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 버린 사람들
나렌드라 자다브 지음, 강수정 옮김 / 김영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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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인구만큼이나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들고 다양한 군상이 존재하는 나라가 있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의 나라 인도이다. 벤츠나 BMW같은 차 옆에 수천명의 걸인이 나뒹구는 나라 인도...다양하고 독특한 제도나 문화, 그리고 사람들이 함께 사는 나라 인도. 그러면서도 세계에서 성장가능성이 가장 무한한 나라로 꼽히는 인도-그곳의 아픔이 담긴 책이다.

 며칠 전 신문에서 빌 게이츠를 밀어내고 인도의 사업가인 무케시 암바니가 세계 최고의 부자에 올랐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다. BRICs라고 해서 세계에서 한창 뜨고 있는 국가 중의 하나이고, 과학기술의 발전도 세계 최고수준이라고 하는 인도에서는 부자도 엄청나게 많지만 이 책의 저자인 나렌드라 자다브 박사의 원래 계급이었던 불가촉천민-즉, 달리트같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조차 영위할 수 없는 빈민계층이 수 억 명에 다다르는 것이 인도의 또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처음에는 나렌드라 자다브 박사가 이 책을 출간할 즈음해서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짧게 소개된 그의 이력에서 무언가 새로움을 느꼈다. 바로 그의 화려한 경력이 불가촉천민에서 시작해 노력만으로 자수성가한 인물이라는 것에 끌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이러한 한 사람의 성공스토리보다도 우리나라 현재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보고 느끼면서 새로운 해결책을 생각해보고 싶기도 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한 관계를 맺어가면서 살아가지만 그러한 사람을 볼 때 우리는 내면의 진실된 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 사람의 외관이나 배경을 많이 보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외부적인 요건 중에는 학벌, 출신지역, 재력 등을 보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이 사람을 판단하는데 기준으로 작용하면 안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전근대적이고, 절대 사람의 판단요소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출신 계급이다. 책에서 나오는 말이지만 신도 나의 운명을 빼앗지 못했다라는 말을 보면서 애당초 신은 계급이라는 것을 만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급이라는 것은 핵폭탄보다도 더 잘못된 인류의 발명품이다. 인류가 태초에 생겨났을 때는 이러한 계급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인간의 능력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농경 생활의 시작으로 인해 잉여 생산물의 축적 등으로 사유재산제가 생겨나게 되고 그러한 것이 고착화되어 계급이라는 것이 나타나게 된다. 이는 전 인류적으로 공통된 현상이었다. 비단 인도만의 현상은 아니였다.

 우리가 흔히 선진국이라고 하는 영국이나 스페인, 덴마크 등의 서유럽은 물론 예전과는 다른 형태이지만 아직까지 국왕이 존재하고, 기사같은 작위가 있는 계급사회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시작된 계급사회가 불과 백 여년 전 갑오개혁으로 인해 신분제가 폐지될 때까지 양반-중인-상민-천민의 신분이 존재하였고, 이는 대한민국이 건국되는 시점까지도 시골에서는 남아있었던 악습이었다. 나 또한 고향이 경북 안동이라서 누구보다도 이러한 양반, 상놈을 따지는 문화를 잘 알고 있다. 아직까지도 그쪽 어르신들은 누구의 몇 대손, 우리 조상이 누구라는 것을 중시여기고 자랑하는 분들이 많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것보다도 내가 걱정하고 두려운 것은 바로 현대의 새로운 계급의 형성이다. 과거에 귀족, 천민이나 우리의 양반, 상놈 문화는 이제 인도같이 카스트제도의 잔재가 남아있는 일부 국가에서나 문제시되고 있고, 이미 세계의 많은 국가에서는 그 존재를 찾아볼 수 없을 뿐더러 설사 영국이나 일본같이 국왕이 존재하는 국가라 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존재이지 그 사람들조차 이제 자신들이 일반 국민들 위에 군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제 새로운 계급사회가 시작되고 있다. 바로 돈에 의한 가진 자와 못가진자의 빈부격차이다. 요즘 들어 심심찮게 등장하는 뉴스 중에 전문직종의 자녀가 명문대 진학률이 더 높다는 통계나 혹은 지금 신문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돈을 주고 자녀를 부정입학이나 혹은 권력을 이용해서 취업시키는 것들이다. 이는 우리사회가 새로운 계급사회에 들어서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 책에서도 강조하고 있지만 교육은 이러한 불평등사회를 가장 빨리 깨뜨릴 수 있는 확실한 열쇠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러한 열쇠조차 점점 더 찾기 어려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교육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극성이라고 하는 강남 엄마들은 한 달에 과외비로만 웬만한 보통 가정의 생활비를 지출하는 시점이고, 그러한 맞춤형 교육과 정보의 독점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가난하지만 똑똑한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들이 교육의 불평등으로 인해 진학의 어려움을 겪고 있고, 이는 학벌 사회에서 더욱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로 다가온다.

나렌드라 자다브는 이 책에서 자신의 성공을 부모님의 뛰어난 교육열, 달리 말하면 시대를 앞서는 통찰력으로 인해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나렌드라 자다브의 아버지는 정규교육이라고는 어떠한 형태의 교육도 받을 수도 없었던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나 지배층의 심부름이나 하고, 혹은 다른 계급들의 명령을 아무런 이유나 조건없이 받들어 수행하면서 살아가는 또한 그로 인해서 얻는 것은 단지 구걸할 권리뿐인 달리트일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남들보다 똑똑하고 사상이 깨어있는 불가촉천민이었다. 물론 어쩌면 당시의 사상운동가인 암베드카르 박사의 맹목적인 추종자라고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출신을 부정하고 신분상승과 보다 많은 권리를 주장하는 그 당시 시대의 조류에 몸을 맡겼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표면적인 모습은 이 책의 초반부에 '소누'와 '다무'라는 그의 부모님과 다른 불가촉천민들의 대조를 통해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달리트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한 또 다른 달리트를 동시에 보여준다.

책의 내용을 통해 감동을 받는 부분은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커진다.

소누와 다무가 자신들이 받은 사회적인 계몽 영향을 자식들에게 교육이라는 부분을 통해 성공의 모습이 나타난다. 책을 읽은 후 마치 엉덩이에 종기가 나도록 공부한 고3 수능생이 좋은 결과를 얻고, 츄리링만 입고 고시촌을 누린 고시생이 합격의 영광을 맛보듯이 극심한 고통에 있고 나서 성공을 맛보는 그 쾌감을 이 책은 저자인 나렌드라 자다브의 시점에서 역경을 딛고 일어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것으로 통쾌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가 짚어가야 할 점은 단지 한 불가촉천민의 가족이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남들보다 어렵고 힘든 삶을 통해 성공했다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가 불가촉천민에서 미국의 명문대 박사학위를 받아서 인도의 경제관료나 명문대의 총장이 되었다는 한 사람의 성공으로 이 책의 의미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고, 전 인류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 선진국의 약소국에 대한 침탈이나 착취는 그 예전 카스트제도의 지배계층이 하위계층이나 달리트를 수탈하던 것과 유사하고, 우리 사회의 지도층은 사회적인 책무나 의무보다 어떻게 하면 부동산으로 더 많은 돈을 벌어볼까, 혹은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해볼까 하는 생각뿐이다. 우리는 나렌드라 자다브의 책을 읽으면서 '아, 나도 저렇게 성공해야겠다.' 라고만 느낄 것이 아니라 이런 새로운 계급사회에서 우리보다 못하고, 시작조차 힘든 사람을 같이 이끌어 갈 수 있는 그런 배려와 사회적인 제도의 뒷받침이나 여론의 공감이 필요하다. 아무리 세계 무역 대국이고, OECD에 가입한 선진국이면 무엇하는가, 다같이 잘 살아야 할 우리 국민이나 혹은 세계적으로 아직도 굶주리고 헐벗은 아프리카의 꿈을 가진 어린이나 인도의 달리트들이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답게 살 권리, 인간존엄을 실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시점이다. 하지만 당장 나부터도 취업난 등으로 인해 내 자신 챙기기에만 급급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해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기득권을 가지고 있게 되면 그 틀을 지키려고 하고, 그 틀 밖의 진리를 보지 못한다. 이는 인도의 국부로 칭송받고, 비폭력 독립운동으로 유명한 간디조차 자신은 카스트제도의 상위계층이라서 카스트제도의 보호에 앞장섰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 까지만 해도 간디하면 우리나라의 김구선생님 같은 독립의 아버지라고만 생각했는데 간디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생각도 할 수 있다. 이 책의 뛰어난 조연쯤 되는 암베드카르 박사는 자신이 불가촉천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신분해방운동에 적극적이었을지 모른다. 만약 그도 상위계층이었다면 그러한 운동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자신의 열악한 환경을 딛고 성공했고, 또한 그것을 자신 혼자 누리지 않고 대중적인 운동으로 연결시켜 인도의 후진성을 깨부수는데 자신의 생을 바친 진정한 운동가라는 것이다.

언젠가 홍세화 선생님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한창 TV에서 '대한민국의 1%가 사는 집'이라는 광고가 유행할 때였다. 하지만 이런 광고를 버젓이 허용하고 또 대놓고 그 1%를 부러워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고, 만약 프랑스 같았다면 온 국민이 들고 일어나서 반대하고 불매운동을 벌였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대한민국 1% 그런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러한 것을 강요하고, 그 논리를 즐기는 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암베드카르 박사나 이 책의 다무처럼 세상의 부조리함을 알리고, 고쳐나가는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이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모두가 다 같이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나렌드라 자다브 박사의 성취가 개인의 성취에서 머물지 말고 인도를 변화시키고, 나아가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발자취를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또한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제2, 제3의 나렌드라 자다브가 많이 나와서 모두가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생전에 만나 뵙고 나의 좁은 시각을 조금이나마 변화시켜준 고 전우익 할아버지의 책 제목이 떠오른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이 책을 읽고 나서 인류의 불평등이 사라진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꿔보면서, 나 또한 그러한 세상을 만드는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 현실에 힘들어하고, 안주하려는 나를 비롯한 요즘 대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책인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지만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해서 사는 한 결코 발전된 사회나 진보된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올 가을 또 한권의 뜻 깊은 책을 알게 되어서 또 한사람의 노력과 의지를 배울 수 있게 되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 세상 모든 세상의 불합리함에 대하여 투쟁하고 개선해 나가려고 노력하는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좋은 책에 대한 너무나 부족한 독후감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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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f 2008-02-10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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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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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한겨레 신문에 소설을 연재한다는 것을 보고 잘 보지 않던 신문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신문을 매일 받아보는 것이 아니고, 도서관에서 혹은 어디 갔을때 있으면 보게 되니까 소설의 흐름이 중간중간에 끊기고 또 신문으로 보면 감질나게 부분, 부분으로 나와서 보기를 중단하고 출간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2007년 7월 작가의 책이 출간되면서 출간되자마자 역시 이름값있는 작가답게(우리나라에서 이름값만으로 책을 수 만부 이상 팔 수 있는 작가는 황석영, 조정래, 김훈, 공지영등 몇 명 안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나 움베르토 에코, 폴 오스터 등의 유럽 작가와 최근 오쿠다 히데오로 대표되는 일본 작가들의 연합공격에 힘들어하던 한국 소설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매우 많이 팔리는 것을 보며, 나도 그에 동참했다. 한국소설은 서사가 없다는 주위의 말을 일축이라도 하듯 그의 소설엔 깊은 서사가 있었다. 김훈 작가의 소설이 짧은 편의 서사에 내면의 심리를 함축시키고, 한없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유명하지만 황석영 작가는 반면에 길고 깊은 서사에 우리나라의 설화나 현실을 적절히 반영하여 소설을 만들어 나간다. 심청이나 오래된 정원, 무기의 그늘, 한씨 연대기 등을 보면 그의 소설 형태를 잘 알 수 있다. 리얼리즘에 민족 전통의 조화라고나 할까?


이번 바리데기도 우리 민족 설화인 버려진 아이 바리데기 설화와 북한에서 탈북한 여성 바리를 통해 우리 민족의 아픔과 고난을 대변한다. 이는 작가 자신이 북한 방북 이후 망명과 투옥, 세계 여러 나라를 체류한 작가의 삶이 동시에 투영되는 듯 하다. 딸만 많은 지방 관료의 일곱째 딸로 태어나 버려지지만 다시 흰둥이에 의해 집으로 돌아오게 된 그녀는 심하게 앓고 난 뒤부터 영혼, 귀신, 짐승, 벙어리 등과도 소통하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소련이 무너지고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북한의 정치경제는 급속히 나빠지고 기근과 홍수로 죽는 이들이 늘어난다. 중국과 무역업을 하던 외삼촌은 결손이 나자 몰래 탈북해 남한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들린다. 외삼촌 때문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바리는 조선족의 도움으로 할머니, 현이 언니, 흰둥이의 새끼와 두만강을 건넌 뒤 아버지와 재회한다. 가족들이 하니씩 죽게 되면서 바리는 다시 북으로 들어가 식구들을 찾아보려 하지만, 굶어 죽었거나 죽어가는 사람, 귀신들만 목격하고 혼자가 된다.

연변의 발 마사지 업소에서 일하다가 빚을 지고 밀항선을 타게 되고, 지옥같은 밀항선의 생생한 묘사를 통해 고통을 받는 그녀의 삶이 잘 드러난다.

생지옥을 겪고 런던에 도착한 뒤 바리는 식당일을 하다가 발 마사지 업소에 다시 취직한다. 빈민가 연립에서 살게 된 바리는 건물을 관리하는 파키스탄인이자 무슬림인 압둘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 알리를 만나게 된다. 바리는 이들과 친해지고, 바리는 알리의 아이까지 겪지만 9.11과 아랍인의 고통이라는 세계적인 재앙에 또 다시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되고, 아이까지 죽게 되면서 서천에 생명수를 가지러 다녀오면서 고생을 하는 등 현실과 꿈이 분간할 수 없게 교차된다. 마지막에 가서 알리와 다시 재회하고 두 번째 아이를 가지면서 끝은 행복하게 시작하는데서 이 긴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황석영 작가는 우리의 이야기-있음직한 사실을 잘 버무리고 또 그에 맞는 우리의 전통 설화를 잘 찾아서 버무린다. 또 여기에 실천하는 지성인의 힘으로 자기 자신이 여러 가지 고통을 겪었고, 진리를 위해 민족을 위해 삶을 치열하게 고민한 것이 소설 속에 베어 나온다. 나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누구보다 어울리는 사람이 황석영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의 글은 우리나라 전통과 현실이 반영되어 세계 속의 우리 문학성과 우리 글을 누구보다도 잘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문학의 보편성을 찾아가는 서사가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노벨상이 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의 작품이 더 잘 번역되어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세계인이 느끼게 된다면 당연히 노벨상을 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노벨상에 목 메는 것은 아니다. 이미 황석영 그의 글로 인하여 우리 민족이 치유받고, 우리 민족이 그 속에서 나아갈 길, 현실을 발견 할 수 있으므로.

그의 소설을 읽으면 재미있고, 무언가 얻을 수 있지만 한없이 '한'을 안고 살아가야 할, 한을 떨쳐낼 수 없는 우리 한국인을 만날 수 있어서 슬프기도 하다.

앞으로도 황석영 작가님의 왕성한 활동을 기대해보면서 부족한 나의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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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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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序

 김훈 작가님의 역사소설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현의 노래 이후 쉽사리 쓰지 않던 역사소설이었는데, 작가님의 말로는 이 소설이 역사소설로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하니 내 마음은 왠지 공허하고, 그 예전 어린이 시절 다달이 즐겁게 봐오던 아이큐점프라는 만화책이 다시는 안나온다고 할 때의 느낌보다 더 큰 상실감을 가지면서 이 소설을 읽었다.

 실제 나는 김훈 작가님이랑 남한산성을 같이 올랐다. 송파 삼전도비-원래는 이곳에 있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엔가 옮겨져서 땅속에 파묻혔다가 다시 꺼냈다가 수난을 당하던 비석이 내가 김훈 선생님이랑 같이 방문했을때는 비석에 페인트칠을 한 범죄? 때문에 복구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삼전도비를 보고 나서 남한산성에 도착해서 같이 남한산성을 올랐다. 책에 나오는 각종 문과 문루, 그리고 행궁, 수어장대 등을 같이 둘러봤다. 남한산성- 그곳은 우리 민족의 아픔이 시작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훈 작가님의 소설은 다른 역사소설과는 조금 다르다. 다른 역사소설은 사실(fact)이 있으면 이것을 비틀거나 변형시켜 혹은 사실에다가 살을 붙여서 소설을 만들어 가는데 김훈 작가님은 이런 역사 사실(fact)에다가 약간의 변형을 가하고 상상력을 붙이는 건 어느 소설이나 보이는 것이고 필요한 장치이지만, 그의 숨이 막힐만큼의 서늘하고 아름다운 美文으로 바로 사람의 내면을 파고 든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피난가는 인조의 마음, 치욕보다 죽음으로 옥쇄하자는 척화파인 청음 김상헌의 내면, 그리고 후세에 배신자, 혹은 나약한 화친주의자라고 욕 먹을 것이 뻔한 최명길의 심리를 무서우리만큼 혹은 슬프리만큼 절절히 보여준다.

 2. 本

 (1) 김훈의 소설의 아름다움과 그의 사람에 대한 미학

책을 읽을 독자를 위해서 내용을 그렇게 세세히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믈론 내용은 단순하다. 인조가 청나라의 병자호란을 맞아 남한산성으로 피난가 47일간의 항전을 그린 소설이다. 그 와중에 피난가 있는 백성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군주로 알려진 인조-후에 소현세자의 변절에 가슴아파 하면서 결국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속좁은 군주로 역사에 남아있는 왕과 주화파, 척화파의 이야기가 전부다. 거기에 또 하나의 인물인 서날쇠(원래 이름은 서흔남-남한산성의 노비 출신으로 기와장이며 대장장이였는데 활달한 성품으로 성안의 무당노릇, 환자를 고치는 의원노릇을 했었고, 무엇보다 인조의 명을 받아 날랜 발로 지방에 명령을 전달하는 인물로 후에 통정대부에 봉해진다.)로 대표되는 민중들의 생각, 또한 무엇보다 서날쇠는 착취당하는 민중이지만 그래도 내나라와 나를 다스린다고 생각하는 지배층을 위해(물론 이마져도 자기 자신들의 가족을 위한 작은 소망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인물과 그리고 정명수라고 불리우는 평안도의 노비로 청나라에 가서 팔자를 고친 인물로 자신의 신분을 볼모로 양반들의 온갖 수모를 되갚아주는 복수에 찬 인물의 대비를 보여준다. 이것이 큰 소설의 씨줄과 날개를 이루고 있다.

 내가 남한산성이라는 역사소설을 썼더라면 이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피폐해질 피페해진 조선의 땅을 다시 일으켜 세워보고자 분주히 나선 군주 광해를 패륜아,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임금이라 몰아세워 내쫓고 조선 16대 왕이 된 인조 그는 실리를 버리고 껍데기 밖에 남지 않은 명분을 좇아 명을 돕는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정묘호란이라는 조선의 역사상 최초인 오랑캐에게 항복해서 형제의 나라의 아우가 되는 치욕을 겪지만 정신차리지 못한 인조는 계속 청을 무시하고, 명에 기댄다. 물론 대의명분을 내세운 인조의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후에 자신의 아들 소현을 죽이는 것을 보면 인조가 그렇게까지 정세를 읽어내거나 통이 큰 군주 갖지는 않다.결국 인조는 명을 거의 제압하고 중원에서 위세를 떨치던 청이 군신관계를 강요해오자 전쟁을 결심한다. 하지만 불과 한달도 안되어 도성을 내주고, 홍건적의 난 이후 북쪽 이민족에게 수도를 빼앗긴 어리석은 군주로 남을 선택을 한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가려다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들게 된다. 여기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살기좋은 주거지 베스트 5에 들 정도로 떠오른 분당으로 신도시가 된 성남벌판, 송파, 잠실 벌판을 적의 10만 대병이 새까맣게 뒤덮는다.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 고생, 그 아픔을 겪은 곳인데 결국 이 잠실이나 강남, 분당의 신도시는 예전의 무능한 지배층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신 귀족층이 자리잡고 있다. 민중을 무시한 정치, 민중을 억압하고 짓누르는 정치는 결국 환(患)을 불러오지만 우리 사회는 역사를 통해 깨닫지 못하고 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인조는 이 10만대군을 물리칠 아무런 묘책도 지지도 없다. 그는 하루하루 고민하고 번뇌하고, 아무말없이 그대로 있을 뿐이다. 이 때 척화를 주장하며 모두가 옥쇄하는 경(원칙)을 권하는 청음이 있다.

 

 (2)그날의 역사와 그날의 사람들 그리고 오늘...

[]은 이하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다-[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들었다.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과 죽음을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건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임금이 주먹으로 서안을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어허 그만들 하라, 그만들 해.

 그렇다 삶과 죽음은 어찌보면 같을 수 있다. 그들은 똑같은 것을 다르게 보고 있는 듯 하지만 이는 마지막에 가면 하나의 물줄기처럼 다시 만나는 것이다. 김상헌은 살아서의 무거운 삶을 이유로 가벼운 죽음이라고 의를 중시한 그것이 백성을 위해, 종묘사직을 위해 큰 죄를 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쟁에서 대장은 죽지 않는다-다만 살아서 후일을 기약해서 다시 백성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그 상헌이 말하는 무거운 삶을 사는 것이 죽음보다 낫다고 한다. 즉, 죽음도 결코 가볍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가지 사실을 두고 싸우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을 드러내준다. 좌파, 우파로 대립되어 싸우는 것이 결국은 한가지-나라를 생각하는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다른 생각이라고 믿고 싶다. 비록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작가는 서두에서 결코 소설로만 보아 달라고 했지만, 오히려 그의 소설은 역사와 사실보다는 내면을 강조하지만 또 무엇보다 현대의 무거운 현실을 대변해주고 그 나아갈 길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던 상헌과 명길은 후에 적의 감옥에 갇혀서 서로 시를 주고 받으며 그들이 생각하는 마음이 결국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상헌이 주장하는 경(원칙)과 권(방편)의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뿐이지 결국 이치는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지도자가 요구된다. 정말로...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상헌은 참 선비다. 소설에서 임금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그는 忠을 위해 살아간 선비였다. 그라고 왜 자기 백성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같은 참선비가 왜 백성의 어려움을 저버리고 전쟁을 주장했을까, 하지만 그는 그 전쟁이 백성에게 씻을 수 없는 환란을 초래한 자신들의 무력함과 죄를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행동과 실천을 같이한 선비였다. 그는 후에 청나라에서 귀국한 후 할말이 없다는 뜻의 묵언재를 안동 고향에 짓고 살아갈 정도로 치욕과 살아남은 무거운 원죄를 절감하면서 일생을 마친다.

 명길 또한 큰 선비다. 그는 누구나 흔히 주장하는 대의명분의 시대에서 실리를 생각한, 민족과 나라를 생각한 큰 선비였다. 물론 당시에는 대의명분을 저버린 보잘것없는 소인배, 혹은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화친을 주장하고 오랑캐에 무릎꿇은 소인배라고 욕을 당했고, 오늘날 역사에서는 그 당시 살기를 바란 구차한 정치인정도로 생각되어지는 불쌍한 선비다. 하지만 김훈은 이 소설에서 그를, 그의 고민을 다시금 이 시대에 필요한 정신- 그의 노력을 그의 치열하게 아름다우면서도 명료한 글로 그를 다시 살려냈다.

 나는 이소설에서 최명길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준 그가 무척이나 고맙다. 결국 멋없고, 언제나 손가락질 받은 선택이었지만 만약 살아남은 인조가 그날의 고난을 잊지 않고, 현군의 정치를 펼쳤다면 명길의 치욕을 품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아름다움을 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이나 예전 그때나 위정자들은 우리의, 충신의, 참 선비의 한 조각 아름다운 마음을 저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물론 그날의 역사도 치졸스러운 오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훈은 그의 소설에서 사람을 미혹한 사람마져도 아름답고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서날쇠의 인간상은 작가의 생각이 또 드러나 있는 주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비록 지배층에 의해 항상 고통과 수탈을 당하는 민중이지만 그는 예나 지금의 우리 국민의 모습- 서날쇠 그는 조선의 민초였다. 김수영의 시 처럼 바람이 불면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날 수 있는 우리 민초였다. 그는 지배층을 미워하는 대신 우리의 가족, 사랑, 믿음을 지킨 민초였다. 우리 민중은 언제나 지배층에게 당하고 얻어맞고, 배신당하고, 털리면서도 그들은 언제나 우리나라와 내가족, 내나라, 내사람을 지키기 위해 묵묵히 일하는 일제에 수탈당하면서도 독재정권에 억압 받으면서도 또한 그들을 크게 용서해 줄 수 있는 우리 민초였던 것이다. 날쇠의 미소가 곧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미소였다.

 반면 정명수는 그러한 민족 중에서 분노를 밖으로 표출하는 즉, 나를 억누른 지배층을 위해 화를 표출함으로 그 한을 푸는 인물이다.  하지만 청의 승리 앞에서 머리에서 피가 날 정도로 절하는 임금을 보며 웃는 그의 크고 비열한 웃음에서 민족을 배신한 슬픔이 드러나게 만든 미워할 수 만은 없는 인물이다.

 3. 結

 역사는 우리 민중을 우리 삶을 항상 짓밟아왔지만 그때마다 우리 민족은 다시 일어나서 꿋꿋이 살아간다. 날쇠의 아들들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이고, 우리 민초인 것이다.

 김훈 작가님의 소설은 아름답지만 슬프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이번의 남한산성에서 한없이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 그 근워적 슬픔과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작가님도 말했지만 그는 수사를 다 제거하고 문장의 뼈만 남겨 간결한 문체를 만드는데 사람들은 그 문체에서 아름다움을 보고 또 한없이 슬픔을 느끼게 만든다. 남한산성을 작가님과 같이 다니면서 그날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남한산성-2007년 대한민국의 인물들에게 하고 싶은말이 담긴 그러한 소설 같다. 올해의 최고 소설로 뽑기를 주저하지 않을 만큼 나에게 깊이 남은 소설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 시대를 함께 고민해 간 명길이나 상헌처럼 그같은 지도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추운 겨울, 정책이나 원칙, 민족에 대한 고민보다는 온통 BBK니 의혹이니 해서 상대방을 거꾸러뜨릴 꼼수로만 대선을 치르려는 올해가 대선 시즌이라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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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FK 케네디 평전 2
로버트 댈럭 지음, 정초능 옮김 / 푸른숲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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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하면 링컨과 함께 가장 많이 떠오르는 대통령인 존.F 케네디의 삶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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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탄생 - 다빈치에서 파인먼까지 창조성을 빛낸 사람들의 13가지 생각도구
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외 지음, 박종성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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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에서 직원들에게 창조력을 기르기 위해 필독서로 권했다고 한다. 명불허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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