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 - 20세기 최초의 코즈모폴리턴 작가 클래식 클라우드 6
백민석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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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클래식 클라우드 페이스북 페이지에 소개되었습니다.

https://www.facebook.com/1199451826840391/posts/1849327921852775/)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처음 읽어봤는데 정말 재밌게 읽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기획이 참 좋다.

해당 예술가의 팬이라면 누구나 환호하면서 볼 책이다.

팬들을 대신해 작가가 다녀온 여행기 같은 느낌인데, 이게 대단한 호사다.

마치 병실에 누워 있는 대부호가 개인 작가를 고용해서 여행을 시킨 것 같다.

같이 작품도 읽어주고, 예술가의 공간도 방문해주고(사진도 찍어다 준다), 인물에 대한 비하인드스토리(라 쓰고 뒷담화라 읽는다)도 들을 수 있다.

포만감이 대단하다.

     

아마도 현실이란 족쇄에 발목 잡힌 독자들을 위한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서글퍼진다.

그만큼 현실도피적인 느낌도 강하다. 푹 젖어서 봤다.

이미 나온 시리즈도 모두 욕심나고, 다음에 어떤 예술가의 책이 나올지 너무 기대된다.

     

하지만 장점이 단점이 될 수도 있겠다.

과도하게 친절한 코스요리는 독자를 즐겁게 하는 동시에 게으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예술가의 작품을 접하지 않고도 마치 작품을 아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예술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다 안다는 착각에 빠질 위험이 크다.

이 책이 주는 포만감 때문에 이 책만으로 만족한다면 누군가가 대신 바라봐 준 시각에서 머무르고 말 것이다. 병실에 누워 누군가 떠먹여 주는 것만 받아먹는 꼴이 된다.

그래서 호사는 호사이되 굴욕적인 호사다. 가장 좋은 건 직접 작품을 접하고 스스로 생각을 모으는 일일 것이다.

     

그런 우려가 들 정도로 책이 꼼꼼하게 잘 만들어진 느낌이다.

백민석 작가는 정말 맛있게 떠먹여 준다. 

나만 해도 헤밍웨이 작품은 『노인과 바다』 밖에 안 읽어 봤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헤밍웨이를 잘 아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생각해 보면 정말 재밌는 전기(傳記)는 사전 지식이 없어도 재밌었던 것 같다.

애플 제품을 한 번도 써보지 않았을 때도 『스티브 잡스』는 재밌었다.

너바나 노래라고는 제일 유명한 ‘그 곡’ 밖에 모르면서도 『평전 커트 코베인』은 감동적이었다.

     

그만큼 작가 선정이 가장 중요한 부분 같다.

내가 읽은 <헤밍웨이> 편의 백민석 작가님은 정말 훌륭한 길잡이였던 것 같다.

하지만 작가의 개인적인 시각이 워낙에 절대적인 시리즈다 보니

지나치게 편협하거나 함량 미달인 작가가 맡게 된다면 끔찍한 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와 장소,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어우러지는 구성인데,

때로는 겉돌기도 하는 것 같다. 확실히 쉬운 작업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시 ‘파리’ 부분은 이상적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모든 걸 떠먹여 주는, 게으른 독자를 위한 책이다.

좋게 말하면 전문가가 총집결한 헤밍웨이의 정수를 맛보는 좋은 책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시작해 자연스레 예술가와 작품에 접근할 수 있다는 면에서 훌륭한 입문서임에 분명하다.


(http://blog.naver.com/bouv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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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뇌는 나보다 잘났다 - 인간관계가 불편한 사람을 위한 뇌 과학
프란카 파리아넨 지음, 유영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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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만 보면 뇌가 가진 잠재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것 같은데, 의외로 ‘사회학적’인 뇌 과학을 다루고 있다. 타인을 이해하고, 오해를 줄이기 위한 뇌 공부다. 그 뇌 공부는 나의 뇌만 들여다본다고 끝나지 않는다. 뇌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성향이 발달했기 때문에 상대적인 관계에 초점이 맞춰진다. 


뇌는 늘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고, 끊임없이 그에 맞춘다. 우리의 뇌는 언제나 타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얼마나 자주 주변 사람을 생각하는지! 그러니 뇌를 외따로 관찰하면 뇌가 하루 종일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뇌는 ‘복수’로 일한다. 그러므로 두 개의 뇌로 시작해 보자. p. 9-10


 독일인 저자가 쓴 뇌 과학 이야기라고 해서 지레 지루하고 재미없을 거라 걱정을 했었다. 그런 독자들의 생각을 읽었는지 저자는 의외로 풍부한 유머감각을 선보인다. (「우리는 외집단의 사람을 특히 단순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꼭 부정적인 단순화가 아니라도 고정관념을 갖는 경우가 많다. 가령 아시아인은 수학을 잘한다는 식의 관념이 그러하다. 우리는 모든 집단에게 이런 식의 범주를 적용한다.」 p. 308)  

 단지, 농담을 던져놓고, ‘(농담)’, 혹은 ‘농담이다.’ 이런 식으로 사족을 붙이는 걸 보면 고정관념이 맞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뇌에 대한 연구가 정확하게 이뤄지지 않았다고 여러 차례 밝히는데, 그러 것치고는 엄청난 양의 정보를 쏟아낸다. 빼곡하게 관련 지식이 들어 차 있다. 거의 매 단락마다 새로운 정보가 담긴 느낌이다. 전문 용어가 난무하는 것도 그렇고 밀도가 높아서 읽어내기 쉽지가 않았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는데 평범한 수준의 책 두께에 비해 종이가 굉장히 얇은 것 같다;;) 유머 감각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과학 정보들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집중해서 읽어야 했다. 


 과학 정보를 재밌게 전달하기 위해 사회적 문제를 끌어온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성격이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저자가 본인의 주장하는 바를 은근히 흘리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근거로 가지고 온 정보량이 워낙에 방대해서 산만해졌을 수도 있겠다.  


 책 전체에 걸쳐 사회적 갈등에 대한 해답을 뇌에서 찾아보려는 뇌 과학자의 고민이 느껴진다. 어찌 보면 본인의 분야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한 셈이다. 하지만 그게 직접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우리는 갈등하지 않기 위해 다음의 것들을 고려해볼 수 있다. 뇌의 각 구역들과 신경세포, 감정 전염 여부, 호르몬, 인류의 진화사, 각종 실험 결과들을 말이다.” 어려운 뇌 과학을 돌고 돌아 사회적 정의와 윤리 문제를 이성적으로 설득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과연 이런 복잡한 설득에 사람들이 변할 수 있을까 의문이 갔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저자의 의도가 그렇게까지 거창한 것이 아니었음을 느꼈다. 저자는 정확하게 어떤 메커니즘으로 우리가 서로에게 반응하는지에 대해 살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우리는 뇌를 좀 더 알게 되었고, 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니 다음번에 걸림돌을 만나면 넘어지지 않고 쉽게 건너뛸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솔직히 말해 그래도 걸려 넘어지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왜 넘어졌는지 정도는 알 것이다. 왜 넘어졌는지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뇌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선물이다. 뇌 혼자서는 역부족이니 말이다. p. 354


 그럼에도 흥미로운 사실들로 가득 찬 좋은 대중 과학서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급소를 때리는 날카로운 지적들도 상당하다. 사실 우리는 상대를 잘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갈등을 빚는다.(내가 독일인 저자의 유머감각을 지레짐작했듯이 말이다) 그 말은 반대로 서로를 이해하는 것만으로 많은 문제가 풀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두뇌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지피지기면 갈등은 없다’. 


타인도 자기만의 머리와 생각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유레카를 외치며 완벽히 내면화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모두 자신만의 입장이 있음을 파악한 뒤에도 두고두고 오랜 세월에 걸쳐 학습해야 하는 내용이다. 정확히 말해 우리는 그 사실을 결코 터득하지 못한다. 그래서 타인에겐 타인만의 생각과 입장이 있음을 매번 새롭게 기억해야 하며, 그때마다 속으로 꽤나 부대껴야 한다. p. 126


우리는 보통 자신을 기준으로 타인을 추론한다. 자기가 모르면 타인도 알 필요가 없는 것이고, 자기가 알면 상식이라 생각한다. 상식이라는 그 정보가 얼마나 최근에 자기 머릿속에 들어왔는지는 상관없다. 지금 막 누군가의 도움으로 어떤 문제의 답을 알았다 해도 마찬가지다. 자기 입장과 감정은 보편적인 것이며, 자신이 가진 능력은 다른 모든 이를 평가하는 잣대이자 우습게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p. 137


 많은 정보들을 소개하는 저자는 인간 두뇌의 가능성과 한계성 모두를 다룬다. 그 모든 기능들과 효과들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뭐든 적당한 게 좋다, 지나치면 해가 된다, 그런 얘기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의 이야기지만 저자가 주목한 것은 나빠질 수도 있고, 좋아질 수도 있는 인간 두뇌의 유동성 그 자체였다. 저자는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경두개자기자극법은 자기와 타인 사이의 경계가 밀려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 경계는 때로 굉장히 명확해지고, 때로 상당히 모호해진다. 이는 지금까지 다룬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인간은 폐쇄적 개체들이 아니다. 우리의 뇌는 타자를 지각하고, 우리의 뇌 속에는 타인의 감정과 생각이 계속 돌아다닌다. 우리의 말과 행동 역시 상대의 머릿속에서 갖가지 것들을 유발할 수 있다. 생물학적으로 ‘열린 시스템’이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구분하는 것과 열려 있는 것이 필요하다. p. 122-123


 그래서 저자의 소박한 의도는 사실 소박하지 않다. 오히려 아주 대범하고 광범위하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할 일이 많다. 그리고 할 수 있는 일도 많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더욱 좋아질 수 있도록 현실을 바꾸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p. 317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다. 뇌를 이해하고 더 좋은 사회를 만들거나, 아니거나.  


결론을 내려 보자. 인간은 그 어떤 종보다 상대방을 잘 이해하고, 협력하고, 공감하고, 학습하고, 의사소통할 수 있다. 이런 능력을 적절히 활용하여 유익을 이끌어 내는 것은 환경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상당 부분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또한 공동체와 국가를 이루어서 뭔가를 할 수도 있다. p. 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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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거짓말 - 아이가 아니라 부모가 거짓말을 한다
엄윤숙 지음 / 책구경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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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아이에게 하는 거짓말을 고발하고 있는 책이다.  

올바른 양육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읽다 보면  

부모에 대한 비판이 더 정확한 의도로 읽힌다. 

  

33가지 부모의 거짓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말 자체는 맞는데 본뜻을 잃어버린 경우와  

부모의 나쁜 욕망을 위해 그럴듯한 말을 빌려오는 경우.  

두 경우 모두 표면인 말과 내용물인 의도가 다르다는 공통점이 있다. 

 

거짓말이란 무엇인가? 말과 삶이 분리된 말, 말이 삶을 초과한 말은 필연적으로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다. 삶에 기반을 두지 않는 ‘좋은 말’은 그저 입으로만 하는 좋은 말일 뿐 진짜 말이 아니다.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말이 아니라, 말의 비듬이다. p. 6

 

먼저 본뜻을 잃은 말들을 살펴보면,  

그 상투적인 말대로만 한다면 아이는 물론이고  

어른들도 행복하고 올바로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관용적이고 상투적인 말들에는 오래된 진리가 들어있다.  

문제는 그 말이 제 뜻을 잃어버리고 엉뚱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부모의 말은 원래부터 거짓말이었던 것은 아니다.  

거짓말이라는 건 일종의 역설이다.  

말이라는 껍데기만 남고 속뜻이라는 알맹이는 사라져버렸으니까.  

근본을 지키자는 당부에 다름 아니다. 

 

두 번째로 ‘나쁜 가치관을 그럴듯하게 꾸며주는 말’들을 보면,  

부모가 무심코 하는 말들에 상당히 끔찍하고 천박한 가치관들이  

함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쁜(혹은 못된), 정의롭지 못한 욕망이 

좋은(혹은 선한), 정의로운 말로 포장되고 있다.  

이중의 거짓말이기 때문에 이런 거짓말들은 더 나쁘다.  

 

사랑, 건강, 꿈… 

부모가 날마다 주워섬기는 좋은 말, 맞는 말, 옳은 말은 

모두, 거짓말이다. 

입에서 좋은 말이어서 더 나쁜 거짓말이다. 

시작은 늘 맞는 말이어서 더욱 질 나쁜 이중(二重) 거짓말이다. 

옳은 말에 살짝 자신의 변명을 섞고 뿌리고 얹어 아이를 속이기에 거짓말이다.  

p. 156

 

말을 꼼꼼히 살피고, 어떤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  

원래 뜻은 무엇인지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을 보고 있으면  

작가가 말이라는 것에 보여주는 재능이 느껴진다.  

그것은 시인에 가까운 감각이다. 

 

거짓말로 꼽은 33가지 말 자체가 작가의 ‘말에 대한 민감성’을 드러낸다.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고 단어들을 가지고 현란하게 놀기도 한다. 

 

‘그래도’는 ‘그대로’로 가는 도돌이표다. p. 127

부모의 이러한 자기 ‘확대’는 아동 ‘학대’의 징후다. p. 135

하지만, 

우리는 ‘하지만’을 신중한 거짓말을 위한 진중한 전주로 애용하고 있다. 우리는 ‘하지만’을 ‘하지 마’로 가는 징검다리쯤으로 치부해버렸다. p. 132


그렇게 민감하게 선택된 단어들은 

간결하고 명쾌하게, 읽는 이의 폐부를 찌른다.  

여백이 많고, 줄바꿈이 잦은 점도 ‘시’처럼 느껴지는 부분이다.  

모든 문장이 잘 다듬어진 ‘시구’다. 

 

자신의 재능을 기울여 어른들의 허위를 파고드는 데에는  

작가 자신의 반성이 바탕이 된다.  

작가는 같은 어른으로서 철저한 자기반성을 한다.  

작가가 비판하는 어른들에는 작가 자신도 포함되는 것이다. 

 

나는 부모의 거짓말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아이 때부터 질리도록 들어왔던 거짓말이고, 내가 오랫동안 아이에게 해왔던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거짓말』은 부모의 말과 삶을 관찰 기록한 보고서이다. 부모의 추악하고 처참한 거짓말을 채집한 녹취록이다. 또한 쓰리고 아픈 자기 고백이며, 미안하고 슬픈 반성문이다. p. 7

  

기본을 잃은 어른들이 많다. 뜨끔하는 부분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 뜨끔함의 핵심에는 ‘세월호’의 비극이 있다. 

 

큰일은 큰일이라 두려워서 가만히 

작은 일은 작은 일이라 시시해서 가만히 

남 일은 남 일이라 낯설어서 가만히 

내 일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가만히 있다 보니,  


기울어진 세상은 끊임없이 재탕되고, 

기울어진 하늘은 간단없이 반복되고, 

기어이 

기어이 

여리고 어린 진실은 검은 바다 속에 침몰하고 말았다. 


우리는 아이에게도 

‘가만히 있으라’를 금과옥조처럼 가르쳐왔다. 

p. 55-56


세월호 앞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어른은 할 말을 잃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억울해 하는 어른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작가의 비판은 작정한 듯 매섭다.  

하지만 세월호가 그 비판의 근간에 깔린 것이라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거짓말쟁이가 된다.

 

바다 속으로 가라앉은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비통함을 기억한다면,  

적어도 억울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작가를 철저하게 반성하게 만든 원동력이다.  

 

‘부모의 거짓말’은 이상하고 나약한 몇몇 개인의 일시적인 일탈이나 실수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공동 창작물이다. 우리 모두가 관여한 거짓말이다. 우리가 사는 이곳이 그렇게 거짓말해도 괜찮은 사회, 그렇게 거짓말해야 살아남는 사회이기에 부모는 아이 앞에서 무시로 거짓말을 입에 올리는 것이다. p. 8


만약 그래도 억울한 마음이 든다면,  

부모들도 힘들다고 호소하고 싶다면,  

자식보다는 사회에 소리쳐야 할 것이다.  

자식이 아니라 사회를 바꿔야 한다.  

안 그러면 자식도 똑같은 부모가 되어 

똑같은 거짓말을 해야 할 테니 말이다.  

 

그것이 작가가 비판을 빙자해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절대로 아이들이 이런 세상에 살게 해선 안 된다.  

어른들도 이런 세상에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부모는 그렇게 잘 알아서 도대체 뭘 했나? 

‘알아서 기는’ 것뿐 아니었나. 

알아서 설설 기고, 샅샅이 알아서 기는 부모 덕분에 

‘뭣’ 같은 세상은 더욱 멋대로  

자신의 힘과 위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p. 105

 

작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누구나 하찮게 생각하고 함부로 하는   

한 마디의 ‘말’을 바로잡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만큼 이 세상은 근간부터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속에 뿌리박혀 있는 줄도 모를 그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전까지는 모든 말이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거짓말을 가르치고, 거짓말을 강요할 수밖에 없다. 

 

말이 삶을 채운다. 

말이 삶을 지탱한다. 

말이 부모다. 

부모의 역할은 말이 시작이고 말이 끝이다. p.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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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 키워드로 읽는 라틴어 이야기
조경호 지음 / Orbita(오르비타)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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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느낌은 이렇다. 교양수업인 줄 알고 호기심에 청강 들어갔다가 수준이 너무 높은 전공 수업이어서 기겁하게 되는 느낌. 언어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언어를 본격적으로 가르치려는 욕심이 보여서 너무 부담된다. 심지어 교수님이 열성적이기까지 하시니 부담은 배가 된다. 하지만 그만큼 라틴어와 라틴어 교육에 대한 애정이 높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백가지 키워드로 라틴어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지만, ‘이야기’ 부분은 금방 끝나고, 나머지 부분은 언어적인 분석에 할애된다. 때문에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초반에 노력해 보기도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이야기만 읽게 된다. 내 수준으로는 딱 1부터 10까지 ‘라틴어로 숫자 세기’가 한계였다.(p. 24) 

 

 일종의 TMI가 너무 많았던 셈인데, 원래 이런 책은 TMI 읽는 재미 아니겠는가. 우리 실생활이나 잘 알려진 고전 부분은 꽤 재미있었다.  

 

 ‘우유’라는 뜻의 라틴어의 어형 변이를 보다 보면 라테(Latte)가 보이고(p. 87), 우리나라 대학들 교표에 적힌 모토들의 뜻도 알 수 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온 ‘카르페 디엠(Carpe diem)’도 반갑고(p. 222), 영화 <검은 사제들>에서 강동원이 부른 라틴어 노래의 뜻도 확인해볼 수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주문들은 어떤가(p. 316). ‘Expecto patronum’은 ‘나는 보호자를 기다린다’는 뜻이다. 그 밖에도 서기를 나타내는 A. D, 오전과 오후를 나타내는 AM, PM, ‘알리바이’나 ‘유비쿼터스’도 라틴어에서 유래됐다는 사실은 신기했다. 

 

 히포크라테스가 말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은 ‘인생은 짧다. 하지만, 의술은 길다(Vita est brevis, sed art est longa.)’의 오역이다.(p. 123) 율리우스 시저가 말한 ‘주사위는 던져졌다(Iacta alea est.)’나(p. 299), 『돈키호테』에 나오는 라틴어에 대한 해설도 흥미롭다.(p. 307) 

 

 물론 재미없는 TMI도 많다. ‘진실은 강하며, 이겨 낼 것이다’라는 어구(p. 120)는 낯설기도 할뿐더러 누가 말한 건지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딱따구리’의 신화적 기원이 되는 인물 Picus의 이야기를 알고 있나요?>(p. 126) 같은 챕터도 마찬가지. ‘행운은 용감한 자들의 편’이라는 문구나(p. 133), <‘스승의 날, 졸업식•입학식’ 즈음이면 떠오르는 라틴어 어구는?>같은 챕터(p. 340)는 그저 정보 전달을 위한 것일 뿐 아무런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차라리 앞서 구분한 두 가지 카테고리(일상생활, 고전)로 분류해서 접근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분류가 좀 무질서한 편이고, 100가지 키워드라는 것만 내세우고 있다. 분명 라틴어는 일반 독자와의 접점이 있지만 그것을 효과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와 관련된 부분이 흥미로웠다. 성경의 원어에 최대한 접근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출애굽기의 구절을 해석하는 부분이나(p. 197), 갈라디아서의 말씀(p. 208), 사도신경 해석(p. 347), 욥기의 한 구절 해석(p. 373) 등이 그렇다. 우리말로 ‘예수’라고 발음하는 것이 라틴어(Jesu)와 일치한다는 지적(p. 80)은 흥미로웠다. 특히 라틴어로 된 십계명을 해석하는 부분(p. 170)에서 두 번째 계명 ‘넌 나에게 우상으로 여겨지는 것을 만들지 마라’의 해석은 깊은 이해를 도왔다. 새겨서 만든(Sculptilis)이라는 형용사를 통해 우상의 범주를 정확하게 유추해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상을 하나만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마음먹은 모든 것을 포괄해야 함으로 목적어를 명시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p. 175

 

 차라리 라틴어 성경을 주제로 책이 나왔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한데, 이미 나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밖에는 ‘짐작에 근거한 말들’이 간간이 눈에 띈다.  

 

순전히 제 개인적인 유추에 의해 만든 글이니 가능성만 생각해주세요. p. 101


1700년대, 이 어휘는 오타나 발음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봅니다. p. 121


 라틴어라는 언어가 과거의 언어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짐작에 의존해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의 표현은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때로는 블로그에 연재되는 글을 보는 느낌도 든다.  

 

이번 단원도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Salve! p. 34


이제야 묵은 숙제를 다 한 느낌이네요. 금방 다 할 줄 알았는데, 역시 글로 쓰니 오래 걸렸습니다. p. 193

 

 편집 과정에서 더 다듬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아쉬움이 든다.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면에서 입문서로서는 절대로 추천하기 힘들 것 같다. 좀 더 전략적인 컨셉이 필요해 보인다. 인기 있는 ‘교양 수업’을 만들 생각이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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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원 기담
전건우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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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나 제목만 보고는 상당히 오싹하고 고요한 공포를 예상했다. 일본 공포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서늘한 공포 말이다. ‘기담’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도 그런 예상에 한몫한 것 같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상당히 자유분방(?) 한 이야기였다. 심지어는 공포가 아닐 수도 있겠다. 공포의 탈을 쓴 복합장르라고 해야 할까.   

 

《고시원 기담》은 장르를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인데,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이 각자 생각하는 장르를 붙여줬으면 하는 마음에 이런 구성으로 글을 썼다. p. 427, 작가 후기

 

 되게 새로운 걸 만들어 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전에 없던 새로운 장르를 창조해낸 건 아니다. 정확히는 작가가 해보고 싶은 장르를 다 욱여넣은 느낌? 코믹함을 바탕으로 추리(그냥 흉내만 내고 있지만), 초능력, 무협, 도시괴담, 킬러라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단편집처럼 엮였다. 굉장히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고 장르가 서로 너무 달라서 옴니버스 이야기 같다. 모든 이야기가 마지막에 공포로 묶이기는 하지만, 각 편의 아이디어들이 많이 휘발되고 있어서 결말의 필연적인 느낌은 덜하다. 

 

 결과적으로 상당히 애매해졌다. 공포인가 싶으면 다른 장르의 비중이 훨씬 많고, 사회풍자극인가 싶으면 그런 것치고는 장난스럽다. 생각 없이 웃기에는 불편한 지점이 많고. 가볍게 시간 때울 킬링 타임용 장르소설? 그 정도가 적당한 분류 같다. 

 

 

 전작인 <소용돌이>는 스티븐 킹의 <그것>에서 큰 틀을 거의 그대로 옮겨 오는 한계를 보였었다. 이번에 <고시원 기담>까지 보고 나니, 작가는 장르소설의 큰 구조를 짜는 데 아직 자신이 없는 것 같다. 일종의 단편집 같은 구성으로 이뤄진 장편소설을 선택했는데, 어쩌면 단편에 더 강한 장점을 살리면서 장편을 쓰기에 최적화된 구조를 찾아낸 건지도 모른다. 물론 구조를 그대로 베껴 온 전작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를 보여준다. 돌파구를 찾아내려는 작가의 노력이 느껴졌다. 

 

 

 본문으로 들어가 보면 상당히 촌스러운 느낌이 있다. ‘다방 아가씨’라든지, ‘커피숍’이라든지, 고전 탐정소설과 무협소설 속 인물과 어휘들이 난무하고, ‘책 대여점’까지 등장한다. 물론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굳이 저런 어휘를 써야 했을까 싶은 느낌은 있다. 현재라는 생각보다는 과거의 어떤 지점에 멈춰진 시간대 같았다. 어쩌면 변두리 서울에 대한 편견 같기도 하고. 

 

 어휘에 대한 문제는 첫 챕터인 ‘고문 고시원’에서 도드라지는데, 어휘나 표현에 있어서 상당히 저열한 느낌이다. 작가의 야심찬 기획임을 감안했을 때 오프닝의 문장들이 너무 성의 없다. 

 

 ‘브라자나 빤스’(p. 9)라는 어휘 선택이나, ‘산타 모자를 쓰고 비키니를 입은 여자의 가슴 부위가 동그랗게 타 들어간다 싶더니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p. 11) 같은 묘사는 불쾌하라고 쓴 것 같다. ‘즉사(卽死). 방금 전까지 철권의 연속기를 외우고 있었을 소년의 머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p. 18), 그리고 가스 마시던 양아치가 옥상에서 떨어지는 부분(“사이어인이 쳐들어왔다!" 양아치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무공을 할 수 없었던 그는 무릎으로 착지했고, 척추가 파열되는 동시에 혀를 깨물어 평생 앉은뱅이와 벙어리로 지내게 되었다. p. 19)은 죽음에 대한 지나친 장난스러움이 느껴져서 거북했다. ‘김치는 중국산으로, 발로 담근 듯한 맛이 난다.’(p. 23) 같은 표현은 프로 작가라는 생각이 안 들 정도로 ‘발로 쓴 것 같은’ 문장이었다. 

 

 한결같이 일부러 불쾌하게 만들려고 작정해서 쓴 느낌이다.  

 

 이것은 먼저 말했던 장르적인 애매함이 불러일으킨 문제가 아닐까 싶다. 사회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공포이면서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유머러스한 잡탕 장르물을 한 작품에 넣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아예 ‘펄프 픽션’같은 싸구려 장르 소설을 지향했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훨씬 노골적이어야 했겠지만. 

 

 오프닝에서 이렇게 광선동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굴려놓고 엔딩에서 그들을 보듬는 것처럼 매듭짓는다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마지막까지 장르적으로 애매한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작가 후기에서 작가가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것도 같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위해서 다양한 장르를 빌려 왔을 뿐이다. 

p. 427, 작가 후기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로 장르적 문제를 어물쩍 넘어가는 건 아닐까. 일정한 톤으로 장르들을 엮어내지 못한 것을 변명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저열한 어휘와 묘사들이 분위기 조성을 하고 있기도 하다. 저열함이 공포라는 장르와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에-다른 장르였다면 단점으로 불거져 나왔겠지만-전체적인 분위기 속에 묻혀 눈에 띄지 않는 편이다.(물론 공포 소설을 저열한 어휘로 써야만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봐도 처음 책을 펼친 독자 입장에서는 첫인상이 굉장히 안 좋을 수밖에 없다. 작품에 대한 선입견에 앞서 작가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된다.  

 

 

 소설 속에서는 다양한 사회적 단면들을 코믹하게 다루고 있어 사회 풍자적인 성격도 엿보인다. 단지 그 모습이 상당히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편이다. 치밀한 취재를 통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그냥 그렇다고들 알려져 있는 통념들을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하는 수준이다. 

 

 ‘오케이맨’ 챕터에 나오는 보수 기독교 층을 비롯한 언론의 반응들이 그렇고, 인터넷 방송을 하는 젊은이들이 그렇다. 깜이라는 외국인 노동자의 열악한 처우도 굉장히 상투적이다. 고시생이나 취준생의 고통도 딱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준이고, 정치인들이나 조폭들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 

 

 생각해 보면 고시원에 대한 기담이라는 발상도 그 정도 발상에 머문다. 낡디낡은 시설, 정체를 알 수 없는 구성원들에 대한 공포, 벽을 통과해 그대로 전해지는 옆방의 소음… 작가 후기에 보면 실제로 고시원에서 살았던 생활을 바탕으로 했다고 하는데, 의외로 상당히 외부적 편견으로 가득 차 있다.  

 

 

 순간의 연출에 있어서 공포감을 주는 능력은 확실해 보인다. 단지 긴 이야기 속에서 그런 순간이 너무 짧고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게 일어난다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확실히 공포 장르와 단편소설에 최적화된 작가 같다.  

 

 그 공포 연출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스펙터클로 채워져 있다. 전작인 『소용돌이』와 마찬가지로, 멤버 모두의 능력을 합친 사건 해결 방식이 스펙터클하게 엔딩을 향해 치닫는데, 이것이 과연 공포에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스펙터클한 엔딩에 대한 강박이 느껴지기도 한다. 주로 할리우드 공포영화에서 익숙한 방식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나 토브 후퍼 감독의 <폴터가이스트>의 엔딩을 보면 집이 땅으로 꺼지거나 오그라들어 다른 차원으로 사라진다. 에드거 앨런 포의 『어셔가의 몰락』에 영향을 받은 듯한 이런 엔딩은 해결 단계의 확실한 비주얼을 보여주며 개운함을 선사하지만, 공포의 여운은 남기기 힘들다. 전건우 작가가 선호하는 이런 엔딩 방식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좀 뻔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가족과의 관계, 특히 부모와의 관계를 통해 연속적인 존재로 정체성을 얻는 데 반해, ‘괴물’은 부모와의 연계성 없이 단독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 재밌었다. 사이코패스에 대한 정확한 지적 같기도 했지만, 타인과의 의사소통 없이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목소리로 들리기도 했다. 

 

 결국 괴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옆방 사람들과의 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연대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서로의 이름을 밝히고,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는 것이 전부다. 지구라는 같은 집에 살고 있는 이상, 자신의 집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웃의 집을 지켜야 한다. 우리는 서로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괴물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서로 연결되어야만 한다. 고시원의 얇은 벽이 서로를 나누고 고립시키기도 하지만, 옆방의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일종의 희망처럼 느껴진다.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것도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다음 작품에서도 고뇌가 느껴지는, 한층 발전된 모습을 기대해 본다. 

 

그리고 이제 책장을 덮고 어둠 속에서 빛으로 걸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사람이 사는 곳으로. 

찬란한 그곳으로. 

p. 428, 작가 후기

(http://blog.naver.com/bouv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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