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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1. 序
김훈 작가님의 역사소설을 오랜만에 볼 수 있었다. 현의 노래 이후 쉽사리 쓰지 않던 역사소설이었는데, 작가님의 말로는 이 소설이 역사소설로는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하니 내 마음은 왠지 공허하고, 그 예전 어린이 시절 다달이 즐겁게 봐오던 아이큐점프라는 만화책이 다시는 안나온다고 할 때의 느낌보다 더 큰 상실감을 가지면서 이 소설을 읽었다.
실제 나는 김훈 작가님이랑 남한산성을 같이 올랐다. 송파 삼전도비-원래는 이곳에 있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엔가 옮겨져서 땅속에 파묻혔다가 다시 꺼냈다가 수난을 당하던 비석이 내가 김훈 선생님이랑 같이 방문했을때는 비석에 페인트칠을 한 범죄? 때문에 복구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삼전도비를 보고 나서 남한산성에 도착해서 같이 남한산성을 올랐다. 책에 나오는 각종 문과 문루, 그리고 행궁, 수어장대 등을 같이 둘러봤다. 남한산성- 그곳은 우리 민족의 아픔이 시작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훈 작가님의 소설은 다른 역사소설과는 조금 다르다. 다른 역사소설은 사실(fact)이 있으면 이것을 비틀거나 변형시켜 혹은 사실에다가 살을 붙여서 소설을 만들어 가는데 김훈 작가님은 이런 역사 사실(fact)에다가 약간의 변형을 가하고 상상력을 붙이는 건 어느 소설이나 보이는 것이고 필요한 장치이지만, 그의 숨이 막힐만큼의 서늘하고 아름다운 美文으로 바로 사람의 내면을 파고 든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피난가는 인조의 마음, 치욕보다 죽음으로 옥쇄하자는 척화파인 청음 김상헌의 내면, 그리고 후세에 배신자, 혹은 나약한 화친주의자라고 욕 먹을 것이 뻔한 최명길의 심리를 무서우리만큼 혹은 슬프리만큼 절절히 보여준다.
2. 本
(1) 김훈의 소설의 아름다움과 그의 사람에 대한 미학
책을 읽을 독자를 위해서 내용을 그렇게 세세히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믈론 내용은 단순하다. 인조가 청나라의 병자호란을 맞아 남한산성으로 피난가 47일간의 항전을 그린 소설이다. 그 와중에 피난가 있는 백성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군주로 알려진 인조-후에 소현세자의 변절에 가슴아파 하면서 결국 아들을 죽이기까지 하는 속좁은 군주로 역사에 남아있는 왕과 주화파, 척화파의 이야기가 전부다. 거기에 또 하나의 인물인 서날쇠(원래 이름은 서흔남-남한산성의 노비 출신으로 기와장이며 대장장이였는데 활달한 성품으로 성안의 무당노릇, 환자를 고치는 의원노릇을 했었고, 무엇보다 인조의 명을 받아 날랜 발로 지방에 명령을 전달하는 인물로 후에 통정대부에 봉해진다.)로 대표되는 민중들의 생각, 또한 무엇보다 서날쇠는 착취당하는 민중이지만 그래도 내나라와 나를 다스린다고 생각하는 지배층을 위해(물론 이마져도 자기 자신들의 가족을 위한 작은 소망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끝까지 충성을 다하는 인물과 그리고 정명수라고 불리우는 평안도의 노비로 청나라에 가서 팔자를 고친 인물로 자신의 신분을 볼모로 양반들의 온갖 수모를 되갚아주는 복수에 찬 인물의 대비를 보여준다. 이것이 큰 소설의 씨줄과 날개를 이루고 있다.
내가 남한산성이라는 역사소설을 썼더라면 이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피폐해질 피페해진 조선의 땅을 다시 일으켜 세워보고자 분주히 나선 군주 광해를 패륜아,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임금이라 몰아세워 내쫓고 조선 16대 왕이 된 인조 그는 실리를 버리고 껍데기 밖에 남지 않은 명분을 좇아 명을 돕는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정묘호란이라는 조선의 역사상 최초인 오랑캐에게 항복해서 형제의 나라의 아우가 되는 치욕을 겪지만 정신차리지 못한 인조는 계속 청을 무시하고, 명에 기댄다. 물론 대의명분을 내세운 인조의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후에 자신의 아들 소현을 죽이는 것을 보면 인조가 그렇게까지 정세를 읽어내거나 통이 큰 군주 갖지는 않다.결국 인조는 명을 거의 제압하고 중원에서 위세를 떨치던 청이 군신관계를 강요해오자 전쟁을 결심한다. 하지만 불과 한달도 안되어 도성을 내주고, 홍건적의 난 이후 북쪽 이민족에게 수도를 빼앗긴 어리석은 군주로 남을 선택을 한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가려다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들게 된다. 여기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살기좋은 주거지 베스트 5에 들 정도로 떠오른 분당으로 신도시가 된 성남벌판, 송파, 잠실 벌판을 적의 10만 대병이 새까맣게 뒤덮는다. 역사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 고생, 그 아픔을 겪은 곳인데 결국 이 잠실이나 강남, 분당의 신도시는 예전의 무능한 지배층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신 귀족층이 자리잡고 있다. 민중을 무시한 정치, 민중을 억압하고 짓누르는 정치는 결국 환(患)을 불러오지만 우리 사회는 역사를 통해 깨닫지 못하고 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인조는 이 10만대군을 물리칠 아무런 묘책도 지지도 없다. 그는 하루하루 고민하고 번뇌하고, 아무말없이 그대로 있을 뿐이다. 이 때 척화를 주장하며 모두가 옥쇄하는 경(원칙)을 권하는 청음이 있다.
(2)그날의 역사와 그날의 사람들 그리고 오늘...
[]은 이하 책에서 인용한 부분이다-[김상헌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들었다. -전하, 죽음이 가볍지 어찌 삶이 가볍겠습니까, 명길이 말하는 생이란 곧 죽음입니다.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과 죽음을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신은 가벼운 죽음으로 무건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 -전하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소서,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임금이 주먹으로 서안을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어허 그만들 하라, 그만들 해.
그렇다 삶과 죽음은 어찌보면 같을 수 있다. 그들은 똑같은 것을 다르게 보고 있는 듯 하지만 이는 마지막에 가면 하나의 물줄기처럼 다시 만나는 것이다. 김상헌은 살아서의 무거운 삶을 이유로 가벼운 죽음이라고 의를 중시한 그것이 백성을 위해, 종묘사직을 위해 큰 죄를 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쟁에서 대장은 죽지 않는다-다만 살아서 후일을 기약해서 다시 백성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그 상헌이 말하는 무거운 삶을 사는 것이 죽음보다 낫다고 한다. 즉, 죽음도 결코 가볍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가지 사실을 두고 싸우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을 드러내준다. 좌파, 우파로 대립되어 싸우는 것이 결국은 한가지-나라를 생각하는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다른 생각이라고 믿고 싶다. 비록 현실은 그렇지 않더라도...작가는 서두에서 결코 소설로만 보아 달라고 했지만, 오히려 그의 소설은 역사와 사실보다는 내면을 강조하지만 또 무엇보다 현대의 무거운 현실을 대변해주고 그 나아갈 길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던 상헌과 명길은 후에 적의 감옥에 갇혀서 서로 시를 주고 받으며 그들이 생각하는 마음이 결국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상헌이 주장하는 경(원칙)과 권(방편)의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뿐이지 결국 이치는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지도자가 요구된다. 정말로...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상헌은 참 선비다. 소설에서 임금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그는 忠을 위해 살아간 선비였다. 그라고 왜 자기 백성을 사랑하지 않겠는가, 그같은 참선비가 왜 백성의 어려움을 저버리고 전쟁을 주장했을까, 하지만 그는 그 전쟁이 백성에게 씻을 수 없는 환란을 초래한 자신들의 무력함과 죄를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행동과 실천을 같이한 선비였다. 그는 후에 청나라에서 귀국한 후 할말이 없다는 뜻의 묵언재를 안동 고향에 짓고 살아갈 정도로 치욕과 살아남은 무거운 원죄를 절감하면서 일생을 마친다.
명길 또한 큰 선비다. 그는 누구나 흔히 주장하는 대의명분의 시대에서 실리를 생각한, 민족과 나라를 생각한 큰 선비였다. 물론 당시에는 대의명분을 저버린 보잘것없는 소인배, 혹은 구차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화친을 주장하고 오랑캐에 무릎꿇은 소인배라고 욕을 당했고, 오늘날 역사에서는 그 당시 살기를 바란 구차한 정치인정도로 생각되어지는 불쌍한 선비다. 하지만 김훈은 이 소설에서 그를, 그의 고민을 다시금 이 시대에 필요한 정신- 그의 노력을 그의 치열하게 아름다우면서도 명료한 글로 그를 다시 살려냈다.
나는 이소설에서 최명길의 새로운 모습을 찾아준 그가 무척이나 고맙다. 결국 멋없고, 언제나 손가락질 받은 선택이었지만 만약 살아남은 인조가 그날의 고난을 잊지 않고, 현군의 정치를 펼쳤다면 명길의 치욕을 품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아름다움을 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이나 예전 그때나 위정자들은 우리의, 충신의, 참 선비의 한 조각 아름다운 마음을 저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물론 그날의 역사도 치졸스러운 오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훈은 그의 소설에서 사람을 미혹한 사람마져도 아름답고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서날쇠의 인간상은 작가의 생각이 또 드러나 있는 주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비록 지배층에 의해 항상 고통과 수탈을 당하는 민중이지만 그는 예나 지금의 우리 국민의 모습- 서날쇠 그는 조선의 민초였다. 김수영의 시 처럼 바람이 불면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날 수 있는 우리 민초였다. 그는 지배층을 미워하는 대신 우리의 가족, 사랑, 믿음을 지킨 민초였다. 우리 민중은 언제나 지배층에게 당하고 얻어맞고, 배신당하고, 털리면서도 그들은 언제나 우리나라와 내가족, 내나라, 내사람을 지키기 위해 묵묵히 일하는 일제에 수탈당하면서도 독재정권에 억압 받으면서도 또한 그들을 크게 용서해 줄 수 있는 우리 민초였던 것이다. 날쇠의 미소가 곧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미소였다.
반면 정명수는 그러한 민족 중에서 분노를 밖으로 표출하는 즉, 나를 억누른 지배층을 위해 화를 표출함으로 그 한을 푸는 인물이다. 하지만 청의 승리 앞에서 머리에서 피가 날 정도로 절하는 임금을 보며 웃는 그의 크고 비열한 웃음에서 민족을 배신한 슬픔이 드러나게 만든 미워할 수 만은 없는 인물이다.
3. 結
역사는 우리 민중을 우리 삶을 항상 짓밟아왔지만 그때마다 우리 민족은 다시 일어나서 꿋꿋이 살아간다. 날쇠의 아들들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이고, 우리 민초인 것이다.
김훈 작가님의 소설은 아름답지만 슬프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이번의 남한산성에서 한없이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 그 근워적 슬픔과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작가님도 말했지만 그는 수사를 다 제거하고 문장의 뼈만 남겨 간결한 문체를 만드는데 사람들은 그 문체에서 아름다움을 보고 또 한없이 슬픔을 느끼게 만든다. 남한산성을 작가님과 같이 다니면서 그날의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남한산성-2007년 대한민국의 인물들에게 하고 싶은말이 담긴 그러한 소설 같다. 올해의 최고 소설로 뽑기를 주저하지 않을 만큼 나에게 깊이 남은 소설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 시대를 함께 고민해 간 명길이나 상헌처럼 그같은 지도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추운 겨울, 정책이나 원칙, 민족에 대한 고민보다는 온통 BBK니 의혹이니 해서 상대방을 거꾸러뜨릴 꼼수로만 대선을 치르려는 올해가 대선 시즌이라서 그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