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 졸업을 앞둔 너에게
커트 보니것 지음, 김용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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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선생님을 기억해보자고 했을 때 제가 떠올린 선생님은 언젠가 제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예술가가 하는 일이 뭘까?” 제가 뭐라고 웅얼거리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가지가 있단다. 첫째, 예술가는 자신이 온 세상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한단다. 그리고 둘째, 예술가는 최소한 이 세상의 작은 부분이라도 바람직한 모습으로 만든단다. 찰흙 한 덩어리, 캔버스 하나, 종이 한 장 등 뭐가 되든 말이지.” 우리 모두 이 순간과 이 장소를 바람직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아주 열심히 그리고 아주 잘 해왔습니다. 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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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보스 수상한 서재 1
김수안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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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보스’는 두 사람, 양쪽 등의 뜻을 가진 스페인어라고 한다. 뭔가 ‘있어 보이는’ 제목이다. 굳이 스페인어를 써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지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기이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독특하고 예쁜(?) 표지 같다. 재밌는 만화책 표지 같기도 하고.

기대 이상의 소설이었다. 최근 황금가지에서 나온 소설들은 약간 ‘아마추어적인’ 면을 감안하고 봤던 터라 더욱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짜임새만 일정 수준 맞춘 작품이어도 만족했을 텐데, 그 이상을 보여준다. 특별히 흠잡을 필요도 없는 소설이긴 한데, 그래도 억지로 한번 짜내보자.
(이후 스포일러)






우선 ‘몸이 서로 바뀐다’는 설정이 재미있다. 아주 단순한 설정인데도 평범함의 함정을 쉽게 빠져나간다. 더군다나 ‘평소에 필요한 부분‘을 모두 해결해주는 상대와 몸이 바뀐다니, 쾌감이 없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군가를 부러워해요. 자신에게 없는 걸 갖고 싶어 하고요. 그걸 가지고 이야기를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 질문은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다면 행복할까?’가 아니라 ‘내게 지금 없는 것을 모두 갖는 대신, 현재 가진 걸 모두 버려야 한다면 그래도 행복할까?’여야 했습니다. 그래야 공정하니까요.” - 김수안, 채널예스 인터뷰 中

그래도 역시나 돈을 얻은 쪽에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야기는 유진의 몸을 입은 한나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타당한 결정이었다고 본다. 누구나 생각하는 판타지가 펼쳐진다.

쇼핑을 하고, 드라이브를 가고, 책을 사고, 좋은 음식을 먹었다. 돈 걱정, 일 걱정, 가족 걱정이 없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세상은 얼추 천국 근처였다. p. 124

“가족으로부터의 해방, 경제적 여유,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 꽤 성공적인데?” p. 133-134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손해 봤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사실은 ‘모든 걸 다 가진다’는 데서 쾌감의 방점을 찍는다. 작가의 말처럼 ‘그래야 공정’하니까 두 여자에게 얻는 것과 잃는 것을 고루 주었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한쪽이 다른 쪽을 강탈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손해 봤다고 생각한 한나 쪽의 상실감을 공들여 묘사한다.

사진 속 언니를 바라보는 유나의 눈에 그리움이 비쳤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앞으로도 어머니와 유나는 저 사진을 보며 딸과 언니를 기억하며 산다는 건가. 함께 웃으며 지냈던 지난 1년을 그리면서?
저게 제일 좋은 사진이라고? p. 228

“오래 만났죠. 많이 싸웠고요. 하지만 최근에는 달랐어요. 아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을 정도로 행복했어요. 지난 1년은요.”
처음으로 내보인 따뜻한 감정. 나는 섭섭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건 또 뭔가. 이 와중에도 유진과의 추억을 회상하면 웃을 수 있다는 건가. 지금 내 앞에서 나와의 5년이 아니라 유진과의 1년이 더 행복했다고 말하는 건가.
앞으로 그가 그리워할 이한나는 내가 아니라, 유진이라는 건가. p. 231-232


한나는 가족을 뺏겼고, 남자친구를 뺏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진이 모든 걸 빼앗길 정도로 나쁜 인간인가? 오히려 이야기 속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 아니던가. 한나의 보상에 마음 놓고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즉, 유진은 고마운 캐릭터이고 한나는 시간을 많이 할애한 캐릭터예요. 무엇보다, 제가 둘 모두에게 미안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양쪽 다 마음이 갑니다.” - 김수안, 채널예스 인터뷰 中



이렇게 생각하게 되자 나는 마지막 박형사의 사건 설명이 추정된 ‘사실’이 아니라 자의적인 ‘해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과적으로 한나는 그런 계획을 세우고 한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주인공 한나를 위로하려고 현실을 왜곡한 건 아닐까.
물론 마지막 유진의 몸을 차지한 한나의 모습이 의심스럽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할 건 없지 않은가? 오히려 일반인이 그렇게까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사람들을 조종한다는 게 더 불가능해 보이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나가 불쌍해지긴 한다. 자기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선택지가 아니었으니까.

이러고 보니 이와이 슌지의 영화 <러브레터>가 떠오른다. 여자 후지이 이츠키와 와타나베 히로코, 둘은 공정한 보상을 받았던가. 마지막 대사가 “부끄러워서.”가 돼 버리면 와타나베 히로코가 불쌍해지고, “마음이 아파서.”로 하면 좀 더 공정해 보이는 상황. 나는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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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몸이 바뀐 상황을 읽을 때는 재밌는데, 형사들이 나오는 관습적인 부분들(클리셰)을 읽을 때는 상당히 재미가 없는 편이다. 신선한 부분이 작품 자체를 많이 살리긴 했지만 클리셰들이 많이 죽이기도 한 것 같다. 특히 중반부에 형사들이 이런저런 가설을 세우기를 반복하는 부분은 많이 지루했다. 거기에 더해서 두 여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김수양이라는 연쇄살인범 이야기도 상당히 전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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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이야기 속에 중요한 장치로 쓰이는 것은 좀 지루하다. 소설이나 소설가에 대한 소설이 주는 지루함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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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가서 다 설명이 되긴 하지만 그전까지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많다. 그게 미스터리로 느껴진다는 말이 아니라, 작가의 미숙함이나 설정의 오류로 느껴진다는 점이 문제다. 이를테면, 마지막에 박 형사의 설명에 이르기까지 태경이라는 캐릭터는 굉장히 모호하게만 그려진다. 그렇게 감출수록 중요한 인물이라는 건 파악하게 되지만, 동기 자체가 없는 허수아비 같은 인물로 보인다는 게 문제다.
또 다른 예로 중반부에 한나가 몸이 불편한 아이를 몰아붙여 단서를 끌어내는 장면을 들 수 있다.

“미안해요. 제가 실수했어요.”
가식이었다. 사실 그에게 미안하지 않았고 내가 한 일은 실수가 아니었다. 현재 이 방면에서 내 양심은 많이 무뎌진 편이었다. 상처 입은 이들을 찾아가 끔찍한 순간의 기억을 다시금 들추어내게 하는 건 기자였던 내게는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이번 대상이 어린아이였던 점이 마음을 좀 무겁게 만들기는 했지만. p. 285


이 사람이 자기 기사 때문에 피해를 입은 소설가에게 죄책감을 갖는 동일인물이란 말인가. 마지막 박 형사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냥 ‘일관적이지 않은 캐릭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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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남자 캐릭터들이 대단히 재미없게 그려진다. 박 형사와 칠범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악당으로 그려진 김수양과 차동욱은 동일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비슷하다. 비슷한 범행 방식이 반복되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여자 캐릭터에 비해 남자 캐릭터들은 성의 없이 그려진 느낌이다.
김 실장의 대사 중에 ‘꿈이었답니다.’(p. 289)라든지 김수양의 말투에서 ‘안 했소’(p. 402), ‘말했소‘(p. 403) 같은 부분은 너무 어색해서 몰입을 방해했다.

조금 다른 얘기로 ‘여혐 남성 범죄자’는 벌써 너무 익숙한 느낌이 든다. 외국 작품에서는 벌써 수십 년 전부터 있어왔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 많이 보이는 추세인데 벌써 정형화되어버린 것 같다. 앞으로는 전형성을 피할 신선한 방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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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바뀐 이야기인 것치고는, 딴 사람이 차지한 자기 몸에 대한 신경을 별로 안 쓴다. 나 같으면 굉장히 신경 썼을 것 같은데, 심지어는 자기 몸을 입고 죽었는데도 이전의 자기 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평범한 죽음도 아니고 신체가 심하게 훼손됐는데도 말이다. 아마도 작가는 이 소설을 ‘몸이 바뀐 이야기’가 아니라 ‘영혼이 바뀐 이야기’로 생각한 듯하다. 둘은 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시각이다.

그러고 보면 소설 내내 인물들이 서로의 의중과 의도를 유추하고, 다시 그 상대가 그 유추를 유추하는 장면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절친한 박 형사와 칠범 사이도 그렇다. 사건의 해결을 박 형사의 머릿속에서만 풀이하는 것도 그렇고, 작가의 관심은 몸이 아니라 몸 안에 있는 생각과 자아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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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정교한 스타일의 스릴러나 미스터리(추리물 느낌의)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작가가 피땀 흘려 만든 결말은 흥미롭게 읽었다. 하지만 이런 정교한 작품은 작가에게 불필요한(?)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실패하면 말 그대로 졸작이 되는 것이고, 암보스처럼 준수하게 해낸다고 해도 ‘오.’ 정도의 반응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장르적인 특성인 것은 알겠지만 나는 작가들이 정교하게 만들어낸 트릭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 지곤 한다. 이건 뭐 작가의 문제라기 보다는 내 문제이지만.

칠범의 물음이 기억났다. “재미있어요?”라는. 느낀바 많은 책이었지만,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기는 힘들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선호는 “내 스타일은 아니었어.”라며 대충 얼버무리고는 고갤 돌렸었다. p. 345


하지만 과감하게 판타지 설정을 집어넣은 것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다른 독자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설정 하나로 아주 신선한 스릴러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특히나 스릴러 장르에서 지나치게 리얼리티를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언제나 불만이었다. 왜 장르가 상상력을 가둬둬야만 할까. 오히려 활짝 열려 있어야 장르 문학 전체에 발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암보스’는 미스터리 또는 스릴러 소설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만, 일반적인 규범이랄까요, 대부분의 독자에게 익숙한 방식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 그런데 ‘암보스’는 판타지 소설이기도 해요. 그 초현실적인 설정을 끝까지 유지합니다.˝- 김수안, 채널예스 인터뷰 中



나는 작가의 이런 선택을 지지하고 싶고, 차기작에서도 리얼리티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더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해주셨으면 한다. 리얼리티만으로는 반쪽만 즐기는 것이다. 문학은 상상력을 포기해선 안 된다. 보르헤스의 말을 들어보자.

생각의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하고 싶군요. 하나는 논증이고 다른 하나는 신화예요. 그리스인들은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었어요.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기 전에 한 마지막 대화에서 우리는 이성과 신화가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지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우리는 논증을 사용하든 아니면 비유나 이미지나 우화를 사용하든, 둘 중 하나만 사용한답니다. - 『보르헤스의 말』 p. 280-281



이 작품은 스토리 공모대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을 개작한 소설이다. 수상 당시의 원제는 ‘거울의 이면’이었다고 한다.


˝‘암보스’의 출발점이며, 쓰는 내내 변화하지 않은 이미지는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이 마주보는 모습이에요. 소설 속에는 한나가 유진과 마주앉은 장면, 혼자일 때는 거울이나 검은 유리창을 통해 유진의 모습을 만나는 장면이 여러 곳에 있어요.˝ - 김수안, 채널예스 인터뷰 中


거울의 반영된 이미지는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공포심을 자극한다. 나와 반대이면서 동일인인 인물. 그런 존재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실은 소름 끼치는 일이다. 암보스는 바로 그런 공포심을 살살 건드리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다시 보르헤스의 말이다.

다른 하나의 악몽은 거울의 악몽이에요. 내가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데, 내가 모르는 누군가, 내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보이는 거예요. 이윽고 나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면 깨고 나서 심하게 몸이 떨려요. - 『보르헤스의 말』 p. 284


오랜만에 만난 좋은 한국 스릴러여서 반가웠다. 실력 좋은 젊은 작가들이 더더욱 많이 등장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더 진화한 작가의 차기작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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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동력 -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는 힘
호리에 다카후미 지음, 김정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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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동력이란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는 힘’을 말한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평생 한 가지 일만 하는 ‘한 우물 파기’식으로는 살아남을 수가 없고, 다동력을 동원해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생존방식이 필요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여러분을 대체할 사람이 있는 한 여러분의 몸값은 오르지 않는다.
복수의 직함을 곱해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존재가 되자.
온갖 산업의 ‘장벽’이 무너진 지금, 하나의 직함에 집착하면 안 된다. p. 37


초반부터 파격적인 타이틀들이 이어진다.
기존 상식들을 뒤집는 반전의 연속이다.

<이제 ‘노하우’는 가치가 없다>
<성실함의 세뇌에서 벗어나라>
<‘적당히 해서는 안 돼’라는 선입견도 버려라>
<졸속 실행이 성공을 부른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말들이다.
저자는 계속해서 패러다임을 바꾸라고 요구하며, 자신의 업무 스타일을 올바른 예로써 계속해서 나열한다.

이렇게 과감하게 말하는 저자는 어떤 사람인가 싶어서 검색해 보니 이런 기사가 뜬다.

[월드피플]히틀러 풍자? 또 논란 빚은 ‘호리에몬’ 호리에 다카후미 전 라이브도어 사장
(https://goo.gl/GtGv1B)

심상치 않은 타이틀이다. 이어지는 소개글이 대단하다.

“호리에는 2000년대 초반 일본 벤처신화의 총아였다. 1996년 도쿄대를 중퇴하고 벤처기업 ‘온 더 에지’를 세운 뒤 연이은 인수·합병으로 기업 규모를 키우고, 포털사이트 라이브도어를 출범시켰다. 이후 프로야구 구단 긴테스 버팔로와 민영방송 후지TV의 경영권 인수를 시도하면서 화제를 불러모았다. 그는 위계질서가 강한 일본의 틀을 깨는 파격의 대명사였다.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등장해 일본 사회의 폐쇄성을 질타하고, <돈 버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같은 책을 쓰기도 했다. 이 같은 점이 젊은이들로부터 갈채를 받으면서 일본의 국민적 만화 캐릭터인 도라에몬을 빗대 ‘호리에몬’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일본에서도 파격으로 받아들여지는 사람 같았다. 이후에도 국회의원 출마라던가 징역을 살았다던가 하는 극단을 오가는 경력이 이어진다.

처음에는 마음 한구석에 ‘잘 나가는 저자나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라거나, 혹은 저자가 ‘실무자’라기 보다는 ‘기획자’에 가깝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아니면 성격 자체가 산만한 사람들에게 적합한 개념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물론 그런 면도 있을 것이다. 다동력이라는 것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라기보다는 원래 특정 성향의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능력에 가깝다. 하지만 이전까지 무시 돼 왔던(혹은 억압 돼 왔던) 그 능력이 이제 무시할 수 없는, 더 중요한 능력으로 부각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앞으로는 산만한 사람들이 유리한 시대인 것이다.


과거에는 ‘다동력’이 부정적인 능력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다동력을 업무에 활용할 상황은 많지 않았고, 다동력을 지닌 사람은 조금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앞으로의 시대에는 다동력이 가장 필요한 능력이 될 것이다. p. 18


파격은 충격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명쾌하고 시원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창피당한 만큼 자유로워질 수 있다>라던가, ‘자식의 도시락을 정성들여 싸느니 돈을 주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던지, <회의의 99퍼센트는 필요없다>, ‘청소는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지 않기 때문에 인생에서 없애버렸다’라던지 하는 말들은 불필요한 강박과 겉치레, 의무감에 쌓여 있는 현대인들에게 일말의 해방감을 준다.


장황하게 이야기해서는 아무런 결론도 나지 않으며, “그러면 내일 다시 회의를 계속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회의가 길어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는 평생 가도 일이 끝나지 않는다. 3원칙을 철저히 지켜서 한 시간이 걸리던 회의를 30분으로, 그리고 15분으로 줄이자. p. 127



누구나 다동력을 이용해서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고,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처럼 ‘달달한’ 말들로 책을 시작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다동력의 기본은 그런 파격이 아니다. 오히려 기본기와 거기서 오는 통찰력을 기반으로 한다.



나는 ‘원액’이 되는, 시대를 한두 걸음 앞서 나가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스템의 본질과 역사의 변천에 바탕을 둔 깊은 교양을 얻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교양이 없는 사람은 ‘지금’이라는 시대의 변화에 휘둘려 눈앞의 일을 처리하는 톱니바퀴로 끝나고 만다. 반대로 ‘교양’이 있으면 장르를 횡단하는 ‘원액’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표면적인 정보나 노하우만 익히지 말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역사의 내면까지 깊게 파고들어 본질을 이해하자. p. 111



책 뒤로 갈수록 ‘교양을 쌓으라거나’, 여러가지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 가지에 몰입해야 한다거나, 업무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지 않고, 할 필요가 없는 일들은 안 해야 한다는, 이전에도 중요하게 생각됐던 기본적인 항목들이 달라붙는다.

파격으로 보이던 이유는 다동력이라는 개념을 실질적으로 적용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가 현재 우리의 모습과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다동력을 이해하고 나면 그 파격은 자연스럽게 수긍하게 된다. 자세히 살펴보면 현재 산업 전반과 기업문화에 만연한 쓸데없는 절차와 고정관념들을 지적하는 것에 더 가깝다. 어느 정도 막연하게나마 인지하고 있던 문제들이기에 수긍이 쉽다.

시대는 바뀌었고, 거기에 걸맞는 행동지침은 ‘다동력’으로 요약될 수 있다. 결국 궁극적으로 미래의 직업 개념이 바뀌어야 하고, 바뀔 수밖에 없음을 납득시킨다.



회사에 가야 한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
자료는 종이에 작성해서 건네야 한다.
이런 아무 근거도 없는 생각을 바꾸기만 해도 단숨에 업무를 효율화할 수 있다. p. 134



그렇다보니 거꾸로 ‘다동력’이라는 개념을 통해 변화하는 시대에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상이나 업무 방식이 무엇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기도 하다.

더더욱 빨라지고 복잡해지는 세상에서 그만큼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할 일이 많아졌고, 할 일이 많아진 만큼 본인의 흥미와 체력, 스트레스 관리는 더 중요해 진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가 체감하는 사회적 트렌드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무리 많은 프로젝트를 끌어안고 있다 해도 수면 시간을 줄여서는 안 된다. 바꿔야 할 것은 일을 하는 방식이며 생산성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은 죽으면 끝이다. 다동력을 발휘해서 막대한 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언제까지라고 뛰어다닐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p. 157





솔직하게 살면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자고 싶은 만큼 잔다. p. 159



그렇게 거창하지 않더라도 다동력은 내게 익숙한 개념이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동시에 여러 권을 읽는다. 그편이 훨씬 덜 피곤하게 더 많이 읽을 수 있고, 전혀 다른 분야의 책들이 서로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연결되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다동력의 장점과 정확하게 부합한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업무의 효율성 증가를 위한 방법들도 많이 제시하고 있긴 하지만 다동력은 경쟁력을 키우고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그럼 무엇을 위해 다동력은 필요한 걸까.



성공하면 하와이에 별장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안전하고 쾌적하기는 하겠지만, 새로운 발견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는다. p. 188




저자에 의하면 특별한 목표를 따로 두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다동력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다. 다동력을 발휘하는 그 순간이 중요한 것이다. 다동력을 발휘하는 순간 살아 있음을 느끼고, 충만한 몰입의 시간이 온다. 그리고 그렇게 인생 자체를 충만하게 채우는 것, 그것이 목표다. 다동력 자체가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게 저자의 최종적인 주장이다.



‘다동력’은 대량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1초도 낭비하지 않고 인생을 즐기기 위한 삶의 방식이다. p. 199




음 이렇게 결말을 맺는다면 다시 처음에 들었던 ‘특정 성향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다시금 떠오르기는 한다. 더 나아가서는 ‘저자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저자는 계속해서 일본의 관습적 개념과 교육이 족쇄가 되는 것처럼 말하지만, 다동력을 발휘 해야 한다는 또 다른 족쇄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산만한 사람이 유리해진 만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본성을 억압해야 하는 건 아닐까.

또 저자가 내세우는 지침들은 효율성을 극대화 하는 것들인데, 그런 효율성 안에 개인의 행복(개인적인 스트레스 관리를 포함한)은 있을지언정 타인과의 교류라거나 타인에게서 얻는 정서적인 면들은 철저하게 배제 되어 있다. 인간은 다동력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일까. 다동력이란 이름 아래 지워지거나 희생된 나머지 삶의 부분들은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관계를 배제한) 개인의 행복, 개인의 사회 활동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 미래가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왔다. 이 책이 그 확실한 증거 중 하나다.

어쨌거나 세상이 변하고 있고, 그 세상에서 다동력이 적합한 대응 중 하나라는 점에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다동력은 습득해야 할 능력인 것이다. 일본과 흡사한 사회 구조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는 더더욱 의미심장한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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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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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독특하다.
사료에 근거한 논픽션을 쓰면서 상상력을 동원한 픽션을 동원하고 있다. 그렇다고 팩션이라고 하기에는 다큐멘터리적인 성격이 너무 강해서 망설여진다.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책날개에 적힌 작가소개에 의하면 ‘유례없이 문학적인 저널리즘식 글쓰기’라고 하는데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 속시원한 명칭은 아닌 것 같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구성도 희한한데, 책을 쓰기 전의 상황과 책을 쓰고 난 이후의 상황까지 모두 담겨 있는 점이 그렇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까지 모두 책의 내용이긴 한데, 또 읽다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지가 않다. 작가의 개인사도 엄청나게 들어가 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분량이 상당히 두꺼워졌다.

도입부도 책을 쓰게 된 계기를 보여주는 작가의 개인사로 시작된다. 이런 도입부는 저자 본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독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이 책은 소위 말하는 사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를 중심으로 신약성경을 파헤쳐보는 내용이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이 본이야기로 잘 들어올 수 있도록 (한때 가톨릭 신자였지만) 회의론자, 불가지론자인 저자가 완전한 내부자(신자였던 시절)이자 완전한 외부자(현재의 불가지론자)로서의 심경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로써 독자는 자연스럽게 출발점에 서서 본이야기로 들어갈 준비를 마치게 된다. 이게 진짜 독자를 위한 효율적인 방식이었는지 확신은 못하겠지만 일단 나의 경우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저자의 목소리가 굉장히 강한 글쓰기이기 때문에 저자에 대한 소개나 적응이 필요할 것 같다. (저널리즘식 글쓰기라고 하면 굉장히 객관적인 논조일 것 같지만 이 책에 있어서만큼은 전혀 아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한 명의 작가와 치열하게 토론이라도 벌인 것 같은 기분이다. 아는 것도 많은데 말까지 많은 지독한 작가와.) 그런 의미에서는 올바른 방식이었다고 여겨진다.

저자 본인을 위해서도 적절한 도입부라고 한 이유는, 저자가 성경이라는 책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 때문이다. 필립 K. 딕의 전기(傳記)를 쓰기도 했던 저자의 이력을 생각해보면 더욱 이해가 되기도 하는데, 저자는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인물을 하나 정하고 그 인물을 따라 책 속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어가는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저자가 선택한 인물은 ‘루카(개신교에서는 ’누가‘)’다. 루카를 선택한 이유는 그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면서, 성경에 포함되는 책을 쓴 ‘작가’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상대적이긴 하지만 적당히 거리를 두고 모든 것이 낯선 관찰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저자의 입장에서는 아주 적절한 동반자가 되는 셈이고, 독자 입장에서도 가장 편안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결과적으로 독자는 루카를 따라 들어가는 저자의 뒤를 따라 들어가는 셈이다.

보통은 루카를 쫓아가도록 저자가 보이지 않게 돕는 역할을 하겠지만, 저자가 워낙 작품 전면에 드러나다 보니까 생기는 재밌는 특성 같다. 즐겁게 읽었으니 뭐가 어떻든 상관은 없다.

즐겁게 읽었다는 고백은 사실이다. 엄청난 분량에도 불구하고 몰입해서 읽었고 허투루 읽을 만한 부분은 전혀 없었다. 내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거다. 확실히 성경에 대해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는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 즐겁게 읽을 것 같다. 내용 자체가 성경이 믿을만한 내용인지 한 번 끝까지 가보자 하면서 달려드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성경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사람은 애초에 읽을 생각을 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점프해가며 읽어도 대단한 수준의 작품이고, 성공적인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훌륭한 ‘문학적 다큐멘터리’를 접하기에 이보다 좋은 예는 드물 거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한번 도전해 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인물과 한 종교에 대한 통찰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독서가 될 거다.

우선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전기 작가로서의 장점이 빛이 난다. 성경의 저자들과 거기 등장하는 인물들, 그리고 거기 등장하진 않지만 동시대를 살아간 각 인물들 속으로 깊숙이 내려가 내면의 속속들이(당연히 사료에서는 절대로 나와 있지 않은 부분이다)를 들여다보는 솜씨는 대단하다.

절대로 그것이 맞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고 저자의 의견일 뿐이라고 밝히는데도, 듣다보면 굉장히 설득력이 있어서 나중에는 그 인물들마다 나름의 인간상이 그려진다. 픽션에서처럼 캐릭터가 보인달까. 등장인물들이 굉장히 많은 셈인데 다들 제각각으로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 캐릭터를 보는 재미가 대단하다.

그 얘기는 성경을 보면서 ‘개인’을 봤다는 말인데, 이건 상당히 놀라운 경험이다. 나름 성경을 보려고 노력하면서도 이 정도까지 선명한 인물 개개인을 의식했던 적은 없다. 의식했다고 해도 아주 개성이 강한 베드로나, 바오로(바울) 정도? 성경은 번역되면서 한 가지 톤으로 정리됐기 때문에 여러 가지 책들의 묶음(개신교의 경우 신구약 합쳐 66권으로 된)임에도 불구하고 저자 개인의 목소리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개인들을 하나하나 살려낸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성격이 보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도 한 명의 인간이었다는 아주아주 당연한 사실을 되새기게 한다. 그들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었고, 그들도 나처럼 고민했고, 그들도 나처럼 걱정했고, 의심했고, 기뻐하고 실망했다는 점, 무엇보다도 신령해 보이는 그들의 신앙심이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아주 혹독한 과정으로 인한 결과물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걸 얻고 난 이후에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고 목숨까지 바쳤다는 사실. 이미 어렸을 적에 읽어서 알고 있던 사실들이 모두 새롭게 다가온다. 그렇다고 그들의 후광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나와 같은 인간일 뿐이기에 더욱 위대해 보인다.

저자가 회의주의자이기 때문에 얻는 장점도 분명하다. 신자였다면 할 수 없는 파격적인 접근방식을 보인다. 모든 각도에서 사료를 의심하고 재정립한다. 모든 걸 해체했다가 다시 쌓으며 굉장한 유연함을 보여준다. 이런 방식에서만 볼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고, 그 새로운 부분들이 이 전 성경 내용들을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아주 훌륭한 성경 이해하기 길잡이 같은 느낌이다.

워낙에 방대한 자료 조사, 연구가 있기에 가능한 것일 것이다. 내가 그 정도를 판단할 수준은 전혀 아니지만 읽는데 부족함을 느끼지는 않았을뿐더러 차고 넘친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읽다보면 저자에 대한 신뢰가 생기기도 한다. 그만큼 그는 집요한 작가다. 거기에 대해 초반에 이미 밝히고 있다.



만약 이 일을 그녀의 관점에서 고찰해 본다면, 난 그때 그녀를 아주 난감하게 만들었으리라 생각한다. 특히나 내가 끔찍하게도 똑똑한 인간이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는 않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내가 교만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씁쓸한 심정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대모가 사용하곤 하던 의미로, 그리고 C 여사가 내 뒤의 안락의자에 앉아 절망적인 어조로 <왜 당신은 항상 그렇게 똑똑해야만 하죠?>라고 푸념했을 때 사용했던 의미로 말하고 있다. 그녀는 내가 단순하지 못하며, 생각이 배배 꼬였고, 항상 복잡하게 생각하고, 아무도 제기할 의도가 없는 반론을 미리 앞질러 생각하고, 무언가를 생각할 때는 꼭 그것의 반대 항을, 또 반대 항의 반대 항을 생각하고, 이런 정신적 쳇바퀴 속에서 아무 소득도 없이 고갈되어 가는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p. 83



거기에 작가 개인의 풍부한 문학적 재능과 주변 지식들이 더해지면서 독자의 이해를 돕고 텍스트가 더 풍성해 진다. 분량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도 있다.

바오로의 조수 역할을 해냈던 루카는 이스라엘 성전에서부터 제국의 심장부 로마까지 두루 돌아보며 바오로의 활동을, 그리고 동시대 사도들과 장로들의 활동들을 지켜본다. 특별히 극적으로 꾸미지 않아도 그의 지적, 영적 탐험은 흥미진진하다. 그 사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하나가 사라지고, 로마의 황제는 계속해서 바뀐다. 말 그대로 기원(紀元)이 된 예수님. 그리고 예수님 이후의 1세기라는 시대는 우리에게 정말 매력적인 시대로 다가온다.

저자가 제시하는 모든 가능성(성경에 대한 또다른 해석들)은 그것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명석한 통찰력과 근거들을 토대로 한 것이니 만큼 생각해볼 만한 문제들이다. 단지 그 가능성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저자에게 동의하지는 않을 뿐이다. 거기서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갈리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비기독교인은 ‘그렇기 때문에 의문이 생긴다’고 한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확신이 생긴다’고 답하고 싶어진다. 저자와 나의 차이는 여기서 분명해진다. 저자는 확실한 근거가 필요했지만 충분히 찾지 못했던 것이고, 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모든 게 성립하지 않는다. 우르르 무너진다. 믿음의 영역은 그래서 파악하기가 힘든 영역이다. 저자가 책의 초반에서 의구심을 가지듯이 이런 ‘믿기 힘든’ 종교를 2천년 넘게 믿어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것도 세계를 좌우할 만큼 많은 수의 신자들을 거느린 종교로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성경에 대한 권위도 추락하고, 얼핏 성경이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정도라고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난 그게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수많은 저자들은 그들이 아는 부분을 썼다. 그리고 굳이 모르는 부분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작은 조각보가 모여 큰 그림을 이루었다. 루카는 자기가 맡은 조각보를 완성한 것뿐이다.

그리고 저자도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코끼리 다리를 만진 셈이다. 정체를 밝혀 보려 했지만 완전히 파악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실체의 일부를 접한 것만 같은 느낌이다. 중요한 것은,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뭔가를 만졌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뭔가가 분명히 있긴 있다. 그렇게 저자는 큰 그림의 또 다른 작은 조각보 하나를 완성했다. 어느 순간 저자는 고백한다.



(…) 나는 이날, 왕국이 무엇인지 잠깐이나마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p. 692



‘다른 각도로 다시 보는 성경’이라는 면에서도 그렇지만, 이것은 혹시 작가가 쓴 새로운 버전의 ‘신약’ 성경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회의주의자가 쓴 복음서. 불가지론자가 쓴 일종의 신앙고백인 셈이다. 그것이 기독교와 예수님에 대한 긍정일 수도 있고 부정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는 또 다른 증언을 남기고 있으니 그렇게 심한 해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책과 작별하는 이 순간 자문해 본다. 이 책은 과거 나였던 그 젊은이와 그가 믿었던 주님을 배신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름의 방식으로 이들에게 충실히 남아 있는 것일까?

나는 모르겠다. p. 693



이 정도로 열심히 탐구하고 나서 믿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면 신자인 나도 별로 할 말이 없어진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 태반은 그것이 뭔지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뭔지도 모르는 걸 제대로 비판할 수 있을까. 이건 비기독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너무 익숙한 성경 말씀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새로운 언어로 다시 읽기. 일종의 낯설게 하기. 물론 대단히 주관적인 해석이기에 위험천만한 순간이 산재해 있긴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시도해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그리고 아주 방대한 연구 조사 자료들로 성경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아주 많은 것들을 배웠다. 픽션과 논픽션의 장점을 모두 취하려는 전략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정반대의 악효과가 날 위험성을 안고 출발했지만, 두 마리 토끼를 정확하게 잡았다.

책을 덮고 나면 이 작품의 복합적인 면을 따로따로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이 이야기는 논픽션인 동시에 픽션이어야만 했고, 저자의 주관적 해석과 개인사가 들어갔어야만 성립하는 이야기다. 적어도 이 정도 분량은 되었어야 하는 이야기다. 그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하나의 복잡한 덩어리가 화려하고 아름답게 반짝이고 있다. 그런 것을 예술이라고 하던가. 맞다. 아주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접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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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폰을 개통하시겠습니까? - 제22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고학년 부문 대상 수상작 창비아동문고 292
박하익 지음, 손지희 그림 / 창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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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와 스마트폰.

이미 제목에서부터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한쪽으로는 오컬트 세계가 있고, 다른 쪽으로는 모바일 인터넷과 가상현실 세계가 있다.
이 이질적인 두 소재가 자연스럽게 하나로 결합된다.

처음에는 도깨비를 판타지 세계로 들어가는 구실 정도로만 소비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읽다 보니 도깨비의 특성이나 기원에 대해서도 깊이 파고들 뿐만 아니라 최신 과학 기술 등과 자연스럽게 엮어 내서 참신한 재해석을 하고 있었다. 그 경계를 오가는 것은 즐거운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이거 진짜야?”
“당연히 허깨비지.”
“허깨비?”
“진짜랑 똑같아 보이게 만드는 눈속임 말이야. 매일아, 허깨비를 뭐라고 하면 되지?”
케빈이 묻자 피부색이 까만 여자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컴퓨터 그래픽.”
“컴퓨터 그……. 그래, 그거야. 음.” p. 41

물론 그 이질적인 결합의 궁극적인 목적은 ‘스마트폰에 빠지지 말고 적당히 쓰라’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다. 그렇긴 해도 소재적인 매력이 반감되지는 않는다. 이토록 ‘이과’적인 도깨비는 처음 접해본다.

폐인.
요즘의 지우를 완벽하게 표현해 주는 단어였다. 눈을 감으면 게임 화면이 아른거리고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도깨비폰을 들고 있었다. 도깨비 소굴에서 도깨비폰을 가지고 노는 꿈을 꿀 정도였다. p. 161

단지 긍정적인 목표나 문제 해결을 위한 도전 같은 ‘당근’으로 교훈을 전달하는 쪽이라기보다는 부정적인 겁주기나 위기 빠뜨리기로 전달하는 식이라 약간 읽으면서 피곤했다. 가뜩이나 소재가 ‘기를 뺐는’ 거라서 그런지 유쾌하게 읽기는 힘들었다.

“홀린다고? 홀리면 어떻게 되는데?”
“우리한테 빠져서 벗어나지 못해.”
홍각시가 말했다.
지우도 비슷한 옛날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요괴나 도깨비한테 홀려 기를 빨려 죽는 사람들 이야기는 흔했다.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 계속 우리랑 놀려고만 하지. 우리는 사람이랑 노는 걸 좋아해. 인간 중에는 재미있는 애들이 많거든. 그런데 같이 놀던 아이들이 죽어 버리면 아주 골치 아파. 어른들한테 혼나고 스마트폰을 빼앗기기도 해. 가끔은 감옥에 가는 도깨비들도 있고. 으으으으.” p. 115-116

인간들을 기에 따라 분류하는 부분은 가장 불쾌한 부분이었다. 일종의 건강 상태로 사람의 행, 불행이 결정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 같아서 경악스러운 부분이었다. 물론 아이들에게 규칙적인 생활이나 운동을 권할 수 있기는 하겠지만, 작품 안에서 말하는 ‘기’나 ‘대’ 같은 것은 타고난 영역이 커서 자칫 아이들에게 괜한 열등감이나 우월의식을 심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더불어서 스마트폰이라는 도구를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만 있으면 괜찮다는 결말은 최신 도구에 대한 양면성을 제시한다는 면에서 필요한 부분이라는 건 알겠다. 하지만 마치 어떤 ‘상품’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 같아서 개운하지는 않았다.

마치 뭐든 ‘산업’으로 치환시키는 어른들(혹은 어르신들)의 논리라고 느껴졌다. ‘영화 <쥬라기 공원>이 국산차 몇 대를 판 이익을 얻었다’고 하면서 ‘영화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던 그 옛날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다. 뭐든 돈이 된다면 괜찮다는 논리. 역시 뭐니뭐니 해도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논리. 사실 과학기술은 언제나 수익으로 연결되지는 않고 그럴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 어떤 ‘문과’ 못지않게 순수한 것이 사실 ‘이과’ 아니던가.

그 밖으로는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인 윤 진사에 대한 부분이 서둘러 봉합된 느낌이 있어서 아쉽기도 했다. 윤 진사 캐릭터만이 아니라 윤 진사를 대하는 지우의 반응도 굉장히 편의적이다. 직관적으로 윤 진사의 말을 척척 알아들으면서도, 갑자기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구는 지우를 보면 전체적인 완성도를 해치는 것 같아 아쉽다.

그럼에도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고, 전통 소재를 자연스럽게 최신 기술과 함께 엮어냈다는 점에서 확실한 장점이 느껴졌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스마트폰이 너무 당연하게 돼 버린 요즘 아이들에게 충분히 자기 모습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줄 수 있을 좋은 이야기다.

지우는 아주 중요한 걸 깨달은 기분이었다. 도깨비폰을 사용하든 안 하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도깨비 아이들과 놀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중요한 건 마음을 지키고 영혼을 차분하게 다잡는 것이었다. p.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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