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늙은 여자 - 알래스카 원주민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짐 그랜트 그림, 김남주 옮김 / 이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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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알라스카에 살고 있는 아타바스칸 원주민 중 그위친 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확히는 그위친 족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작가가 각색한 것이다.) 책 뒷부분에 실린 그위친 족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이동 생활을 하다가 1900년경에야 정착 생활을 시작했고, 동물 가죽 산업에 종사하기 전까지는 순록이나 다람쥐, 토끼 등을 잡아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열악한 환경 때문에 기근에 자주 시달려야 했는데, 이 이야기도 바로 그런 힘겨운 겨울의 기근 동안에 벌어진다.

『두 늙은 여자』라는 제목에서 이미 중요 화두가 보인다. ‘노인’과 ‘여성’이라는 이중의 핸디캡. 변방의 작은 이야기가 이렇게 현대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바다 건너 한국이라는 나라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이야기가 현대의 노인문제, 그리고 여성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선 노인문제를 보자.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고려장’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기근이 너무 심해져 부족장은 가장 나이 많은 두 여성 노인(칙디야크Ch‘idigyaak와 사Sa)을 무리에서 이탈시킨다. 그위친 족의 생활상을 살펴보면 이해가 되는 행동이다. 거친 환경에서 사냥으로 먹고 사는 남성중심 사회, 더 정확히는 근육의 힘이 중요시 되는 ‘젊은 남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다. 그런 환경 속에서 ‘늙고’, ‘여자인 몸’으로 단 둘이 무리에게 버려졌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살아남는다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그 생존은 기존 사회를 뒤흔드는 혁명에 가깝다.

무리에게 버려진 두 할머니는 하루하루의 생존이 ‘사는 것’의 전부다. 거기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위대한 것을 이룩해 낸다. 보란 듯이 살아남아, 젊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물론 노인들의 연륜과 지혜는 원시적 원주민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하지만 나는 노인들의 가치가 그들의 지혜와 지식에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 대한 존경은 그들이 뭔가를 증명해 보였을 때 오는 것이지, 젊은이들의 필요에 의한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특정 기술자나 특출 난 지식인이 아닌 이상 요즘같이 엄청난 속도로 바뀌는 사회 안에서는 바로 어제의 지식조차 낡은 것이다.

전후 미국 젊은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작가 커트 보니것은, 한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약간 더 나이든 사람들은 약간 더 젊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바랄까요? 그들은 오랫동안 종종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남았고, 그 점에서 칭찬을 듣고 싶어합니다. 약간 더 젊은 사람들은 약간 더 나이 많은 사람들의 공로를 인정하는 데 지나치게 인색합니다. -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p. 29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존경을 받는 방법은, 이전의 공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존경할만한 인간임을 계속해서 증명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안일함 없이 자기 삶을 끝까지 책임지고 살아가는 것의 다름 아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존경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젊은이들에 대한 원망과 질책과 함께 노인 본인들의 반성도 촉구하고 있다.

“두 늙은 여인. 그들은 만족할 줄 모르고 불평을 해대지. 우리는 먹을 게 없다고, 젊었을 때가 좋았다고 떠들어댔어. 사실은 더 나을 것도 없었는데 말이야. 우리는 우리가 너무 늙었다고 생각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우리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젊은 사람들에게 인식시켰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우리가 더이상 이 세상에서 아무 쓸모도 없다고 여기는 거야.” p. 43

노인들을 버린 젊은이들도 물론 잘못이 있지만, 늙은 이후 모든 짐을 젊은이에게 떠넘기는 노인도 옳지는 않다. 젊은이도 늙은이도 잘못이 있다. 그 말은 양쪽 다 반성하고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칙디야크와 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살아남는 법칙임을 깨닫고 그대로 시행했다.

노년기에 들어서서 약해지긴 했지만, 칙디야크와 사는 자신들이 힘든 노역이라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만 대지가 그 대가로 자신들에게 안락을 준다는 자연의 법칙을 알고 있었다. p. 61

커트 보니것이 당대 젊은이들에게 존경 받았던 점도 같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직접 참여했고, 드레스덴 폭격 당시 그곳의 나치 포로로 붙잡혀 있었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와 그 경험을 『제5도살장』으로 녹여낸 그는 평생에 걸쳐 한결같은 휴머니즘과 반전 메시지를 던졌다. 젊은이들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당신들을 보호하겠어요.”
모두들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동료들도 두 여인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들은 이 기적적인 생존을 목격하고 연장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했던 것이다. p. 140

이처럼 직접 경험한 사람, 직접 증명해낸 사람이 갖게 되는 권위가 있다. 그것은 억지로 만든 픽션들이 가지는 권위를 훌쩍 뛰어넘는다. 독자들은 그런 이야기가 전해주는 감동이 ‘진짜’라고 여긴다. 『두 늙은 여자』의 작가인 벨마 월리스도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이 이 이야기를 전할 적격자임을 초반에 이미 증명해 보인다.

나중에 우리의 겨울용 오두막 안에서 나는 이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 이야기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그것은 이 이야기가 내 삶에 응용할 수 있는 교훈을 갖고 있음은 물론, 다름아닌 나의 부족, 우리의 과거에 대한 것─내가 뼛속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p. 9, 서문

특정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그 문화권 밖에 있는 사람이 전달하게 되면 때때로 잘못된 해석이 나올 수 있는데, 그런 오해가 빚어진다면 정말이지 비극이다. 어떤 이야기가 일단 책으로 간행되고 나면, 설사 그것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하더라도 하나의 역사로, 하나의 사실로 여겨지기 쉽기 때문이다. p. 10, 서문


이제 나머지 부분인 ‘여성 문제’로 이야기를 바라보자.
나는 두 할머니의 생존을 지켜보면서 상황에 맞지 않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젊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늙은 여자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란 보잘 것 없다. 그들은 어른을 공경하도록 교육 받았지만,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그들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약간의 배려조차 여자들이 순종하고 입을 다물 때야 겨우겨우 얻는 것들이다. 그렇게 어찌 보면 ‘더럽고 치사하게’ 살던 그들이, 그 알량한 이익마저 완벽하게 잃고, 더 이상 잃을 게 없어지는 순간, 자기 목숨을 자신이 스스로 돌봐야 하는 순간, 엄청난 육체적 고통과 동시에 자유로움이 오는 것이다. 두 할머니 중 ‘사’는 젊었을 때부터 사냥에 능했고, 가정을 꾸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으며, 남자들과 동등하게 생활하는 것을 즐겼었다. 하지만 부족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포기해야 했고, 결국 입을 다물고 어쩔 수 없이 순종하며 살게 된다.

이윽고 내 나이가 더 많아져서 여자가 가정을 꾸려야 하는 나이를 지나자, 모두들 나에 대해 수군거렸어. 나는 도대체 그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지. 왜냐하면 나는 남자와 함께 살지도 않고 아이도 없었지만, 여전히 내 몫의 일을 해서 식량을 조달하고 있었거든. 남자들보다 더 많은 식량을 구해오는 경우도 여러 차레 있었어.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어. p. 80

칙디야크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알지도 못하는 나이 많은 남자와 어린 나이에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다. 노인들의 세대는 확실히 그랬다. 여자들에게 끔찍한 시대였다. 하지만 다음 세대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가진 능력, 혹은 잠재력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자발적인 복종만은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혀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특별히 ‘남성’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근육으로 먹고 사는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이런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으면서도, 곳곳에 ‘여인’이라는 멸칭을 사용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노인과 여성. 공동체가 이들에게 가했던 폭력을 이제는 거둬야 한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끌어안고 잃어버렸던 공동체의 신뢰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일정 기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건 당연하다. 그들을 소외시킨 시간이 너무도 오래됐다. 회복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겨울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두 야영지 사이의 길이 사람들의 발길로 다져졌다. p. 156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족장의 망설임과 죄책감은 이전까지 고수해온 가부장적인 권위가 무효해졌음을 잘 보여준다. 칙디야크의 손자 ‘슈러 주’는 기존 시스템에 뭔가 불합리한 면이 있음을 간파한다.

부족 내에서 여자들은 물건을 잔뜩 실은 썰매를 끄는 것 같은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 또한 그 밖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들이 여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남자들은 사냥에만 집중했다. 그래야만 부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불공평한 작업 분담에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해오던 방식이었으므로.
슈러 주는 여자들에게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남자들이 여자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보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거듭 설명을 들었음에도 그는 어째서 남자들이 여자들을 도와 일을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p. 22-23

이야기를 읽다보면 무엇보다 모든 것이 가진 양면이 느껴진다.
자연은 잔혹한 동시에 너그럽고,
동물은 사람에게 잡아먹히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모은 양식을 훔치기도 하고,
거꾸로 인간을 잡아먹기도 한다.
비극은 노인들에게 활기를 주었다.
몸이 바쁘면 마음이 심란할 겨를이 없다.
거꾸로 몸이 편하면 잊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를 채우기 시작한다.

우리는 어쩌면 ‘젊고’ ‘남성’인 사회에 집중하다가, 인간이 지닌 양면 중 한쪽을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위기가 올수록 우리는 뭉쳐야 한다. 이제는 위기가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럴 때 일수록 젊은이와 노인들 모두의 힘을 합쳐야 한다. 여자와 남자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 누구도 제외하지 않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노력해야 겨우 이겨낼 수 있고, 기적처럼 생존할 수 있다.

살아남은 두 노인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의 매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p. 156

이것이 그들이 획득한 가장 큰 깨달음일 것이다.
이야기를 보는 우리도 그것을 느끼게 된다.
약하디 약한 두 할머니를 통해서 말이다. 강자에게는 당연한 그 하루하루가 누군가에게는 필사적인 쟁취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자연 안에서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그런 겸손함을, 우리는 많이 잊고 있는 것 같다.

네번째 되는 날 밤, 두 여인은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하며 개울에 이르렀다. 그들 주위의 모든 것이 은빛 달빛으로 싸여있었다. 수많은 나무 아래 그리고 야영지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두 여인은 잠시 동안 둑 위에 서서 그 특별한 밤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쉬었다. 사는 자신 같은 사람, 짐승, 나아가 나무까지 압도하는 대지의 힘에 감탄했다. 그들 모두는 대지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지의 법칙에 복종하지 않는 부주의하고 무가치한 생명에는 즉각 죽음이 닥칠 터였다. p.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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