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개 키워드로 읽는 라틴어 이야기
조경호 지음 / Orbita(오르비타)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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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느낌은 이렇다. 교양수업인 줄 알고 호기심에 청강 들어갔다가 수준이 너무 높은 전공 수업이어서 기겁하게 되는 느낌. 언어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언어를 본격적으로 가르치려는 욕심이 보여서 너무 부담된다. 심지어 교수님이 열성적이기까지 하시니 부담은 배가 된다. 하지만 그만큼 라틴어와 라틴어 교육에 대한 애정이 높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백가지 키워드로 라틴어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지만, ‘이야기’ 부분은 금방 끝나고, 나머지 부분은 언어적인 분석에 할애된다. 때문에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초반에 노력해 보기도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이야기만 읽게 된다. 내 수준으로는 딱 1부터 10까지 ‘라틴어로 숫자 세기’가 한계였다.(p. 24) 

 

 일종의 TMI가 너무 많았던 셈인데, 원래 이런 책은 TMI 읽는 재미 아니겠는가. 우리 실생활이나 잘 알려진 고전 부분은 꽤 재미있었다.  

 

 ‘우유’라는 뜻의 라틴어의 어형 변이를 보다 보면 라테(Latte)가 보이고(p. 87), 우리나라 대학들 교표에 적힌 모토들의 뜻도 알 수 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온 ‘카르페 디엠(Carpe diem)’도 반갑고(p. 222),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강동원이 부른 라틴어 노래의 뜻도 확인해볼 수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주문들은 어떤가(p. 316). ‘Expecto patronum’은 ‘나는 보호자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그 밖에도 서기를 나타내는 A. D, 오전과 오후를 나타내는 AM, PM, ‘알리바이’나 ‘유비쿼터스’도 라틴어에서 유래됐다는 사실은 신기했다. 

 

 히포크라테스가 말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은 ‘인생은 짧다. 하지만, 의술은 길다(Vita est brevis, sed art est longa.)’의 오역이다.(p. 123) 율리우스 시저가 말한 ‘주사위는 던져졌다(Iacta alea est.)’나(p. 299), 『돈키호테』에 나오는 라틴어에 대한 해설도 흥미롭다.(p. 307) 

 

 물론 재미없는 TMI도 많다. ‘진실은 강하며, 이겨 낼 것이다’라는 어구(p. 120)는 낯설기도 할뿐더러 누가 말한 건지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딱따구리’의 신화적 기원이 되는 인물 Picus의 이야기를 알고 있나요?>(p. 126) 같은 챕터도 마찬가지. ‘행운은 용감한 자들의 편’이라는 문구나(p. 133), <‘스승의 날, 졸업식•입학식’ 즈음이면 떠오르는 라틴어 어구는?>같은 챕터(p. 340)는 그저 정보 전달을 위한 것일 뿐 아무런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차라리 앞서 구분한 두 가지 카테고리(일상생활, 고전)로 분류해서 접근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분류가 좀 무질서한 편이고, 100가지 키워드라는 것만 내세우고 있다. 분명 라틴어는 일반 독자와의 접점이 있지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와 관련된 부분이 흥미로웠다. 성경의 원어에 최대한 접근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출애굽기의 구절을 해석하는 부분이나(p. 197), 갈라디아서의 말씀(p. 208), 사도신경 해석(p. 347), 욥기의 한 구절 해석(p. 373) 등이 그렇다. 우리말로 ‘예수’라고 발음하는 것이 라틴어(Jesu)와 일치한다는 지적(p. 80)은 흥미로웠다. 특히 라틴어로 된 십계명을 해석하는 부분(p. 170)에서 두 번째 계명 ‘넌 나에게 우상으로 여겨지는 것을 만들지 마라’의 해석은 깊은 이해를 도왔다. 새겨서 만든(Sculptilis)이라는 형용사를 통해 우상의 범주를 정확하게 유추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상을 하나만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마음먹은 모든 것을 포괄해야 함으로 목적어를 명시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p. 175

 

 차라리 라틴어 성경을 주제로 책이 나왔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한데, 이미 나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밖에는 ‘짐작에 근거한 말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순전히 제 개인적인 유추에 의해 만든 글이니 가능성만 생각해주세요. p. 101


1700년대, 이 어휘는 오타나 발음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봅니다. p. 121


 라틴어라는 언어가 과거의 언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짐작에 의존해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의 표현은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때로는 블로그에 연재되는 글을 보는 느낌도 든다.  

 

이번 단원도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Salve! p. 34


이제야 묵은 숙제를 다 한 느낌이네요. 금방 다 할 줄 알았는데, 역시 글로 쓰니 오래 걸렸습니다. p. 193

 

 편집 과정에서 더 다듬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아쉬움이 든다.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면에서 입문서로서는 절대로 추천하기 힘들 것 같다. 좀 더 전략적인 컨셉이 필요해 보인다. 인기 있는 ‘교양 수업’을 만들 생각이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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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 기담
전건우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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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나 제목만 보고는 상당히 오싹하고 고요한 공포를 예상했다. 일본 공포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서늘한 공포 말이다. ‘기담’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도 그런 예상에 한몫한 것 같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상당히 자유분방(?) 한 이야기였다. 심지어는 공포가 아닐 수도 있겠다. 공포의 탈을 쓴 복합장르라고 해야 할까.   

 

《고시원 기담》은 장르를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인데,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이 각자 생각하는 장르를 붙여줬으면 하는 마음에 이런 구성으로 글을 썼다. p. 427, 작가 후기

 

 되게 새로운 걸 만들어 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전에 없던 새로운 장르를 창조해낸 건 아니다. 정확히는 작가가 해보고 싶은 장르를 다 욱여넣은 느낌? 코믹함을 바탕으로 추리(그냥 흉내만 내고 있지만), 초능력, 무협, 도시괴담, 킬러라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단편집처럼 엮였다. 굉장히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고 장르가 서로 너무 달라서 옴니버스 이야기 같다. 모든 이야기가 마지막에 공포로 묶이기는 하지만, 각 편의 아이디어들이 많이 휘발되고 있어서 결말의 필연적인 느낌은 덜하다. 

 

 결과적으로 상당히 애매해졌다. 공포인가 싶으면 다른 장르의 비중이 훨씬 많고, 사회풍자극인가 싶으면 그런 것치고는 장난스럽다. 생각 없이 웃기에는 불편한 지점이 많고. 가볍게 시간 때울 킬링 타임용 장르소설? 그 정도가 적당한 분류 같다. 

 

 

 전작인 <소용돌이>는 스티븐 킹의 <그것>에서 큰 틀을 거의 그대로 옮겨 오는 한계를 보였었다. 이번에 <고시원 기담>까지 보고 나니, 작가는 장르소설의 큰 구조를 짜는 데 아직 자신이 없는 것 같다. 일종의 단편집 같은 구성으로 이뤄진 장편소설을 선택했는데, 어쩌면 단편에 더 강한 장점을 살리면서 장편을 쓰기에 최적화된 구조를 찾아낸 건지도 모른다. 물론 구조를 그대로 베껴 온 전작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를 보여준다. 돌파구를 찾아내려는 작가의 노력이 느껴졌다. 

 

 

 본문으로 들어가 보면 상당히 촌스러운 느낌이 있다. ‘다방 아가씨’라든지, ‘커피숍’이라든지, 고전 탐정소설과 무협소설 속 인물과 어휘들이 난무하고, ‘책 대여점’까지 등장한다. 물론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굳이 저런 어휘를 써야 했을까 싶은 느낌은 있다. 현재라는 생각보다는 과거의 어떤 지점에 멈춰진 시간대 같았다. 어쩌면 변두리 서울에 대한 편견 같기도 하고. 

 

 어휘에 대한 문제는 첫 챕터인 ‘고문 고시원’에서 도드라지는데, 어휘나 표현에 있어서 상당히 저열한 느낌이다. 작가의 야심찬 기획임을 감안했을 때 오프닝의 문장들이 너무 성의 없다. 

 

 ‘브라자나 빤스’(p. 9)라는 어휘 선택이나, ‘산타 모자를 쓰고 비키니를 입은 여자의 가슴 부위가 동그랗게 타 들어간다 싶더니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p. 11) 같은 묘사는 불쾌하라고 쓴 것 같다. ‘즉사(卽死). 방금 전까지 철권의 연속기를 외우고 있었을 소년의 머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p. 18), 그리고 가스 마시던 양아치가 옥상에서 떨어지는 부분(“사이어인이 쳐들어왔다!" 양아치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무공을 할 수 없었던 그는 무릎으로 착지했고, 척추가 파열되는 동시에 혀를 깨물어 평생 앉은뱅이와 벙어리로 지내게 되었다. p. 19)은 죽음에 대한 지나친 장난스러움이 느껴져서 거북했다. ‘김치는 중국산으로, 발로 담근 듯한 맛이 난다.’(p. 23) 같은 표현은 프로 작가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발로 쓴 것 같은’ 문장이었다. 

 

 한결같이 일부러 불쾌하게 만들려고 작정해서 쓴 느낌이다.  

 

 이것은 먼저 말했던 장르적인 애매함이 불러일으킨 문제가 아닐까 싶다. 사회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공포이면서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유머러스한 잡탕 장르물을 한 작품에 넣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아예 ‘펄프 픽션’같은 싸구려 장르 소설을 지향했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훨씬 노골적이어야 했겠지만. 

 

 오프닝에서 이렇게 광선동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굴려놓고 엔딩에서 그들을 보듬는 것처럼 매듭짓는다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마지막까지 장르적으로 애매한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작가 후기에서 작가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것도 같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위해서 다양한 장르를 빌려 왔을 뿐이다. 

p. 427, 작가 후기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로 장르적 문제를 어물쩍 넘어가는 건 아닐까. 일정한 톤으로 장르들을 엮어내지 못한 것을 변명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저열한 어휘와 묘사들이 분위기 조성을 하고 있기도 하다. 저열함이 공포라는 장르와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에-다른 장르였다면 단점으로 불거져 나왔겠지만-전체적인 분위기 속에 묻혀 눈에 띄지 않는 편이다.(물론 공포 소설을 저열한 어휘로 써야만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봐도 처음 책을 펼친 독자 입장에서는 첫인상이 굉장히 안 좋을 수밖에 없다. 작품에 대한 선입견에 앞서 작가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된다.  

 

 

 소설 속에서는 다양한 사회적 단면들을 코믹하게 다루고 있어 사회 풍자적인 성격도 엿보인다. 단지 그 모습이 상당히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편이다. 치밀한 취재를 통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냥 그렇다고들 알려져 있는 통념들을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하는 수준이다. 

 

 ‘오케이맨’ 챕터에 나오는 보수 기독교 층을 비롯한 언론의 반응들이 그렇고, 인터넷 방송을 하는 젊은이들이 그렇다. 깜이라는 외국인 노동자의 열악한 처우도 굉장히 상투적이다. 고시생이나 취준생의 고통도 딱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준이고, 정치인들이나 조폭들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 

 

 생각해 보면 고시원에 대한 기담이라는 발상도 그 정도 발상에 머문다. 낡디낡은 시설,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성원들에 대한 공포, 벽을 통과해 그대로 전해지는 옆방의 소음… 작가 후기에 보면 실제로 고시원에서 살았던 생활을 바탕으로 했다고 하는데, 의외로 상당히 외부적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  

 

 

 순간의 연출에 있어서 공포감을 주는 능력은 확실해 보인다. 단지 긴 이야기 속에서 그런 순간이 너무 짧고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게 일어난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확실히 공포 장르와 단편소설에 최적화된 작가 같다.  

 

 그 공포 연출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스펙터클로 채워져 있다. 전작인 『소용돌이』와 마찬가지로, 멤버 모두의 능력을 합친 사건 해결 방식이 스펙터클하게 엔딩을 향해 치닫는데, 이것이 과연 공포에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스펙터클한 엔딩에 대한 강박이 느껴지기도 한다. 주로 할리우드 공포영화에서 익숙한 방식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나 토브 후퍼 감독의 <폴터가이스트>의 엔딩을 보면 집이 땅으로 꺼지거나 오그라들어 다른 차원으로 사라진다. 에드거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에 영향을 받은 듯한 이런 엔딩은 해결 단계의 확실한 비주얼을 보여주며 개운함을 선사하지만, 공포의 여운은 남기기 힘들다. 전건우 작가가 선호하는 이런 엔딩 방식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좀 뻔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가족과의 관계, 특히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 연속적인 존재로 정체성을 얻는 데 반해, ‘괴물’은 부모와의 연계성 없이 단독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 재밌었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정확한 지적 같기도 했지만, 타인과의 의사소통 없이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목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결국 괴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옆방 사람들과의 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연대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서로의 이름을 밝히고,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는 것이 전부다. 지구라는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이상, 자신의 집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웃의 집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서로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괴물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서로 연결되어야만 한다. 고시원의 얇은 벽이 서로를 나누고 고립시키기도 하지만, 옆방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일종의 희망처럼 느껴진다.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도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다음 작품에서도 고뇌가 느껴지는, 한층 발전된 모습을 기대해 본다. 

 

그리고 이제 책장을 덮고 어둠 속에서 빛으로 걸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사는 곳으로. 

찬란한 그곳으로. 

p. 428, 작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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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인포메이션 - 만화로 배우는 정보와 검색의 모든 것 어메이징 코믹스
맷 업슨 외 지음, 케빈 캐넌 그림, 노승영 옮김 / 궁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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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제를 하는 학생들(특히 대학생들)이나 초보 연구자들이 보고서를 쓸 때 활용할 수 있는 A to Z를 담아낸 책이다. ‘연구주제 정하기’부터 ‘출처 표시하기’까지 전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상당히 솜씨 있게 담아냈다. 광범위한 범위를 압축, 정리해내는 솜씨가 특히 대단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가 다룬 주제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만 골라도 책 한 권을 써야 해요. 정보 문해력은 기술이지만, 정보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하는 방법이기도 해요. 생각해보면 과학이자 예술이기도 하죠. p. 116

 

 각 단계와 주제마다 연습문제까지 붙어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책 자체가 아주 친절하다. 최대한 알기 쉽게 풀어쓰고 있고, 중학생 정도부터는 문제없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아무리 만화로 다룬다고 해도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이야기를 이렇게 친절하게 전달해주는 책이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사실 도서관의 분류법 같은 것은 전산화되기 전부터 존재했으니까 아주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활용해본 사람은 정말 극소수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대학생이라고 해도 보고서 한 번 쓰려면 허둥대는 사람들이 많다. 그나마 효율적으로 정보를 찾아내 사용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더 적을 것이다.  

 

 정보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그저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져 있고, 그 상태로 대학교에 들어가서 갑자기 자기 주도적인 논문과 보고서를 쓰려고 하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중고등학생들이 대학생이 되기 전에 좋은 훈련을 하기에 최적화된 책이다. 

 

 어렸을 적에 책을 읽으며 느낀 점 중 하나는, 책이라는 것의 우주가 너무 크다는 점이었다. 최근의 전자화된 문서들까지 생각해보면 정보는 실감이 안 날 정도로 큰 우주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실제 우주처럼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정보의 분류법을 보다 보면 카오스에 가까울 정도로 범람하는 정보 속에서 질서를 부여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정보의 우주 속에서 길을 잃지 않고 정확한 지점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 분류법이다. 이것을 익히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길을 잃고 헤매야 한다. 

 

온 우주가 펼쳐져 있지만 모든 별을 볼 수는 없어요. 너무 많고 너무 멀어서 수많은 별은 어렴풋한 빛조차 볼 수 없죠. 깊은 우주에는 무한한 양의 물질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보는 것만으로는 결코 알 수 없어요. 맨눈으로는 못 보는 게 대부분이니까요. p. 81

 

 때문에 도서관 분류에 대한 교육은 도서관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꼭 필요한 부분이었다. 부록으로 ‘한국십진분류법’이 실려 있는 것도 상당히 유용해 보였다. 세계적으로 그 분류법이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도 재미있었다. 

 

 정보를 찾는 일은 일종의 가능성과 확률의 문제다. ‘어떻게 하면 그 확률을 비약적으로 올릴 것인가’에 대한 최적의 방법을 알려주는데, 생각해 보면 검색은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된 지 오래다. 그래서 책이 안내하는 방법들은 실생활의 검색에도 적용할 수 있는 개념들이 많았다.  

 

 검색어를 더 정확하게 입력하는 법(p. 49)은 말할 것도 없고, 주제 검색(p. 51) 같은 경우는 헤시 태그 검색을 떠올리기도 했다. 절단 검색이나 와일드카드(p. 57)같은 경우는 데이터베이스 검색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웹 검색 챕터(5장)에 이르러서는 일반 웹 검색의 원리나 웹 검색에서의 고급 검색 방법 같은 유용한 정보들도 소개된다. 

 

 압축된 내용이라고 해서 대략적이기만 할 거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업계 간행물 중 대중지와 전문지를 구분하는 팁을 보자. 

 

“간행물의 제목과 기사가 대상 독자나 직업군을 강조하는가? 공통주제가 있는가? 광고가 기사 내용과 관계가 있는가?” p. 65

 

 학술지를 구분하는 법도 있다. 

 

학술지 제목은 대개 주제 분야를 나타내며, 학술지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저널’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요. 논문 제목은 아주아주 구체적이고 전문적이며 길어요. 논문 자체도 분량이 많으며, 논문을 뒷받침하는 차트, 그래프, 표, 그림이 실리기도 해요. 군더더기나 무의미한 이미지는 하나도 없어요. p. 66

 

 이런 식으로 깨알 같은 팁으로 가득 차 있다.  

 

 더불어 이 책의 훌륭한 점은 검색과 연구 조사에 대한 깊이 있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책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주고, 저자들의 소재에 대한 애정을 느끼게 한다. 

 

미덥고 꾸준한, 친숙한 별자리를 볼 수는 있지만, 거기에 만족할 수는 없어요. 그 너머를 바라보고 새로운 것을 발견해야 해요. 하지만 이 모든 쓰레기가 시야를 가리고 주의를 혼란시키기에, 안 보이는 게 많다는 사실을 망각하거나 심지어 깨닫지 못하기 십상이죠. 더 멀리 더 깊이 볼 수 있는 도구가 있어야 해요. p. 81

 

(정보나 전문가의) 권위는 만들어진 개념이며 상황에 따라 달라져요. 즉 우리는 누구와 무엇을 믿어야 할지 이해하는 나름의 체계를 만들지만, 이 체계의 토대는 우리 자신의 경험, 편견, 기존 체계와의 상호작용이에요. p. 92

 

명심하세요. 연구는 모든 연구자들이 공유하고 기여하는 집단적 과정이에요. 여러분 또한 연구자로서 남의 연구를 바탕으로 연구 과정에 기여하는 셈이에요. 남이 해놓은 연구를 이용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에요. 괜찮아요. 이게 핵심이에요! 연구가 해마다 확장되는 것은 사람들이 과거의 결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결론에 이르고 과거의 발견을 바탕으로 새로운 발견을 하기 때문이에요. p. 99

 

 만화는 작화도 안정적이고 그림체가 귀엽고 예뻐서 친근한 느낌이 든다. 확실히 내용 이해에 도움을 주는 면도 있지만 매 컷마다 쏟아져 나오는 유머는 부담이 되기도 한다. 아마도 내용의 밀도가 있는데 거기에 다시 만화의 유머도 밀도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미국식 유머이기 때문에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다.  

 

 책을 읽고 나면 뭔가 자신감이 샘솟는다. 뭐라도 조사 보고서를 써볼 수도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아직 한 번만 읽어봤기 때문에 확실히 마스터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 책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자신감이 생긴다. 역시나 이런 책은 계속 옆에 두고 백과사전처럼 이용하기 좋은 것 같다. 책의 맺음말에도 그런 성격이 드러난다. 

 

모두에게 행운을 빌어요. 열심히 공부하고, 바르게 인용하고, 그리고 명심하세요. 이 책을 가지고 계신 한…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p. 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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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방패다 - 당신의 행복을 지키는 힘
최경훈 지음 / 쉴드에듀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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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좋은 책이다. 다 읽은 지금은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초반에는 걸리는 부분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을 지켜야 한다. 우리 자신의 생각, 자신의 상상력을 지켜나가야 한다. 그 방법이 바로 책 읽기다. 사람들은 책을 읽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립하고 지켜나갈 수 있다. 책의 내용에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을 책에서 찾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분별력이 생기고 생각이 지켜진다. 내용이 아니라 그 과정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p. 11


 우선 ‘책만 읽으면 된다’는 과격한 주장에 반발심이 들었다. 모든 책은 훌륭한가? 그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고전? 고전은 무조건 좋은 책일까. 어떤 책은 광고와 다를 바 없는, 오히려 더 심한 프로파간다 아니던가. 생각은 어디에나 있다. 책을 고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 읽는 비판적 능력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단순화시키기도 한다) 

 

 지나치게 논리적이고 딱딱한 저자의 어조에 거부감도 들었다. 자주 논리를 들이미는데, 논리가 옳다고 그대로 움직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때때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게 인간 아닌가. 어린 학생 가르치는 듯한 교조적 어조로 들리기도 한다. 상당히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뒷부분으로 가면서 이런 첫인상은 뒤바뀐다. 처음에는 무의미했던 논리들이 점점 팩트 폭행으로 다가온다. 결국 나는 그 논리를 수긍하고 녹다운 되고 말았다. 저자가 내세우는 방패는 방패이긴 한데 방어무기가 아니다. 방패에 얻어맞은 느낌이다. 분명히 초반만 잘 견뎌낸다면 얻어 갈 게 많은 책이다. 

 

우리는 모두 달린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로 달리고 있는 걸까? 지금 우리 옆에 거북이처럼 보이는 사람들, 즉 내 멋대로 경쟁자로 설정한 그들은 과연 정말 느린 걸까? 도대체 우리는 어디로 달리고 있기에 누구는 빠르고 누구는 느린 걸까? 5,800만 명은 과연 동일한 결승점으로만 달려야 하는 걸까? p. 224


 저자가 말하는 방패는 한국 사회의 획일성을 타파하는 최선의 방편으로서의 독서다. 방패가 아니라 창, 아니 그것보다는 오함마에 가깝다. 때려 부순다는 면에서 말이다. 각 챕터의 주제인 개인의 생각, 개인의 경제, 직장, 교육, 국민 주권, 진실과 인류애까지, 하나하나 조목조목 격파해 나간다. 획일성은 관성 때문에 바뀌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획일성 타파는 곧 관성에 대한 타파다. 

 

지금 관성이 이끄는 삶을 살고 있진 않은가? 삶이란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과 같아서 누가 운전대에 있는지를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무언가를 결정할 때 그 선택이 이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가기를 원한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할 때, 그 일을 선택한 이유가 오로지 ‘지금까지 그래왔기 때문이다’밖에 없다면 그것은 관성이 이끄는 삶이다. p. 219

 

 그런 타파는 독자들을 어느 정도 불편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느 정도 사회의 흐름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가치관이 개인적 가치관으로 내재된 상태에서 사회를 깨부수는 비판은 개인을 깨부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저자는 초지일관 불친절하게 밀어붙이며 절대 달달한 말로 포장해주지 않는다. 진실을 직시하려면 그것은 불가피하다고 냉정하게 잘라 말한다. 

 

진실을 마주보기가 두려울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고개 돌린다고 진실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삶의 한 자락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진실이다. p. 154

 

 저자가 말하는 ‘좋은 책’의 기능도 거기에 있다. 그리고 자신의 책을 ‘좋은 책’으로 만들려고 작정을 한 듯하다. 

 

작가들은 책의 기능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그냥 살아온 대로만 살아가는 것은 편하다. 그러나 마음이 불편해지면 자신의 상황에 대한 진실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당신 안에 양심과 자유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p. 85

 

 획일성 타파 목적은 오로지 단 하나.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서다. 나답게 산다는 것. 그것은 모두 똑같은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만의 길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행복의 첫걸음이다. 사회적인 억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온전히 내가 될 수만 있다면 남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남을 깎아내릴 필요도 없다. 그 자체로 그 삶은 충만해진다. 

 

1등이 되려다가 2등으로 죽는 것보다, 나 자신이 되려다가 나 자신으로 죽고 싶었다. 하루를 살아도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다 가고 싶었다. 만약 죽기 전에 관에 누워 마지막 한 마디를 전하고 갈 수 있다면 “1등은 역시 힘들구나…”보다 “나는 나로 살아서 행복했다”라고 말하고 싶다. p. 99

 

 그렇게 얻어낸 자유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가치를 향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 수 있는 방법이다. 나답게 사는 것에 이어 ‘인간답게’ 사는 것을 제시한다. 내가 유일한 존재로서의 본질을 발현해야 하듯이,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본질이 실현됐을 때 가장 아름답고 행복해진다. 

 

사실 거의 모든 사회문제의 이면에는 ‘인간성’이 숨겨져 있다. 그것이 이 세상에 숨어 있는 가장 아름다운 비밀이다. 인간성이란 인간의 본질을 말한다. 인간의 본질은 당신의 느낌을 말한다. 사랑, 공감, 믿음, 신념, 감동, 기쁨 등을 느낄 수 있어야 우리는 비로소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다. 결론적으로 그런 감정을 충실히 느끼며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답게 사는 것이 가장 후회 없는 삶이 되는 것이다. p. 211-212

 

 그리고 그 모든 인간의 문제는 결국은 사랑을 향해야 한다. 사랑은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랑으로 설명된다. 증오라는 감정 또한, ‘사랑의 완벽한 부재’로 설명된다. 그 사람이 지독하게 악마적인 것은 곧 그 사람의 마음에 사랑이 완벽하게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랑은 인간이 느끼는 것 중에 최고의 감정이다. 사랑은 세상의 모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무의미해 보는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열쇠이다. p. 250-251

 

 논리적으로 본질을 파고들어 얻은 결과 치고는 상당히 의외의 결론이다. 팩트로 폭행하다가 막판에 감정에 호소하는 느낌. 그리고 그 목소리는 분명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순진한 생각이라고 폄하할 수는 있을지언정, 틀린 생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혹은 저자의 도덕적, 긍정적, 희망적인 태도에 반발심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나치게 절망에 익숙해 있다. 한쪽만 바라본다고 나머지 반쪽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희망은 언제나 세상의 반쪽으로 거기 있어왔다. 

 

 내용은 유익한데 반해, 오히려 책과 연결 짓는 논리가 빈약한 편이다. 책 제목을 생각했을 때 치명적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책이란 것은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의 알리바이 정도로 전락한다. 책을 통해 배워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는 정도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저자가 말하는 책이라는 것을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 싶기도 하다. 

 

사람은 이 세상에 고유한 책이다. 걸어 다니는 한 권의 책이다. 자신만의 스토리가 있고, 그것은 정말 실체가 있고 실존적인 것이다. 그 단단한 책들이 이 세상에 많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 옆에, 그리고 매일같이 마주하는 일상에 있다. 그 사람을, 그 책을 읽어 보자.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책이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에게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책은 생각이다. 사람을 통해 당신은 생각을 할 수 있다.  


다만, 분명 세상에는 그다지 유익하지 않은 책도 있을 수 있다. 그 책을 피하는 길보다 반면교사로 삼는 길을 찾자. 그리고 돌아보는 것이다. ‘나는 무슨 책일까?’, ‘나는 어떤 책일까?’, ‘어떤 책이 되고 싶은가?’에 대한 고민을 해 보자. p. 163

 

 어쩌면 저자가 말하는 방패로서의 책은, 책 자체가 아니라 책을 흡수한, 좋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 개개인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으로 이루는 혁명은 지나치게 간접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책이 지성과 논리로 무장된 우리 개개인이라면, 그것만큼 빠르고 직접적인 혁명은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에둘러 가지 않고 지름길을 택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좋은 책임을 알아채고 나니 막판에 가서는 편집이 아쉬웠다. 좋은 내용을 너무 엉성한 편집으로 엮어냈다. 앞서 말했듯이 도입부 부분의 불친절함이나 과격함도 그렇고, 오타나 잘못된 정보도 간간이 눈에 띈다. 중복되는 이야기나 불필요한 이야기도 꽤 됐다. 그런 부분을 걷어냈다면, 그리고 더 예쁘고 눈에 띄는 표지였다면 훨씬 많은 사람에게 읽힐 수 있지 않았을까. 내용만으로 승부 짓기에는 출판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책들이 너무 많다. 남 걱정 잘 안 하는 편인데(사실 나 자신이 제일 걱정거리라), 책 내용이 좋다 보니 별 걱정을 다 하게 된다.  


(http://blog.naver.com/bouv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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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투 퀸 1
무소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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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중세풍의 황실을 배경으로 하는 로맨스 소설이다. 하지만 거의 판타지에 가깝다. 백설공주나 신데렐라 이야기처럼 배경의 리얼리티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얼핏 왕좌의 게임 같은 판타지 소설의 갈등 구조도 떠오르지만, 훨씬 치정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퀸’이 되는 이야기가 핵심이 되는데, ‘황제’나 ‘황후’ 같은 단어들과 ‘퀸’이라는 단어가 아무런 위화감 없이 함께 나오고 있다. 판타지 소설다운 분위기라고 볼 수 있겠다. 더군다나 퀸(Queen)은 여왕이나 왕비를 뜻하는 단어일 뿐, 황후를 뜻하지 않기도 하다. (황후는 ‘Empress’) 하지만 판타지이기도 하고, 로맨스가 핵심인 가볍게 즐기는 이야기이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설정이나 시대 배경 같은 것은 최소한의 수준만 유지돼도 상관없어 보인다. 

 

 그리고 아무래도 계급 호칭들이 한자어로 표기되고 있고, 말투마저 조선시대 궁에서 쓴다고 해도 어색할 것 없는 말투다. 그러다 보니까 등장인물의 이름만 아니라면 동양풍 이야기라고 봐도 무방한 느낌인데, 이때 중간중간 서구풍 명칭들이 등장하면서 분위기 조성을 돕고 있기도 하다. 로맨스 소설계에 한해서 서양풍과 동양풍은 다분히 종이 한 장 차이인 것 같다. 

 

 우선 치정물답게 정적을 향한 독자의 분노를 끌어내는 방식이 확고하다고 느껴졌다. 독자의 강력한 감정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분명 큰 무기다. 단지 후반부로 가면서 주인공과 조력자들이 도덕적으로 선을 넘게 되면서 선악 구분이 조금 희석되기도 한다. 이후로 어떤 전개가 펼쳐질지 알 수 없지만, 악녀에게 연민을 가질 여지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기 힘들 여지도 있어 보인다. 단순한 구도를 넘어서서 캐릭터가 좀 더 복잡해지면 이야기는 더 풍성해질지는 모르지만 단순한 쾌감을 주기는 힘들어진다. 앞으로 작가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독자가 작품에 원하는 바가 분명한 장르물이다 보니까 클리셰들이 여러 번 반복된다. 처음에는 죽일 듯이 싫어하는 남녀 사이가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가까워지는 과정을 겪는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상당히 불가항력적으로 이뤄진다. 마음의 변화라는 것은, 특히나 연정의 마음이라는 것이 늘 그런 느닷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면서도, 좀 더 다양한 변주를 주지 않는 면이 아쉬웠다.  

 

 황제와 황후라는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빈번히 혼자 있는 상태가 된다. 여주인공이 혼자 있는 상태가 되면 곧 황제가 나타날 시간이 된 것이다. 그렇게 우연히 둘만의 시간을 보낼 때면 어김없이 뒤이어 비가 내린다.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독자가 이 장르에 원하는 것이기도 할 테니 딱히 불만은 없다. 

 

 작품의 핵심과도 같은 문장, “언니 대신 내가 퀸이 될게.”를 처음 봤을 때는, 언니라는 라이벌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여동생의 욕망으로 읽혔다. 어찌 보면 심술 맞아 보이는 그 욕망을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로 선량하게 포장한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그런 심술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소설에서 결혼은, 제아무리 황후가 되는 결혼이라고 해도 불행의 가능성을 내포한 독이 든 성배다. 그 독은 남편의 또 다른 여자를 뜻한다. 곧 남편의 바람이라는 독이 든 성배인 것이다.  

 

 그리고 먼저 결혼한 언니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동생이 있다. 착하기만 하고 요령 없는 언니는, 남자의 바람에 의해(악녀에 의해) 처참하게 실패한 결혼 생활을 한다. 그런 언니를 가슴 아프게 바라보던 동생은,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내가-언니보다는 영악하고 모진 면도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내가-언니 대신 겪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것이 시간을 되돌려 ‘언니 대신 퀸이 되는’ 이야기 밑에 흐르는 감정이다. 

 

 언니 대신 결혼을 한 동생은 정적에게 분노를 쏟아낸다. 그 분노는 자신과 언니 이중의 것이기에 훨씬 강렬하다. 하지만 그 분노에 쉽게 꺾이는 악녀라면 재미가 없다. 악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더 위험한 음모를 꾸민다. 그래서 이야기는 쉽게 끝나지 못하고 계속된다. 아마 영원히 안 끝날지도 모르겠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인 페트리지아는 든든한 여성 공동체를 구성한다. 자신의 언니 페트로닐라, 호위 무사인 라파엘라, 시녀인 미르야. 이들의 공동체는 신분 차에도 불구하고 평등하다. 황제로 대표되는 남성적 공동체는 권위적이고 수직적이다. 황제는 함부로 모두에게 반말을 한다. 그런 권위주의는 황제 본인에게도 해롭다.(또 다른 클리셰인 남자 주인공의 ‘상처받은 여린 마음’은 그런 뉘앙스를 풍긴다) 페트리지아의 여성 공동체가 상대적으로 이상적으로 보이는 이유다. 

 

 사실 <레이디 투 퀸>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 권력의 정점에 서는, ‘왕비’가 아닌 ‘여왕’이 최종 목적지이길 기대했다. 물론 1권의 내용만으로 결론 내리기 힘들겠지만, 그런 이야기와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닌가 싶다. 주인공인 페트리지아가 황제를 대신한 섭정을 통해 느끼는 것은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한 황후는 힘이 없다’라는, 다소 김 빠지는 것이었다. 주인공은 다시 ‘남편의 여자’라는 자리로 돌아와 ‘남편의 인정과 사랑’을 받아 ‘남편의 권력’을 대리하는 치정 싸움에 집중하게 된다. 권위주의에 대한 염증을 드러내는 것도 좋지만, 그렇다고 자기에게 직접 주어진 권위를 거부하고 남자를 통해 권위를 얻으려 하는 건 우스꽝스럽다.

 

 이것을 로맨스 소설 장르 자체의 한계로 볼 수도 있겠지만 세상이 변하고, 주 독자층인 여성들의 욕망이 변화한다면, 자연스레 장르는 변화하게 될 것이다. 장르의 문제는 곧 독자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도 그런 고민은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여성 공동체에 대한 우호적인 표현도 그렇고, 사냥대회에 나서는 활동적인 여주인공의 모습, 남자 주인공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적극성 등이 그렇다. 앞으로는 더 많이 변하게 될 거라고 본다.

 

 인터넷에 연재되는 웹소설을 책으로 엮어냈음에도 한 권의 이야기로서 기승전결의 완성도를 잘 갖추고 있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 이르면 숨겨진 비밀들을 암시하는 등, 다음 편을 궁금하게 만드는 미덕도 갖추고 있다. 과연 페트리지아가 황후의 자리 이상을 노리게 될지, 이 이야기가 단순한 여자들의 치정 싸움에 머물게 될지는 더 지켜봐야 알 것 같다.


(http://blog.naver.com/bouv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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