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모리셔스의 바닷가를 달린다 - 하루 30분 달리기로 인생을 바꾼 기적 같은 이야기
안정은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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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만 보면 셀럽의 극적인 인생 이야기가 펼쳐지는 에세이 같지만, 의외로 저자의 인생 이야기가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책날개에 적혀있는 경력이 인생 역경의 전부다)


백수생활과 이직, 퇴사 이야기는 황급히 마무리되고 이후에 잠깐씩 끼어들 뿐이다.


나머지 부분은 마라톤에 대한 정보와 경험담들로 채워진다. 그야말로 ‘런스타’다운 구성이다. 아마도 인스타그램에 저자가 올리는 게시물보다 약간 더 깊이 있게 나간 수준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 이 책의 단점이자 강점이다


드라마틱 하고 로맨틱한 에세이를 기대했다면

생각보다 빈약한 스토리에 김이 샐 것이다. (사실 아직 어린 저자에게서 그런 극적인 걸 기대하는 것도 무리다)


하지만 달리기, 더 정확하게는 마라톤에 대한 매력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저자가 애정을 갖고 써 내려간 달리기 경험들을 읽다 보면 나까지 숨이 차는 것 같고, 한참을 달린 듯 심장이 두근거린다.

누구나 한 번쯤 마라톤을 꿈꿔본 적이 있지 않을까.

없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그런 로망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자신의 잦은 이직과 퇴사 경험을 역경 아니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밑거름’ 정도로 의미 부여를 한다. 


나는 오히려 저자가 돌고 돌아 자신에게 꼭 맞는 직업을 찾은 게 아닐까 싶다. 바늘구멍을 뚫고 대기업이나 중국계 항공사에 들어갔다고 해서 반드시 그 직장에 잘 맞는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다.


때문에 저자처럼 자신의 끈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마라톤을 달릴 필요도 없다. 그냥 거기 안 맞는 사람일 뿐이다. 안 맞아도 버티는 사람들이 있다고 못 버티는 내가 틀린 건 아니다. 


그저 저자는 무작정 뛰다 보니 얼결에 자기 자리를 잘 찾아온 사람이고,

그 자리에 꼭 맞는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보통 그런 사람은 아름답게 빛나기 때문이다.

역시 무작정 뭔가를 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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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의 적나라한 민.낯. - 야동 끊은 한 남자의 진솔한 고백
허상 지음 / 에테르니(AETERNI)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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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30대 중반의 기혼남으로 추측된다. 애도 있고, 적당히 페미니스트 같다.

독자로 상정된 대상은 20~30대 미혼 여성으로 짐작된다.

이 구도 자체가 갖는 태생적인 맨스플레인의 약점이 있다. 이것이 첫 번째 단점이다. 그래도 남자들의 민낯을 보여준다니 꾹 참고 읽었다.

하지만 같은 시간과 노력이라면, 그 나이대의 여성 독자들은
차라리 리베카 솔닛이나 우에노 지즈코 책을 읽는 게 훨씬 생산적일 것 같다.

왜냐면 이 책은 대단히 비전문적인 논리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 책이 가지는 두 번째 단점이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얄팍한 지식에 의지해서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대단히 위태로워 보인다. 프로이트 이론이나 에로티시즘 개념을 자신감 넘치게 가져오는 부분들이 특히 그렇다.

심지어 뻔뻔하다. 어쩌면 ‘적나라한 민낯’이라는 제목이 가리키는 것은 저자가 쓴 내용보다는 이런 저자의 태도에서 더 드러나는 것 같다.

|| 물론 그래 봐야 주관적인 의견에 불과하겠지만, 설령 이에 대해 어떤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객관적인 조사를 한다고 해서 나보다 정확한 사실을 파악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어차피 이런 조사도 없겠지만). 공신력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 내 이야기를 믿든 안 믿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다. || p. 59


이런 뻔뻔한 태도를 내세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공신력이 떨어지는 저자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면, 이 책 자체는 성립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 말은 이 책이 전문가가 아닌 저자의 개인적인 의견에 기대고 있는 바가 지나치게 크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싫으면 읽지 말던가’하는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차라리 공신력 있는 ‘척’을 하지 말고, 솔직하게 개인적인 이야기로 책을 구성했다면 어떨까 싶다. 프로이트만으로 남성의 심리를 설명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많다.

그리고 상당 부분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는 게 세 번째 단점이다.

이제는 통념적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트위터에 널리고 널린 남자에 대한 분석이 너무 많다.

일베를 분석하면서 여성들의 사회진출로 인한 위기감을 이유로 드는 것이라거나,
유흥업소에 출입하거나 성관계 동영상을 찍는 남자들은 열등감/우월감이 강하다거나,
남자들은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사실 관계만으로 맥락을 판단해 버린다던지.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논의했고, 거의 상식이 되어버린 내용들이 상당수다.

너무 늦게 도착한 해석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맨스플레인의 혐의는 더욱더 짙어진다.

남성의 행동 패턴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너무 성적인 부분에만 집중돼 있다는 게 이 책의 네 번째 단점이다. 사회학적인, 혹은 심리적인 모든 면이 성욕으로 설명된다.

아마도 저자가 프로이트에 깊이 경도된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프로이트에 대단히 공감하고 있는 집단인 건가. 텍스트 밑에 흐르는 ‘적나라한 민낯’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면이다.

그 적나라한 민낯의 절정은 소설 형식으로 된 마지막 부분에서 드러난다. 거의 90년대 싸구려 연애 소설 같은 느낌이다.

첫 키스 장면을 묘사하며 ‘물컹함’, ‘말캉했다’라거나 ‘결국 뚫어냈다’ 같은 표현은 꽤나 거북했는데, 신체 접촉을 묘사하는 저자의 어휘가 어떤 식으로 형성되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름대로 ‘민낯’을 드러내는 부분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굳이 내가 이걸 왜 읽어야 하지’ 하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저자가 어느 정도 페미니스트 같다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에 저자는 한 번도 본인을 가리켜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한 적이 없다.

책에서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는 ‘남녀 혹은 여남’이라는 표현이 무색해지는 지점이다. 익숙한 느낌이다. 굳이 페미니즘을 거부하며 ‘양성평등’을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닮았다.

|| 그런데도 모든 남자가 문제인 양 모두를 비판하려 드는 일부 여자들의 무차별적인 태도 또한 우리는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태도는 분명 남녀 혹은 여남 간의 공생이 아닌 공멸의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며, 결국 모두의 손해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 p. 8


결국 여성 혐오, 혹은 남성 혐오의 문제에 있어서 그 문제 근간에 있는 가부장제의 억압적인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여성들이 그 시스템 아래에서 어떻게 고통받고 있는지는 이 책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이런 남자들을 골라내는 방법’(p. 67) 같은 거나 가르쳐주는 책이라면 문제가 있다. 문제의 핵심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그런 남자를 만나는 건 여자들의 잘못도 있어’라는 태도다.

|| 따라서 만약 당신이 그런 남자들을 만나고 싶지 않다면, 무조건 남자 탓을 하기에 앞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제대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은연중에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남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지, 경차 타는 남자들을 무시하고 있진 않은지, 자신의 외모, 상대방의 외모 등 평소 남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삶을 살고 있진 않은 지에 대해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소리다. || p. 66-67


더 중요한 문제는 사실 그게 아니다. 아무나 만나도 위험하지 않고, 상식이 통하며, 혹여 그들에게 공격을 받더라도 사회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 것들은 남자의 민낯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긴 하다. 가뜩이나 공신력도 없는데.

책은 시종일관 자신의 목표인 남자의 민낯(이 책에 의하면 ‘남자의 성욕’)을 설명하는 데 공을 들인다. 그런데 저자가 남자의 성욕을 여자 독자에게 이해시켜서 관철시키려는 것은 도대체 뭘까?

|| 그러나 수연과의 관계의 경우, 그녀와 우연히 정서적 교감이 먼저 형성될 수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수연의 작은 관심에서 비롯한다. 그의 말을 귀담아듣고 반응해준 작은 노력들이, 그로 하여금 그가 여성을 바라보는 방식에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다 그에게 여러모로 심정적인 충격을 전달하기까지 하면서 수연은, 그가 엄마와 교감하던 그때처럼, 수연 자신과 교감하고 싶은 내적 충동을 그에게서 끌어낼 수 있었다. || p. 218

|| 그가 엄마 품에 안겨 엄마를 욕망하던 그 시절의 경험과 흡사한 형태로 다시 사랑이 재완성된 것이다. 육체적, 정서적으로 상대방과 하나의 존재처럼 연결된 느낌, 그는 수연을 그렇게 사랑할 수가 있었다. || p. 219

이것은 또다시 문제의 해결을 남성의 변화가 아니라, 여성의 이해에서 구하는 것은 아닐까?

목적이 그것이라면, 여자들은 더더욱 남자의 민낯을 살펴볼 필요가 없다. 그것은 가부장적인 남자의 태도를 이해하고, 위험한 남자는 피하고, 위험한 남자가 아니라면 그 사람에게 여자가 맞춰주는 것밖에는 안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자들이 자기들의 민낯을 객관적으로 보고, 현실을 직시하는 게 더 급하다.

어쨌거나 이렇게 상당한 양의 단점을 참으면서 읽어낸다면, 익히 봐오지 못했던 새로운, 그러면서 꽤나 솔직한, 그리고 내밀한, 남자들의 속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단지 너무 드물게 나타난다는 게 문제다.

하지만 텍스트에 드러나지 않은 더더욱 내밀한 민낯은 그 아래 깔려 있는 저자의 욕망을 읽어내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 전체는 민낯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단지 그 텍스트 전체에 흐르는 가치관이 꽤나 위태롭다는 게 문제다. 어떻게 보면 이 책에서 가장 무해한 말은 프롤로그가 나오기 전 첫 장에 이미 나온다.

|| 우리는 본래 동물이지만, 동물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당신은 ‘생각’을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에겐,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해졌다. ||

남자들에게는 아직도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남자 스스로의 민낯을 살피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한 번 더 반대로 뒤집어 생각하고, 다시 뒤집어 그것을 검토해봐야 한다. 남자가 무해한 텍스트를 쓴다는 건 그렇게나 어렵다. 가부장의 역사는 그렇게나 길고 깊었다. 그나마 몇 년 전에 비하면 이런 책이 나온다는 건 대단한 발전이긴 하다. 하지만 더 나은, ‘진짜 민낯’을 말하는 책이 나올 때까지는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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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드 2022-03-25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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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도감
나카무라 루미 지음, 이지수 옮김 / 윌북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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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아저씨야?”라는 질문을 자주 들어서, 후기에서 확실하게 해명하려 했지만 아직도 말로 잘 표현이 안 된다. 그 대답으로 이 책을 만든 것이라 여겨주면 좋겠다. p. 131, 후기 


서점에서 발견하자마자 재밌는 책이라고 느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저자가 ‘왜 하필 아저씨야?’라는 질문에 명쾌히 답하지는 못했지만,

왜 하필 아저씨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아저씨라는 존재를 관찰하고 정리한 책이라니.

가장 재미없는 존재를 가장 재미있게 만들었다.


읽어본 책은 아닌데, 필립 볼의 『자연의 패턴』 카드 광고를 보니,

혼돈 속에서 패턴을 발견하면 사람은 누구나 안심을 하게 된다고 한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진화한 본능적인 패턴 탐색자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혼돈에 가까운 아저씨의 세계에서,

그것을 파악 가능한 상태로 패턴을 찾아낸 것은 아닐까.

젊은 여성에게 아저씨는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이기도 하니까.


그 패턴 정리 솜씨를 놓고 보자면 정말 집요하다 싶을 정도였다.

익히 알려진 고정관념이긴 하지만, ‘일본인 다운’ 집착과 꼼꼼한 관찰력, 정리 벽이 느껴졌다.

‘왜 이전에 누군가 이런 작업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작업을 하는 사람이 없는 걸까.


개인적인 생각으로 아저씨라는 존재(책에서 말하는 ‘오지상’은 중년과 노년 사이 어디쯤의 남자들을 말한다. 과연 고령사회)는 어느 나이대의 사람들보다 자유롭고, 타인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 계층인 것 같다. 자기 자아를 투명하게 모두 드러내면서 타인의 시선에 거의 무관심한, 한 마디로 관찰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진 대상인 것이다.


어느 도박장이든 거의 98퍼센트가 아저씨라서 젊은 사람이 가면 튈 것 같지만, 아저씨들은 경기에 집중하고 있어서 대체로 주위에 무관심하다. 그래서 마음껏 경기와 아저씨를 관찰할 수 있다. p. 46



거기다가 같은 남성도 아니고, 비슷한 연배도 아닌 젊은 여성의 관찰이라면, 

그들에게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호기심을 느끼거나 호의를 보이는 사례들이 많이 나온다. 도리어 작가 쪽이 걱정이 될 정도다.


당연히 무서운 사례들도 실려 있다. 성적인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아저씨들(<섬의 변태 할아범> p. 44)이나, 여자에게 폭력적인 언사를 하는 경우들(<노숙자 아저씨들을 만나러 가다> p. 124)이 그렇다.



그리고 작가는 그런 투명한 욕망을 드러내는 아저씨들을 보면서 경탄할 때가 많은데, 

그건 작가 특유의 유머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부러움을 내비친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아저씨들의 대칭점에 젊은 여성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사회적으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아저씨, 그리고 비교적 남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고,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숨겨야 하는 젊은 여성들.


아저씨는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거의 강제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파워로 어쨌거나 앞으로 나아간다. 언제라도 자신이 중심이다. 아저씨의 터프함과 여차할 때 빠르게 포기하는 자세는 오랜 세월 축적된 경험이 만들어낸 기술이다. 아저씨를 보고 배워서, 가끔은 본능이 이끄는 대로 지내보면 어떨까? p. 122



아저씨가 자유분방할 수 있는 사회일수록 여자들은 힘들어지는 게 아닐까.

책에 나오는 아저씨들 대부분이 도박을 하고, 술 담배를 했다.

공공장소에서 아무렇게나 입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기도 하다.

외모를 자기 멋대로 꾸민 것은 기본이다.


저자는 심지어 아무것도 안 하고 멍 때리고 있는 아저씨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축 처진 아저씨’ p. 23)


뭘 하는가 싶었더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신발을 벗고 그저 오로지 햇볕을 쬐고 있다. 나는 과연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낸 적이 있을까? 가장 사치스러운 시간 활용이 아닐까 싶다. p. 122



다음 챕터가 무언인지 전혀 모른 채 느닷없이 등장하는 아저씨 패턴들은 정말 기상천외하다.


심지어 아저씨가 아닌 챕터가 두 개 있는데, 그중 하나는 ‘아저씨에게 인기 있는 여성’ 유형에 관한 챕터(p. 84)다. 나머지 하나를 보고는 정말이지 감탄했다. 패턴 찾기의 최고 상태 아닐까 싶다. (p. 107)



디테일하게 조사한 면면들을 살펴보다 보면 의외의 말이 아저씨들 입에서 튀어나오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젊은이들에게 한마디 해달라는 요청에 “내 일만으로 벅차서 그런 여유는 없다.” (p. 116)고 답하거나, 좋아하는 배우로 한국판 <꽃보다 남자>에 나왔던 구혜선을 드는(p. 119) 순간에는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아저씨의 느낌이 많이 깨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외모로만 분류한 유형들을 봤을 때는 확실히 일본 쪽이 다채로운 것 같다. 우리나라 아저씨로 도감을 만든다면 좀 더 유형이 단조롭지 않을까. 하지만 조금은 낯선 느낌의 외국인 아저씨일지라도 익숙한 지점들은 분명히 있다. 그래서 상당히 공감하면서 읽었다. 


자신이 추하게 늙어가고 싶지 않은 아저씨라면, 그 어떤 책보다도 직접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런 책은 아저씨가 읽을 일이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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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스트라이크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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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대단히 지루하고, 처진다. 많지 않은 분량에도 읽기가 쉽지 않았다.


문제가 뭘까 계속 생각해 봤는데,

악당인 마이가 너무 늦게 등장하고, 너무 늦게 활약(?)을 벌이는 게 핵심적이었던 것 같다.


악당이 등장하기 전까지 가짜 악당들(익인들, 비오, 휴고 등)이 대신 활약을 하지만

진짜 악당이 아니기 때문에 동력이 약하고 자주 교체된다. 때문에 이야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진짜 악당(마이)을 제외한 모두는 선해야 한다는 규칙이 지켜지고 있다.

왜 선해야 하는가. 작가가 그리고 있는 엔딩이 모두에게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결국 작품 전체에 나이브 한 가치관이 흐르게 된다.

나중에 가서는 악당조차 스스로 회심하고 용서를 받는다.


어쨌거나 이런 문제가 불러온 가장 큰 폐해는 

캐릭터들이 선명하지 못하고 흐리멍덩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건가 싶으면 이렇지 않고, 저런 건가 싶으면 저렇지 않고,

이건 캐릭터가 입체적인 게 아니라 이도 저도 아닌 것이다.

캐릭터의 입장이라는 게 불분명하다.


비오는 루를 사막에 버리고 가겠다는 건가 아닌가.

지장은 너그럽게 비오를 용납하겠다는 건가 아닌가.

익인들은 도시인들에게 분노를 가졌다는 건가 아닌가.


이러다 보니 인물들의 행동이 명쾌하지 못하고 집중도를 흐트러뜨린다.


또 이렇게 되면 각각의 캐릭터로서도 문제지만,

캐릭터 간의 대립각도 흐리멍덩해진다.

이 둘은 우호적인 관계인가 아닌가. 이 인물은 아군인가 적인가. 

이 이야기의 갈등은 어떤 축에서 이뤄지는가.

방향을 알 수 없게 이야기는 그저 흘러간다. 

마이가 진짜 악당이라는 게 드러날 때까지 말이다.


익인들은 시 청사를 습격하고도 역습을 당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어떤 익인들은 도시로의 무역을 계속한다.

도시인들은 그런 무역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태연하게 도시로 무역을 나온 비라이를 붙든 시행은

정중하게 익인들이 왜 청사를 습격한 건지를 묻고 있다.

도대체 이 세계는 어떤 논리에 의해 돌아가고 있는 걸까?

어떤 긴장감이나 갈등도 없다. 흐리멍덩할 뿐이다.


그러니 이야기의 목표, 캐릭터의 목표랄 것도 없다.

실종된 다니오를 찾는 것도 아니고,

인질로 잡혀간 루를 구해오는 이야기도 아니다.


주인공은 루와 비오로 보이는데, 

이들은 중반이 넘어갈 때까지 별다른 목표 없이 이야기 속에서 부유한다.

이야기는 늘어놓고 있는데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해결되어야 할 갈등이 애초에 존재했던가.

이야기를 지루하게 만드는 이유다.


루는 익인들이 분주하다는 이유가 비오의 아버지 다니오와 관련된 일이라고 짐작했으나 이어지는 지장의 말은 좀 달랐다.

“우리의 정직하고 충실한 구성원인 다니오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해마다 준비하던 건 해야지요. 다음 주에 익인 청년들의 이행식이 있답니다.” p. 105(가제본)


이쯤 되면 헛웃음이 나온다.


문장들도 늘어질 때가 많은데, 다듬어지지 않은 미완성 작품처럼 보였다.

정식 출간본에서는 고쳐지리라 예상된다.



그 여자아이가 내미는, 뭔지 모를 뿌연 음료가 담긴 나무잔도 사양할까 하다가, 낯선 데서 깨어나선 적의를 담지 않은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베푸는 호의를 거절하는 게 앞으로 거취를 생각했을 때 그리 현명한 선택 같지 않아서 루는 약이려니 하고 잠자코 받아 마셨다. p. 65(가제본)


또한 벼랑 같은 데서 떨어져 바위에 부딪치거나 하여 완전히 머리가 부서진 동물도 고치지 못하고 다만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고통을 보살펴 준 뒤 묻어주었다고, 지요는 슬픈 낯빛으로 담담히 말했다. p. 116(가제본)


또 다른 커다란 문제는 가부장적인 성 역할이 전제됐다는 점이다.

두 남녀 주인공의 불행은 아버지의 외도에서 시작된다.

둘은 혼외 자식이다. 둘의 공통점을 만들어 주고, 같은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심지어 청소년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자연스럽게 바람을 피우는 것은 보기 불편했다.


여자들의 역할이 모성적인 희생과 이해심으로 고정돼 있는 것도 문제다.

앞선 혼외 자식 문제도 그렇지만, 남자들이 저지른 모든 문제는 여자들이 받아들이고, 감내하면서 해결된다.


비오가 마이를 죽이려 총 쏜 것을 루가 대신 맞는다.

미친 과학자에 가까운 마이의 정체를 알고도 탄은 그를 용서하고 결혼을 하려고 마음을 먹는다.

무능한 휴고는 아마라의 도움으로 시행이 될 수 있었으면서도, 

시행이 되고 나자 아마라와 루를 ‘과수원’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한다.

마치 대단한 시해라도 베푼다는 듯이 말이다.

사고를 치고 무책임하게 날아가버린 비오를 루는 이해하고 보내주더니만

나중에는 그를 찾겠다며 비행기를 타고 나선다. 


지요가 그런 루에게 하는 말이 가관이다.



그 어떤 새도 영원히 허공에서만 살 수 없고 언젠가 땅에 두 발을 디디고 내려앉아야 한다면, 네가 그의 영원한 영토이니까. p. 290(가제본)


거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수준이다.

그 노래가 나온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다.

주인공인 루가 수동적으로 사건에 대처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녀는 계속해서 도움을 받기만 한다.


영 어덜트 소설이라고 엉성하게만 엮어놓은 이야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청소년과 어른들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니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청소년 대상이건, 성인 대상이건 재밌고 신선한 장르물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어느 쪽도 아닌 싱거운 작품이 된 것 같다.

창비라는 브랜드 때문에 잘 팔릴 것 같긴 한데

다음 작품도 잘 팔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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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인자에게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 지음, 김지원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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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오빠에게 부족하지 않은 거라면 바로 설득력이었다. 30분만 주면 오빠는 당신의 동정심을 살 것이다. 

45분이 지나면 자신의 음모론으로 당신을 세뇌할 것이다. 

한 시간이 지나면 당신은 내가 방금 이야기한 모든 것을 의심할 것이다. 한 시간 15분이 지나면 이 상냥하고 매력적인 신사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 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 시간 반이 지나면 오빠는 당신을 조종해서 여동생들에게 이런 식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그를 불쌍하게 여기도록 만들 것이다. p. 284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이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라고 한다. ‘<가스등(Gas Light)>(1938)’이란 연극에서 유래한 단어라고 한다.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의 『나의 살인자에게』는 가스라이팅으로 가족과 범죄조직, 시민들을 쥐락펴락하는 희대의 범죄자 오빠에 대한 고발의 기록이다. 오랜 세월 고통받아온 저자는 어려움 끝에 오빠를 감옥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한다. 물론 저자가 가스라이팅이란 단어를 쓰지도 않고 그 개념으로 자신의 경우를 파악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가스라이팅에 대한 설명보다도 생생한 사례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흥미롭다. 마치 가스라이팅 개념을 토대로 작위적인 픽션을 만든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심지어 흥미진진한 전개까지 갖추고 있다.


모든 원인은 아버지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간에 어떻게 됐다는 언급도 없이 조용히 사라지는 이 아버지는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개차반인 인간이다. 가정 폭력, 폭군, 가부장…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전형적인 케이스인데, 여성 인권이 높다고 알고 있던 서유럽 국가에서 이런 유형을 발견한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그들도 지난한 여성 투쟁의 역사를 겪었으리라. 

문제의 큰 아들 ‘빔’의 가스라이팅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게서 기인한다. 


엄마를 고립시킨 다음 아빠는 엄마를 세뇌시켰다. 엄마는 “그저” 여자일 뿐이고, 여자들은 열등한 존재이자 남편의 소유물이며, 본질적으로 창녀였다. 엄마가 “창녀 짓을” 하지 못하도록 다른 남자와 만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엄마는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 하고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식료품을 사러 갈 때면 정확하게 어디에 가는지 알리는 쪽지를 써놔야 했다. p. 34


아버지에게서 그것을 물려받은 빔은 청출어람이다. 

그는 가스라이팅의 대상을 가정이라는 소박한 범위에서 더 나아가, 

범죄 집단, 지역 사회로 넓혀갔다.


그의 가스라이팅 방법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나온다. 

사이코패스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소시오패스는 된다.


우선 그는 절대로 자신이 나쁜 사람임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빔 오빠는 유치원생의 감정적 발달을 흉내 내서 자신을 작고 무해해 보이게 만들곤 했다. 하지만 오빠는 무해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p. 239


물론 그것은 일종의 미끼와도 같았다. 상대는 그 미끼를 물고 그의 위험성을 간과한다.


협박에 이어지는 것은 갈취일 것이다. 오빠는 경험 많은 성인 남자가 어린 여동생에게 해주는 선의의 조언으로 그것을 포장했다. p. 239


그리고 충분히 그물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하면 본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오빠는 늘 “다른 사람을 도와주었다”. 그게 오빠가 사람들을 자신에게 구속시키는 방법이었고, 확실하게 그들을 옭아매고 나면 그들을 이용했다. p. 252-253


“문제가 일어날 거야!”

오빠는 그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 오빠는 누가 그런 계획을 꾸몄는지 아니까. 그리고 친구로서, 오빠가 도와줄 것이다.

진심으로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빠는 당신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이 분쟁의 중재자 역할을 기꺼이 맡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지불’이 시작된다.

오빠가 전령이기 때문에 이쪽과 저쪽에 전달하는 내용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

아무도 오빠가 이 분쟁의 유일한 원인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p. 280-281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그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려 있는 것이다.


빔 오빠에게 1센티미터를 내주면 오빠는 1킬로미터를 차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길 전체를 장악한다. 그리고 마음 내키면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는다. p. 285


이런 교묘한 방식을 통해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냈다.

그렇게 그의 범죄는 공권력까지 농락하며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의 달변과 연기력, 매력은 재판에 유리했다)


그는 가족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오히려 가족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단순 피해를 넘어서 ‘일체화’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야비하게도 가족, 그중에서도 여자 가족들에게 행해졌다.

바로 막내 동생인 저자가 가장 위험한 경우였다.

그녀는 자신이 오빠와 비슷한 존재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내가 남자아이였으면 딱 오빠처럼 자라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폭력과 허세에 빠지는 걸 막아주었던 건 내가 여자아이라는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대신에 내가 내 지적 능력을 사용해서 비슷한 삶을 걷는 것을 막았는지도 모르겠다. 

남자로 태어났다는 우연을 갖고 내가 어떻게 오빠를 비난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내가 과연 오빠한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오빠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꽤나 “똑같은” 사람들인데. p. 267



이것은 가스라이팅이 가진 최악의 폐해다. 

오빠에 의해 저자는 자존감이 급격히 깎이게 된다.

때문에 그녀가 오빠의 폭압을 견뎌내고 그를 고발하기까지의 과정은,

저자 자신이 오빠와는 다른 인간임을 증명해 보이는 투쟁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오빠를 향한 증명이자, 사회를 향한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증명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가부장 시스템 안에서 철저하게 가스라이팅 당한 여자에게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본인은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아는 것부터 희망은 시작된다. 

남자들이 후려친 상태 그대로 자신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 유사성이 나와 오빠를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건 아니야. 오빠가 한 모든 일은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히는 거였어.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피하려고 노력한 일이야. p. 524


그녀의 투쟁은 어렸을 적부터 시작됐다.

저자는 열심히 공부했고, 오빠와는 정반대로 정의를 다루는 법조인이 된다.

그리고 계속해서 오빠와의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오빠에게 이용돼 범죄조직을 위한 변호사가 될 뻔하지만 분명히 선을 긋는다.

오빠와 같은 인간이 아님을 호소하기 위해 법무부와 은밀히 접촉하여 결백을 보장받는다.

그리고 끝내 그를 고발하는 데 성공하면서 오빠와 정반대의 인간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가 않고, 쉽게 끝나지도 않는다.

그녀는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는 오빠의 살해 목록 1순위이고,

이미 한차례 살해 사주가 발각되기도 했다.


그녀의 기록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지나치게 오빠를 두려워하고,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조심한다.

때로는 지나치게 과잉 충성하고 있다는 인상도 받는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이 기록이 실제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가스라이팅 당한 사람에게 왜 그렇게까지 충성했느냐고,

왜 진작 오빠를 고발하지 않았느냐고,

왜 도망가거나 오빠에게 맞서지 않았느냐고 비난할 수는 없다.

가스라이팅이란 것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의 여자들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미국의 흑인 노예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였고, 언제나 백인보다 하등하다는 세뇌를 당한 그들에게

왜 진작 봉기를 일으켜 권리를 쟁취하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녀를 도운 것은 여자들이었다. 법무부의 직원들, 언니, 빔의 정부, 그리고 자신의 딸.


남자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빠와 오빠는 말할 것도 없다. 형부도, 남편도, 심지어 정의의 편도 마찬가지였다.

(한 검사는 오빠와 형부가 운영하는 윤락업소에서 찍힌 자신의 성관계 테이프를 찾기 위해 저자의 집을 불법으로 수색한다. p. 230) 그들은 어떻게 보면 한 패인 것처럼 보인다.

같이 증언해 달라는 여자 형제들의 요구에 작은 오빠는 이렇게 말하며 거절한다.


“우리 셋 다 죽을 필요가 뭐 있어? 둘 다 여기 없으면 최소한 내가 엄마를 돌봐드릴 수 있을 거야.” p. 435-436


그래서 끝내 빔에게 목숨을 잃은 형부를 놓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형부는 재밌는 사람이었지만 좋은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그녀는 완벽하게 가부장 시스템에서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종종 그랬듯 코르 형부에게 도와달라고 빌었다. 형부는 형부의 살인으로 빔 오빠가 형을 받도록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하는 동안 언제나 거기에, 배경에 있었다. 형부는 언제나 신호를 보내서 우리에게 계속할 힘을 주었다. 미신이라고 불러도 좋고 우리가 미쳤다고 해도 좋지만, 우리가 용기를 잃거나 갈피를 못 잡을 때면 항상 무슨 일인가 일어나서 우리에게 형부가 거기에 있고 우리를 지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p. 345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고도 훌륭한 가스라이팅 사례를 남긴 것처럼,

이 책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고도 훌륭한 페미니즘 사례로 남는다.

그래서 저자가 하는 말에는 힘이 실려 있다. 그녀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지만, 억압받는 모든 여성을 향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나는 평생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곤 했다. 그게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직업적으로도 나에게 정체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이제 누가 자기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만 징징거리고 해결을 하라고.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 p. 448



자신의 겁쟁이 같은 사례를 적나라하게 들려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사느니 지금 당장 행동하라고 저자는 종용한다. 그녀는 지금도 집안에 갇혀서 살해 위협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그 사슬을 단호하게 끊어냈다.


오빠는 자꾸 물어 대서 아이들에게서 떼어놔야만 하는 나쁜 개 같은 존재였다. 

죽이거나 남은 평생 우리에 가둬놔야 하는 그런 나쁜 개 같은 존재. p. 243


그것은 어쩌면 당사자들인 남자들은 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강하다는 아버지도, 오빠도 그것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결국 폭력과 가스라이팅을 거부하지 못하고 물려줬고, 물려받았다.

결국 여자들이 직접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책을 읽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럼 언니는 그냥 앉아서 다른 사람이 뭔가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건 쉬운 일이지.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해서 아무 결과도 안 나왔잖아. 우린 운명에 의존하고 있어. 난 내 운명을 내 손으로 만들고 싶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 안 해.” p. 265


저자가 오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는 모든 가부장 남성들을 향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빔 오빠, 내가 왜 오빠에게 이런 일을 했는지 궁금하다면, 이게 내 답이야. 코르를 위해서. 소냐 언니를 위해서. 리히를 위해서. 프란시스를 위해서. 오빠 때문에 아빠를 잃은 모든 아이를 위해서. 그리고 그 고통에서 구해주고 싶은 모든 아이를 위해서. 

이제 살인을 멈출 때야. p. 525


분명히 이제는 살인을 멈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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