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좋아한다. 특히 한국의 장길산, 임꺽정같은 역사소설과 중국의 삼국지, 초한지, 수호지,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 장편 역사소설을 좋아한다.
이문열의 <초한지>를 읽은지 3년 정도 지난 시점으로 최근 견위의 원전 초한지가 완역되어
나와서 다시 보고 있던 찰나에 이 소설을 만났다.
이 책의 저자는 켄 리우(뭔가 이름에서 중국의 추억이 돋는다)다.
1976년 생으로 40대 중반으로 접어드는 나이인데 아직도 30대 같아 보이는 외모를 가졌다.
중국 서북부 간쑤 성의 란저우 시에서 태어나 열한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다. 미국 최고의
명문 하버드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이 소설의 영어판을 읽어보고 싶기도 하다. 중국인 이민자로 하버드 영문과 생의 영어는 어떨까 궁금증이
들었다) 영문과 출신인데 신기하게도 마이크로소프트 등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했다고 한다. 아마 이 책에서 나오는 기술적 상상이나 내용들은 이
때 착안하거나 영감을 얻은 것이 많으리라.
전세계 수재들만 다닌다는 미국 대통령도 여러 명이나 배출한 그 어렵다는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지금은 보스턴에 거주하면서 법무법인 변호사로 일한다.
낮에는 기술 전문 컨설턴트로 일하고, 밤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소설을 써내는 뭔가 내가 바라는 삶을
사는 한 사람이다.
나 또한 법학과 학생이지만 지금은 IT회사에서 마케팅을 하고, 언젠가는 로스쿨을 꿈꾸기도 했고,
무엇보다 역사소설이나 책을 집필하고 싶었다.
저자는 대학 시절부터 습작을 시작하여 수많은 단편을 썼으나 오랫동안 출판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2002년 오슨 스콧 카드가 편집한 <포보스 SF 단편선>에 '카르타고의 장미'를 발표하며 소설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2011년에 발표한 단편 <종이 동물원>으로 2012년에 SF 및
판타지 문학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휴고 상과 네뷸러 상, 세계환상문학상을 모두 휩쓴 최초의 작가가 됐다고 한다. 사실
SF물을 좋아하지 않아서 다른 상은 잘 모르지만 휴고상은 어디선가 들어봤다. 그리고 3개의 시상식을 모두 휩쓸었다는 것은 그만큼 대단한
작품이리라. 나중에 꼭 한 번 읽어봐야겠다.
2016년에 이 책 ‘민들레 왕조 전쟁기’ 3부작의 1부 <제왕의 위엄(The Grace of
Kings)>으로 로커스 상 장편 신인상을 수상했고, 중국어로 된 소설을 영역하기도 한다.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저자의 소개를
길게 한 것은 이 소설을 내가 서평에서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어서다. 소설은 그저 주인공이 누구정도인지 알고 들어가서 읽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괜한 선입견을 이 서평을 읽는 사람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다만 저자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성향의
사람인 것은 알아도, 몰라도 그만이기에 소개를 했다.
저자는 어릴 적 할머니로부터 한(漢)왕조의 위대한
영웅들을 소개 받았다. 특히 할머니랑 같이 들었던 오후의 라디오 드라마를 잊지 못한다고 한다.
중국인이라는 피가 몸속에 흘렀기 때문에 이런 중국 역사를 변주한 소설이 탄생했으리라.
책은 '다라'제도를 통일한 마피데레 황제(진시황의 모티브)가 성대한 축하연을 여는 것부터 시작한다.
포로로 잡혀온 500여명의 무희가 파티를 벌이고 있는 순간 하늘에서 연처럼 생긴 자객이 활강해서 황제에게 불덩이를 던진다.
아마도 작가는 예전에 본 영화인데 폴 앤더슨 감독, 올랜도 블룸이
나온 '삼총사' 영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 같다. 그 영화도 프랑스의 달타냥이 나오는 삼총사에 하늘에서 배를 타고
다니고, 신식무기가 등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삼총사의 스토리를 잃지 않았는데 그 소설과 유사하다.
첫 장면은 초한지의 시작과 같다. 진시황이 통일하고 지방 순행을 갔을 때 자격의 습격을 받는
장면이다. 진시황역의 마피데레 황제를 늙고 쪼글쪼글한 인물로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거의 유사하다.
켄 리우는 어릴적부터 초한지 영웅들로 이야기를 지어 친구들과 역할 놀이를 하고, 미국에 건너와서도
사전을 뒤져가며 사마천의 사기를 읽고 역사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역사의 기록'과 관련한 작업을 자신의 과제로 삼고 있다고 한다.
이 소설 또한 초반에는 초한지의 서사를 거의 그대로 따른다. 후세의 영웅이 되는
쿠니 가루(유방)와 마타 진두(항우)의 성장담이 나온다. 마타 진두는 명문의 후예로, 쿠니 가루는 미천한 농민의 아들로
나온다. 유방의 부인으로 훗날 천하를 호령하는 여황후는 지아 마티자로 나와서 유방에게 시집가는 것과 유사한 서사를 유지한다.
다라 제도의 패권을 둘러싼 경쟁이 뼈대를 이루면서 환관 조고가 호해를 농락하던 '지록위마'의 고사가
변주되어 나오고, 만리장성 건축은 해저터널로 만들어져 (이 책 뒤에 지도가 나오는데 이 소설은 바다와 섬으로 이루어진 가상의 도시가 배경이다)
나온다.
(이 책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다라제도)
작품의 배경은
오락가락 한다. 연호를 쓰고, 대나무 비단 같은 옛날 소재와 하늘에서 날아다니는 최첨단 기술이 결합에 미래도 아닌 것이 과거도 아닌 SF의
시공간을 창출한다.
이런 장르를 바로 실크펑크(Silkpunk)라고 한다. 켄 리우는 단순히 초한지 모티브를 변주한
것에서 나아가 자신이 창조한 또 하나의 세계에 생동감을 불어넣었고, 고고학, 기계공학 논문을 참조해서 한나라의 방직기, 한국의 거북선 같은
기술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했다.
또한 소설에서 작가의 세상과 철학을 군데군데 배치 해 놓았다. 전쟁은 잘못된 것이라는 신의 질책에
황제는 '더 많은 피가 흐르지 않도록 흘린 피였다'라고 이야기하거나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변주한 것에는 '세상은 아직 너무나 불완전하고, 위대한
인간이 당대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 소설은 초한지에 기반한 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전쟁의 판도를 뒤바꾼 다다익선의 고사를 남긴 한신은 성별이 바뀌어 '긴 마조티'라는 야심에 찬
여성으로 등장한다. 특히 현대에 맞게 여성 캐릭터가 많이 등장한다. 이전 중국에서는 기껏해야 부인이나 첩 정도 나오는 것에서 장군 등의 캐릭터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항우의 애첩이자 절세미인 우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키코미 공주와 전쟁에 대해
부정적인 미라 두 인물로 변주했다.
항우의 숙부로 홍문여에서 유방의 목숨을 구하는 항백 또한 지아 마티자의 하녀장인 소로와 마타 진두의
숙부이자 양아버지인 핀 진두로 나뉜다.
유방의 책사인 장량은 다양한 기계를 발명해내고 만들어내는 루안 지아로
묘사되고,
항우의 노책사인 범증은 토롤루
페림으로 나온다.
(책 끝에 등장인물 소개가 나온다. 초한지를 잘 아는 사람은 누가 누구로 변했는지 추적해가면서 읽어도 재밌다)
또한 진의 호해와 자영은 에리시 황제로 합쳐져서 이 책 1권의 마지막은 에리시 황제가 권좌에서
내려오기 직전으로 몰리는 것으로 끝이 난다.
개인적으로 초한지의 내용을 잘 알고 있어서 이 사람은 이렇게 변했구나, 이 사람은 누구겠다를
추측하면서 읽는 것이 재미있었다.
이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은 황금가지의 모회사라 할 수 있는 민음사의 이문열 초한지나 최근에 나온 원전
초한지 등을 먼저 읽고 읽으면 원전과 변주곡이라 할 수 있는 이 책 '제왕의 위엄'을 서로 비교하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SF에 충실하고 싶으면 이 책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2권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