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박완서의 부엌 :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호원숙)에 인용된 박완서의 첫 작품 '나목' 속 개성만두이다.

개성 만두 (출처: 중앙일보 ) https://www.joongang.co.kr/article/17450100






[개성 만두는 생김새부터가 유머러스하거든요. 얄팍하고 쫄깃하게 잘 주무른 만두 꺼풀을 동그랗게 밀어서 참기름 냄새가 몰칵 나는 맛난 만두소를 볼록하도록 넣어서 반달 모양으로 아무린 것을 다 시 양끝을 뒤로 당겨 맞붙이면 꼭 배불뚝이가 뒷짐 진 형상이 돼요.] 어머니의 첫 소설 『나목』 속에 나오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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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서양철학사의 베르그송 편을 읽고 있다.

Inscription sur un pilier du Panthéon de Paris à la gloire d'Henri Bergson, philosophe Auteur Piero d'Houin, Inocybe pour Wikipédia Année 2006


앙리 베르그송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9b1857b





본능과 지성은 다른 하나가 없이는 결코 완전하게 존재하지 못하지만, 대체로 지성은 인간에게 재난을 초래하는 불운인 반면 본능은 개미나 벌이나 베르그송에게나 최선의 상태를 보여 준다. 지성과 본능의 구별은 베르그송 철학의 근본인데, 많은 부분이 일종의 샌드퍼드와 머턴152의 이야기와 비슷하게 본능은 착한 놈이고 지성은 나쁜 놈이라는 식이다.

152 * 토머스 데이(Thomas Day)(1748~1789)가 루소의 『에밀』의 영향을 받아 쓴 아동 소설 『샌드퍼드와 머턴의 내력(The History of Sandford and Merton)』에 등장하는 두 소년. 농부의 아들인 샌드퍼드는 신사 계급의 아들인 머턴이 노동의 의미와 게으른 부자의 사악함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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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서양철학사를 계속 읽자.

베르그송의 묘 Par ManoSolo13241324 (위키미디어커먼즈)


창조적 진화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20c1858a












베르그송의 비합리주의는 정치와 무관한 영역, 예컨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1856~1950)에게서 더 큰 호감을 얻었으며, 그의 『므두셀라에게 돌아가라』150는 순수하게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사상을 구현한 작품이다.

150 * 버나드 쇼가 쓴 다섯 편의 연작 희곡이다. 에덴동산부터 1920년대까지 진행된 극적 우화를 통해 창조적 진화라는 자신의 철학을 설명했다. ‘므두셀라’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구약 시대 족장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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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세계문학전집 '체호프 희곡선'(박현섭 역)의 해설로부터 옮긴다. 

Taganrog. Monument to Anton Pavlovich Chekhov By Alexxx1979 (위키미디어커먼즈) 타간로그는 체호프의 출생지이다.






스물한 살 의대생 시절에 첫 장막극 「플라토노프」(1881년,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를 들고 공연을 부탁하기 위해 유명한 ‘말리 극장’을 찾아갔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한 일화는 지난한 역정의 서막일 뿐이었다.

작가는 「플라토노프」로부터 8년 뒤에 장막극 「이바노프」(1889)를, 그리고 다음 해에 장막극 「숲의 정령」(1890)을 발표했지만, 두 작품의 공연 또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숲의 정령」은 그로부터 7년 뒤에 발표된 「바냐 삼촌」의 원시 판본으로 간주되며, 「이바노프」는 훗날 평자에 따라 「갈매기」보다 뛰어난 작품으로 꼽히기도 하지만, 대체로 이 시기에 체호프의 극작술은 아직 그 본령을 구축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체호프는 「숲의 정령」 이후 6년 동안 장막극에 손을 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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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읽기 시작한 '박완서 朴婉緖 :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 1931년~2011년' 프롤로그에 김병익(언론인 출신으로 '문학과 지성' 동인이었다)이 머리글을 썼다. 제목은 '못 가 본, 새로운 길의 더 아름다움 - 박완서 선생의 구술 총서 발간의 의미'이다. 


이 글에 나오기를 김병익은 고 박완서 작가가 1970년 여성동아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었을 때 동아일보 기자로서 인터뷰를 한 인연이 있고 2007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의 해설을 썼다. (그리고 김병익은 박완서와 함께 4인 공동산문집 '아름다운 성찰'(1999)을 간행한 적이 있고 박완서가 세상을 떠난 해인 2011년에 나온 '모든 것에 따뜻함이 숨어 있다 - 박완서 문학앨범'에도 글을 실었다.)


이 글의 마지막 부분('못 가 본 길을 향해'란 소제목이다)에서 필자는 박완서를 "개성의 변두리 마을에서 자란 평범한 한 시골 소녀'(31쪽)라고 썼는데 읽는 나는 어쩐지 '평범'이란 단어가 거슬린다. ( '변두리'나 '시골'이란 단어가 더 거슬리는 독자도 있으리라.) 


글쎄, 평범이란 무엇일까. 그렇다면 대신 비범한 소녀라고 썼다면 내 맘이 좋았을까. 그것도 글쎄올시다. 결론적으로 평범과 비범 둘 다 필요 없지 않을까. 어떤 단어를 쓰고 안 쓰고는 당연히 쓰는 자의 자유이나 내 보기엔 그렇다는 말이다.


cf. 박완서가 태어나고 자란 북한 개풍 박적골의 옛집 확인 https://v.daum.net/v/2026061915373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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