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거짓말을 한다 - 구글 트렌트로 밝혀낸 충격적인 인간의 욕망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지음, 이영래 옮김 / 더퀘스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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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엄청나게 재밌다는 사실을 밝히고 들어가야겠다. 

책 속에서 소개하는 조사 사례들을 조금만 뽑아보면,

     

남성이 포르노를 검색할 때 연령별로 가장 많이 찾는 여성 직업은 무엇일까?

가난한 가정 출신과 중산층 가정 출신 중 NBA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어느 쪽이 더 높을까?

슈퍼볼 광고는 진짜로 매출을 늘릴까?

명문고에 간발의 차이로 붙은 사람과 떨어진 사람은 이후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일까?

     

이런 이야기들을 도대체 어디 가서 들어볼 수 있겠는가. 

이런 사례들은 저자가 제시한 수많은 흥미로운 사례 중 극히 일부다.

     

설문조사를 비롯한 기존의 조사 방식에서 사람들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거짓말을 하게 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하지만 빅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검색창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솔직해진다. 빅데이터 속에는 사람들의 진짜 마음이 들어있다. 그걸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의 제목에 대한 중요한 근거다.


(작가는 원래 제목을 《내 음경은 얼마나 큰가요? 구글 검색은 인간 본성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로 하고 싶었단다. 하지만 편집자가 극구 반대했는데, 서점에서 그런 제목의 책을 쑥스러워서 누가 사겠냐는 이유였다. 우리는 책을 사면서도 완전히 솔직해지긴 힘들다. 전자책 소설 부문 1위가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였던 해를 아직도 기억한다)

     

‘솔직한 조사 자료’로서의 장점을 어필하려다 보니 조사 사례 중에 섹스와 포르노에 대한 부분이 많다. (저자의 차기작은 ‘섹스’에 집중될 예정이라고 한다) 


검색 결과는 익명일 뿐 아니라 정확한 결과를 얻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솔직해진다. 이익을 보는 것이라면 사람들은 솔직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네이버 영화 별점의 추락한 신뢰도와 영화 평점 사이트 ‘왓챠’가 내세우는 ‘클린한’ 영화 별점의 이유이기도 하다. 왓챠는 자신의 별점 평가를 토대로 취향에 맞는 영화를 추천해 준다. 

     

하지만 이 책이 단순하게 흥미로운 사례를 늘어놓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저자도 그것을 강조한다.

     

이 책에 특이한 사실이나 일회적인 연구가 많이 등장하긴 하지만 단순히 그런 것들을 모아놓은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방법론은 대단히 새롭고 앞으로 계속 세력을 확장해나갈 것이기 때문에, 이 방법론이 어떻게 작용하고 무엇이 이를 그렇게나 획기적이게 하는지에 관한 아이디어를 소개할 것이다. p. 34

     

물론 사례는 중요하다. 사소한 포르노 검색에서부터 계층 간 이동이라던지, 어떤 광고 방식이 소비자에게 더 먹히는가, 아니면 선거에서 누가 이길 것인지, 어떻게 해야 이길 것인지 같은 굉장히 심각한 이슈들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무거운 주제들도 빠짐없이 재미있다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1. 단순한 사례 모음. 혹은 

2. 그것을 통한 새로운 개념의 제시.

정확하게 말하면 저자의 아이디어는 그 사이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여러 사례들과 함께 두루뭉술한 큰 방향을 제시한다. 

저자가 제시한 ‘빅데이터 분석의 힘’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1. 새로운 유형의 데이터 제공

2. 솔직한 데이터 제공

3. 작은 집단도 클로즈업해서 볼 수 있는 것

4. 인과적 실험의 실행 가능성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기대한 구체적 방법론은 아니다. 

저자는 마지막까지 어떤 분명한 법칙이나 방식을 제시하지 못한다.

뭔가 그럴듯한 목표를 계속해서 장황하게 약속하긴 하는데, 끝까지 딱히 뭔가를 내놓는 건 아니다. 


엔딩에서도 계속 결론 내리기를 망설이다가 대충 얼버무리고 만다. 마지막 챕터의 제목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책을 끝까지 읽을까’인데, 경제학 분야 책은 보통 완독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면서 은근히 독자들 탓으로 돌린다. 마지막 문장이 참 걸작이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을 적절한 방법으로 끝맺을 것이다. 데이터에 따라서,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하는 행동에 따라서 말이다. 나는 친구들과 맥주를 한잔하고 이 망할 결론을 그만 쓸 것이다. 빅데이터가 말하길 여기까지 읽고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니까. p. 324

     

저자는 뭔가 대단한 개념을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만을 내보이다가 결국 도망쳐 버린다. 책의 완성도를 낮추는 치명적인 단점이다. 정말 아쉽다. 왜냐하면 이 책이 정말 재밌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법칙’이나 ‘개념’, 혹은 ‘방법론’을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에서만 벗어나면 긍정적인 결말도 쉽게 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데이터에는 이야기가 있다’(p. 236)라는 챕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빅데이터 분석이 인간 본성, 사회적 현상에 대한 가장 정확한 지표들을 제시한다는 건 위에서도 이야기했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왜 그런 지표들이 드러나는지에 대한 이유를 파고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저 그렇다는 것만 알고 그것을 이용하면 그만이다. 

     

예측을 할 때는 어떤 것이 효과가 있는지만 알면 되고 그 이유까지 알 필요는 없다. p. 92

     

그게 한계이기도 하지만 그것 때문에 상상력이 자극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게 바로 내가 ‘데이터에는 이야기가 있다’라는 챕터에 주목하는 이유다.

     

조사대상인 개개인의 사람들은 모두 데이터 속으로 사라진다. 더 정확한 내 느낌은 데이터 속으로 ‘숨는다’. 모든 적나라한 욕망들이 숫자로만 드러난다. 그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혹은, 때때로 이해할 수 없기도 하다. 여기가 바로 상상력이 자극되는 부분이다. 알 것 같다가도 모를 그 부분.

     

그렇게 상상을 하다 보면 나조차도 데이터 앞에서 숨는 셈이 된다. 우리는 숨어서 남의 속마음 지켜보는 걸 즐긴다. 영화관에 앉아서 홍상수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키득거린다. 어떤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 이 책을 재밌게 읽을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다. 작가도 분명 이 장점을 알고 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여타의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데이터와 수치를 기반으로 한다. 생동감 있고 광범위하다. 데이터가 너무도 풍성해서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을 시각화 할 수 있을 정도다. 에드먼턴의 물 소비를 분단위로 확대하면 피리어드가 끝날 때 소파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을 머릿속에 그릴 수 있다. 필라델피아에서 마이애미로 이주해서 탈세를 시작한 사람들을 확대하면, 나는 이 사람들이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세금을 덜 내는 방법을 배우는 장면을 그릴 수 있다. 연령별로 야구팬을 확대하면 나는 나의 어린 시절과 내 남동생의 어린 시절, 여덟 살 때 자신들을 끌어들인 팀을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성인 남성 수백만 명을 그릴 수 있다. p. 237

     

절대적인 다수에 대한 상상은 언제나 어렵다. 그 다수를 구성하는 개개인을 상상하는 건 더 어렵다. 일반인들이 가진 알량한 경험과 지식으로는 그 전체의 단 10퍼센트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은 더 복잡해지고 더 빠르게 변하고 있지 않은가. 


빅데이터의 활용 방안은 훨씬 더 광범위해질 것이고, 전문화될 테지만, 바로 이런 상상력 자극의 매체로서, 인간과 사회를 상상하는 아주 좋은 단서로서의 가치도 크다고 생각한다. 빅데이터는 아무도 해주지 않는 솔직한 속 얘기다.

     

모두 트럼프는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뽑혔는가. 작가의 연구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나는 그것을 보고 박근혜가 당선됐을 당시 그것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국내 언론들이 생각났다. 


오바마를 뽑았던 사람과 트럼프를 뽑았던 사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일까. 박근혜를 끌어내린 사람들과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일까. 


저자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 내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의 사용자는 딱히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온라인에서 더 솔직하다. 겉으로 표방하는 정치적 입장과는 다르게 온라인에서는 그 높은 벽을 쉽게 넘나든다.


미국 내에 해결되지 않은 증오와 편견이 많이 숨어 있었던 것처럼 우리 사회도 그런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좀 더 솔직하게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좀 더 자주, 좀 더 구체적으로 서로의 속마음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에게 빅데이터가 주는 가능성은 희망적이다.

     

모두가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빅데이터는 그 거짓말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가장 놀라운 부분이자, 가장 재밌고 흥미로운 부분이면서,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아쉬운 부분(실은 저자가 가장 아쉬워하고 있는)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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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촛불이다 - 광장에서 함께한 1700만의 목소리
장윤선 지음 / 창비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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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촛불집회에 대한 기록물이다. 그런데 촛불집회가 애당초 박근혜 정부에 대한 울분이 터져 나온 사건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박근혜 정부에 대한 기록일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촛불집회를 돌아보는 뜻깊은 시간이 되었다. 잊고 있던 진기록들을 다시 접하니 말문이 막힌다. 대통령 지지율 20대 ‘0%’. 스무 차례나 연속으로 계속된 촛불집회. 전국 1700만 명의 촛불집회 참가자. 등등. 이런 나라를 잘 살아냈구나 싶어서 가슴이 철렁해진다.

  

“(…) 우리 사회 기득권세력이 이렇게 부도덕하고 이렇게 천박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정말 상상 그 이상이군요. 이런 수준의 사람들이 정치권력을 휘두르는 동안 우리가 살아낸 세월이 참 억울해요. (…)” p. 166-167, 배우 문성근

  

요즘 대한민국의 상황을 보면 벌써 격세지감이 느껴지고, 촛불 국면 당시가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잊고 있던 한탄이 떠오른다. ‘이게 나라냐?’ 

남북정상회담이 너무 쉽게 이뤄지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도 쉽게 서로의 경계를 넘는 남북 정상의 모습을 보면서, 진작 이러면 될 것을 이게 뭐가 그렇게 어려웠던가, 헛웃음만 나온다. 그렇다. 지금, 이게 나라다.

  

‘이게 나라냐?’라는 한탄을 통해서 알 수 있지만, 촛불집회는 이 나라가 아직 나라임을 증명해 보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우리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다!" 

그래서 자원봉사가 넘쳐 났고, 비폭력을 그렇게도 외쳤고, 친절하려고 노력했고 웃으며 즐거우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적폐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렇게 음흉하고 악독하고 이기적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증명해야 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숨이 막히도록 꽉 조여드는 상황에도 화내는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대개 이런 상황이 되면 누군가 먼저 꼭 신경질을 내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 만원버스에서도 지하철에서도 한둘은 꼭 짜증을 낸다. 짜증은 바이러스처럼 퍼져 전염이 되고 급기야 싸움으로 불붙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광화문광장 촛불 주변에는 미소뿐이었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 아빠를 먼저 배려하고, 내 아이 남의 아이 구분하지 않고 애들을 먼저 살폈다. “괜찮으세요?” “미안합니다.” 배려도 많았다. 불의한 권력,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정치집회였지만 현장은 거칠지 않았고 정치적이지도 않았으며 소박하고 매우 따뜻했다. p. 52-53

  

“제가요, 집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제 일흔셋입니다. 그런데 왜 꼭 여기를 왔느냐, 이유가 있지요. 역사의 이 현장에서 그들과 같은 공범이 되지 않으려고 왔습니다. 그러려면 이 광장에 나와 함께 외쳐야만 공범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p. 158

  

이 나라는 위기가 있을 때마다 정부는 무능하고 국민들이 나서서 일을 해결한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억울함을, 우리의 결백함을 거듭 증명해 보여야 했다. 정말 피곤한 나라다.

  

돌이켜보건대, 촛불집회가 계속해서 국민들에게 외쳤던 것은 ‘국민이 곧 국가권력’이라는 아주 당연하고 기본적인 사실이다. 그래서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부 청사 건물 외벽에 레이저로 구호를 쏘는 것이었고, 청와대 앞 100미터까지 행진할 수 있는 것이고, 실시간 검색어 1위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한 출판사에서 헌법 책을 무료로 나눠줬고, 10분 만에 동이 났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 살벌한 ‘갑의 나라’에서, 갑질의 극단인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앞에서, 그 당연한 사실, 국민이 곧 국가라는 사실을 되찾는 것은 중요했다.

그래서 의외로 시민들의 인터뷰 중에는 적폐들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부분이 많았다. 국민들에게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켜줬다는 것이다.

  

“(…)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시위할 때에도 시민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때가 5000명 정도 돼요. 그러니 이번에 그 4배가 더 나온 겁니다. 2만 춘천 시민들이 김진태 의원 사무실 앞 6차선 도로에서 촛불을 들었습니다. 하여간에 이렇게 많은 춘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게 한 건 김진태 의원 공이 커요. 김진태 의원이 춘천 시민을 촛불로 단결하게 해줬어요.” p. 158

  

(김진태 의원은 당시 '바람이 불면 촛불은 꺼진다'는 말로 촛불집회에 기름을 부었다)


확실히 대한민국은 촛불집회 이후로 더 용기 있어졌다. 적폐를 적폐라 말하고, 부정을 부정이라 말하며 여기저기서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촛불집회 때도 그랬다. 적폐들은 박근혜와 최순실만이 아니었다. 재벌 문제, 노동문제, 위안부 문제 모든 약자들이 입을 열었고, 모든 폐부가 터져 나왔다. 촛불이 끝났다고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아직 적폐 청산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시민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계속해서 촛불을 들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이제는 걷잡을 수 없다. 시대는 변했고 국민도 변했다. 고(故)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는 촛불집회 연설의 마지막을 ‘모두 조심하십시오.’라는 말로 맺었다. 우리가 촛불을 잊고 지낸다면 적폐는 다시 우리를 옥죄어올 것이다. 2016년의 촛불은 미래의 우리에게 계속해서 경고한다. 모두 조심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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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나이듦에 대하여 -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당신에게 보여주고픈 그림들
이연식 지음 / 플루토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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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돌아온 탕자)은 렘브란트의 그림이라고 보기에는 딱딱하고 미숙하다. 렘브란트의 성숙한 화풍에 투박하게 흉내낸 듯한 필치가 뒤섞여 있다. 아무래도 제자가 손을 댄 것 같다. 렘브란트가 시작했을지는 몰라도 그의 손을 벗어난 그림이다. 어차피 어느 누구도 스스로 끝을 볼 수는 없다. 제 손으로 끝을 낼 수 있다는 생각 또한 만용이다. 설령 다음 세대가 하는 짓이 성에 안 차더라도 그들이 이어나가도록 해야 한다. p. 6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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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의 별 - 제4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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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고독하게 태어나서 고독하게 살고 때로는 고독하게 사랑하다 결국 고독하게 죽어가는 것 같습니다. 고독은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라 견뎌야 하는 것이며 우리에게는 얼마나 잘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의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고독에 대한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고립되어 있고, 자신에게 부여된 지독한 고독을 견뎌 내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 의문의 사나이 ‘리’가 끼어든다. 리의 개입으로 그들의 고독과 외로움은 잠시나마 위로를 받게 되고, 고독에 대해서 독설을 날리던 소설은 슬그머니 유대와 위로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소설 속 외로움의 원인을 크게 나눠보면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자기 자신, 타인, 사회 시스템.

불행을 자초한 자신과 그런 자신 때문에 위기에 빠진 아들, 어렸을 적 아빠의 성폭행 때문에 일평생 먹는 것을 끊을 수 없게 된 여자, 사람들의 탐욕이 만든 자본주의 시스템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처벌을 받게 되는 과학자.

     

결국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 외로움을 해갈시켜줄 존재도 사람이라는 점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는 것은 지긋지긋한 밀당의 연속이다.

외로운가 싶으면 또 혼자 있고 싶고, 사무치게 사람이 그립다 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꼴도 보기 싫은 게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그건 마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 같다. 혐오스럽다가도 연민에 빠지고 마는. 작가는 유난히 똥 얘기를 자주 꺼내며 인간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다가도 완전히 인간을 버리지는 못한다.

     

모든 것은 언제나 연민에서 시작된다우. 누군가가 불쌍해 보인다는 건 그게 어떤 상황이든 절대 거기서 끝나는 법이 없지. 그러니까 연민은 불쏘시개 같은 건데, 다른 감정에 불을 붙이고, 불은 또 다른 감정으로 옮겨 붙고, 더 이상 아무것도 탈 게 없을 때까지 모든 것을 태워버리다가…… 이상한 일이지만 맨 마지막에 남는 것도 연민뿐이고. p. 47

     

작가나 독자나, 너나 나나 결국은 모두 똑같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붙들지도, 뿌리치지도 못한 채 괴로워한다. 

     

인간은 자기가 짐승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죽어가는 짐승이라고 자학하면서 자기를 괴롭힐 수 있는 유일한 짐승이었다. p. 179

     

사람들은 리의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혼자 웅크리고 있다가도, 결국 오밤중에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속 얘기를 모조리 털어놓고 마는 게 사람이니까. 고독이란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을 맞이해 주는 것도 결국 사람뿐이다.

     

나는 행성대관람차를 상상하면서 어쩔 수 없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그래비티>를 떠올렸다. 지구라는 타인들을 떠나지도 못하고, 다시 그들 속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궤도에 머물며 붕 떠있기만 하는 영화 속 주인공은 리를 닮았다. 그곳에서 관조하는 세상은 기가 막히게 아름답지만, 우리는 지구를 벗어나 생존할 수가 없다. 

     

소설은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게, 농담처럼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 같은 유머는 사실 거리감에서 나온다. 굳이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말(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미래의, 외국인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성을 오가는 극단적인 삶이 유머를 자아내는 이유는 독자들과의 거리감 때문임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멀리서 보면 사람들은 한 명씩 고립되지 않았다.

아주 가느다란 인연들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챕터에는 다른 챕터와의 연결점이 존재하고, 그 연결점이 바로 다른 챕터의 주인공들이다. 그 위태로울 정도의 굵기를 가진 인연의 끈들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마음이 두근거리게 된다. 우리는 혹시 외롭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플랜A는 행성 단위의 거대한 가능성이다……. 인간은 모든 가능성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그게 아무리 사소한 가능성이라 해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방치한다는 것은…… (…)” p. 21

     

플랜A가 일종의 가능성이라면, 이 소설은 일종의 ‘사고실험’처럼 느껴진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 중에 작가가 선별한 몇 개의 가능성이 있다. 서로 연결되어 연대하고 위로할 가능성은 없는 걸까. 아주 가느다란 인연의 끈에 그 희망을 걸어도 되는 걸까. 플랜A의 리는 그 희망에 기대를 걸어보며 그렇게 무수히 많은 전화를 걸었던 걸까.

     

플랜A는 사실 다 큰 어린 왕자가 혼자 살고 있는 B612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왕자는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불러주기를.

     

“아무도 없는 나라의 왕이 된 기분을 양 자네가 알까 모르겠군.”

“영감님이 지금 그렇다는 거예요?”

“사실이 그래. 난 이 거대한 유원지의 유일한 이용객일세. 그런데 이용객이 한 명도 없는 유원지는…….” p. 220

     

그리고 작가는 리의 자리에 서서 독자들을 향해 전화를 걸고 있다. 우연히 그 전화를 받은 나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작가는 리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누군가 그 뒤를 이어서 유원지를 지켜주기를 바란다.

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그곳에 누군가 있어야 하는 걸까?

다른 사람의 외로움을 위로하려면, 그보다 훨씬 외로운 사람이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 다른 사람들의 외로움을 대신 짊어질 사람. 마치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에서 제일 외로웠던 어떤 사람처럼 말이다.

     

(…) 어쩌면 그중 누군가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합친 것보다 더 고독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자기보다 더 고독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무라는 한 달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

기무라는 플랜A에 있는 몇 개의 대륙과 하나로 이어진 거대한 대양을 생각했다. 기무라의 체스 친구는 그곳에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무라는 더 이상 자신의 고독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p. 16-17

     

아무도 없는 유원지가 혼자서 돌아가는 모습은 마치 성경에서 약속한 새 예루살렘의 모습 같다. 하나님은 그곳에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해 놓고 사람들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노아와 그 가족만큼의 사람들도 없는 게 아닐까. 약속의 징표였던 무지개마저 무색해질 정도로 사람들은 그 약속을 잊은 것 같다. 까마귀를 대신해서 생명의 징표를 가지고 돌아왔던 비둘기는 보이지도 않는다.

     

이제 다니엘 심슨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억해야 할 것 같았는데,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새 어디로 날아갔는지 비에 쫄딱 젖은 까마귀는 보이지 않았고, 다니엘 심슨은 리를 기억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리를 기억할지도 모르지만 다니엘 심슨이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가세, 잭. 비가 정말 징글맞게도 내리는군.” p. 228

     

그리고 그것은 기억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상상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나머지 모두를 위해 플랜A를 지키고 있다는 상상.

     

몇십만 평짜리 임야라니, 세상에 그런 물건이 정말 있기는 한 걸까? 물론 있기야 있겠지. 있으니까 평당 얼마씩 가격이 붙고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하는 거 아니겠어? 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 모두 뜬구름 잡는 소리거든. 멀리 있는 건 그게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진짜 인생은 아니니까. 안 그렇수? 모름지기 진짜 인생이라는 건 말이야, 이렇게 두 손으로 단단히 잡은 다음 한입 가득 베어 물고 쩝쩝 소리를 내면서 씹을 수 있어야 해. 이 맥도널드 자이언트 버거처럼 말이우. p. 33

     

종교적 상상력에 기댄다면 이 소설의 엔딩은 마치 인류에게 선고하는 심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그 말은 아직 우리의 외로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무도 그것을 상상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외로움에 지친 사람이 오밤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결국 그것을 상상할 것이고, 기억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는 인류에게 심판의 엔딩을 선사하면서도 냉정하게 모든 것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우리에겐 플랜A 뿐 아니라, 플랜B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다. 그렇게 어떻게 해서든 위로를 받아내고, 위로를 주고야 말 것이다. 최소한 '별의 리'를 기억하는 작가가 동시대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는가. 

   

이 소설이 고독을 견뎌나가는 당신의 분투에 작은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길 순 없지만 죽을 때까지 잘 견디면 진 건 아니니까요.  -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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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늙은 여자 - 알래스카 원주민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짐 그랜트 그림, 김남주 옮김 / 이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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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알라스카에 살고 있는 아타바스칸 원주민 중 그위친 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확히는 그위친 족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작가가 각색한 것이다.) 책 뒷부분에 실린 그위친 족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이동 생활을 하다가 1900년경에야 정착 생활을 시작했고, 동물 가죽 산업에 종사하기 전까지는 순록이나 다람쥐, 토끼 등을 잡아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열악한 환경 때문에 기근에 자주 시달려야 했는데, 이 이야기도 바로 그런 힘겨운 겨울의 기근 동안에 벌어진다.

『두 늙은 여자』라는 제목에서 이미 중요 화두가 보인다. ‘노인’과 ‘여성’이라는 이중의 핸디캡. 변방의 작은 이야기가 이렇게 현대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바다 건너 한국이라는 나라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이야기가 현대의 노인문제, 그리고 여성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선 노인문제를 보자.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고려장’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기근이 너무 심해져 부족장은 가장 나이 많은 두 여성 노인(칙디야크Ch‘idigyaak와 사Sa)을 무리에서 이탈시킨다. 그위친 족의 생활상을 살펴보면 이해가 되는 행동이다. 거친 환경에서 사냥으로 먹고 사는 남성중심 사회, 더 정확히는 근육의 힘이 중요시 되는 ‘젊은 남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다. 그런 환경 속에서 ‘늙고’, ‘여자인 몸’으로 단 둘이 무리에게 버려졌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살아남는다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그 생존은 기존 사회를 뒤흔드는 혁명에 가깝다.

무리에게 버려진 두 할머니는 하루하루의 생존이 ‘사는 것’의 전부다. 거기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위대한 것을 이룩해 낸다. 보란 듯이 살아남아, 젊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물론 노인들의 연륜과 지혜는 원시적 원주민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하지만 나는 노인들의 가치가 그들의 지혜와 지식에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 대한 존경은 그들이 뭔가를 증명해 보였을 때 오는 것이지, 젊은이들의 필요에 의한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특정 기술자나 특출 난 지식인이 아닌 이상 요즘같이 엄청난 속도로 바뀌는 사회 안에서는 바로 어제의 지식조차 낡은 것이다.

전후 미국 젊은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작가 커트 보니것은, 한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약간 더 나이든 사람들은 약간 더 젊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바랄까요? 그들은 오랫동안 종종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남았고, 그 점에서 칭찬을 듣고 싶어합니다. 약간 더 젊은 사람들은 약간 더 나이 많은 사람들의 공로를 인정하는 데 지나치게 인색합니다. -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p. 29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존경을 받는 방법은, 이전의 공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존경할만한 인간임을 계속해서 증명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안일함 없이 자기 삶을 끝까지 책임지고 살아가는 것의 다름 아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존경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젊은이들에 대한 원망과 질책과 함께 노인 본인들의 반성도 촉구하고 있다.

“두 늙은 여인. 그들은 만족할 줄 모르고 불평을 해대지. 우리는 먹을 게 없다고, 젊었을 때가 좋았다고 떠들어댔어. 사실은 더 나을 것도 없었는데 말이야. 우리는 우리가 너무 늙었다고 생각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우리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젊은 사람들에게 인식시켰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우리가 더이상 이 세상에서 아무 쓸모도 없다고 여기는 거야.” p. 43

노인들을 버린 젊은이들도 물론 잘못이 있지만, 늙은 이후 모든 짐을 젊은이에게 떠넘기는 노인도 옳지는 않다. 젊은이도 늙은이도 잘못이 있다. 그 말은 양쪽 다 반성하고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칙디야크와 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살아남는 법칙임을 깨닫고 그대로 시행했다.

노년기에 들어서서 약해지긴 했지만, 칙디야크와 사는 자신들이 힘든 노역이라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만 대지가 그 대가로 자신들에게 안락을 준다는 자연의 법칙을 알고 있었다. p. 61

커트 보니것이 당대 젊은이들에게 존경 받았던 점도 같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직접 참여했고, 드레스덴 폭격 당시 그곳의 나치 포로로 붙잡혀 있었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와 그 경험을 『제5도살장』으로 녹여낸 그는 평생에 걸쳐 한결같은 휴머니즘과 반전 메시지를 던졌다. 젊은이들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당신들을 보호하겠어요.”
모두들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동료들도 두 여인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들은 이 기적적인 생존을 목격하고 연장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했던 것이다. p. 140

이처럼 직접 경험한 사람, 직접 증명해낸 사람이 갖게 되는 권위가 있다. 그것은 억지로 만든 픽션들이 가지는 권위를 훌쩍 뛰어넘는다. 독자들은 그런 이야기가 전해주는 감동이 ‘진짜’라고 여긴다. 『두 늙은 여자』의 작가인 벨마 월리스도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이 이 이야기를 전할 적격자임을 초반에 이미 증명해 보인다.

나중에 우리의 겨울용 오두막 안에서 나는 이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 이야기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그것은 이 이야기가 내 삶에 응용할 수 있는 교훈을 갖고 있음은 물론, 다름아닌 나의 부족, 우리의 과거에 대한 것─내가 뼛속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p. 9, 서문

특정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그 문화권 밖에 있는 사람이 전달하게 되면 때때로 잘못된 해석이 나올 수 있는데, 그런 오해가 빚어진다면 정말이지 비극이다. 어떤 이야기가 일단 책으로 간행되고 나면, 설사 그것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하더라도 하나의 역사로, 하나의 사실로 여겨지기 쉽기 때문이다. p. 10, 서문


이제 나머지 부분인 ‘여성 문제’로 이야기를 바라보자.
나는 두 할머니의 생존을 지켜보면서 상황에 맞지 않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젊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늙은 여자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란 보잘 것 없다. 그들은 어른을 공경하도록 교육 받았지만,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그들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약간의 배려조차 여자들이 순종하고 입을 다물 때야 겨우겨우 얻는 것들이다. 그렇게 어찌 보면 ‘더럽고 치사하게’ 살던 그들이, 그 알량한 이익마저 완벽하게 잃고, 더 이상 잃을 게 없어지는 순간, 자기 목숨을 자신이 스스로 돌봐야 하는 순간, 엄청난 육체적 고통과 동시에 자유로움이 오는 것이다. 두 할머니 중 ‘사’는 젊었을 때부터 사냥에 능했고, 가정을 꾸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으며, 남자들과 동등하게 생활하는 것을 즐겼었다. 하지만 부족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포기해야 했고, 결국 입을 다물고 어쩔 수 없이 순종하며 살게 된다.

이윽고 내 나이가 더 많아져서 여자가 가정을 꾸려야 하는 나이를 지나자, 모두들 나에 대해 수군거렸어. 나는 도대체 그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지. 왜냐하면 나는 남자와 함께 살지도 않고 아이도 없었지만, 여전히 내 몫의 일을 해서 식량을 조달하고 있었거든. 남자들보다 더 많은 식량을 구해오는 경우도 여러 차레 있었어.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어. p. 80

칙디야크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알지도 못하는 나이 많은 남자와 어린 나이에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다. 노인들의 세대는 확실히 그랬다. 여자들에게 끔찍한 시대였다. 하지만 다음 세대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가진 능력, 혹은 잠재력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자발적인 복종만은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혀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특별히 ‘남성’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근육으로 먹고 사는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이런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으면서도, 곳곳에 ‘여인’이라는 멸칭을 사용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노인과 여성. 공동체가 이들에게 가했던 폭력을 이제는 거둬야 한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끌어안고 잃어버렸던 공동체의 신뢰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일정 기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건 당연하다. 그들을 소외시킨 시간이 너무도 오래됐다. 회복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겨울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두 야영지 사이의 길이 사람들의 발길로 다져졌다. p. 156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족장의 망설임과 죄책감은 이전까지 고수해온 가부장적인 권위가 무효해졌음을 잘 보여준다. 칙디야크의 손자 ‘슈러 주’는 기존 시스템에 뭔가 불합리한 면이 있음을 간파한다.

부족 내에서 여자들은 물건을 잔뜩 실은 썰매를 끄는 것 같은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 또한 그 밖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들이 여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남자들은 사냥에만 집중했다. 그래야만 부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불공평한 작업 분담에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해오던 방식이었으므로.
슈러 주는 여자들에게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남자들이 여자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보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거듭 설명을 들었음에도 그는 어째서 남자들이 여자들을 도와 일을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p. 22-23

이야기를 읽다보면 무엇보다 모든 것이 가진 양면이 느껴진다.
자연은 잔혹한 동시에 너그럽고,
동물은 사람에게 잡아먹히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모은 양식을 훔치기도 하고,
거꾸로 인간을 잡아먹기도 한다.
비극은 노인들에게 활기를 주었다.
몸이 바쁘면 마음이 심란할 겨를이 없다.
거꾸로 몸이 편하면 잊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를 채우기 시작한다.

우리는 어쩌면 ‘젊고’ ‘남성’인 사회에 집중하다가, 인간이 지닌 양면 중 한쪽을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위기가 올수록 우리는 뭉쳐야 한다. 이제는 위기가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럴 때 일수록 젊은이와 노인들 모두의 힘을 합쳐야 한다. 여자와 남자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 누구도 제외하지 않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노력해야 겨우 이겨낼 수 있고, 기적처럼 생존할 수 있다.

살아남은 두 노인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의 매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p. 156

이것이 그들이 획득한 가장 큰 깨달음일 것이다.
이야기를 보는 우리도 그것을 느끼게 된다.
약하디 약한 두 할머니를 통해서 말이다. 강자에게는 당연한 그 하루하루가 누군가에게는 필사적인 쟁취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자연 안에서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그런 겸손함을, 우리는 많이 잊고 있는 것 같다.

네번째 되는 날 밤, 두 여인은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하며 개울에 이르렀다. 그들 주위의 모든 것이 은빛 달빛으로 싸여있었다. 수많은 나무 아래 그리고 야영지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두 여인은 잠시 동안 둑 위에 서서 그 특별한 밤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쉬었다. 사는 자신 같은 사람, 짐승, 나아가 나무까지 압도하는 대지의 힘에 감탄했다. 그들 모두는 대지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지의 법칙에 복종하지 않는 부주의하고 무가치한 생명에는 즉각 죽음이 닥칠 터였다. p.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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