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인자에게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 지음, 김지원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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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 오빠에게 부족하지 않은 거라면 바로 설득력이었다. 30분만 주면 오빠는 당신의 동정심을 살 것이다. 

45분이 지나면 자신의 음모론으로 당신을 세뇌할 것이다. 

한 시간이 지나면 당신은 내가 방금 이야기한 모든 것을 의심할 것이다. 한 시간 15분이 지나면 이 상냥하고 매력적인 신사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어? 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 시간 반이 지나면 오빠는 당신을 조종해서 여동생들에게 이런 식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그를 불쌍하게 여기도록 만들 것이다. p. 284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가스라이팅이란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라고 한다. ‘<가스등(Gas Light)>(1938)’이란 연극에서 유래한 단어라고 한다.


아스트리드 홀레이더르의 『나의 살인자에게』는 가스라이팅으로 가족과 범죄조직, 시민들을 쥐락펴락하는 희대의 범죄자 오빠에 대한 고발의 기록이다. 오랜 세월 고통받아온 저자는 어려움 끝에 오빠를 감옥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한다. 물론 저자가 가스라이팅이란 단어를 쓰지도 않고 그 개념으로 자신의 경우를 파악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가스라이팅에 대한 설명보다도 생생한 사례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흥미롭다. 마치 가스라이팅 개념을 토대로 작위적인 픽션을 만든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심지어 흥미진진한 전개까지 갖추고 있다.


모든 원인은 아버지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간에 어떻게 됐다는 언급도 없이 조용히 사라지는 이 아버지는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개차반인 인간이다. 가정 폭력, 폭군, 가부장…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전형적인 케이스인데, 여성 인권이 높다고 알고 있던 서유럽 국가에서 이런 유형을 발견한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그들도 지난한 여성 투쟁의 역사를 겪었으리라. 

문제의 큰 아들 ‘빔’의 가스라이팅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게서 기인한다. 


엄마를 고립시킨 다음 아빠는 엄마를 세뇌시켰다. 엄마는 “그저” 여자일 뿐이고, 여자들은 열등한 존재이자 남편의 소유물이며, 본질적으로 창녀였다. 엄마가 “창녀 짓을” 하지 못하도록 다른 남자와 만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엄마는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 하고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식료품을 사러 갈 때면 정확하게 어디에 가는지 알리는 쪽지를 써놔야 했다. p. 34


아버지에게서 그것을 물려받은 빔은 청출어람이다. 

그는 가스라이팅의 대상을 가정이라는 소박한 범위에서 더 나아가, 

범죄 집단, 지역 사회로 넓혀갔다.


그의 가스라이팅 방법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나온다. 

사이코패스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소시오패스는 된다.


우선 그는 절대로 자신이 나쁜 사람임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빔 오빠는 유치원생의 감정적 발달을 흉내 내서 자신을 작고 무해해 보이게 만들곤 했다. 하지만 오빠는 무해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p. 239


물론 그것은 일종의 미끼와도 같았다. 상대는 그 미끼를 물고 그의 위험성을 간과한다.


협박에 이어지는 것은 갈취일 것이다. 오빠는 경험 많은 성인 남자가 어린 여동생에게 해주는 선의의 조언으로 그것을 포장했다. p. 239


그리고 충분히 그물에 걸려들었다고 생각하면 본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오빠는 늘 “다른 사람을 도와주었다”. 그게 오빠가 사람들을 자신에게 구속시키는 방법이었고, 확실하게 그들을 옭아매고 나면 그들을 이용했다. p. 252-253


“문제가 일어날 거야!”

오빠는 그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 오빠는 누가 그런 계획을 꾸몄는지 아니까. 그리고 친구로서, 오빠가 도와줄 것이다.

진심으로 상대방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빠는 당신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이 분쟁의 중재자 역할을 기꺼이 맡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지불’이 시작된다.

오빠가 전령이기 때문에 이쪽과 저쪽에 전달하는 내용을 완벽하게 통제했다.

(…)

아무도 오빠가 이 분쟁의 유일한 원인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p. 280-281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그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려 있는 것이다.


빔 오빠에게 1센티미터를 내주면 오빠는 1킬로미터를 차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길 전체를 장악한다. 그리고 마음 내키면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는다. p. 285


이런 교묘한 방식을 통해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냈다.

그렇게 그의 범죄는 공권력까지 농락하며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의 달변과 연기력, 매력은 재판에 유리했다)


그는 가족이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오히려 가족이 가장 큰 피해자였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단순 피해를 넘어서 ‘일체화’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야비하게도 가족, 그중에서도 여자 가족들에게 행해졌다.

바로 막내 동생인 저자가 가장 위험한 경우였다.

그녀는 자신이 오빠와 비슷한 존재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내가 남자아이였으면 딱 오빠처럼 자라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폭력과 허세에 빠지는 걸 막아주었던 건 내가 여자아이라는 사실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대신에 내가 내 지적 능력을 사용해서 비슷한 삶을 걷는 것을 막았는지도 모르겠다. 

남자로 태어났다는 우연을 갖고 내가 어떻게 오빠를 비난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내가 과연 오빠한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오빠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꽤나 “똑같은” 사람들인데. p. 267



이것은 가스라이팅이 가진 최악의 폐해다. 

오빠에 의해 저자는 자존감이 급격히 깎이게 된다.

때문에 그녀가 오빠의 폭압을 견뎌내고 그를 고발하기까지의 과정은,

저자 자신이 오빠와는 다른 인간임을 증명해 보이는 투쟁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오빠를 향한 증명이자, 사회를 향한 것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증명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가부장 시스템 안에서 철저하게 가스라이팅 당한 여자에게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본인은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아는 것부터 희망은 시작된다. 

남자들이 후려친 상태 그대로 자신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 유사성이 나와 오빠를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건 아니야. 오빠가 한 모든 일은 다른 사람들을 상처 입히는 거였어.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피하려고 노력한 일이야. p. 524


그녀의 투쟁은 어렸을 적부터 시작됐다.

저자는 열심히 공부했고, 오빠와는 정반대로 정의를 다루는 법조인이 된다.

그리고 계속해서 오빠와의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다.

오빠에게 이용돼 범죄조직을 위한 변호사가 될 뻔하지만 분명히 선을 긋는다.

오빠와 같은 인간이 아님을 호소하기 위해 법무부와 은밀히 접촉하여 결백을 보장받는다.

그리고 끝내 그를 고발하는 데 성공하면서 오빠와 정반대의 인간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결코 쉽지가 않고, 쉽게 끝나지도 않는다.

그녀는 아직도 감옥에 갇혀 있는 오빠의 살해 목록 1순위이고,

이미 한차례 살해 사주가 발각되기도 했다.


그녀의 기록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지나치게 오빠를 두려워하고,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조심한다.

때로는 지나치게 과잉 충성하고 있다는 인상도 받는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이 기록이 실제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가스라이팅 당한 사람에게 왜 그렇게까지 충성했느냐고,

왜 진작 오빠를 고발하지 않았느냐고,

왜 도망가거나 오빠에게 맞서지 않았느냐고 비난할 수는 없다.

가스라이팅이란 것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의 여자들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미국의 흑인 노예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였고, 언제나 백인보다 하등하다는 세뇌를 당한 그들에게

왜 진작 봉기를 일으켜 권리를 쟁취하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녀를 도운 것은 여자들이었다. 법무부의 직원들, 언니, 빔의 정부, 그리고 자신의 딸.


남자들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빠와 오빠는 말할 것도 없다. 형부도, 남편도, 심지어 정의의 편도 마찬가지였다.

(한 검사는 오빠와 형부가 운영하는 윤락업소에서 찍힌 자신의 성관계 테이프를 찾기 위해 저자의 집을 불법으로 수색한다. p. 230) 그들은 어떻게 보면 한 패인 것처럼 보인다.

같이 증언해 달라는 여자 형제들의 요구에 작은 오빠는 이렇게 말하며 거절한다.


“우리 셋 다 죽을 필요가 뭐 있어? 둘 다 여기 없으면 최소한 내가 엄마를 돌봐드릴 수 있을 거야.” p. 435-436


그래서 끝내 빔에게 목숨을 잃은 형부를 놓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형부는 재밌는 사람이었지만 좋은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그녀는 완벽하게 가부장 시스템에서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종종 그랬듯 코르 형부에게 도와달라고 빌었다. 형부는 형부의 살인으로 빔 오빠가 형을 받도록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하는 동안 언제나 거기에, 배경에 있었다. 형부는 언제나 신호를 보내서 우리에게 계속할 힘을 주었다. 미신이라고 불러도 좋고 우리가 미쳤다고 해도 좋지만, 우리가 용기를 잃거나 갈피를 못 잡을 때면 항상 무슨 일인가 일어나서 우리에게 형부가 거기에 있고 우리를 지지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p. 345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고도 훌륭한 가스라이팅 사례를 남긴 것처럼,

이 책은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쓰지 않고도 훌륭한 페미니즘 사례로 남는다.

그래서 저자가 하는 말에는 힘이 실려 있다. 그녀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지만, 억압받는 모든 여성을 향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나는 평생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곤 했다. 그게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직업적으로도 나에게 정체성을 부여했다. 하지만 이제 누가 자기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만 징징거리고 해결을 하라고.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 p. 448



자신의 겁쟁이 같은 사례를 적나라하게 들려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사느니 지금 당장 행동하라고 저자는 종용한다. 그녀는 지금도 집안에 갇혀서 살해 위협을 감수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그 사슬을 단호하게 끊어냈다.


오빠는 자꾸 물어 대서 아이들에게서 떼어놔야만 하는 나쁜 개 같은 존재였다. 

죽이거나 남은 평생 우리에 가둬놔야 하는 그런 나쁜 개 같은 존재. p. 243


그것은 어쩌면 당사자들인 남자들은 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강하다는 아버지도, 오빠도 그것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결국 폭력과 가스라이팅을 거부하지 못하고 물려줬고, 물려받았다.

결국 여자들이 직접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책을 읽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럼 언니는 그냥 앉아서 다른 사람이 뭔가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건 쉬운 일이지. 하지만 지금까지 그렇게 해서 아무 결과도 안 나왔잖아. 우린 운명에 의존하고 있어. 난 내 운명을 내 손으로 만들고 싶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 안 해.” p. 265


저자가 오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는 모든 가부장 남성들을 향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빔 오빠, 내가 왜 오빠에게 이런 일을 했는지 궁금하다면, 이게 내 답이야. 코르를 위해서. 소냐 언니를 위해서. 리히를 위해서. 프란시스를 위해서. 오빠 때문에 아빠를 잃은 모든 아이를 위해서. 그리고 그 고통에서 구해주고 싶은 모든 아이를 위해서. 

이제 살인을 멈출 때야. p. 525


분명히 이제는 살인을 멈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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