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의 별 - 제4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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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고독하게 태어나서 고독하게 살고 때로는 고독하게 사랑하다 결국 고독하게 죽어가는 것 같습니다. 고독은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라 견뎌야 하는 것이며 우리에게는 얼마나 잘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의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고독에 대한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고립되어 있고, 자신에게 부여된 지독한 고독을 견뎌 내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 의문의 사나이 ‘리’가 끼어든다. 리의 개입으로 그들의 고독과 외로움은 잠시나마 위로를 받게 되고, 고독에 대해서 독설을 날리던 소설은 슬그머니 유대와 위로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소설 속 외로움의 원인을 크게 나눠보면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자기 자신, 타인, 사회 시스템.

불행을 자초한 자신과 그런 자신 때문에 위기에 빠진 아들, 어렸을 적 아빠의 성폭행 때문에 일평생 먹는 것을 끊을 수 없게 된 여자, 사람들의 탐욕이 만든 자본주의 시스템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처벌을 받게 되는 과학자.

     

결국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 외로움을 해갈시켜줄 존재도 사람이라는 점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는 것은 지긋지긋한 밀당의 연속이다.

외로운가 싶으면 또 혼자 있고 싶고, 사무치게 사람이 그립다 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꼴도 보기 싫은 게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그건 마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 같다. 혐오스럽다가도 연민에 빠지고 마는. 작가는 유난히 똥 얘기를 자주 꺼내며 인간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다가도 완전히 인간을 버리지는 못한다.

     

모든 것은 언제나 연민에서 시작된다우. 누군가가 불쌍해 보인다는 건 그게 어떤 상황이든 절대 거기서 끝나는 법이 없지. 그러니까 연민은 불쏘시개 같은 건데, 다른 감정에 불을 붙이고, 불은 또 다른 감정으로 옮겨 붙고, 더 이상 아무것도 탈 게 없을 때까지 모든 것을 태워버리다가…… 이상한 일이지만 맨 마지막에 남는 것도 연민뿐이고. p. 47

     

작가나 독자나, 너나 나나 결국은 모두 똑같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붙들지도, 뿌리치지도 못한 채 괴로워한다. 

     

인간은 자기가 짐승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죽어가는 짐승이라고 자학하면서 자기를 괴롭힐 수 있는 유일한 짐승이었다. p. 179

     

사람들은 리의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혼자 웅크리고 있다가도, 결국 오밤중에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속 얘기를 모조리 털어놓고 마는 게 사람이니까. 고독이란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을 맞이해 주는 것도 결국 사람뿐이다.

     

나는 행성대관람차를 상상하면서 어쩔 수 없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그래비티>를 떠올렸다. 지구라는 타인들을 떠나지도 못하고, 다시 그들 속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궤도에 머물며 붕 떠있기만 하는 영화 속 주인공은 리를 닮았다. 그곳에서 관조하는 세상은 기가 막히게 아름답지만, 우리는 지구를 벗어나 생존할 수가 없다. 

     

소설은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게, 농담처럼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 같은 유머는 사실 거리감에서 나온다. 굳이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말(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미래의, 외국인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성을 오가는 극단적인 삶이 유머를 자아내는 이유는 독자들과의 거리감 때문임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멀리서 보면 사람들은 한 명씩 고립되지 않았다.

아주 가느다란 인연들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챕터에는 다른 챕터와의 연결점이 존재하고, 그 연결점이 바로 다른 챕터의 주인공들이다. 그 위태로울 정도의 굵기를 가진 인연의 끈들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마음이 두근거리게 된다. 우리는 혹시 외롭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플랜A는 행성 단위의 거대한 가능성이다……. 인간은 모든 가능성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그게 아무리 사소한 가능성이라 해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방치한다는 것은…… (…)” p. 21

     

플랜A가 일종의 가능성이라면, 이 소설은 일종의 ‘사고실험’처럼 느껴진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 중에 작가가 선별한 몇 개의 가능성이 있다. 서로 연결되어 연대하고 위로할 가능성은 없는 걸까. 아주 가느다란 인연의 끈에 그 희망을 걸어도 되는 걸까. 플랜A의 리는 그 희망에 기대를 걸어보며 그렇게 무수히 많은 전화를 걸었던 걸까.

     

플랜A는 사실 다 큰 어린 왕자가 혼자 살고 있는 B612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왕자는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불러주기를.

     

“아무도 없는 나라의 왕이 된 기분을 양 자네가 알까 모르겠군.”

“영감님이 지금 그렇다는 거예요?”

“사실이 그래. 난 이 거대한 유원지의 유일한 이용객일세. 그런데 이용객이 한 명도 없는 유원지는…….” p. 220

     

그리고 작가는 리의 자리에 서서 독자들을 향해 전화를 걸고 있다. 우연히 그 전화를 받은 나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작가는 리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누군가 그 뒤를 이어서 유원지를 지켜주기를 바란다.

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그곳에 누군가 있어야 하는 걸까?

다른 사람의 외로움을 위로하려면, 그보다 훨씬 외로운 사람이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 다른 사람들의 외로움을 대신 짊어질 사람. 마치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에서 제일 외로웠던 어떤 사람처럼 말이다.

     

(…) 어쩌면 그중 누군가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합친 것보다 더 고독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자기보다 더 고독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무라는 한 달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

기무라는 플랜A에 있는 몇 개의 대륙과 하나로 이어진 거대한 대양을 생각했다. 기무라의 체스 친구는 그곳에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무라는 더 이상 자신의 고독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p. 16-17

     

아무도 없는 유원지가 혼자서 돌아가는 모습은 마치 성경에서 약속한 새 예루살렘의 모습 같다. 하나님은 그곳에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해 놓고 사람들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노아와 그 가족만큼의 사람들도 없는 게 아닐까. 약속의 징표였던 무지개마저 무색해질 정도로 사람들은 그 약속을 잊은 것 같다. 까마귀를 대신해서 생명의 징표를 가지고 돌아왔던 비둘기는 보이지도 않는다.

     

이제 다니엘 심슨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억해야 할 것 같았는데,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새 어디로 날아갔는지 비에 쫄딱 젖은 까마귀는 보이지 않았고, 다니엘 심슨은 리를 기억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리를 기억할지도 모르지만 다니엘 심슨이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가세, 잭. 비가 정말 징글맞게도 내리는군.” p. 228

     

그리고 그것은 기억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상상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나머지 모두를 위해 플랜A를 지키고 있다는 상상.

     

몇십만 평짜리 임야라니, 세상에 그런 물건이 정말 있기는 한 걸까? 물론 있기야 있겠지. 있으니까 평당 얼마씩 가격이 붙고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하는 거 아니겠어? 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 모두 뜬구름 잡는 소리거든. 멀리 있는 건 그게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진짜 인생은 아니니까. 안 그렇수? 모름지기 진짜 인생이라는 건 말이야, 이렇게 두 손으로 단단히 잡은 다음 한입 가득 베어 물고 쩝쩝 소리를 내면서 씹을 수 있어야 해. 이 맥도널드 자이언트 버거처럼 말이우. p. 33

     

종교적 상상력에 기댄다면 이 소설의 엔딩은 마치 인류에게 선고하는 심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그 말은 아직 우리의 외로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무도 그것을 상상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외로움에 지친 사람이 오밤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결국 그것을 상상할 것이고, 기억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는 인류에게 심판의 엔딩을 선사하면서도 냉정하게 모든 것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우리에겐 플랜A 뿐 아니라, 플랜B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다. 그렇게 어떻게 해서든 위로를 받아내고, 위로를 주고야 말 것이다. 최소한 '별의 리'를 기억하는 작가가 동시대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는가. 

   

이 소설이 고독을 견뎌나가는 당신의 분투에 작은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길 순 없지만 죽을 때까지 잘 견디면 진 건 아니니까요.  -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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