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나이듦에 대하여 -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당신에게 보여주고픈 그림들
이연식 지음 / 플루토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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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그림(돌아온 탕자)은 렘브란트의 그림이라고 보기에는 딱딱하고 미숙하다. 렘브란트의 성숙한 화풍에 투박하게 흉내낸 듯한 필치가 뒤섞여 있다. 아무래도 제자가 손을 댄 것 같다. 렘브란트가 시작했을지는 몰라도 그의 손을 벗어난 그림이다. 어차피 어느 누구도 스스로 끝을 볼 수는 없다. 제 손으로 끝을 낼 수 있다는 생각 또한 만용이다. 설령 다음 세대가 하는 짓이 성에 안 차더라도 그들이 이어나가도록 해야 한다. p. 6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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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의 별 - 제4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강태식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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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고독하게 태어나서 고독하게 살고 때로는 고독하게 사랑하다 결국 고독하게 죽어가는 것 같습니다. 고독은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라 견뎌야 하는 것이며 우리에게는 얼마나 잘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의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고독에 대한 이야기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고립되어 있고, 자신에게 부여된 지독한 고독을 견뎌 내야 한다.

그런데 거기에 의문의 사나이 ‘리’가 끼어든다. 리의 개입으로 그들의 고독과 외로움은 잠시나마 위로를 받게 되고, 고독에 대해서 독설을 날리던 소설은 슬그머니 유대와 위로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소설 속 외로움의 원인을 크게 나눠보면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자기 자신, 타인, 사회 시스템.

불행을 자초한 자신과 그런 자신 때문에 위기에 빠진 아들, 어렸을 적 아빠의 성폭행 때문에 일평생 먹는 것을 끊을 수 없게 된 여자, 사람들의 탐욕이 만든 자본주의 시스템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처벌을 받게 되는 과학자.

     

결국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 외로움을 해갈시켜줄 존재도 사람이라는 점이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는 것은 지긋지긋한 밀당의 연속이다.

외로운가 싶으면 또 혼자 있고 싶고, 사무치게 사람이 그립다 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꼴도 보기 싫은 게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그건 마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 같다. 혐오스럽다가도 연민에 빠지고 마는. 작가는 유난히 똥 얘기를 자주 꺼내며 인간에 대한 경멸을 드러내다가도 완전히 인간을 버리지는 못한다.

     

모든 것은 언제나 연민에서 시작된다우. 누군가가 불쌍해 보인다는 건 그게 어떤 상황이든 절대 거기서 끝나는 법이 없지. 그러니까 연민은 불쏘시개 같은 건데, 다른 감정에 불을 붙이고, 불은 또 다른 감정으로 옮겨 붙고, 더 이상 아무것도 탈 게 없을 때까지 모든 것을 태워버리다가…… 이상한 일이지만 맨 마지막에 남는 것도 연민뿐이고. p. 47

     

작가나 독자나, 너나 나나 결국은 모두 똑같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붙들지도, 뿌리치지도 못한 채 괴로워한다. 

     

인간은 자기가 짐승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죽어가는 짐승이라고 자학하면서 자기를 괴롭힐 수 있는 유일한 짐승이었다. p. 179

     

사람들은 리의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혼자 웅크리고 있다가도, 결국 오밤중에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속 얘기를 모조리 털어놓고 마는 게 사람이니까. 고독이란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을 맞이해 주는 것도 결국 사람뿐이다.

     

나는 행성대관람차를 상상하면서 어쩔 수 없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그래비티>를 떠올렸다. 지구라는 타인들을 떠나지도 못하고, 다시 그들 속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궤도에 머물며 붕 떠있기만 하는 영화 속 주인공은 리를 닮았다. 그곳에서 관조하는 세상은 기가 막히게 아름답지만, 우리는 지구를 벗어나 생존할 수가 없다. 

     

소설은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게, 농담처럼 이야기를 끌고 간다. 그 같은 유머는 사실 거리감에서 나온다. 굳이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말(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미래의, 외국인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행성을 오가는 극단적인 삶이 유머를 자아내는 이유는 독자들과의 거리감 때문임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멀리서 보면 사람들은 한 명씩 고립되지 않았다.

아주 가느다란 인연들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챕터에는 다른 챕터와의 연결점이 존재하고, 그 연결점이 바로 다른 챕터의 주인공들이다. 그 위태로울 정도의 굵기를 가진 인연의 끈들을 발견할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마음이 두근거리게 된다. 우리는 혹시 외롭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플랜A는 행성 단위의 거대한 가능성이다……. 인간은 모든 가능성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그게 아무리 사소한 가능성이라 해도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방치한다는 것은…… (…)” p. 21

     

플랜A가 일종의 가능성이라면, 이 소설은 일종의 ‘사고실험’처럼 느껴진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 중에 작가가 선별한 몇 개의 가능성이 있다. 서로 연결되어 연대하고 위로할 가능성은 없는 걸까. 아주 가느다란 인연의 끈에 그 희망을 걸어도 되는 걸까. 플랜A의 리는 그 희망에 기대를 걸어보며 그렇게 무수히 많은 전화를 걸었던 걸까.

     

플랜A는 사실 다 큰 어린 왕자가 혼자 살고 있는 B612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왕자는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불러주기를.

     

“아무도 없는 나라의 왕이 된 기분을 양 자네가 알까 모르겠군.”

“영감님이 지금 그렇다는 거예요?”

“사실이 그래. 난 이 거대한 유원지의 유일한 이용객일세. 그런데 이용객이 한 명도 없는 유원지는…….” p. 220

     

그리고 작가는 리의 자리에 서서 독자들을 향해 전화를 걸고 있다. 우연히 그 전화를 받은 나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작가는 리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누군가 그 뒤를 이어서 유원지를 지켜주기를 바란다.

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그곳에 누군가 있어야 하는 걸까?

다른 사람의 외로움을 위로하려면, 그보다 훨씬 외로운 사람이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 다른 사람들의 외로움을 대신 짊어질 사람. 마치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에서 제일 외로웠던 어떤 사람처럼 말이다.

     

(…) 어쩌면 그중 누군가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합친 것보다 더 고독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자기보다 더 고독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무라는 한 달 전부터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

기무라는 플랜A에 있는 몇 개의 대륙과 하나로 이어진 거대한 대양을 생각했다. 기무라의 체스 친구는 그곳에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무라는 더 이상 자신의 고독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p. 16-17

     

아무도 없는 유원지가 혼자서 돌아가는 모습은 마치 성경에서 약속한 새 예루살렘의 모습 같다. 하나님은 그곳에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해 놓고 사람들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노아와 그 가족만큼의 사람들도 없는 게 아닐까. 약속의 징표였던 무지개마저 무색해질 정도로 사람들은 그 약속을 잊은 것 같다. 까마귀를 대신해서 생명의 징표를 가지고 돌아왔던 비둘기는 보이지도 않는다.

     

이제 다니엘 심슨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억해야 할 것 같았는데,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새 어디로 날아갔는지 비에 쫄딱 젖은 까마귀는 보이지 않았고, 다니엘 심슨은 리를 기억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리를 기억할지도 모르지만 다니엘 심슨이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가세, 잭. 비가 정말 징글맞게도 내리는군.” p. 228

     

그리고 그것은 기억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상상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나머지 모두를 위해 플랜A를 지키고 있다는 상상.

     

몇십만 평짜리 임야라니, 세상에 그런 물건이 정말 있기는 한 걸까? 물론 있기야 있겠지. 있으니까 평당 얼마씩 가격이 붙고 팔기도 하고 사기도 하는 거 아니겠어? 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 모두 뜬구름 잡는 소리거든. 멀리 있는 건 그게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진짜 인생은 아니니까. 안 그렇수? 모름지기 진짜 인생이라는 건 말이야, 이렇게 두 손으로 단단히 잡은 다음 한입 가득 베어 물고 쩝쩝 소리를 내면서 씹을 수 있어야 해. 이 맥도널드 자이언트 버거처럼 말이우. p. 33

     

종교적 상상력에 기댄다면 이 소설의 엔딩은 마치 인류에게 선고하는 심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삶은 끝나지 않았다. 그 말은 아직 우리의 외로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무도 그것을 상상하지 않고, 기억하지 않는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외로움에 지친 사람이 오밤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결국 그것을 상상할 것이고, 기억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가는 인류에게 심판의 엔딩을 선사하면서도 냉정하게 모든 것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우리에겐 플랜A 뿐 아니라, 플랜B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다. 그렇게 어떻게 해서든 위로를 받아내고, 위로를 주고야 말 것이다. 최소한 '별의 리'를 기억하는 작가가 동시대 우리 곁에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는가. 

   

이 소설이 고독을 견뎌나가는 당신의 분투에 작은 위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길 순 없지만 죽을 때까지 잘 견디면 진 건 아니니까요.  -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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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늙은 여자 - 알래스카 원주민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짐 그랜트 그림, 김남주 옮김 / 이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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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알라스카에 살고 있는 아타바스칸 원주민 중 그위친 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확히는 그위친 족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작가가 각색한 것이다.) 책 뒷부분에 실린 그위친 족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이동 생활을 하다가 1900년경에야 정착 생활을 시작했고, 동물 가죽 산업에 종사하기 전까지는 순록이나 다람쥐, 토끼 등을 잡아먹으며 살았다고 한다. 열악한 환경 때문에 기근에 자주 시달려야 했는데, 이 이야기도 바로 그런 힘겨운 겨울의 기근 동안에 벌어진다.

『두 늙은 여자』라는 제목에서 이미 중요 화두가 보인다. ‘노인’과 ‘여성’이라는 이중의 핸디캡. 변방의 작은 이야기가 이렇게 현대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바다 건너 한국이라는 나라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이야기가 현대의 노인문제, 그리고 여성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선 노인문제를 보자.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고려장’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기근이 너무 심해져 부족장은 가장 나이 많은 두 여성 노인(칙디야크Ch‘idigyaak와 사Sa)을 무리에서 이탈시킨다. 그위친 족의 생활상을 살펴보면 이해가 되는 행동이다. 거친 환경에서 사냥으로 먹고 사는 남성중심 사회, 더 정확히는 근육의 힘이 중요시 되는 ‘젊은 남성’이 중심이 되는 사회다. 그런 환경 속에서 ‘늙고’, ‘여자인 몸’으로 단 둘이 무리에게 버려졌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살아남는다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그 생존은 기존 사회를 뒤흔드는 혁명에 가깝다.

무리에게 버려진 두 할머니는 하루하루의 생존이 ‘사는 것’의 전부다. 거기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 말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위대한 것을 이룩해 낸다. 보란 듯이 살아남아, 젊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이다.

물론 노인들의 연륜과 지혜는 원시적 원주민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하지만 나는 노인들의 가치가 그들의 지혜와 지식에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에 대한 존경은 그들이 뭔가를 증명해 보였을 때 오는 것이지, 젊은이들의 필요에 의한 경우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특정 기술자나 특출 난 지식인이 아닌 이상 요즘같이 엄청난 속도로 바뀌는 사회 안에서는 바로 어제의 지식조차 낡은 것이다.

전후 미국 젊은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작가 커트 보니것은, 한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약간 더 나이든 사람들은 약간 더 젊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바랄까요? 그들은 오랫동안 종종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남았고, 그 점에서 칭찬을 듣고 싶어합니다. 약간 더 젊은 사람들은 약간 더 나이 많은 사람들의 공로를 인정하는 데 지나치게 인색합니다. -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p. 29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존경을 받는 방법은, 이전의 공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존경할만한 인간임을 계속해서 증명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안일함 없이 자기 삶을 끝까지 책임지고 살아가는 것의 다름 아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존경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젊은이들에 대한 원망과 질책과 함께 노인 본인들의 반성도 촉구하고 있다.

“두 늙은 여인. 그들은 만족할 줄 모르고 불평을 해대지. 우리는 먹을 게 없다고, 젊었을 때가 좋았다고 떠들어댔어. 사실은 더 나을 것도 없었는데 말이야. 우리는 우리가 너무 늙었다고 생각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우리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젊은 사람들에게 인식시켰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우리가 더이상 이 세상에서 아무 쓸모도 없다고 여기는 거야.” p. 43

노인들을 버린 젊은이들도 물론 잘못이 있지만, 늙은 이후 모든 짐을 젊은이에게 떠넘기는 노인도 옳지는 않다. 젊은이도 늙은이도 잘못이 있다. 그 말은 양쪽 다 반성하고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칙디야크와 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살아남는 법칙임을 깨닫고 그대로 시행했다.

노년기에 들어서서 약해지긴 했지만, 칙디야크와 사는 자신들이 힘든 노역이라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만 대지가 그 대가로 자신들에게 안락을 준다는 자연의 법칙을 알고 있었다. p. 61

커트 보니것이 당대 젊은이들에게 존경 받았던 점도 같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직접 참여했고, 드레스덴 폭격 당시 그곳의 나치 포로로 붙잡혀 있었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와 그 경험을 『제5도살장』으로 녹여낸 그는 평생에 걸쳐 한결같은 휴머니즘과 반전 메시지를 던졌다. 젊은이들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당신들을 보호하겠어요.”
모두들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동료들도 두 여인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들은 이 기적적인 생존을 목격하고 연장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했던 것이다. p. 140

이처럼 직접 경험한 사람, 직접 증명해낸 사람이 갖게 되는 권위가 있다. 그것은 억지로 만든 픽션들이 가지는 권위를 훌쩍 뛰어넘는다. 독자들은 그런 이야기가 전해주는 감동이 ‘진짜’라고 여긴다. 『두 늙은 여자』의 작가인 벨마 월리스도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이 이 이야기를 전할 적격자임을 초반에 이미 증명해 보인다.

나중에 우리의 겨울용 오두막 안에서 나는 이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이 이야기에 큰 감명을 받았는데, 그것은 이 이야기가 내 삶에 응용할 수 있는 교훈을 갖고 있음은 물론, 다름아닌 나의 부족, 우리의 과거에 대한 것─내가 뼛속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었기 때문이다. p. 9, 서문

특정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그 문화권 밖에 있는 사람이 전달하게 되면 때때로 잘못된 해석이 나올 수 있는데, 그런 오해가 빚어진다면 정말이지 비극이다. 어떤 이야기가 일단 책으로 간행되고 나면, 설사 그것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하더라도 하나의 역사로, 하나의 사실로 여겨지기 쉽기 때문이다. p. 10, 서문


이제 나머지 부분인 ‘여성 문제’로 이야기를 바라보자.
나는 두 할머니의 생존을 지켜보면서 상황에 맞지 않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젊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늙은 여자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이란 보잘 것 없다. 그들은 어른을 공경하도록 교육 받았지만, 필요에 의해 얼마든지 그들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약간의 배려조차 여자들이 순종하고 입을 다물 때야 겨우겨우 얻는 것들이다. 그렇게 어찌 보면 ‘더럽고 치사하게’ 살던 그들이, 그 알량한 이익마저 완벽하게 잃고, 더 이상 잃을 게 없어지는 순간, 자기 목숨을 자신이 스스로 돌봐야 하는 순간, 엄청난 육체적 고통과 동시에 자유로움이 오는 것이다. 두 할머니 중 ‘사’는 젊었을 때부터 사냥에 능했고, 가정을 꾸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으며, 남자들과 동등하게 생활하는 것을 즐겼었다. 하지만 부족에 스며들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포기해야 했고, 결국 입을 다물고 어쩔 수 없이 순종하며 살게 된다.

이윽고 내 나이가 더 많아져서 여자가 가정을 꾸려야 하는 나이를 지나자, 모두들 나에 대해 수군거렸어. 나는 도대체 그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지. 왜냐하면 나는 남자와 함께 살지도 않고 아이도 없었지만, 여전히 내 몫의 일을 해서 식량을 조달하고 있었거든. 남자들보다 더 많은 식량을 구해오는 경우도 여러 차레 있었어.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일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어. p. 80

칙디야크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알지도 못하는 나이 많은 남자와 어린 나이에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다. 노인들의 세대는 확실히 그랬다. 여자들에게 끔찍한 시대였다. 하지만 다음 세대의 여성들은 자신들이 가진 능력, 혹은 잠재력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자발적인 복종만은 피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혀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특별히 ‘남성’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근육으로 먹고 사는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이런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으면서도, 곳곳에 ‘여인’이라는 멸칭을 사용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노인과 여성. 공동체가 이들에게 가했던 폭력을 이제는 거둬야 한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끌어안고 잃어버렸던 공동체의 신뢰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는 일정 기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건 당연하다. 그들을 소외시킨 시간이 너무도 오래됐다. 회복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겨울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두 야영지 사이의 길이 사람들의 발길로 다져졌다. p. 156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족장의 망설임과 죄책감은 이전까지 고수해온 가부장적인 권위가 무효해졌음을 잘 보여준다. 칙디야크의 손자 ‘슈러 주’는 기존 시스템에 뭔가 불합리한 면이 있음을 간파한다.

부족 내에서 여자들은 물건을 잔뜩 실은 썰매를 끄는 것 같은 힘든 일을 도맡아 했다. 또한 그 밖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들이 여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 남자들은 사냥에만 집중했다. 그래야만 부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불공평한 작업 분담에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주 오래전부터 해오던 방식이었으므로.
슈러 주는 여자들에게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남자들이 여자들을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보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거듭 설명을 들었음에도 그는 어째서 남자들이 여자들을 도와 일을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p. 22-23

이야기를 읽다보면 무엇보다 모든 것이 가진 양면이 느껴진다.
자연은 잔혹한 동시에 너그럽고,
동물은 사람에게 잡아먹히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모은 양식을 훔치기도 하고,
거꾸로 인간을 잡아먹기도 한다.
비극은 노인들에게 활기를 주었다.
몸이 바쁘면 마음이 심란할 겨를이 없다.
거꾸로 몸이 편하면 잊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를 채우기 시작한다.

우리는 어쩌면 ‘젊고’ ‘남성’인 사회에 집중하다가, 인간이 지닌 양면 중 한쪽을 잊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위기가 올수록 우리는 뭉쳐야 한다. 이제는 위기가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럴 때 일수록 젊은이와 노인들 모두의 힘을 합쳐야 한다. 여자와 남자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 누구도 제외하지 않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노력해야 겨우 이겨낼 수 있고, 기적처럼 생존할 수 있다.

살아남은 두 노인은 이전과는 달랐다.

그들은 더이상 자신들의 매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p. 156

이것이 그들이 획득한 가장 큰 깨달음일 것이다.
이야기를 보는 우리도 그것을 느끼게 된다.
약하디 약한 두 할머니를 통해서 말이다. 강자에게는 당연한 그 하루하루가 누군가에게는 필사적인 쟁취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대자연 안에서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그런 겸손함을, 우리는 많이 잊고 있는 것 같다.

네번째 되는 날 밤, 두 여인은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하며 개울에 이르렀다. 그들 주위의 모든 것이 은빛 달빛으로 싸여있었다. 수많은 나무 아래 그리고 야영지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두 여인은 잠시 동안 둑 위에 서서 그 특별한 밤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쉬었다. 사는 자신 같은 사람, 짐승, 나아가 나무까지 압도하는 대지의 힘에 감탄했다. 그들 모두는 대지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지의 법칙에 복종하지 않는 부주의하고 무가치한 생명에는 즉각 죽음이 닥칠 터였다. p.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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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 졸업을 앞둔 너에게
커트 보니것 지음, 김용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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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선생님을 기억해보자고 했을 때 제가 떠올린 선생님은 언젠가 제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예술가가 하는 일이 뭘까?” 제가 뭐라고 웅얼거리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두 가지가 있단다. 첫째, 예술가는 자신이 온 세상을 바로잡을 수 없다는 걸 인정한단다. 그리고 둘째, 예술가는 최소한 이 세상의 작은 부분이라도 바람직한 모습으로 만든단다. 찰흙 한 덩어리, 캔버스 하나, 종이 한 장 등 뭐가 되든 말이지.” 우리 모두 이 순간과 이 장소를 바람직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아주 열심히 그리고 아주 잘 해왔습니다. p.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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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보스 수상한 서재 1
김수안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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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보스’는 두 사람, 양쪽 등의 뜻을 가진 스페인어라고 한다. 뭔가 ‘있어 보이는’ 제목이다. 굳이 스페인어를 써야 할 필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지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작가가 만들어낸 작품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기이한 느낌을 더해주고 있다. 독특하고 예쁜(?) 표지 같다. 재밌는 만화책 표지 같기도 하고.

기대 이상의 소설이었다. 최근 황금가지에서 나온 소설들은 약간 ‘아마추어적인’ 면을 감안하고 봤던 터라 더욱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짜임새만 일정 수준 맞춘 작품이어도 만족했을 텐데, 그 이상을 보여준다. 특별히 흠잡을 필요도 없는 소설이긴 한데, 그래도 억지로 한번 짜내보자.
(이후 스포일러)






우선 ‘몸이 서로 바뀐다’는 설정이 재미있다. 아주 단순한 설정인데도 평범함의 함정을 쉽게 빠져나간다. 더군다나 ‘평소에 필요한 부분‘을 모두 해결해주는 상대와 몸이 바뀐다니, 쾌감이 없을 수 없다.

“사람은 누군가를 부러워해요. 자신에게 없는 걸 갖고 싶어 하고요. 그걸 가지고 이야기를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단, 질문은 ‘원하는 걸 가질 수 있다면 행복할까?’가 아니라 ‘내게 지금 없는 것을 모두 갖는 대신, 현재 가진 걸 모두 버려야 한다면 그래도 행복할까?’여야 했습니다. 그래야 공정하니까요.” - 김수안, 채널예스 인터뷰 中

그래도 역시나 돈을 얻은 쪽에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야기는 유진의 몸을 입은 한나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타당한 결정이었다고 본다. 누구나 생각하는 판타지가 펼쳐진다.

쇼핑을 하고, 드라이브를 가고, 책을 사고, 좋은 음식을 먹었다. 돈 걱정, 일 걱정, 가족 걱정이 없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세상은 얼추 천국 근처였다. p. 124

“가족으로부터의 해방, 경제적 여유,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것. 꽤 성공적인데?” p. 133-134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손해 봤다’고 생각하던 사람이 사실은 ‘모든 걸 다 가진다’는 데서 쾌감의 방점을 찍는다. 작가의 말처럼 ‘그래야 공정’하니까 두 여자에게 얻는 것과 잃는 것을 고루 주었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한쪽이 다른 쪽을 강탈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손해 봤다고 생각한 한나 쪽의 상실감을 공들여 묘사한다.

사진 속 언니를 바라보는 유나의 눈에 그리움이 비쳤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앞으로도 어머니와 유나는 저 사진을 보며 딸과 언니를 기억하며 산다는 건가. 함께 웃으며 지냈던 지난 1년을 그리면서?
저게 제일 좋은 사진이라고? p. 228

“오래 만났죠. 많이 싸웠고요. 하지만 최근에는 달랐어요. 아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을 정도로 행복했어요. 지난 1년은요.”
처음으로 내보인 따뜻한 감정. 나는 섭섭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건 또 뭔가. 이 와중에도 유진과의 추억을 회상하면 웃을 수 있다는 건가. 지금 내 앞에서 나와의 5년이 아니라 유진과의 1년이 더 행복했다고 말하는 건가.
앞으로 그가 그리워할 이한나는 내가 아니라, 유진이라는 건가. p. 231-232


한나는 가족을 뺏겼고, 남자친구를 뺏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진이 모든 걸 빼앗길 정도로 나쁜 인간인가? 오히려 이야기 속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 아니던가. 한나의 보상에 마음 놓고 좋아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즉, 유진은 고마운 캐릭터이고 한나는 시간을 많이 할애한 캐릭터예요. 무엇보다, 제가 둘 모두에게 미안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양쪽 다 마음이 갑니다.” - 김수안, 채널예스 인터뷰 中



이렇게 생각하게 되자 나는 마지막 박형사의 사건 설명이 추정된 ‘사실’이 아니라 자의적인 ‘해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과적으로 한나는 그런 계획을 세우고 한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주인공 한나를 위로하려고 현실을 왜곡한 건 아닐까.
물론 마지막 유진의 몸을 차지한 한나의 모습이 의심스럽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할 건 없지 않은가? 오히려 일반인이 그렇게까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사람들을 조종한다는 게 더 불가능해 보이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나가 불쌍해지긴 한다. 자기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선택지가 아니었으니까.

이러고 보니 이와이 슌지의 영화 <러브레터>가 떠오른다. 여자 후지이 이츠키와 와타나베 히로코, 둘은 공정한 보상을 받았던가. 마지막 대사가 “부끄러워서.”가 돼 버리면 와타나베 히로코가 불쌍해지고, “마음이 아파서.”로 하면 좀 더 공정해 보이는 상황. 나는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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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몸이 바뀐 상황을 읽을 때는 재밌는데, 형사들이 나오는 관습적인 부분들(클리셰)을 읽을 때는 상당히 재미가 없는 편이다. 신선한 부분이 작품 자체를 많이 살리긴 했지만 클리셰들이 많이 죽이기도 한 것 같다. 특히 중반부에 형사들이 이런저런 가설을 세우기를 반복하는 부분은 많이 지루했다. 거기에 더해서 두 여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김수양이라는 연쇄살인범 이야기도 상당히 전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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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이야기 속에 중요한 장치로 쓰이는 것은 좀 지루하다. 소설이나 소설가에 대한 소설이 주는 지루함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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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가서 다 설명이 되긴 하지만 그전까지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많다. 그게 미스터리로 느껴진다는 말이 아니라, 작가의 미숙함이나 설정의 오류로 느껴진다는 점이 문제다. 이를테면, 마지막에 박 형사의 설명에 이르기까지 태경이라는 캐릭터는 굉장히 모호하게만 그려진다. 그렇게 감출수록 중요한 인물이라는 건 파악하게 되지만, 동기 자체가 없는 허수아비 같은 인물로 보인다는 게 문제다.
또 다른 예로 중반부에 한나가 몸이 불편한 아이를 몰아붙여 단서를 끌어내는 장면을 들 수 있다.

“미안해요. 제가 실수했어요.”
가식이었다. 사실 그에게 미안하지 않았고 내가 한 일은 실수가 아니었다. 현재 이 방면에서 내 양심은 많이 무뎌진 편이었다. 상처 입은 이들을 찾아가 끔찍한 순간의 기억을 다시금 들추어내게 하는 건 기자였던 내게는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이번 대상이 어린아이였던 점이 마음을 좀 무겁게 만들기는 했지만. p. 285


이 사람이 자기 기사 때문에 피해를 입은 소설가에게 죄책감을 갖는 동일인물이란 말인가. 마지막 박 형사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냥 ‘일관적이지 않은 캐릭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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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남자 캐릭터들이 대단히 재미없게 그려진다. 박 형사와 칠범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악당으로 그려진 김수양과 차동욱은 동일인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비슷하다. 비슷한 범행 방식이 반복되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여자 캐릭터에 비해 남자 캐릭터들은 성의 없이 그려진 느낌이다.
김 실장의 대사 중에 ‘꿈이었답니다.’(p. 289)라든지 김수양의 말투에서 ‘안 했소’(p. 402), ‘말했소‘(p. 403) 같은 부분은 너무 어색해서 몰입을 방해했다.

조금 다른 얘기로 ‘여혐 남성 범죄자’는 벌써 너무 익숙한 느낌이 든다. 외국 작품에서는 벌써 수십 년 전부터 있어왔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 많이 보이는 추세인데 벌써 정형화되어버린 것 같다. 앞으로는 전형성을 피할 신선한 방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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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바뀐 이야기인 것치고는, 딴 사람이 차지한 자기 몸에 대한 신경을 별로 안 쓴다. 나 같으면 굉장히 신경 썼을 것 같은데, 심지어는 자기 몸을 입고 죽었는데도 이전의 자기 몸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평범한 죽음도 아니고 신체가 심하게 훼손됐는데도 말이다. 아마도 작가는 이 소설을 ‘몸이 바뀐 이야기’가 아니라 ‘영혼이 바뀐 이야기’로 생각한 듯하다. 둘은 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시각이다.

그러고 보면 소설 내내 인물들이 서로의 의중과 의도를 유추하고, 다시 그 상대가 그 유추를 유추하는 장면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절친한 박 형사와 칠범 사이도 그렇다. 사건의 해결을 박 형사의 머릿속에서만 풀이하는 것도 그렇고, 작가의 관심은 몸이 아니라 몸 안에 있는 생각과 자아에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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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정교한 스타일의 스릴러나 미스터리(추리물 느낌의)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작가가 피땀 흘려 만든 결말은 흥미롭게 읽었다. 하지만 이런 정교한 작품은 작가에게 불필요한(?)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실패하면 말 그대로 졸작이 되는 것이고, 암보스처럼 준수하게 해낸다고 해도 ‘오.’ 정도의 반응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장르적인 특성인 것은 알겠지만 나는 작가들이 정교하게 만들어낸 트릭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해 지곤 한다. 이건 뭐 작가의 문제라기 보다는 내 문제이지만.

칠범의 물음이 기억났다. “재미있어요?”라는. 느낀바 많은 책이었지만,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기는 힘들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선호는 “내 스타일은 아니었어.”라며 대충 얼버무리고는 고갤 돌렸었다. p. 345


하지만 과감하게 판타지 설정을 집어넣은 것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다른 독자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설정 하나로 아주 신선한 스릴러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특히나 스릴러 장르에서 지나치게 리얼리티를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언제나 불만이었다. 왜 장르가 상상력을 가둬둬야만 할까. 오히려 활짝 열려 있어야 장르 문학 전체에 발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암보스’는 미스터리 또는 스릴러 소설의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만, 일반적인 규범이랄까요, 대부분의 독자에게 익숙한 방식을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다. (…) 그런데 ‘암보스’는 판타지 소설이기도 해요. 그 초현실적인 설정을 끝까지 유지합니다.˝- 김수안, 채널예스 인터뷰 中



나는 작가의 이런 선택을 지지하고 싶고, 차기작에서도 리얼리티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더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해주셨으면 한다. 리얼리티만으로는 반쪽만 즐기는 것이다. 문학은 상상력을 포기해선 안 된다. 보르헤스의 말을 들어보자.

생각의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하고 싶군요. 하나는 논증이고 다른 하나는 신화예요. 그리스인들은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었어요.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기 전에 한 마지막 대화에서 우리는 이성과 신화가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지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우리는 논증을 사용하든 아니면 비유나 이미지나 우화를 사용하든, 둘 중 하나만 사용한답니다. - 『보르헤스의 말』 p. 280-281



이 작품은 스토리 공모대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을 개작한 소설이다. 수상 당시의 원제는 ‘거울의 이면’이었다고 한다.


˝‘암보스’의 출발점이며, 쓰는 내내 변화하지 않은 이미지는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이 마주보는 모습이에요. 소설 속에는 한나가 유진과 마주앉은 장면, 혼자일 때는 거울이나 검은 유리창을 통해 유진의 모습을 만나는 장면이 여러 곳에 있어요.˝ - 김수안, 채널예스 인터뷰 中


거울의 반영된 이미지는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공포심을 자극한다. 나와 반대이면서 동일인인 인물. 그런 존재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실은 소름 끼치는 일이다. 암보스는 바로 그런 공포심을 살살 건드리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다시 보르헤스의 말이다.

다른 하나의 악몽은 거울의 악몽이에요. 내가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데, 내가 모르는 누군가, 내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보이는 거예요. 이윽고 나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면 깨고 나서 심하게 몸이 떨려요. - 『보르헤스의 말』 p. 284


오랜만에 만난 좋은 한국 스릴러여서 반가웠다. 실력 좋은 젊은 작가들이 더더욱 많이 등장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더 진화한 작가의 차기작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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