 천병희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필두로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에서 시작하여, <국가>를 위시한 중기 대화편들, 후기 저작을 대표하는 <법률>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원전 번역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번역사를 ‘새로’ 썼다. 위작 논란에서 자유로운 플라톤의 대화편들 대부분을 한 번역가가 우리말로 옮겼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며 새로 열린 길이었다.

 

새로운 번역사를 쓰다, 대부분의 플라톤 대화편을 원전번역한 천병희
그런데 궁금했다. 그런 천병희 선생이 우리말로 옮길 다음 책은 무엇일까? 그런데, 뜻밖에도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관련 저작이라 흥미로웠다. 어쩌면, 이번 저작은 이후에 출간되었지만 선생은 오래 전에 번역하여, 플라톤 대화편 번역에 가늠자로 삼지 않았을까? 플라톤의 자상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화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인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문득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저 산 저 너머에 걸린 무지개나 그 숲 어디쯤에서 노래하는 파랑새처럼.
그런데 천병희의 크세노폰 번역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오래 전에 펴낸(단국대 출판부) 것을 새롭게 다듬어 펴낸 <페르시아 원정기>(숲, 2011)가 있다. ‘원정기’에 이어 필자는 번역 출간된 크세노폰의 다른 저작 <키로파에디아 -키루스의 교육>(이은종 옮김, 주영사, 2012)를 읽었다. <페르시아 원정기>도 흥미진진했지만 그 연장선에서(저자가 페르시아에 원정 과정에서 취재한 자료를 기반으로) 쓴 <키로파에디아>는 한 편의 소설(실제로 옮긴이는 소설로 규정했다)처럼 부담 없이 읽혔다. "이 사람 뭐지?" 필자는 크세노폰이 다루는 주제도 그렇거니와, 그의 글이 가진 독특한 스타일(문체, 기술 방법)에 매료되었다. 크세노폰은 그 시대에 어떻게 ‘작품’인 듯 ‘작품’이 아닌,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저술을 하였을까? 그 '용기'가 궁금했다. 무엇을 위해? 그 ‘무엇’을 한동안 고민하면서 찾아야 했다. 부제에서 보듯 <키로파에디아>는 일종의 전기로 교육 문제를 다룬다. 한 인물의 혈통, 타고난 자질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가 어떤 교육을 받아 탁월한 지배자가 되었는지, (비록 적성 국가의 위인이라도) 아테나이의 독자들에게 모범을 제시한다.

 

플라톤 대화편 번역의 가늠자로 '회상록'은 미리 번역되지 않았을까?
크세노폰은 그리스에 大퀴로스(페르시아, 아카이메니다이 왕조의 시조)의 리더십을 소개하는 것이다. '리더는 따르는 사람을 책임져야 한다'(당연하신 말씀이다), '항상 좋은 리더는 없다'(때론 따르는 사람이 자신을 두려워하게 만들 줄도 알아야 한다) 리더십의 발휘에 필수적인 도구(tool) 중 하나가 '두려움'이란다. 국내에서만 17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명량>에서 충무공은 전사들의 '두려움'을 이용하는 리더십을 발휘한다. 이처럼 <키로파에디아>에서 소개하는 리더십에는 야전의 지휘관이기에 현장에서 터득가능하였을 생생함이 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다. 적진에서 터득한 그 나라의 리더십을 자국의 1만 용병들을 탈출시키는데 적용한다. <페르시아 원정기>는 그런 이야기다. 세월이 흘러도 빛날 뿐만 아니라 응용 가능한 가치를 담고 있다. 때문에 <키로파에디아>와 함께 <페르시아 원정기>는 훗날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된다(알렉산드로스가 휴대한 고전이 <일리아스>만은 아니었던 것).
크세노폰이 사건을 주관적인 견해에 따라 기술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 원정기>도 예외가 아닐뿐더러 자전적 저작으로, 그러한 저작을 대표한다. 이 <원정기>에 퀴로스2세의 용병 제안을 받아들인 크세노폰이 고민하는 대목이 있다. 적성국가의 내전에 용병으로 참전한다! 이것은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스승인 소크라테스는 왜 사전에 용병 참여 여부를 나와 상의하지 않았느냐고 나무란다. 용병대의 참여가 훗날 고향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실제 그런 일이 벌어진다). 출전하더라도 신탁에 가서 묻는 등 (신중했다는) 모양새를 갖추라고 조언한다(머잖아 국가의 신들을 부정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에 회부될 소크라테스의 당부다). 두 사람이 부자(父子)나 다름없는 사제지간이었음을 엿볼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두 사람이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믿어지고.'(천병희 해설) 있다. 

 

생전의 소크라테스와의 마지막 만남이 담긴 <페르시아 원정기>
이것이 크세노폰이 생전의 소크라테스를 만난 마지막으로 기록이다. 그런데 크세노폰(기원전 430/25년경~355/50년경)의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와 플라톤(기원전 427~347)과는 달리 5년 남짓의 특정할 수 없는 세월이 있다. 어쨌든 2년 동안의 크세노폰의 페르시아 원정 기간(기원전 401년 3월~399년 3월)에, 아테나이의 소크라테스는 사망한다.
때문에 그는 기원전 399년의 아테나이, 소크라테스가 고발되어 재판정에 펼친 세기적인 변론을 지켜볼 수 없었다[플라톤은 이 재판을 참관했다(1)]. 투옥되어 사형집행을 기다리던 감옥에도(2), 사형 집행 현장(3)에도 크세노폰은 배석할 수 없었다. 가까이에서 이 과정을 지켜본 플라톤(당시 28세)에 비해(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이란 대화편에 이 과정을 담았다), 물리적인 거리에서 시간상의 차이에서 크세노폰은 스승의 죽음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임종할 때 그 자리에 배석했다는 헤르모게네스로부터 들은 내용을 토대로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쓴다. 동명의 플라톤의 대화편에 비해 길이는 짧고 깊이가 없다고 평가된다. 또한 스승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담담하다. 재판 현장의 속기록을 읽는 듯이 세세한 플라톤의 <변론>에 비하면 무성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자신의 '변론' 서두에서부터 단도직입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깔린 핵심을 짚는다. 집필에 앞서 크세노폰은 (헤르모게네스로부터) 소크라테스가 맞이한 최후의 삶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플라톤을 비롯한)의 글을 통해 당시의 정황을 읽었다.

 

단도직입, '변론' 서두에서 스승의 죽음을 진단하는 크세노폰
그런데 이들의 기록은 그(소크라테스)의 '잘난 체하는 말투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고 일축한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당한 것은 그가 고발된 죄(나라의 신들을 믿지 않고/새로운 신들을 들여오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 때문이 아니라(변론 자체에서는 이겼으나) 당시 기득권자들(시민배심원)의 심기를 거슬린 '괘씸죄' 때문에 죽었다, 라고 결론짓는다. 소크라테스가 행한 변론 내용보다는 그의 변론 태도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을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거침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죽음을 '어쩔 수 없이' 맞이한 것이 아니라 '자초한' 것이라는데, 행간 곳곳에서 "이 양반, 큰 코 닥칠 줄 알았어."라는 저자의 혼잣말이 튀어나오는 듯하다. 스승이자 아버지와 같은 소크라테스와 나눈 평소의 대화 스타일(말투, 태도 혹은 근성)을 잘 알기에 가능한 진단이다. 스승의 죽음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이들 사제지간의 우정은 두터웠고, 그만큼 허물없었음을 엿본다. 당대에 그리고 훗날의 독자들에게 ‘보이는’ 것보다 그들은 훨씬 가까웠을 것으로 예상한다. 때문에 거두절미(去頭截尾) 크세노폰은 헤르모게네스가 증언하는 비밀, 그(소크라테스)가 "의도적으로 잘난 체하는 말투를 썼음"을, 짧은 지면에도 일부를 할애하여 소개한다. 

 

헤르모게네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변론해야 할지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소크라테스: 자네는 내 인생 전체가 변론을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지 않나?
헤르모게네스: 어째서 그렇습니까?
소크라테스: 나는 불의한 짓이라고는 아무 것도 행하지 않고 살아왔으니, 그것이야말로 변론을 위한 가장 훌륭한 준비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세." (<변론> 앞부분의 서술을 대화로 구성_필자)

 

"내 인생 전체가 변론을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지 않나?"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길게 늘어놓을 이유가 없으며 그의 스타일도 아니다. 이런 짧은 길이 때문에 장황한 연설문(변론 내용) 형식의 플라톤의 <변론>에 대한 일종의 소회(리뷰)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변론’은 플라톤의 관련 대화편 <크리톤>과 <파이돈>에 대한 리뷰이기도 하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는 왜 그랬을까(독자라면 누구나 나름대로 대답할 수 있는 해석적 질문에 대해), 독자의 한 사람처럼 간명하게 '의견'을 제시한다. (1)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내세웠다. (2)배심원들의 반감을 ‘산’ 탓에 자신의 유죄를 더 '확실하게' 만들었다. (3)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일단 결정하자 죽음 앞에서도 유약해지지 않고(플라톤의 <변론>) 죽음을 기다릴 때도(<파이돈> 죽을 때도(<파이돈> 쾌활할 수 있었다.(크세노폰의 <변론> 32~33)
크세노폰의 '변론'은 같은 책에 수록된 <소크라테스의 회상록>의 연장선에 있는, 일부라고 볼 수 있다. 아니 '변론'은 상대적으로 긴 '회상록'(이 논문 전체라면)에 대한 개요(그 논문의 '초록')이며 서문이다. 그런데 간명한 '변론'에서 크세노폰은 고발자 중 1인인 멜레토스를 논박하는 소크라테스가 발언을 상세히 재구성한다. "…… 나를 인류 최대의 축복인 교육 전문가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나를 사형에 처하라고 그대가 고발하는 것이 더 놀랍다고 생각하지 않소?"라고. 재판에 관해 세세히 보고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던 크세노폰이 굳이 '소크라테스는 인류 최대의 축복인 교육 전문가다.라는 명제를 제시하는 걸까?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결연한 태도(일련의)를 '통해' 최후의 순간까지 시민들을 교육하였다고(가르침을 행하였다고) 보고 있다. 때문에 당대의 플라톤에게, 훗날 플라톤을 의해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마중하는 후학들에게 크세노폰은 '가볍게'(경박 혹은 경솔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인류 최대의 축복인 교육 전문가', 회상록은 그리스판 <키로파에디아>
크세노폰은 용병으로 참전한 경험에서 <페르시아 원정기>를 썼고, 더불어 <키로파에디아>라는 그 성격을 "역사서도 정치철학서도 아니며 사실을 바탕으로 쓴 역사소설로 규정"(역자 서문)할 수밖에 없는 저술을 남겼다. 그런데, 정작 두 권의 대표 저술을 하게 되는 원정 기간에 고국에서는 스승이 사형선고를 받고 ‘서거’했다. 너무 무겁지 않게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크세노폰은 세 편의 회상록에 늘 가까이 있었지만 그 때는 몰랐던 ‘파랑새’를 상기함으로써, 또 하나의 아테나이 시민교육을 위한 ‘키로파에디아’를 남긴 것은 아닐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다. 플라톤의 ‘작품’들(대화편들)은 말과 행동으로 그려볼 수 있는 자연인 소크라테스의 '그리는' 데 걸림돌이 된다. 당대의 시대가 맞닥뜨린 문제들에서 해결책을 찾아가는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그처럼 어려웠다면, 그런 소크라테스를 아테나이의 젊은이들이 골프스타의 행보를 쫓는 갤러리처럼 따랐을 리 없다. 오히려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의 회상록>을 통해,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상식적인) '설득하는' 소크라테스(삶과 철학)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닐는지, 크세노폰이 그리는 소크라테스는 플라톤 고유의 철학 세계도 엿보는 단초가 되는 것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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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9-02-12 18: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의 행적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크세노폰의 저작들과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함께 설명해 주시니 소크라테스의 행적이 훨씬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느낌이 아주 좋습니다.

저는 크세노폰이 지은 책은 여태껏『페르시아 원정기』밖에 읽은 게 없는데, 그 책에 나타난 크세노폰의 불굴의 용기와 지혜에는 정말로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겠더군요. 여담입니다만, 크세노폰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여기저기 등장하는데(<아게실라오스 편>, <안토니우스 편> 등), 숱한 영웅들의 가슴 속에 귀감으로 남아 있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어서 기분이 좋더군요. 크세노폰이 쓴 『키루스의 교육』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나오고, 다른 책에서도 자주 마주친 적이 있는데 여태껏 읽어보지 못했네요. 나중에 시간이 나면 크세노폰의 저작들을 한꺼번에 쭉 읽어보고 싶습니다.
* * *
두 사람의 갑작스럽고 이상한 죽음은 나에게 고통과 아쉬움을 남긴다. 나는 한니발에게도 존경을 표한다. 그는 그토록 많은 전투를 치르면서도 한 번도 다친 적이 없었다.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에 나오는 크리산테스 또한 마찬가지이다. 칼을 뽑아 적을 치려는 순간, 후퇴 명령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곧바로 무기를 거두고 겸손하게 물러났다. 이런 것에 비하면 두 영웅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어리석게 죽음을 맞은 것이다. 그렇다고 두 영웅의 행동이 아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펠로피다스는 적에 대한 원한이 사무쳐, 복수하고자 용기를 내어 한 일이기 때문이다.
-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펠로피다스와 마르켈루스의 비교> 중에서

timeroad 2019-02-14 18:42   좋아요 2 | URL
플라톤에게 28세는 터닝포인트입니다. 턴레프트인지 턴라이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저 그렇게 보인다이지 숱한 연구 결과가 있을 (후손들) 그들의 논의야 어찌 알겠어요, 다만 뭔가 다름이 있다. 소포클레스가 처음으로 비극경연에서 우승활 때 그 나이가 28세라네요. 고맙습니다.

oren 2019-02-12 18: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크라테스를 인류 최고의 인물로 숭앙했던 몽테뉴도 크세노폰을 자주 언급했던 기억이 납니다. 생각난 김에 『몽테뉴 수상록』 중에 <이름에 대하여>라는 글 속에 있는 흥미로운 글을 덧붙여 봅니다.(옹테뉴는 도대체 모르는 게 없는 둣한 사람인데도, 평생 동안 ‘나는 무엇을 아는가‘를 화두로 삼고 살았다니, 그저 기가 막힐 뿐입니다.)
* * *
수많은 혈족들에 동성 동명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잡다한 민족·시대·국가에도 또 얼마만큼 많은가? 역사상에는 소크라테스가 셋, 플라톤이 다섯, 이리스토텔레스가 여덟, 크세노폰이 일곱, 데메트리오스가 스물, 그리고 테오도르가 스물 있었다.

timeroad 2019-02-14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세계는 이미 인간 세상에 펼쳐지지 않았을까? 채색이 화려하지는 앉지만 비록 흑백화라도. 4B연필은 스케치에 필요하지만 건설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2B연필이더군요. 현장에는 비도 내리니까요. 몽테뉴는 밑그름의 가치를 알았던 사람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