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 스트라이크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9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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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대단히 지루하고, 처진다. 많지 않은 분량에도 읽기가 쉽지 않았다.


문제가 뭘까 계속 생각해 봤는데,

악당인 마이가 너무 늦게 등장하고, 너무 늦게 활약(?)을 벌이는 게 핵심적이었던 것 같다.


악당이 등장하기 전까지 가짜 악당들(익인들, 비오, 휴고 등)이 대신 활약을 하지만

진짜 악당이 아니기 때문에 동력이 약하고 자주 교체된다. 때문에 이야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진짜 악당(마이)을 제외한 모두는 선해야 한다는 규칙이 지켜지고 있다.

왜 선해야 하는가. 작가가 그리고 있는 엔딩이 모두에게 해피엔딩이기 때문이다.

결국 작품 전체에 나이브 한 가치관이 흐르게 된다.

나중에 가서는 악당조차 스스로 회심하고 용서를 받는다.


어쨌거나 이런 문제가 불러온 가장 큰 폐해는 

캐릭터들이 선명하지 못하고 흐리멍덩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건가 싶으면 이렇지 않고, 저런 건가 싶으면 저렇지 않고,

이건 캐릭터가 입체적인 게 아니라 이도 저도 아닌 것이다.

캐릭터의 입장이라는 게 불분명하다.


비오는 루를 사막에 버리고 가겠다는 건가 아닌가.

지장은 너그럽게 비오를 용납하겠다는 건가 아닌가.

익인들은 도시인들에게 분노를 가졌다는 건가 아닌가.


이러다 보니 인물들의 행동이 명쾌하지 못하고 집중도를 흐트러뜨린다.


또 이렇게 되면 각각의 캐릭터로서도 문제지만,

캐릭터 간의 대립각도 흐리멍덩해진다.

이 둘은 우호적인 관계인가 아닌가. 이 인물은 아군인가 적인가. 

이 이야기의 갈등은 어떤 축에서 이뤄지는가.

방향을 알 수 없게 이야기는 그저 흘러간다. 

마이가 진짜 악당이라는 게 드러날 때까지 말이다.


익인들은 시 청사를 습격하고도 역습을 당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어떤 익인들은 도시로의 무역을 계속한다.

도시인들은 그런 무역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다.

태연하게 도시로 무역을 나온 비라이를 붙든 시행은

정중하게 익인들이 왜 청사를 습격한 건지를 묻고 있다.

도대체 이 세계는 어떤 논리에 의해 돌아가고 있는 걸까?

어떤 긴장감이나 갈등도 없다. 흐리멍덩할 뿐이다.


그러니 이야기의 목표, 캐릭터의 목표랄 것도 없다.

실종된 다니오를 찾는 것도 아니고,

인질로 잡혀간 루를 구해오는 이야기도 아니다.


주인공은 루와 비오로 보이는데, 

이들은 중반이 넘어갈 때까지 별다른 목표 없이 이야기 속에서 부유한다.

이야기는 늘어놓고 있는데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다.

해결되어야 할 갈등이 애초에 존재했던가.

이야기를 지루하게 만드는 이유다.


루는 익인들이 분주하다는 이유가 비오의 아버지 다니오와 관련된 일이라고 짐작했으나 이어지는 지장의 말은 좀 달랐다.

“우리의 정직하고 충실한 구성원인 다니오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해마다 준비하던 건 해야지요. 다음 주에 익인 청년들의 이행식이 있답니다.” p. 105(가제본)


이쯤 되면 헛웃음이 나온다.


문장들도 늘어질 때가 많은데, 다듬어지지 않은 미완성 작품처럼 보였다.

정식 출간본에서는 고쳐지리라 예상된다.



그 여자아이가 내미는, 뭔지 모를 뿌연 음료가 담긴 나무잔도 사양할까 하다가, 낯선 데서 깨어나선 적의를 담지 않은 눈길을 보내는 사람이 베푸는 호의를 거절하는 게 앞으로 거취를 생각했을 때 그리 현명한 선택 같지 않아서 루는 약이려니 하고 잠자코 받아 마셨다. p. 65(가제본)


또한 벼랑 같은 데서 떨어져 바위에 부딪치거나 하여 완전히 머리가 부서진 동물도 고치지 못하고 다만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고통을 보살펴 준 뒤 묻어주었다고, 지요는 슬픈 낯빛으로 담담히 말했다. p. 116(가제본)


또 다른 커다란 문제는 가부장적인 성 역할이 전제됐다는 점이다.

두 남녀 주인공의 불행은 아버지의 외도에서 시작된다.

둘은 혼외 자식이다. 둘의 공통점을 만들어 주고, 같은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심지어 청소년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자연스럽게 바람을 피우는 것은 보기 불편했다.


여자들의 역할이 모성적인 희생과 이해심으로 고정돼 있는 것도 문제다.

앞선 혼외 자식 문제도 그렇지만, 남자들이 저지른 모든 문제는 여자들이 받아들이고, 감내하면서 해결된다.


비오가 마이를 죽이려 총 쏜 것을 루가 대신 맞는다.

미친 과학자에 가까운 마이의 정체를 알고도 탄은 그를 용서하고 결혼을 하려고 마음을 먹는다.

무능한 휴고는 아마라의 도움으로 시행이 될 수 있었으면서도, 

시행이 되고 나자 아마라와 루를 ‘과수원’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한다.

마치 대단한 시해라도 베푼다는 듯이 말이다.

사고를 치고 무책임하게 날아가버린 비오를 루는 이해하고 보내주더니만

나중에는 그를 찾겠다며 비행기를 타고 나선다. 


지요가 그런 루에게 하는 말이 가관이다.



그 어떤 새도 영원히 허공에서만 살 수 없고 언젠가 땅에 두 발을 디디고 내려앉아야 한다면, 네가 그의 영원한 영토이니까. p. 290(가제본)


거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수준이다.

그 노래가 나온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다.

주인공인 루가 수동적으로 사건에 대처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녀는 계속해서 도움을 받기만 한다.


영 어덜트 소설이라고 엉성하게만 엮어놓은 이야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청소년과 어른들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니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청소년 대상이건, 성인 대상이건 재밌고 신선한 장르물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어느 쪽도 아닌 싱거운 작품이 된 것 같다.

창비라는 브랜드 때문에 잘 팔릴 것 같긴 한데

다음 작품도 잘 팔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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