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적이지 않은 게 미덕인 우아한 환상 문학. 작가는 스산하고 미스터리한 분위기 조성에 공을 들인다. 인물들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꽁꽁 숨기는 데서 서스펜스와 공포가 생기는데, 그런 면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부부 사이에서 특히 도드라진다) 간접적인 방식으로 미스터리를 슬쩍 내보이는 편. 그래서 수록작들 중 가장 직접적이었던 <충만한 삶>이 좋았던 건지 모르겠다.
글의 결론보다, 결론에 이르는 저자의 지적 과시, 혹은 지적 생각의 흐름이 더 중요해 보인다. 때문에 모든 챕터의 결론이 굉장히 초라하거나, (교훈적이라는 의미에서)따분하거나, 조금은 꼰대스럽다. 미래를 내다보는 결론들이 특히 그런데, 과거(고전)에 얽매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만약 미래는 과거의 반복이라고 가정한다면 우선 과거 데이터를 기반으로 미래를 예측해볼 수 있다. 하지만 세상과 인생은 변곡점과 특이점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함정으로 가득하다. 과거는 미래에 대한 힌트는 될 수 있겠지만, 미래는 언제나 반복성과 랜덤의 조합이다. // -본문 중에서주제와 함께 제시된 미술 작품들도 그 연결이 억지스러울 때가 많다. 장식이나 과시에 머무르는 느낌. (표지와 삽입된 그래픽은 세련됐다) 저자의 지적인 유희에 초점이 맞춰져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것이 독자의 지적 유희와는 큰 관련이 없어 보인다는 게 가장 큰 단점이다.
너무 옛날 이야기이고(1980년 전후), 일본에 해당하는 이야기이고, 지나치게 오타쿠 중심적인 문화의 이야기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나쳐버리기에는 얻을 수 있는 핵심적 이야기가 너무 많다. 서브컬쳐와 미디어 산업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시간을 들여 읽어볼만한 생생한 그때 그 시절, 초기 오타쿠들의 벨 에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