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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보스 ㅣ 수상한 서재 1
김수안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4월
평점 :
‘암보스’는 두 사람, 양쪽 등의 뜻을 가진 스페인어라고 한다. 뭔가 ‘있어 보이는’ 제목이다. 굳이 스페인어를 써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지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기이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독특하고 예쁜(?) 표지 같다. 재밌는 만화책 표지 같기도 하고.
기대 이상의 소설이었다. 최근 황금가지에서 나온 소설들은 약간 ‘아마추어적인’ 면을 감안하고 봤던 터라 더욱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짜임새만 일정 수준 맞춘 작품이어도 만족했을 텐데, 그 이상을 보여준다. 특별히 흠잡을 필요도 없는 소설이긴 한데, 그래도 억지로 한번 짜내보자.
(이후 스포일러)
우선 ‘몸이 서로 바뀐다’는 설정이 재미있다. 아주 단순한 설정인데도 평범함의 함정을 쉽게 빠져나간다. 더군다나 ‘평소에 필요한 부분‘을 모두 해결해주는 상대와 몸이 바뀐다니, 쾌감이 없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군가를 부러워해요. 자신에게 없는 걸 갖고 싶어 하고요. 그걸 가지고 이야기를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 질문은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다면 행복할까?’가 아니라 ‘내게 지금 없는 것을 모두 갖는 대신, 현재 가진 걸 모두 버려야 한다면 그래도 행복할까?’여야 했습니다. 그래야 공정하니까요.” - 김수안, 채널예스 인터뷰 中
그래도 역시나 돈을 얻은 쪽에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야기는 유진의 몸을 입은 한나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타당한 결정이었다고 본다. 누구나 생각하는 판타지가 펼쳐진다.
쇼핑을 하고, 드라이브를 가고, 책을 사고, 좋은 음식을 먹었다. 돈 걱정, 일 걱정, 가족 걱정이 없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세상은 얼추 천국 근처였다. p. 124
“가족으로부터의 해방, 경제적 여유,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 꽤 성공적인데?” p. 133-134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손해 봤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사실은 ‘모든 걸 다 가진다’는 데서 쾌감의 방점을 찍는다. 작가의 말처럼 ‘그래야 공정’하니까 두 여자에게 얻는 것과 잃는 것을 고루 주었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한쪽이 다른 쪽을 강탈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손해 봤다고 생각한 한나 쪽의 상실감을 공들여 묘사한다.
사진 속 언니를 바라보는 유나의 눈에 그리움이 비쳤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앞으로도 어머니와 유나는 저 사진을 보며 딸과 언니를 기억하며 산다는 건가. 함께 웃으며 지냈던 지난 1년을 그리면서?
저게 제일 좋은 사진이라고? p. 228
“오래 만났죠. 많이 싸웠고요. 하지만 최근에는 달랐어요. 아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을 정도로 행복했어요. 지난 1년은요.”
처음으로 내보인 따뜻한 감정. 나는 섭섭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건 또 뭔가. 이 와중에도 유진과의 추억을 회상하면 웃을 수 있다는 건가. 지금 내 앞에서 나와의 5년이 아니라 유진과의 1년이 더 행복했다고 말하는 건가.
앞으로 그가 그리워할 이한나는 내가 아니라, 유진이라는 건가. p. 231-232
한나는 가족을 뺏겼고, 남자친구를 뺏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진이 모든 걸 빼앗길 정도로 나쁜 인간인가? 오히려 이야기 속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 아니던가. 한나의 보상에 마음 놓고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즉, 유진은 고마운 캐릭터이고 한나는 시간을 많이 할애한 캐릭터예요. 무엇보다, 제가 둘 모두에게 미안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양쪽 다 마음이 갑니다.” - 김수안, 채널예스 인터뷰 中
이렇게 생각하게 되자 나는 마지막 박형사의 사건 설명이 추정된 ‘사실’이 아니라 자의적인 ‘해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과적으로 한나는 그런 계획을 세우고 한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주인공 한나를 위로하려고 현실을 왜곡한 건 아닐까.
물론 마지막 유진의 몸을 차지한 한나의 모습이 의심스럽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할 건 없지 않은가? 오히려 일반인이 그렇게까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사람들을 조종한다는 게 더 불가능해 보이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나가 불쌍해지긴 한다. 자기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선택지가 아니었으니까.
이러고 보니 이와이 슌지의 영화 <러브레터>가 떠오른다. 여자 후지이 이츠키와 와타나베 히로코, 둘은 공정한 보상을 받았던가. 마지막 대사가 “부끄러워서.”가 돼 버리면 와타나베 히로코가 불쌍해지고, “마음이 아파서.”로 하면 좀 더 공정해 보이는 상황. 나는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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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몸이 바뀐 상황을 읽을 때는 재밌는데, 형사들이 나오는 관습적인 부분들(클리셰)을 읽을 때는 상당히 재미가 없는 편이다. 신선한 부분이 작품 자체를 많이 살리긴 했지만 클리셰들이 많이 죽이기도 한 것 같다. 특히 중반부에 형사들이 이런저런 가설을 세우기를 반복하는 부분은 많이 지루했다. 거기에 더해서 두 여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김수양이라는 연쇄살인범 이야기도 상당히 전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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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이야기 속에 중요한 장치로 쓰이는 것은 좀 지루하다. 소설이나 소설가에 대한 소설이 주는 지루함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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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가서 다 설명이 되긴 하지만 그전까지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많다. 그게 미스터리로 느껴진다는 말이 아니라, 작가의 미숙함이나 설정의 오류로 느껴진다는 점이 문제다. 이를테면, 마지막에 박 형사의 설명에 이르기까지 태경이라는 캐릭터는 굉장히 모호하게만 그려진다. 그렇게 감출수록 중요한 인물이라는 건 파악하게 되지만, 동기 자체가 없는 허수아비 같은 인물로 보인다는 게 문제다.
또 다른 예로 중반부에 한나가 몸이 불편한 아이를 몰아붙여 단서를 끌어내는 장면을 들 수 있다.
“미안해요. 제가 실수했어요.”
가식이었다. 사실 그에게 미안하지 않았고 내가 한 일은 실수가 아니었다. 현재 이 방면에서 내 양심은 많이 무뎌진 편이었다. 상처 입은 이들을 찾아가 끔찍한 순간의 기억을 다시금 들추어내게 하는 건 기자였던 내게는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이번 대상이 어린아이였던 점이 마음을 좀 무겁게 만들기는 했지만. p. 285
이 사람이 자기 기사 때문에 피해를 입은 소설가에게 죄책감을 갖는 동일인물이란 말인가. 마지막 박 형사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냥 ‘일관적이지 않은 캐릭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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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남자 캐릭터들이 대단히 재미없게 그려진다. 박 형사와 칠범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악당으로 그려진 김수양과 차동욱은 동일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비슷하다. 비슷한 범행 방식이 반복되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여자 캐릭터에 비해 남자 캐릭터들은 성의 없이 그려진 느낌이다.
김 실장의 대사 중에 ‘꿈이었답니다.’(p. 289)라든지 김수양의 말투에서 ‘안 했소’(p. 402), ‘말했소‘(p. 403) 같은 부분은 너무 어색해서 몰입을 방해했다.
조금 다른 얘기로 ‘여혐 남성 범죄자’는 벌써 너무 익숙한 느낌이 든다. 외국 작품에서는 벌써 수십 년 전부터 있어왔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 많이 보이는 추세인데 벌써 정형화되어버린 것 같다. 앞으로는 전형성을 피할 신선한 방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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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바뀐 이야기인 것치고는, 딴 사람이 차지한 자기 몸에 대한 신경을 별로 안 쓴다. 나 같으면 굉장히 신경 썼을 것 같은데, 심지어는 자기 몸을 입고 죽었는데도 이전의 자기 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평범한 죽음도 아니고 신체가 심하게 훼손됐는데도 말이다. 아마도 작가는 이 소설을 ‘몸이 바뀐 이야기’가 아니라 ‘영혼이 바뀐 이야기’로 생각한 듯하다. 둘은 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시각이다.
그러고 보면 소설 내내 인물들이 서로의 의중과 의도를 유추하고, 다시 그 상대가 그 유추를 유추하는 장면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절친한 박 형사와 칠범 사이도 그렇다. 사건의 해결을 박 형사의 머릿속에서만 풀이하는 것도 그렇고, 작가의 관심은 몸이 아니라 몸 안에 있는 생각과 자아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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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정교한 스타일의 스릴러나 미스터리(추리물 느낌의)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작가가 피땀 흘려 만든 결말은 흥미롭게 읽었다. 하지만 이런 정교한 작품은 작가에게 불필요한(?)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실패하면 말 그대로 졸작이 되는 것이고, 암보스처럼 준수하게 해낸다고 해도 ‘오.’ 정도의 반응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장르적인 특성인 것은 알겠지만 나는 작가들이 정교하게 만들어낸 트릭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 지곤 한다. 이건 뭐 작가의 문제라기 보다는 내 문제이지만.
칠범의 물음이 기억났다. “재미있어요?”라는. 느낀바 많은 책이었지만,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기는 힘들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선호는 “내 스타일은 아니었어.”라며 대충 얼버무리고는 고갤 돌렸었다. p. 345
하지만 과감하게 판타지 설정을 집어넣은 것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다른 독자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설정 하나로 아주 신선한 스릴러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특히나 스릴러 장르에서 지나치게 리얼리티를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언제나 불만이었다. 왜 장르가 상상력을 가둬둬야만 할까. 오히려 활짝 열려 있어야 장르 문학 전체에 발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암보스’는 미스터리 또는 스릴러 소설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만, 일반적인 규범이랄까요, 대부분의 독자에게 익숙한 방식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 그런데 ‘암보스’는 판타지 소설이기도 해요. 그 초현실적인 설정을 끝까지 유지합니다.˝- 김수안, 채널예스 인터뷰 中
나는 작가의 이런 선택을 지지하고 싶고, 차기작에서도 리얼리티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더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해주셨으면 한다. 리얼리티만으로는 반쪽만 즐기는 것이다. 문학은 상상력을 포기해선 안 된다. 보르헤스의 말을 들어보자.
생각의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하고 싶군요. 하나는 논증이고 다른 하나는 신화예요. 그리스인들은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었어요.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기 전에 한 마지막 대화에서 우리는 이성과 신화가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지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우리는 논증을 사용하든 아니면 비유나 이미지나 우화를 사용하든, 둘 중 하나만 사용한답니다. - 『보르헤스의 말』 p. 280-281
이 작품은 스토리 공모대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을 개작한 소설이다. 수상 당시의 원제는 ‘거울의 이면’이었다고 한다.
˝‘암보스’의 출발점이며, 쓰는 내내 변화하지 않은 이미지는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이 마주보는 모습이에요. 소설 속에는 한나가 유진과 마주앉은 장면, 혼자일 때는 거울이나 검은 유리창을 통해 유진의 모습을 만나는 장면이 여러 곳에 있어요.˝ - 김수안, 채널예스 인터뷰 中
거울의 반영된 이미지는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공포심을 자극한다. 나와 반대이면서 동일인인 인물. 그런 존재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실은 소름 끼치는 일이다. 암보스는 바로 그런 공포심을 살살 건드리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다시 보르헤스의 말이다.
다른 하나의 악몽은 거울의 악몽이에요. 내가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데, 내가 모르는 누군가, 내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보이는 거예요. 이윽고 나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면 깨고 나서 심하게 몸이 떨려요. - 『보르헤스의 말』 p. 284
오랜만에 만난 좋은 한국 스릴러여서 반가웠다. 실력 좋은 젊은 작가들이 더더욱 많이 등장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더 진화한 작가의 차기작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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