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 현암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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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아마추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일에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지, 솜씨의 수준을 평가하는 말은 아니었다. 예술의 아마추어는 그림을 수집했고, 음악을 했고, 역사를 연구했으며, 마찬가지로 과학의 아마추어들은 천문학에서 의학, 식물학으로 옮겨 다녔다. 독자적인 생계수단이 있는 경우, 아마추어들은 지식의 산책자flaneur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수입원이 없는 장인들은 이런 사심 없는 방식으로 처신할 여유를 좀처럼 낼 수 없었다. - P189

하지만 협력의 어떤 점이 근대적인지를 이해하고 싶으니 우리는 이 대비를 완전히 포기하기는 싫다. 실험은 대화적 대화를 유발한다. 결말을 확정짓지 않은 채 가설과 과정과 결과에 관해 사람들과 토론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16세기와 17세기에 막 등장하기 시작한 과학은 대화적이고 결말이 열린 대화를 긍정적으로 본 데 반해 기독교는 그것을 두려워했다. 가톨릭교는 그것이 교회의 권위를 훼손할까 봐 겁을 냈고, 개신교는 자유로운 사고에 의거한 토론이 자신감이라는 죄로 연결될까 봐 겁을 냈다. 밀턴이 자신의 작품에서 이브와 뱀 그리고 이브와 아담이 나눈 대화를 통해 표현한 두려움 바로 그것이었다. 미하일 바흐친은 이렇게 쓴다. 대화적 대화란 "인간 자신의 경험에 대한 신념을 긍정한다. 창조적 이해를 위해서는 (・・・・・) 자신의 이해 대상 밖으로 나가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P192

꽌시는 사회적 결속social bond이 어떤 식으로 경제적 삶을 형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본질적으로 이 결속은 비공식적인 성격으로, 기존의 규칙과 규제의 엄격한 테두리 밖에서 지원해주는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오늘날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혼란스러운 중국의 상황에서는 이 결속이 필수적이다. 중국 사회의 공식적 규칙들 가운데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비공식적이고 사적인 네트워크는 사람들이 살아남고 번영을 누리기 위해 이런 규칙을 우회하도록 도와준다. 비공식적인 결속력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는 그것이 개인적인 대화든 혹은 솔 앨린스키의 공동체 조직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든 대화적 교환을 통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회에서 이런 교환의 범위를 확정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런 교환이 중국인들에게서처럼 실질적인 가치를 갖는가? 우리가 협력에 대해 중국인들처럼 생각하고 싶어 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꽌시는 비공식적인 것이지만 지속 가능한 것이 되고자 한다. 도움을 받는 사람은 장래의 언젠가 반드시 돌려주리라는 것은 알지만, 어떤 식으로 그것을 돌려주게 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꽌시는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계속 이어지게 되어 있는 관계이다. 서구식 계약의 기준에서 보면 그처럼 확정되지 않은 기대는 어떤 실체도 갖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의 학생이나 공무원이나 실업가에게, 그런 기대는 분명한 실체를 지닌다. 그 네트워크 안에서 책임감이 없다고 판명된 사람들은 처벌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사람들의 현재 행동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 해명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둘째로, 꽌시 네트워크 속에서는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사회 서열상 아래든 위든 당신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 혹은 당신에게 필요한 누군가와도 꽌시를 맺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다른 사회에서도 그랬지만 중국의 가족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3장에서 서술되었듯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에 따르면 서구 문화에서는 수치심이 자제력과 깊이 결부되어 있다. 수치심은 자신의 신체나 발언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 데서 연유한다. 현대의 가족생활, 더욱이 현대의 사업 관행은 이런 자립성의 개념을 확장했다. 타인에 대한 의존성은 약하다는 신호, 성격적 결함의 신호로 여겨졌다. 자녀를 기를 때나 직장에서 우리의 제도는 자율성과 자족성의 증진을 추구한다. 자율적 개인은 자유로운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문화에서는 타인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은 어딘가 깊은 결함이 있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사회적 안착social embeddedness에 대한 두려움에 지배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P220

획득된 권위는 일상적 불평등의 경험을 특정한 방식으로 처리한다. 그것은 지휘와 복종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굴욕감을 완화시킨다. 베버식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주인과 하인의 관계에서 굴욕감이 생기는 것은 하인에게 아무런 선택지가 없을 때이다. 더 폭넓게 본다면 주인이 전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하인은 굴욕감을 느낀다. 굴욕감을 주지 않는 사장은 보스턴의 공장에서처럼 소리도 지르고 욕을 할 수도 있고, 춤토르의 스튜디오에서처럼 현장의 직원들에게 일을 처리하도록 맡기고 자신은 이곳저곳으로 조용히 돌아다닐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그는 자신에게 닫혀 있지 않다. 우리는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처럼, 굴욕감이 수치심을 유발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3장에서 언급한 대로 엘리아스는 이 과정을 방귀 뀌는 것이 자신을 수치스럽게만든다는 식의 개별적 경험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그에 더하여 엘리아스는 수치심이 더 장기적인 효과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권위를 획득하는 의례에서 분노의 순간들은 지나간다. 일시적으로는 굴욕감을 줄지도 모르지만 수치심 역시 사라진다. 감정을 수용하는 것이 문명화하는 의례의 힘이 가진 한 가지 측면이다.
사장과 직원들 간의 관계가 그런 감정 폭발로 전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격식을 차리지 않는 토론이 구속력 있는 의례가 될 수 있다. 다만 정기적으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있다. 토의의 주제라는 게 기계에 기름칠을 언제 할지, 아니면 침대를 어디에 놓을지 같은 문제처럼,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의견 교환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일터가 구성된다면 관련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고 여기게 된다. 적어도 내가 시간을 보낸 보스턴의 신발 공장에서는 그랬다. 폭풍이 부는 사이사이의 며칠 혹은 몇 주일 동안, 주임과 기술자들은 커피를 마시면서 어떤 브랜드의 산업용 윤활유나 워셔액, 보호막 등이 기계에 가장 좋은지 논의했다. 여기서도 말을 듣고 메모를 하는 주임들은 권위를 획득한다. - P246

신뢰란 홀바인의 탁자 위에 놓인 도구들과 같다. 당신은 작동법도 정확하게 모르면서 그것들을 기꺼이 사용하려 한다. 은행가가 잘 알지 못하는 파생상품을 거래하려면 믿음의 도약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거래하는 금융 상품을 믿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위험에 대한 그의 지식보다 더 강하다. 건축가의 스튜디오에서 사람들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프로젝트,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들 자신도 결코 자금을 모으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런 프로젝트를 믿는다. 그들을 책상 앞에 묶어두는 것은 짐멜이 말한 믿음의 도약이다. 타인에 대한 신뢰도 이와 비슷하다. 그것은 그 믿음이 입증될 수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그들을 믿는 마음이다. - P248

의례는 획득된 권위를 이루는 바탕의 일부분이고, 은폐하는 거짓말은 믿음의 도약을 필요로 하는 신뢰 속에 짜여 들어가 있으며, 잡담은 제쳐두더라도, 위기 관리와 문제 해결은 협력과 파열을 연결한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이런 관계는 모두 매우 섬세한 소통을 포함한다. 더욱이 삼각 구도의 각 요소는 연합association에 의해 강화된다. 파열을 일으켰던 사건이 처리될 때 신뢰는 더 강해지며 권위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총괄적으로 볼 때 섬세하기도 하고 결속력도 있는 사회 구조이다. - P252

가장된 연대감, 타인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과 압박 하에 놓인 단기적인 팀워크는 4장의 시작 부분에서 논의했던 지속적인 사회적 연대의 모델 케이스인 꽌시와는 극적으로 대비된다. 꽌시는 조심스런 악수가 아니라 비판과 날카로운 조언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기 자신을 하나의 모델로서 전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려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날카로운 조언을 받아들인다. 무엇보다도 꽌시는 지속적이다. 그것은 특정한 사건을 초월하게 되어 있는 관계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네트워크는 발전하여 더 많은 파트너를 포함하게 된다. 각 파트너들은 서로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의지한다. 스포츠 팀과는 달리 참여자들은 여러 게임에 동시에 관련된다. 꽌시의 관계에는 효율을 위한 축소나 절감이 없다. 오히려 네트워크는 확대되어 점점 더 큰 모자이크가 되고 더 강해진다. - P272

여기서 비영업부서의 기술자들이, 위기로 치닫는 동안 컴퓨터용 회계처리 프로그램을 해석하지 못하는 상급자들의 무능력보다는 그들의 무관심을 더 큰 문제로 꼽았다는 사실을 말해둘 필요가 있다. 그것은 순전히 소질aptitude 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이다. 또 그들이 탓한 것은 자기들의 직속상관인 관리자들(그들 중에서도 일자리를 잃은 사람이 많다)보다 더 무관심했다고 판단되는 자기 조직의 최상급자들, 즉 사장, 이사, 임원 들이었다. 그런 요인들이 어떻게 혼합되었든 간에 결과는 유능함과 위계간의 전도된 관계, 상급자들에 대한 신뢰를 와해시키는 고통스러운 역행bitter reversal이었다.
바로 이러한 형태의 차별화하는 비교는 사일로 효과를 심화시킨다. 진심으로 들어주려는 관심이 없다면 소통하고 싶은 욕구도 사라진다. 비영업부서의 노동자들이 이런 전도된 관계를 상당 기간 경험하게 되면 그들은 상관의 온갖 세세한 행동에서 그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거드름을 피울 자격이 없음을 확인해주는 표시를 찾으려 애쓰는 무자비한 심판관이 되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는 차별화하는 비교를 끌어오는 사람도 스스로에게 좋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을 할 때, 이런 상황에서는 차별화하는 비교의 결과가 은밀한 만족감보다는 씁쓸함이 되기 십상이다. - P277

그들은 협력이 빈약하다는 것을 즉각 알아차렸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은 테크니컬한 소양을 갖추고 있는데 반해 상급자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신뢰감의 감소 현상도 느꼈다. 위기는 권위를 시험하는 리트머스 종이였는데, 상급자들 중에는 이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회사를 방어하지 못하고, 다른 지도자들이나 시스템 탓을 하면서 개인적 책임을 회피했으며, 일자리를 잃게 된 부하들을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었으니 그렇게 된 것이다. - P283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더욱 정교해졌다. 하인츠 코후트 Heinz Kohut는 ‘거울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신분석학에 "과대적 자기grandiose self"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나‘는 현실의 모든 공간을 채운다. 과대적 자기가 표현되는 한 가지 방식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통제할 필요를 느끼는 데 있다. 코후트의 말을 빌리자면, "다른 사람들이 성인으로서 겪는 경험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신체와 감정에 가해지기를 바라는 통제가 더 강조되는 것이다. 확실히 과대적 자기에 굴복한 사람들은 타인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가 "억압되고 노예화되는 것 같다"고 느낀다. 코후트가 활동하던 무렵의 또 다른 정신분석가인 오토 케른베르크Otto Kernberg 의 견해에 따르면 그로 인해 행동 자체가 가치를 잃게 되는 결과가 생긴다. "나는 무얼 하고 있는가?"는 "나는 어떤 기분인가?"로 대체되는 것이다.
이런 자기 몰입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현실이 개입하게 되면 불안감을 느낀다. 자아가 풍요로워지기보다는 자아가 상실될 것 같은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통제 받고 있다는 느낌을 되찾게 되면 불안감은 줄어든다. 내면에서 이런 정신분석적 거래가 발생하면 외적으로는 사회적 결과가 뒤따르는데,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회적 협력이 감소하는 현상이다. - P296

허약하고 묵직하지도 않고 신뢰할 수 없는 사회 질서에 직면하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 속으로 움츠러든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사람들의 경험에서 협력보다는 움츠러드는 쪽으로 무게를 더해주어 현대 사회의 저울추를 기울어지게 만드는 힘이다. 철학자 아마르티아 센과 마사 누스바움은 사회가 사람들의 가능성을, 무엇보다도 협력의 가능성을 확대하고 풍요롭게 해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그것을 약화시킨다. -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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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최소한으로 생각하라 - 삶과 죽음에 대한 스피노자의 지혜
스티븐 내들러 지음, 연아람 옮김 / 민음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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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덕을 가르치는 법보다 사람들의 부도덕을 비난하는 법을 더 잘 안다. 그들은 사람들을 이성으로 인도하지 않고 공포를 통해 통제하여 그들이 덕을 사랑하기보다 악을 피하게 하려고 애쓴다." 여기서 행동을 추동하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다.
반면 자유인은 오직 선을 추구하며 직접적으로 선을 행한다.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악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유인은 슬픔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추구할 뿐이다. - P254

죽음이 (어떤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끝이라는 사실을 알면 표상된 사후 세계를 향한 희망이나 두려움 같은 비이성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자유인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죽음이 자신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전혀 걱정할 것도, 바랄 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유인은 오직 이 세상에서 삶을 지속하는 동안 이성적인 자유를 발휘하고 덕이 필연적으로 가져다주는 행복을 누리는 데에만 관심을 둔다. "지복은 덕의 보상이 아니라 덕 그 자체다."
<에티카>의 이 부분의 핵심을 잘 정리한 어느 학자의 말처럼 스피노자가 의미한 영속성을 획득한 사람은 신체의 죽음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것이다. - P267

반면 『에티카』는 개인의 자유를 다룬다. 이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물리적 자유나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지적 자유가 아니라 선하고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인식하는 것을 행하기로 결정하는 내면적 자유다. 이것은 자주성으로서의 자유로, 사유와 욕망과 선택이 (그리고 궁극적으로 행동까지) 외부 사물들이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니라 자기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을 의미한다. - P269

스피노자는 이 전략을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우리의 정서에 대해 완전한 인식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우리가 할 수있는 최선의 것은 올바른 삶의 원칙이나 확실한 삶의 지침을 구상하고 이것을 기억하여 인생에서 자주 마주치는 개별 사례에 지속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후 그가 열거하는 삶의 지침은 바로 이성이 자유인에게 지시하는 내용들이다. 그런 "이성의 규칙"에는 미움을 사랑으로 극복하고 미움으로 되갚지 않는다는 것과 "흔히 발생하는 삶의 위험은 침착함과 정신의 힘으로 가장 잘 회피하고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있다. 분노나 야망, 다른 사람의 견해에 의존하는 자긍심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그중 하나다. 더 자유로워지고 궁극적으로 자유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이런 (규칙들)을 (그것들이 어렵지 않기에) 세심하게 따르고 실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머지않아 자신의 행동 대부분을 이성의 명령에 따라 지배할 수 있게 된다." 다시말해서 자유인처럼 행동하는 사람, 즉 이성의 지시에 따르는 사람은 더 자유로워지고 궁극적으로는 (바라건대) 자유인에도 이르게 된다. - P281

세상의 이치가 이렇지 않을까. 사람이 살다 보면 자신이 추구하던 선이 참된 선이 아니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이 참된 기쁨과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개인을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 이를테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의문이나 개인적인 상실, 불만, 더 나은 것에 대한 경험도 생긴다. 이런 일은 자연의 만물처럼 모두 인과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사유의 속성 아래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일련의 사건들이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삶의 행로를 바꾸지 못한다 해서 그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공식적인 의무를 등한시하는 것이 아니므로 형벌도 없다. 그러나 이성에 따르는 삶을 간과하는 데 대한 개인적인 대가는 상당한 반면 이성을 추구하는 삶이 주는 보상은 대단히 크다.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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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진보 - 카렌 암스트롱 자서전
카렌 암스트롱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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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은 얻고 싶다고 해서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항상 무언가를 ‘건지려고’ 들면 다시 태어날 수가 없다. 문학에 대한 안목을 이용해서 이력을 꾸미거나 평판을 높이려는 생각을 포기하니까 마음의 빗장이 열리면서 글이 쏙쏙 들어왔다. 단어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게 되고 작가의 혜안도 느껴졌다. 그야말로 엑스타시스(ekstasis,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밖에 서다‘ 란 뜻), 색다른 정취에 의식이 황홀경을 느끼는 엑스터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나를 넘어서는 그런 느낌을 맛보았다. - P309

"우리는 정설, 곧 바른 이론보다는 정행, 곧 바른 실행을 중시합니다." 입을 닦고 테이블에서 빵 부스러기를 치우면서 하이엄이 차분히 대꾸했다. "바른 믿음‘ 보다는 ‘바른 행동‘을 중시해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교리가 어떻고 하면서 수선을 피웁니다만, 생각을 어떻게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그건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는 점에서 시 같은 것에 불과한 거니까요. 우리 유대인은 무얼 믿느냐에는 개의치 않아요. 그저 할 뿐입니다." - P402

사실은 그로부터 6년 전 핀칠리 센트럴 지하철 역 부근의 허름한 카페에서 달걀 토마토 샌드위치를 같이 먹다가 하이엄 머코비한테 언질을 받은 셈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신앙은 실천이지 믿음이 아니라고 말했다. 종교는 아침을 먹기 전에 스무 가지의 실천불가능한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꾸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종교는 도덕의 미학이요 윤리의 연금술이다. 사람은 어떤 식으로 행동하면 달라지기 마련이다. 신화라든가 종교가 참다운 까닭은 그것이 어떤 형이상학적, 과학적 혹은 역사적인 실재에 부합해서가 아니라 생을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신화와 종교는 인간의 본성이 어떻다고 가르치지만 그런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나의 삶에 끌어와서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진리는 드러나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나 아킬레우스 같은 인물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 역사적 정보를 제공하려고 영웅 신화를 만든 게 아니다. 예수나 붓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영웅 신화의 역할은 행동으로 나서도록 사람을 자극하는 데 있다. 그래서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영웅을 일깨우는 데 있다.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나는 구도라는 것은 ‘진리‘ 라든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얼마나 알차게 사는가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초인간적 인격체나 천국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온전히 사람답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깨달음을 얻은 완전한 사람의 모습을 신격화하는 것은 그래서다. 마호메트, 붓다, 예수의 원형은 모두 충만한 인간성의 상징이다. 신이나 열반은 우리의 본성에 덤으로 갖다 붙인 것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거룩해질 수 있다. 자기 안에서 그걸 깨달아야만 완전해질 수 있다.
한 브라만 사제가 지나가다가 붓다한테 당신은 신이요 유령이요 아니면 천사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붓다는 어느 것도 아니며 "나는 깨어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 안에서 잠자던 능력이 깨어날 때 그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 옛날에 내가 한 수도 생활은 나를 오그라뜨렸지만 참다운 신앙은 사람을 더욱 사람답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믿었다. - P456

다양한 종교 전통을 공부하면서 내가 얻은 결론은 자아에서 벗어나려는 일관된 노력이 엑스타시 곧 몰아의 경지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것은 엑스타시스, 문자 그대로 자아의 밖에 선다는 뜻이다. 모든 위대한 종교의 신학자는 자기를 비우는 이런 겸허가 신의 일생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온갖 신화를 만들어냈다. 뭔가 그럴 듯하게 보이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도 그렇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그렇게 했다.
나를 버릴 때 비로소 평소의 경험을 뛰어넘는 다른 가능성에 눈뜨면서 가장 창조적으로 살 수 있다. - P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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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최소한으로 생각하라 - 삶과 죽음에 대한 스피노자의 지혜
스티븐 내들러 지음, 연아람 옮김 / 민음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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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자기 자리가 어디인지 분명하고 명확하게 알고 모든 자연물을 관장하는 결정론을 이해하는 자유인은 모든 것을 운명이라 체념하고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일을 침착하게 견디고 세상을 잘 헤쳐나간다. 그는 자유와 사물의 우연성에 관한 잘못된 신념을 근거로 한 외부로 향한 욕망 때문에 발생하는 불안으로부터 자유롭다. 다시 말해 인식과 오성은 평온함과 자제력을 가져다준다. 이성적으로 유덕한 사람은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안다.
그러므로 자유인은 가장 참된 의미의 인간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진정 행복하다. - P106

"이성의 지도에 따라 사는 사람은 가능한 한 자신을 향한 다른 사람의 미움, 분노, 경멸을 사랑과 관대함으로 대응하려고 노력한다." (스피노자는 관대함(generositas)을 "각자가 오직 이성의 지시에 의해서만 다른 사람들을 돕고 그들과 친교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욕망"이라고 정의한다.) - P115

미움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자유인은 시기와 질투에서도 자유롭다. 자유인은 타인의 행운에 기뻐한다. 설사 그로 인해 자신이 처음에 해를 입더라도 개선된 타인의 삶이 궁극적으로는 자신에게도 유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자유인은 이성적 본성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처럼 정념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자유인은 자연과 자연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잘 이해하기 때문에, 특히 자기 능력의 한계와 모든 사물을 관장하는 필연성을 잘 알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물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겨도 이를 침착하게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우리 이익의 원칙이 요구하는 것과 반대되는 일이 일어나도, 우리의 의무를 다했다는 사실과 우리가 가진 능력이 그런 것들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연장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는 전체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의 질서에 따른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그런 일들에 침착하게 대처할 것이다." - P122

이성적으로 유덕한 인간은 자신이 어떤 인간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잘 알 수밖에 없다. 자유인은 자신의 능력을 언제나 바르고 정확하게 판단한다. 그는 자기 능력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적정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해 성찰함으로써 자신의 본성과 이성의 힘을 통해 자신이 정확히 얼마나 유능한지 알 수 있기에 이것은 즐거운 인식이다. 그렇게 자유인은 이런 기쁨의 원천인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이성적인 자기애다. 이러한 자기애는 외부 의견에 그 근원이 있거나 외부 의견에 의해 강화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이성적인 자긍심이 주는 기쁨은 자신에 대한 타인의 평가라고 추정되는 데에서 얻는 자긍심과 달리 걱정이나 불안에서 자유롭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대중의 변덕스러운 평판에 따라 요동치지 않는다. 실제로 자유인은 대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무지한 자들 사이에 사는 자유인은 가능한 한 그들의 호의를 피하기 위해 애쓴다." 자유인의 자긍심은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것, 즉 자신의 덕과 능력에 관한 인식에 근거한다. - P135

아크라시아는 이성적인 관념이 기대하는 선이 먼 미래에 발생하는 반면 표상의 관념이나 정념과 관련된 즐거움이 즉각적으로 존재하거나 적어도 이성의 선보다는 가까운 시간 내에 일어날 때 발생한다. 이를테면 이성은 학생에게 나가지 않고 집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익하며 최선의 행동이라고 말하지만, 표상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보내는 즐거운 밤을 상상하게 만든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즐거움이 훨씬 가까운 미래에 발생한다는 사실로 인해 이 표상의 관념은 이성적 관념을 압도하는 더 큰 정서적 힘을 갖고, 그 결과 학생은 친구들과 나가서 노는 것을 선택하게 된다. "선과 악에 대한 참된 인식에서 비롯된 욕망은, 이 인식이 미래에 관계되는 한, 현재의 즐거움을 향한 욕망에 의해 꽤 쉽게 억제되거나 소멸될 수 있다." - P147

나약함의 반대는 강함이다. 유덕한 사람, 곧 자유인을 의지가 약한 사람과 구분하는 특징은 정념에 저항하고 오로지 이성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내면의 힘이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포르티투도(fortitudo), 즉 정신의 힘이라고 부른다. "그것이 인식하는 한에서 정신과 관계된 정서에서 생기는 모든 활동을 나는 정신의 힘으로 간주한다."
정신의 힘은 다시 강인함과 관대함으로 나뉜다. 이 둘은 이성의 지도에 따라 이루어지는 행위가 전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유지하고 증대하는 일인지 아니면 타인의 삶까지도 개선하는 일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강인함(animositas)을 각자가 오직 이성의 지시에 의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욕망으로 이해한다. 나는 관대함(generositas)을 각자가 오직 이성의 지시에 의해서만 다른 사람들을 돕고 그들과 친교를 맺으려고 노력하는 욕망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나는 오직 행위자의 이익만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를 강인함으로, 타인의 이익도 목적으로 하는 행위를 관대함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절제, 금주, 위험에 처했을 때의 침착성 등은 강인함의 일종이며, 예의, 자비 등은 관대하미 일종이다. - P153

그러므로 모든 조건이 동일하면 자유인은 미래에 발생하는 사물을 현재에 발생하는 사물을 볼 때와 동일한 정서로 바라보며, 현재의 선을 단순히 그것의 현재성을 이유로 미래의 선보다 더 욕망하지 않는다. 따라서 스피노자가 간결하게 정리했듯이 자유인의 정신은 "더 큰 미래의 선을 위해 더 작은 현재의 선을 필연적으로 무시하며, 현재에는 선일 수 있으나 미래에는 악의 원인이 되는 것을 절대 바라지않는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선한가 또는 더 선한가이지, 그것이 언제 발생하느냐는 관계없다. - P159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의 정서를 (가능한 한) 명석판명하게 인식하도록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그래야만 정신이 정서를 떠나 자신이 명석판명하게 지각하며 온전히 만족하는 것들을 사유하도록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래야만 정서 자체가 외부 원인의 사상에서 분리되어 참된 사상과 결합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63

따라서 앞서 보았듯이 더 작지만 더 즉각적인 선을 위해 장기적이고 영구한 선을 절대 희생시키지 않는 자유롭고 이성적으로 유덕한 사람은 기만행위가 경우에 따라 그리고 단기적으로 자신의 지속적 삶을 연장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지만, 장기적으로는 외부상황의 악화를 초래하여 결국 자신의 완전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그러므로 생명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자신의 품성을 약화시키고 삶의 질을 저하시키는 방법뿐이라면 이성은 자유인이 생명 연장을 선택하게 두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유인에게는 덕이 지속적인 생존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자유인의 이성적 덕이야말로 삶을 살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다. 덕을 희생해야 생명연장이 보장되는 경우라도 자유인은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 - P185

이렇게 보면 유덕한 인간은 차갑고 매정한 존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스피노자를 오독한 것이다. 앞에서 보있듯이 자유인에게도 다양한 종류의 감정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것을 왜 하느냐이다. 자유인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은 그가 능동적 사랑, 능동적 기쁨 등 능동적인 정서에 의해 마음이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코나투스와 욕망이 희망이나 사랑 또는 연민과 같은 정념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덕이 아닌 예속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행동은 그가 선하고 올바르다고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그를 기쁨이나 슬픔, 즐거움이나 고통으로 자극하여 변화시킨 것에 의해 좌우된다. 스피노자가 말했듯이 그런 사람은 무능력하며, 이 "무능력은 오직 인간이 외부 사물들에 휘둘리고, 그 자체로 고찰된 자기 본성이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사물들의 일반적인 성질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결정되는 데에 있다."
진정으로 유덕하고 이성적인 사람을 움직여 타인을 관대하고 윤리적으로 대하게 하는 것은 수동적 정서가 아니다. 현명한 이기주의자는 자신의 안녕뿐 아니라 타인의 안녕도 추구하는데, 그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 보답에 대한 기대, 상대방이 자신에게 못되게 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다른 인간에 대한 동정심, 위협이나 연민 때문이 아니다. 현명한 이기주의자는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며, 이성이 그것을 명령하므로 그리고 그것이 옳고 선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행동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선의와 도의심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명확히 구분하면서, 선의(benevolentia)를 "우리가 이롭게 하고싶어 하는 사물에 대한 연민에서 생기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나 충동"으로, 도의심(pietas)을 "이성의 지도에 따라 삶으로써 우리 안에 생기는 선을 행하려는 욕망"으로 정의한다. 자유인은 선의가 아닌 도의심으로 움직인다. - P199

이는 곧 무엇이 진정으로 자기에게 이로운지 아는 이성에 따라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수준의 이성적 완전함에 도달하도록 이끌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다. 이성적 인간이 행하는 타인을 향한 능동적 선의는 그저 타인들과의 교류에 나타나는 사려 깊고 관용적인 행위에 있지 않다. 그의 유덕하고 이성적인 선의는 단순히 다른 인간들의 단점을 인내하는 수동적 태도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선이라고 믿는 것(그것이 맞든 틀리든)을 추구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의 목표나 과제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는 전통적 의미의 개방적이고 가치 중립적인 관대함도 아니다.
오히려 유덕하고 이성적인 인간인 자유인은 다른 사람들도 이성에 따라 살고 참된 선, 즉 인식을 추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방법을 강구한다. 이것이 바로 완전성을 위해 노력하는 자신에게 미치는 그들의 효용성을 극대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덕을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해 원하는 선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원한다." 다시 말해서 이성적이고 유덕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이성적이고 유덕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행동한다. 그는 타인들을 대할 때 그들이 이성의 삶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 그러나 이성적이고 유덕해지는 일은 그들에게도 유익하므로, 결국 이것은 이성적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증대하고 그들을 진정으로 이롭게 하는 행동을 하고자 노력한다는 의미다. 그것이 근본적으로 이타적인 동기가 아니라 이기적인 동기일지라도 말이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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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상을 위한 7가지 대안 - 비비르 비엔, 탈성장, 커먼즈, 생태여성주의, 어머니지구의 권리, 탈세계화, 상호보완성
파블로 솔론 외 지음, 김신양 외 옮김 / 착한책가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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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맥락이 없는 유일한 텍스트다. 다른 모든 것은 우주의 맥락속에서 조망되어야 한다. 우주의 이야기는 우주 속 각 개별 존재의 이야기이며, 따라서 우주의 여정(영원한 변화, 끊임없는 생성)은 우주 속 각 개별 존재의 여정이다. 우리는 우주의 이야기를 나무에서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우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람은 그저 상상으로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는 모든 곳에 흔적을 남기며, 그 이야기를 아는 게 중요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그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당신은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것이며, 결국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Berry, 1999) - P164

‘지구법‘이라는 용어는 현대 법학이 인간중심주의적 틀을 극복해야함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야생법은 전체의 다른 두 부분을 함께보고 균형을 잡으려는 운동의 주창자들이 가진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코막 컬리넌은 야생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야생법‘이 넌센스처럼 모순되는 말로 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법이란 결국 구속하고, 제약하며, 규제하고, 교화하기 위한 것이다. 법의 규칙들은, 무력으로 뒷받침되면서, 인간 행동의 야생성을 자르고 가지치고 다듬어서 깔끔하게 손질된 잔디밭과 인공 정원의 관목숲으로 바꾸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야생‘은 한편으로는 헝클어진, 야만적인, 정리되지 않은, 문명화되지 않은, 제약되지 않는, 제멋대로인, 질서 없는, 규칙 없는, 다루기 어려운, 전통적이지 않은, 규율되지 않는, 열정적인, 폭력적인, 다듬어지지 않은, 그리고 시끌벅적한 것과 동의어다. 그리고 야생법은 인간 행동이 지구와 지상의 모든 종들의 온전한 상태를 보호하도록 규제하는 법이다. 이렇게 되려면 인간이 자연 세계와 갖는 관계를 착취자에서 다른 존재들과 민주적으로 공존하는 자로 바뀌어야 한다. 만약 당신이 지구공동체의 일원이고자 한다면, 당신의 권리는 지구, 동물, 강과 생태계의 권리와 균형을 이루어야만 한다. 야생법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파괴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자연 세계 착취는 불법이 될 것이다. 인간이 의도적으로 생태계의 기능을 파괴하거나 다른 종들을 멸종으로 내모는 것이 금지될 것이다." (Cullinan, 2011) - P165

어떤 살아있는 존재도 스스로 양분이 될 수 없다. 지구공동체의 각 구성요소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공동체의 다른 모든 성원들에게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의존한다. - P169

토머스 베리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상상력의 상실과 자연의 상실은 동일한 것이다. 하나를 잃는다면 다른 하나도 잃게 된다." 같은 선상에서 코막 컬리넌은 어머니지구의 권리 운동의 목표는 "획일성을 부여하기보다는 창조적 다양성을 고양"하고 "다양한 비전통적 접근이 태어나고 자라며 흐르다가 사멸할 수 있도록 공간을 여는 것"이라고 강조한다(Cullinan, 2011). - P183

탈세계화라는 말을 처음 고안한 것은 월든 벨로와 남반구 포커스 Focuson the Global South이다. 그들의 목적은 지구적 경제로부터 철수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경제와 국민경제가 약화되지 않고 강화되도록 세계 경제와 정치 체제의 구조를 바꾸도록 촉발하는 것이다(Bello, 2005). 탈세계화는 민중과 국가들의 의사결정 역량을 빼앗아가는 자본의 논리와 이른바 경제적 합리성에 지배되는 통합 과정에 의문을 제기한다. 탈세계화한다는 것은 민중, 국민, 지역공동체와 생태계의 필요에 바탕을 두고 세계의 통합 과정을 구상하고 건설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한다. - P186

탈세계화 과정의 핵심은 모든 단위에서 관용과 수용과 연대를진작하는 일이다.
따라서 탈세계화를 이루려면 지구 시스템과 우리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탈세계화는 자연의 한계와 생명 순환에 대한 인식과 존중을 수반한다. 이는 지구가 우리의 집이며, 우리가 이미 겪고 있는 생태적 불균형을 심화시킬 경제적, 지정학적 또는 기술적 활동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함을 의미한다. 탈세계화를 위해서는 지구시스템이 국가나 민족의 이해보다 위에 있음을 전제로 해야 한다. 결국 탈세계화는 우리가 경제를 탈탄소화하고, 산림 파괴와 생물다양성 파괴를 멈추고, 물을 관리하고 다양한 생태계를 보존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 자연과 인적 자원을 더 많이 착취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촉진하는 자본주의와 반대로, 탈세계화는 전체로 통합되는 과정 속에서 인간관 자연 둘 다에게 우선순위를 부여한다. - P202

탈세계화는 모든 정치적·경제적 결정들이 문제와 가장 가까이 있는 정치 단위 수준에서 채택되어야 함을 확인하는 보완성의 원칙principle of subsidiarity*을 기본으로 한다. 지역의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고 의사결정의 결과를 가장 먼저 감내하게 될 이들이 가장 먼저 의견을 내고 자신들의 입장을 말해야 한다. 지역 범위에 영향을 주는 정치적 또는 경제적 결정은 근본적으로 지역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 의사결정 권력은 정말 불가피할 때에만 국가적, 광역적 또는 지구적 수준으로 이양되어야 한다. 탈세계화는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이룩할 수 없다. 전략적인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결정들은 가능한한 가장 광범위하고 민주적인 참여로 이루어져야 하며 시장이나 국가기술관료들이 결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 - P203

탈세계화는 농업, 제조업, 커뮤니케이션, 정보기술의 영역에서 발전하고 있는 다양한 유형의 공동체에서 쌓인 경험에 기반한다. 탈세계화에 있어 세계화의 대안은 아직 오지 않은 무엇이 아니라, 사회에 이미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기획들이다. 하지만 월든 벨로가 말하듯, "시장체제는 거대한 초국적기업들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이러한 대안들 중 다수는 스스로를 지탱하거나 원래의 목적을 지켜가는 데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어왔다." (Bello, 2013) - P205

민중이 현재와 미래에 자신들의 역량을 보장받고 효과적인 참여를 하는지가 진보의 주요지표다. - P207

조장했다는 것이다. 대안적 통합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다양한 사회부문들의 자기조직과 자주관리 경험을 강화함으로써 그들이 기본적 필요를 충족하고 소비주의 경향과 더불어 신자유주의의 가장 강력하고 보이지 않는 힘인 현대성의 이미지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 프로젝트를 실행해야 한다. - P209

상호보완성은 서로가 서로를 완성해준다는 뜻이다. 이는 다양성을 바탕으로 하는 전체whole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서로 다른 행위자 간의 대화이다. 이는 서로가 배우고 기여하는 것이다. 이는 각자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서로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는 서로 힘을 합하여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함으로써 다양한 차원이 조화를 이루는 전체를 완성하는 것이다.
비비르 비엔, 탈성장, 커먼즈, 생태여성주의, 어머니지구의 권리, 탈세계화가 상호보완성을 추구한다면, 시스템 위기의 대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긴밀하게 상호작용함으로써 서로에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서로를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다. 목표는 단일한 하나의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다. 서로 얽히고 연관되어 있는 다양한 대안들을 총체적holistic으로 발전시킴으로써, 전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 P212

비비르 비엔은 성장에 대한 핵심 대안으로 역동적 균형상태dynamic equilibrium를 추구할 것을 제시한다. 경제적 진보와는 다른 문명의 새로운 지평으로서 인간들 간에, 그리고 인간과 자연 간에 조화를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를 위한 과제는 끊임없이 더 많이 갖는 것을 목표로 개발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간에 그리고 인간과 자연 간에 상호보완을 추구함으로써 시스템의 균형을 다시 맞추는 것이다. 즉, 역동적 균형이란 새로운 모순을 낳으면서도 새로운 균형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 균형을 의미한다. 새로운 근대성은 성장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적 근대성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다른 인간과 자연을 탈취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전체를 이루는 모든 부분들의 적절한 결합을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다. - P216

지난 세기의 경험을 통해 국가가 모든 영역을 통제하는 것이 자유시장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졌다. 재분배가 효과가 있으려면 시장과 국가가 아닌 다른 행위자들이 중심에 놓여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커먼즈의 커다란 몫이다. 스스로 조직하고 스스로 관리하는 커머너들이 없다면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재분배는 없다. 이는 더 나은 분배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생명자원들을 다른 적절한 방식으로 관리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비비르비엔이 지적하듯이, 인간의 역할은 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지혜를 갖고서 조심스럽게 균형상태를 찾는 데 기여하는 다리, 즉 중재자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생산수단(민간은행, 초국적기업, 농기업, 화학기업, 군수복합체 등)을 사회화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자연의 순환을 존중하도록 생산수단을 완전히 전환하고, 채굴주의, 생산주의, 지식의 사유화, 생물다양성의 상품화, 대량살상무기의 개발 등과 단절해야 한다. - P217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면 근대성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 필요하다. 그래서 탈성장이라는 전망을 목표로 하는 소박한 사회를 제안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소비자원을 사용할 때 검소하고 신중하며 아끼고 절약하는단순하고 겸손한 사회다. 아니면 비비르 비엔이 표방하듯이 인간들 간에서로 경쟁하고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간에 조화를 증진하는 사회다. 사회 변혁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 목표가 모든 인간이 자본가나 중상류층처럼 소비하면서 사는 것이라면, 자본의 논리와 무제한적 성장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 P222

하지만 개인, 가족, 지역공동체 수준에서 또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진정한 지구적 변화를 실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생태여성주의가 기여한 바 중 하나는 공공 영역과 민간 영역에서의 변화들 간에 상호보완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와 동시에 가장 내밀한 삶 속에서 인간관계가 혁명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지속가능한 전환은 없다. 공공정책과 사적인 행동 간의 일관성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 P225

실업의 구조적 원인에 맞서기 위해서는 생산주의 논리에서 벗어나서 재생산 노동을 가시화하고 인정하며, 이를 특히 자연과의 균형상태를 회복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 새로운 영역들로 확장해야 한다. 오늘날 건강한 사회와 경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연에 손상을 입힌 불균형을 바로잡는 것이 필수다. 이를 위해서는 숲, 강, 해안, 대기, 지하수 등 지구 시스템의 여러 구성요소들을 회복시키고 돌봐야 한다. 그렇다고 일자리를 창출해야 할 필요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필요성이 커지는 일자리는 생산 영역에 있지 않고 재생산과 생명의 돌봄에 토대를 두는 다른 유형의 일자리다. 우리가 맞닥뜨린 지구의 위급상황에 맞서기 위해서는 수억 개에 이르는 일자리가 필요하다. - P228

비비르 비엔, 커먼즈, 탈성장, 어머니지구의 권리, 생태여성주의, 탈세계화,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제안들 간의 상호보완성을 이루는 과정은 다각적이고 또 다양하다. 앞서 우리는 이러한 상호보완성과 관련해 독자로하여금 이 길을 같이 가도록 독려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거의 살펴보지 않았다. 우리는 결론의 목록을 만들기보다는, 독자들이 다양한 시각과 접근, 전망들에서 나오는 현실, 문제, 대안들을 살펴볼동기를 부여받길 바란다. 우리는 상호보완성이 이러한 전망들 각각을 더강화하고, 약점을 찾아내며, 실패를 극복하고, 함께 협력하여 폭넓게 논의되지 않았던 사안들에 대한 해답을 탐색하고, 시스템 대안을 건설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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