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고양이 1~2 세트- 전2권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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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파리, 소통을 꿈꾸는 암고양이 바스테트와 지적인 수고양이 피타고라스가 위기에 빠진 인류를 구하고 공생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갑게 읽을 것 같다. 단지 고양이의 뛰어남을 강조하다 보니까 개를 폄하하는 장면이 많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기분 나쁠 수도 있겠다. 개를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보면 항상 고양이는 악당으로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

     

「개들은 왜 저렇게 생겨 먹었을까?」

포효하는 개들을 내려다보면서 내가 피타고라스에게 묻는다.

「인간 주인의 의식이 스며들어서 그래. 난폭한 주인을 만나면 똑같이 난폭해지고 순하고 부드러운 성격의 주인을 만나면 또 그렇게 되는 거야. 개들이 스스로 성격을 결정하는 게 아니야.」

「그런 개들과 달리 우리는 주체적이잖아. 우리 기질을 스스로 결정하니까. 안 그래?」 2권 p. 51

 

 이야기 자체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설정들이 엉성하다고 느껴지기도 하고, 약간 적당히 편의적으로 버무려놓은 느낌이 있다. 이것은 미숙함에서 오는 문제라기보다는 능숙함에서 오는 느낌 같다. 소품 같은 느낌도 있어서 작가가 힘을 빼고 쉽게 접근한 것이 아닐까 싶다. 

 고양이를 주제로 한다면 쥐와의 대결은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쥐가 권력을 잡아 인류를 위협한다면 그 힘의 원천은 페스트인 것이 자연스럽다. 역사 속 고양이는 숭배의 대상인 적이 많고 영적인 세계와 많이 엮였으니 그런 면은 자연스럽게 주인공 캐릭터에 입혀진다. 그리고 고양이가 다른 동물과 싸운다면, 고양이의 왕격인 사자가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충 이런 식의 예측 가능한 발상 자체가 적당한 느낌을 주는 것 같다.

     

 그런 작가의 의도는 주제적으로도 맥을 같이 하기에 더 분명해 진다. 작품의 논조는 전체적으로 ‘역지사지’와 ‘계몽’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문제는 그 두 가지가 동화에서나 쓰이는 아주 직접적인 방식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같은 독자를 상정하고 아주 단순하고 쉽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고양이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를 통해 작가가 목표로 삼는 것도 아주 심플하다. 독자가 고양이의 입장이 되어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부조리한지를 체험한다. 역시나 동화나 우화 수준의 장치 사용이다.

     

「어디 그뿐인가요! 파트리샤, 우리 입장이 한번 돼 봐요. 당신들은 우리한테 음식다운 음식을 못 먹게 하죠, 성생활의 기쁨도 못 누리게 하죠, 게다가 멋대로 주인을 정해 주고 우리 이름을 정해 주고 살 곳까지 정해 주죠. 그런데 우리더러 <거만>하다고요? 우리 시중을 들어야 할 인간들한테 고양이들이 원한을 품지 않는 게 내 눈엔 이상하게 보여요.」 2권 p. 156

     

추신 6. 마지막으로 아주 간단한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만약 여러분보다 덩치가 다섯 배는 크고 소통도 불가능한 존재가 여러분을 마음대로 다룬다면, 문손잡이가 닿지 않는 방에 여러분을 가두고 재료를 알 수도 없는 음식을 기분 내키는 대로 준다면, 어떤 심정일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아이들 처지도 이와 비슷한데, 기간이 짧아요. 그렇죠?) 2권 p. 236-237, <작가의 말>

     

 그렇게 독자가 주인공인 암고양이 바스테트에게 감정이입을 한 상태에서, 본능과 직관만 알고 있던 무지한 그에게 피타고라스가 인간의 지식을 설명해준다. 이는 결론적으로 유식한 저자가 무지몽매한 독자들에게 이것저것 교양 상식 같은 걸 가르쳐주고 있는 모양새를 만든다. 

 이런 관계는 독자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게 사실이다. 뭔가 잘난 척 하면서 교조적인 태도를 취하는 걸 독자들은 싫어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지식을 얻기 위한 책도 아니고 소설을 읽으면서 노골적인 강의를 듣고 싶은 독자는 별로 없을 것이다. 이것도 역시사지처럼 마치 아이에게 가르치듯이(실제로는 고양이에게 가르치지만) 독자에게 말을 걸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모두를 계몽시켜야 해요. 그러려면 우선 우리의 정신이 지식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야 해요.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지식이 주입되면 왜곡해서 이해하게 되니까요. 지식의 도구를 건설이 아닌 파괴에 사용할 테니까요. 실재적 정보를 거짓말로 둔갑시켜 동시대인들을 억압하는 데 쓸 테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프랑스 인본주의자 라블레는 <의식의 뒷받침이 없는 과학은 영혼의 파괴를 부를 뿐이다>라고 말했죠.」2권 p. 197

     

 작가의 선량한 의도는 알겠지만 상당히 위험한 접근법이라고 하겠다. 더군다나 바스테트와 피타고라스의 구도가 어쩔 수 없이 남녀 주인공의 구도가 되면서 성역할을 고정시키는 느낌마저 준다.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에서 남녀 주인공을 ‘시골’과 ‘도시’로 나눈 것을 떠올린다. 

     

 암컷인 바스테트는 자연에 더 가깝다. 본능에 충실하고, 직관과 영적 능력이 충만하다.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충실하다. 반대로 수컷인 피타고라스는 금욕적이고 이성적이다. 거의 수도승같은 분위기에 로봇이나 컴퓨터처럼 사고하고 움직인다. 절대로 흥분하는 때가 없고 자기 감정을, 마치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그런 성역할에서 벗어난 캐릭터도 있지만(대표적으로 펠릭스라는 수컷 고양이) 남녀 주인공이 이런 구도다 보니까 성적 고정관념이 투사된 것 같아서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암튼 두 캐릭터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성장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종국에는 같은 깨달음 속으로 합치된다. 바스테트는 직관과 영적 능력에 기댄 소통으로, 피타고라스는 이성과 논리, 지식으로 소통의 방식을 찾아낸다. 

     

 하지만 항상 우위에 있는 것처럼 그려지던 피타고라스보다 바스테트의 마지막 깨달음이 훨씬 광범위하고 고차원적인 것으로 그려지면서, 작가는 여성이 지닌 특유의 성질(?)이 미래에 더 중요한 자질이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작가는 캐릭터에 고정된 성역할을 부여해 놓고 여자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손을 들어주는, 병주고 약주고 식의 태도를 드러낸다.

     

 바스테트의 깨달음이 작가의 미래관과 세계관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부분인데,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체들은 모두 형태만 다를 뿐 사실은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혹은 원래 하나인 존재다. 각자의 생각 때문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생명체들은, 평등하고 자유롭고, 심지어는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소유란 무의미하고 타인이나 적으로 간주하는 것도 오해에 불과하다. 불행한 삶이란 없으며 모든 것은 자신의 욕망이 선택한 것이고,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일은 자신의 발전을 돕는다.

     

 상당히 평화적인 사고방식이면서도 어떻게 보면 상당히 안일하고 보수적인 생각 같기도 하다. 작품 내내 종교를 비판하면서도 끝내는 종교적인 해결책을 내놓는 것도 재밌다. 물론 그 종교는 특정 신과 교리를 믿는 종교가 아니라 개개인이 모두 신과 같은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다. 상당히 신비주의적이기도 하고, 엘리트적인 느낌도 든다. 설득력이나 논리를 떠나서 일단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서 얘기했듯이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야기처럼 역지사지와 계몽적·교조적 태도를 지니고 있는데(사실 아이들 동화에서도 이런 점이 두드러지면 좋은 작품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이런 보수적이고 현학적인 종교철학을 해결책으로 내놓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작가를 상당히 오만하게 보이게 만든다.

     

내일이 어제와 다르지 않은 존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후에 벌어질 일을 알고 있는 존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현실에 안주하고 몸의 안위만 추구하는 존재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2권 p. 176

     

 작가는 무슨 기준으로 계몽시킬 사람을 정하는 걸까. 지식은 어느 정도까지 쌓아야 작가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이렇게 살아남기 힘든 세상에서 본능대로 생각없이 사는 것은 과연 죄일까. 마음 편히 살다가 억울하게 죽은 펠릭스를 비난할 수 있을까.

     

나는 매사에 무덤덤하던 펠릭스를 떠올린다. 무엇에도 관심이 없고 도대체 야망이라곤 없던 펠릭스. 그가 삶에 거는 기대가 없었던 만큼 삶도 그에게 되돌려 주는 게 없었지. 2권 p. 171

     

 어찌 보면 인간이 소설 속 모습처럼 전쟁과 환경파괴의 결과에 시달리는 건 본능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 원래 본능대로 살던 고양이들이 다시 계몽을 이야기한다면 그들의 미래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말이 틀렸다기 보다는, 고양이의 입장에 충실하다 보니 인간의 입장은 좀 더 소홀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고양이가 보는 것만큼 인간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고양이가 생각하듯이 그 문제의 해결책이 그리 단순하지도 않다. 


 고양이는 오만하다.(혹은 그렇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고양이를 그린 작품이어서 오만함은 필수적인 요소였는지도 모르겠다. 서두에 소개되는 글이 생각난다.

     

개의 생각: 인간은 나를 먹여 주고 지켜 주고 사랑해 준다. 인간은 신이 분명하다.

고양이의 생각: 인간은 나를 먹여 주고 지켜 주고 사랑을 해 준다. 인간에게 나는 신이 분명하다.

  

- 작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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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거짓말을 한다 - 구글 트렌트로 밝혀낸 충격적인 인간의 욕망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지음, 이영래 옮김 / 더퀘스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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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엄청나게 재밌다는 사실을 밝히고 들어가야겠다. 

책 속에서 소개하는 조사 사례들을 조금만 뽑아보면,

     

남성이 포르노를 검색할 때 연령별로 가장 많이 찾는 여성 직업은 무엇일까?

가난한 가정 출신과 중산층 가정 출신 중 NBA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어느 쪽이 더 높을까?

슈퍼볼 광고는 진짜로 매출을 늘릴까?

명문고에 간발의 차이로 붙은 사람과 떨어진 사람은 이후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일까?

     

이런 이야기들을 도대체 어디 가서 들어볼 수 있겠는가. 

이런 사례들은 저자가 제시한 수많은 흥미로운 사례 중 극히 일부다.

     

설문조사를 비롯한 기존의 조사 방식에서 사람들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거짓말을 하게 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하지만 빅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검색창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솔직해진다. 빅데이터 속에는 사람들의 진짜 마음이 들어있다. 그걸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의 제목에 대한 중요한 근거다.


(작가는 원래 제목을 《내 음경은 얼마나 큰가요? 구글 검색은 인간 본성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로 하고 싶었단다. 하지만 편집자가 극구 반대했는데, 서점에서 그런 제목의 책을 쑥스러워서 누가 사겠냐는 이유였다. 우리는 책을 사면서도 완전히 솔직해지긴 힘들다. 전자책 소설 부문 1위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였던 해를 아직도 기억한다)

     

‘솔직한 조사 자료’로서의 장점을 어필하려다 보니 조사 사례 중에 섹스와 포르노에 대한 부분이 많다. (저자의 차기작은 ‘섹스’에 집중될 예정이라고 한다) 


검색 결과는 익명일 뿐 아니라 정확한 결과를 얻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솔직해진다. 이익을 보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솔직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네이버 영화 별점의 추락한 신뢰도와 영화 평점 사이트 ‘왓챠’가 내세우는 ‘클린한’ 영화 별점의 이유이기도 하다. 왓챠는 자신의 별점 평가를 토대로 취향에 맞는 영화를 추천해 준다. 

     

하지만 이 책이 단순하게 흥미로운 사례를 늘어놓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저자도 그것을 강조한다.

     

이 책에 특이한 사실이나 일회적인 연구가 많이 등장하긴 하지만 단순히 그런 것들을 모아놓은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방법론은 대단히 새롭고 앞으로 계속 세력을 확장해나갈 것이기 때문에, 이 방법론이 어떻게 작용하고 무엇이 이를 그렇게나 획기적이게 하는지에 관한 아이디어를 소개할 것이다. p. 34

     

물론 사례는 중요하다. 사소한 포르노 검색에서부터 계층 간 이동이라던지, 어떤 광고 방식이 소비자에게 더 먹히는가, 아니면 선거에서 누가 이길 것인지, 어떻게 해야 이길 것인지 같은 굉장히 심각한 이슈들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거운 주제들도 빠짐없이 재미있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1. 단순한 사례 모음. 혹은 

2. 그것을 통한 새로운 개념의 제시.

정확하게 말하면 저자의 아이디어는 그 사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여러 사례들과 함께 두루뭉술한 큰 방향을 제시한다. 

저자가 제시한 ‘빅데이터 분석의 힘’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1. 새로운 유형의 데이터 제공

2. 솔직한 데이터 제공

3. 작은 집단도 클로즈업해서 볼 수 있는 것

4. 인과적 실험의 실행 가능성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기대한 구체적 방법론은 아니다. 

저자는 마지막까지 어떤 분명한 법칙이나 방식을 제시하지 못한다.

뭔가 그럴듯한 목표를 계속해서 장황하게 약속하긴 하는데, 끝까지 딱히 뭔가를 내놓는 건 아니다. 


엔딩에서도 계속 결론 내리기를 망설이다가 대충 얼버무리고 만다. 마지막 챕터의 제목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책을 끝까지 읽을까’인데, 경제학 분야 책은 보통 완독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면서 은근히 독자들 탓으로 돌린다. 마지막 문장이 참 걸작이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적절한 방법으로 끝맺을 것이다. 데이터에 따라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하는 행동에 따라서 말이다. 나는 친구들과 맥주를 한잔하고 이 망할 결론을 그만 쓸 것이다. 빅데이터가 말하길 여기까지 읽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니까. p. 324

     

저자는 뭔가 대단한 개념을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만을 내보이다가 결국 도망쳐 버린다. 책의 완성도를 낮추는 치명적인 단점이다. 정말 아쉽다. 왜냐하면 이 책이 정말 재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법칙’이나 ‘개념’, 혹은 ‘방법론’을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에서만 벗어나면 긍정적인 결말도 쉽게 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데이터에는 이야기가 있다’(p. 236)라는 챕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빅데이터 분석이 인간 본성, 사회적 현상에 대한 가장 정확한 지표들을 제시한다는 건 위에서도 이야기했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왜 그런 지표들이 드러나는지에 대한 이유를 파고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저 그렇다는 것만 알고 그것을 이용하면 그만이다. 

     

예측을 할 때는 어떤 것이 효과가 있는지만 알면 되고 그 이유까지 알 필요는 없다. p. 92

     

그게 한계이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상상력이 자극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게 바로 내가 ‘데이터에는 이야기가 있다’라는 챕터에 주목하는 이유다.

     

조사대상인 개개인의 사람들은 모두 데이터 속으로 사라진다. 더 정확한 내 느낌은 데이터 속으로 ‘숨는다’. 모든 적나라한 욕망들이 숫자로만 드러난다. 그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혹은, 때때로 이해할 수 없기도 하다. 여기가 바로 상상력이 자극되는 부분이다. 알 것 같다가도 모를 그 부분.

     

그렇게 상상을 하다 보면 나조차도 데이터 앞에서 숨는 셈이 된다. 우리는 숨어서 남의 속마음 지켜보는 걸 즐긴다. 영화관에 앉아서 홍상수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키득거린다. 어떤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 이 책을 재밌게 읽을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다. 작가도 분명 이 장점을 알고 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여타의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데이터와 수치를 기반으로 한다. 생동감 있고 광범위하다. 데이터가 너무도 풍성해서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을 시각화 할 수 있을 정도다. 에드먼턴의 물 소비를 분단위로 확대하면 피리어드가 끝날 때 소파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필라델피아에서 마이애미로 이주해서 탈세를 시작한 사람들을 확대하면, 나는 이 사람들이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세금을 덜 내는 방법을 배우는 장면을 그릴 수 있다. 연령별로 야구팬을 확대하면 나는 나의 어린 시절과 내 남동생의 어린 시절, 여덟 살 때 자신들을 끌어들인 팀을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성인 남성 수백만 명을 그릴 수 있다. p. 237

     

절대적인 다수에 대한 상상은 언제나 어렵다. 그 다수를 구성하는 개개인을 상상하는 건 더 어렵다. 일반인들이 가진 알량한 경험과 지식으로는 그 전체의 단 10퍼센트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은 더 복잡해지고 더 빠르게 변하고 있지 않은가. 


빅데이터의 활용 방안은 훨씬 더 광범위해질 것이고, 전문화될 테지만, 바로 이런 상상력 자극의 매체로서, 인간과 사회를 상상하는 아주 좋은 단서로서의 가치도 크다고 생각한다. 빅데이터는 아무도 해주지 않는 솔직한 속 얘기다.

     

모두 트럼프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뽑혔는가. 작가의 연구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나는 그것을 보고 박근혜가 당선됐을 당시 그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국내 언론들이 생각났다. 


오바마를 뽑았던 사람과 트럼프를 뽑았던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일까. 박근혜를 끌어내린 사람들과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일까.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 내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의 사용자는 딱히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온라인에서 더 솔직하다. 겉으로 표방하는 정치적 입장과는 다르게 온라인에서는 그 높은 벽을 쉽게 넘나든다.


미국 내에 해결되지 않은 증오와 편견이 많이 숨어 있었던 것처럼 우리 사회도 그런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좀 더 솔직하게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좀 더 자주, 좀 더 구체적으로 서로의 속마음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에게 빅데이터가 주는 가능성은 희망적이다.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빅데이터는 그 거짓말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가장 놀라운 부분이자, 가장 재밌고 흥미로운 부분이면서,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아쉬운 부분(실은 저자가 가장 아쉬워하고 있는)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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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촛불이다 - 광장에서 함께한 1700만의 목소리
장윤선 지음 / 창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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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촛불집회에 대한 기록물이다. 그런데 촛불집회가 애당초 박근혜 정부에 대한 울분이 터져 나온 사건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박근혜 정부에 대한 기록일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촛불집회를 돌아보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잊고 있던 진기록들을 다시 접하니 말문이 막힌다. 대통령 지지율 20대 ‘0%’. 스무 차례나 연속으로 계속된 촛불집회. 전국 1700만 명의 촛불집회 참가자. 등등. 이런 나라를 잘 살아냈구나 싶어서 가슴이 철렁해진다.

  

“(…) 우리 사회 기득권세력이 이렇게 부도덕하고 이렇게 천박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정말 상상 그 이상이군요. 이런 수준의 사람들이 정치권력을 휘두르는 동안 우리가 살아낸 세월이 참 억울해요. (…)” p. 166-167, 배우 문성근

  

요즘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면 벌써 격세지감이 느껴지고, 촛불 국면 당시가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잊고 있던 한탄이 떠오른다. ‘이게 나라냐?’ 

남북정상회담이 너무 쉽게 이뤄지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도 쉽게 서로의 경계를 넘는 남북 정상의 모습을 보면서, 진작 이러면 될 것을 이게 뭐가 그렇게 어려웠던가, 헛웃음만 나온다. 그렇다. 지금, 이게 나라다.

  

‘이게 나라냐?’라는 한탄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촛불집회는 이 나라가 아직 나라임을 증명해 보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우리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그래서 자원봉사가 넘쳐 났고, 비폭력을 그렇게도 외쳤고, 친절하려고 노력했고 웃으며 즐거우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적폐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렇게 음흉하고 악독하고 이기적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숨이 막히도록 꽉 조여드는 상황에도 화내는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대개 이런 상황이 되면 누군가 먼저 꼭 신경질을 내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 만원버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한둘은 꼭 짜증을 낸다. 짜증은 바이러스처럼 퍼져 전염이 되고 급기야 싸움으로 불붙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광화문광장 촛불 주변에는 미소뿐이었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 아빠를 먼저 배려하고, 내 아이 남의 아이 구분하지 않고 애들을 먼저 살폈다. “괜찮으세요?” “미안합니다.” 배려도 많았다. 불의한 권력,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정치집회였지만 현장은 거칠지 않았고 정치적이지도 않았으며 소박하고 매우 따뜻했다. p. 52-53

  

“제가요, 집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제 일흔셋입니다. 그런데 왜 꼭 여기를 왔느냐, 이유가 있지요. 역사의 이 현장에서 그들과 같은 공범이 되지 않으려고 왔습니다. 그러려면 이 광장에 나와 함께 외쳐야만 공범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p. 158

  

이 나라는 위기가 있을 때마다 정부는 무능하고 국민들이 나서서 일을 해결한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억울함을, 우리의 결백함을 거듭 증명해 보여야 했다. 정말 피곤한 나라다.

  

돌이켜보건대, 촛불집회가 계속해서 국민들에게 외쳤던 것은 ‘국민이 곧 국가권력’이라는 아주 당연하고 기본적인 사실이다. 그래서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부 청사 건물 외벽에 레이저로 구호를 쏘는 것이었고, 청와대 앞 100미터까지 행진할 수 있는 것이고, 실시간 검색어 1위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한 출판사에서 헌법 책을 무료로 나눠줬고, 10분 만에 동이 났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 살벌한 ‘갑의 나라’에서, 갑질의 극단인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앞에서, 그 당연한 사실, 국민이 곧 국가라는 사실을 되찾는 것은 중요했다.

그래서 의외로 시민들의 인터뷰 중에는 적폐들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부분이 많았다. 국민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켜줬다는 것이다.

  

“(…)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시위할 때에도 시민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때가 5000명 정도 돼요. 그러니 이번에 그 4배가 더 나온 겁니다. 2만 춘천 시민들이 김진태 의원 사무실 앞 6차선 도로에서 촛불을 들었습니다. 하여간에 이렇게 많은 춘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게 한 건 김진태 의원 공이 커요. 김진태 의원이 춘천 시민을 촛불로 단결하게 해줬어요.” p. 158

  

(김진태 의원은 당시 '바람이 불면 촛불은 꺼진다'는 말로 촛불집회에 기름을 부었다)


확실히 대한민국은 촛불집회 이후로 더 용기 있어졌다. 적폐를 적폐라 말하고, 부정을 부정이라 말하며 여기저기서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촛불집회 때도 그랬다. 적폐들은 박근혜와 최순실만이 아니었다. 재벌 문제, 노동문제, 위안부 문제 모든 약자들이 입을 열었고, 모든 폐부가 터져 나왔다. 촛불이 끝났다고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아직 적폐 청산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계속해서 촛불을 들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이제는 걷잡을 수 없다. 시대는 변했고 국민도 변했다. 고(故)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는 촛불집회 연설의 마지막을 ‘모두 조심하십시오.’라는 말로 맺었다. 우리가 촛불을 잊고 지낸다면 적폐는 다시 우리를 옥죄어올 것이다. 2016년의 촛불은 미래의 우리에게 계속해서 경고한다. 모두 조심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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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나이듦에 대하여 -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당신에게 보여주고픈 그림들
이연식 지음 / 플루토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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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돌아온 탕자)은 렘브란트의 그림이라고 보기에는 딱딱하고 미숙하다. 렘브란트의 성숙한 화풍에 투박하게 흉내낸 듯한 필치가 뒤섞여 있다. 아무래도 제자가 손을 댄 것 같다. 렘브란트가 시작했을지는 몰라도 그의 손을 벗어난 그림이다. 어차피 어느 누구도 스스로 끝을 볼 수는 없다. 제 손으로 끝을 낼 수 있다는 생각 또한 만용이다. 설령 다음 세대가 하는 짓이 성에 안 차더라도 그들이 이어나가도록 해야 한다. p. 6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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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의 별 - 제4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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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고독하게 태어나서 고독하게 살고 때로는 고독하게 사랑하다 결국 고독하게 죽어가는 것 같습니다. 고독은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라 견뎌야 하는 것이며 우리에게는 얼마나 잘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의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고독에 대한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고립되어 있고, 자신에게 부여된 지독한 고독을 견뎌 내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 의문의 사나이 ‘리’가 끼어든다. 리의 개입으로 그들의 고독과 외로움은 잠시나마 위로를 받게 되고, 고독에 대해서 독설을 날리던 소설은 슬그머니 유대와 위로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소설 속 외로움의 원인을 크게 나눠보면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자기 자신, 타인, 사회 시스템.

불행을 자초한 자신과 그런 자신 때문에 위기에 빠진 아들, 어렸을 적 아빠의 성폭행 때문에 일평생 먹는 것을 끊을 수 없게 된 여자, 사람들의 탐욕이 만든 자본주의 시스템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처벌을 받게 되는 과학자.

     

결국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 외로움을 해갈시켜줄 존재도 사람이라는 점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는 것은 지긋지긋한 밀당의 연속이다.

외로운가 싶으면 또 혼자 있고 싶고, 사무치게 사람이 그립다 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꼴도 보기 싫은 게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그건 마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 같다. 혐오스럽다가도 연민에 빠지고 마는. 작가는 유난히 똥 얘기를 자주 꺼내며 인간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다가도 완전히 인간을 버리지는 못한다.

     

모든 것은 언제나 연민에서 시작된다우. 누군가가 불쌍해 보인다는 건 그게 어떤 상황이든 절대 거기서 끝나는 법이 없지. 그러니까 연민은 불쏘시개 같은 건데, 다른 감정에 불을 붙이고, 불은 또 다른 감정으로 옮겨 붙고, 더 이상 아무것도 탈 게 없을 때까지 모든 것을 태워버리다가…… 이상한 일이지만 맨 마지막에 남는 것도 연민뿐이고. p. 47

     

작가나 독자나, 너나 나나 결국은 모두 똑같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붙들지도, 뿌리치지도 못한 채 괴로워한다. 

     

인간은 자기가 짐승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죽어가는 짐승이라고 자학하면서 자기를 괴롭힐 수 있는 유일한 짐승이었다. p. 179

     

사람들은 리의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혼자 웅크리고 있다가도, 결국 오밤중에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속 얘기를 모조리 털어놓고 마는 게 사람이니까. 고독이란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을 맞이해 주는 것도 결국 사람뿐이다.

     

나는 행성대관람차를 상상하면서 어쩔 수 없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그래비티>를 떠올렸다. 지구라는 타인들을 떠나지도 못하고, 다시 그들 속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궤도에 머물며 붕 떠있기만 하는 영화 속 주인공은 리를 닮았다. 그곳에서 관조하는 세상은 기가 막히게 아름답지만, 우리는 지구를 벗어나 생존할 수가 없다. 

     

소설은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게, 농담처럼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 같은 유머는 사실 거리감에서 나온다. 굳이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말(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미래의, 외국인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성을 오가는 극단적인 삶이 유머를 자아내는 이유는 독자들과의 거리감 때문임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멀리서 보면 사람들은 한 명씩 고립되지 않았다.

아주 가느다란 인연들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챕터에는 다른 챕터와의 연결점이 존재하고, 그 연결점이 바로 다른 챕터의 주인공들이다. 그 위태로울 정도의 굵기를 가진 인연의 끈들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마음이 두근거리게 된다. 우리는 혹시 외롭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플랜A는 행성 단위의 거대한 가능성이다……. 인간은 모든 가능성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그게 아무리 사소한 가능성이라 해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방치한다는 것은…… (…)” p. 21

     

플랜A가 일종의 가능성이라면, 이 소설은 일종의 ‘사고실험’처럼 느껴진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 중에 작가가 선별한 몇 개의 가능성이 있다. 서로 연결되어 연대하고 위로할 가능성은 없는 걸까. 아주 가느다란 인연의 끈에 그 희망을 걸어도 되는 걸까. 플랜A의 리는 그 희망에 기대를 걸어보며 그렇게 무수히 많은 전화를 걸었던 걸까.

     

플랜A는 사실 다 큰 어린 왕자가 혼자 살고 있는 B612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왕자는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불러주기를.

     

“아무도 없는 나라의 왕이 된 기분을 양 자네가 알까 모르겠군.”

“영감님이 지금 그렇다는 거예요?”

“사실이 그래. 난 이 거대한 유원지의 유일한 이용객일세. 그런데 이용객이 한 명도 없는 유원지는…….” p. 220

     

그리고 작가는 리의 자리에 서서 독자들을 향해 전화를 걸고 있다. 우연히 그 전화를 받은 나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작가는 리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누군가 그 뒤를 이어서 유원지를 지켜주기를 바란다.

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그곳에 누군가 있어야 하는 걸까?

다른 사람의 외로움을 위로하려면, 그보다 훨씬 외로운 사람이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 다른 사람들의 외로움을 대신 짊어질 사람. 마치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에서 제일 외로웠던 어떤 사람처럼 말이다.

     

(…) 어쩌면 그중 누군가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합친 것보다 더 고독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자기보다 더 고독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무라는 한 달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

기무라는 플랜A에 있는 몇 개의 대륙과 하나로 이어진 거대한 대양을 생각했다. 기무라의 체스 친구는 그곳에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무라는 더 이상 자신의 고독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p. 16-17

     

아무도 없는 유원지가 혼자서 돌아가는 모습은 마치 성경에서 약속한 새 예루살렘의 모습 같다. 하나님은 그곳에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해 놓고 사람들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노아와 그 가족만큼의 사람들도 없는 게 아닐까. 약속의 징표였던 무지개마저 무색해질 정도로 사람들은 그 약속을 잊은 것 같다. 까마귀를 대신해서 생명의 징표를 가지고 돌아왔던 비둘기는 보이지도 않는다.

     

이제 다니엘 심슨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억해야 할 것 같았는데,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새 어디로 날아갔는지 비에 쫄딱 젖은 까마귀는 보이지 않았고, 다니엘 심슨은 리를 기억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리를 기억할지도 모르지만 다니엘 심슨이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가세, 잭. 비가 정말 징글맞게도 내리는군.” p. 228

     

그리고 그것은 기억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상상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나머지 모두를 위해 플랜A를 지키고 있다는 상상.

     

몇십만 평짜리 임야라니, 세상에 그런 물건이 정말 있기는 한 걸까? 물론 있기야 있겠지. 있으니까 평당 얼마씩 가격이 붙고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하는 거 아니겠어? 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 모두 뜬구름 잡는 소리거든. 멀리 있는 건 그게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진짜 인생은 아니니까. 안 그렇수? 모름지기 진짜 인생이라는 건 말이야, 이렇게 두 손으로 단단히 잡은 다음 한입 가득 베어 물고 쩝쩝 소리를 내면서 씹을 수 있어야 해. 이 맥도널드 자이언트 버거처럼 말이우. p. 33

     

종교적 상상력에 기댄다면 이 소설의 엔딩은 마치 인류에게 선고하는 심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그 말은 아직 우리의 외로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무도 그것을 상상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외로움에 지친 사람이 오밤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결국 그것을 상상할 것이고, 기억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는 인류에게 심판의 엔딩을 선사하면서도 냉정하게 모든 것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우리에겐 플랜A 뿐 아니라, 플랜B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다. 그렇게 어떻게 해서든 위로를 받아내고, 위로를 주고야 말 것이다. 최소한 '별의 리'를 기억하는 작가가 동시대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는가. 

   

이 소설이 고독을 견뎌나가는 당신의 분투에 작은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길 순 없지만 죽을 때까지 잘 견디면 진 건 아니니까요.  -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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